Language & ... Writing/아리나 커넥션

아리나 커넥션 02-솔본 (아라니 tiger2020)

monocrop 2011. 5. 8. 00:44

글: 아라니(tiger2020) / 출처 및 원문보기


1997년 여름, IMF라는 경제한파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 나는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 PD로 카
자흐스탄에 있었다.
그해 4월,중국 북경 도심에서 일어난 버스폭발테러 배후로서 지목된 위구르 반군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였다. 스스로를 동투르키스탄 혁명전선이라고 불렀던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신장위구르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카자흐스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친 14시간의 비행.
알마아타 공항에서 녹초가 되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나는 난생 처음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7월 뜨거운 태양으로 숨막힐 듯 달아오른 아스팔트 열기 사이로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웅장한 만년설 봉
우리들이 바로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펼쳐지는 그 광경
이란 마치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신들의 군무(群舞)를 보는 느낌이었다.
“한텡그리에요. 중국인들은 천산이라고도 하죠. 한국에서 오신거죠?”
한참을 그렇게 넋을 잃고 산봉우리들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와서 영어로 아는 체를 했
다. 예약된 현지 가이드 마리나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메어진 방송용 6mm 핸디캠을 신기한 듯 훑어 보
며 의심의 찬 눈초리로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녀는 영어가 아주 능숙했다.
마리나의 안내로 알마아타 시내의 한 호텔에 짐을 푼 나는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국적 냄새가
가득한 침대위에 쓰러져 금방 잠에 곯아 떨어졌다. 취재에 대한 중압감과 오랜 비행때문인지 악몽이 찾
아왔다.
공항에서 보았던 그 흰머리의 거대한 산들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갑자기 한꺼번에 일어서는가 했더니 내
게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낯선 취재지에서 맞닥뜨리는 악몽은 길조라지만 상황은 정말로 끔찍했다.
달아나려 애쓰는 내 의지와는 달리 정작 꿈속의 나는 단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 없었고 산봉우리로부터
쏟아져 내린 눈덩이들이 사방에서 나를 덮쳐왔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공포였다.
한차례 가위눌림에서 깨어났을 때 밖에는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저녁식사도 거른 체 부랴부랴 인터뷰 장비들을 챙겨야 했다.
무슨 이유인 지 그날 저녁 갑자기 반군캠프에서 나를 호출했던 것이다.
“어디로 가나요?”
대기시켜 놓은 차량에 장비들을 실으며 내가 습관적으로 물었다.
“지휘부에서 알려 주지 말라고 했어요. 당신은 운이 좋다는 걸 알아야 해요”
마리나의 대답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동투르키스탄 혁명전선과 인터뷰는 당신이 처음이죠. BBC도 못했던 일이에요.지도자 동지가 한국의
미디어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특종 아닌가!.
차량은 북쪽 외곽도로를 타고 알마아타 시내를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사방은 온통 칠흙 같은 어둠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공항과 꿈속에서 보았던 만년설의 봉우리들만이 저 멀리 달빛에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산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왔고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텡그리라고 했던 가요? ...”
“ 맞아요. 위대한 텡그리칸의 현신이죠”
나는 낯선 이 중앙아시아의 언어들이 뜻하는 바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침묵하고 있는 이방인에게 마리나는 친절을 베풀었다.
“텡그리칸은 하늘 (Tengri)의 통치자 (Khan) 라는 뜻이죠,그 하늘의 주군이 머무르는 산을 한텡그리라
고 부르는 겁니다.”
나는 그제서야 이들에게 저 산들이 우리에게는 백두산과 같은 신령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나의 안내로 동투르키스탄 혁명전선 본부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들을 따라 한 참을 걸어야 했다. 그
들은 일부러 내 방향감각을 잃게 하기 위해 몇번이고 멈추어 서서는 나를 빙빙돌렸고 그 때마다 나는 어
지러움증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 신고식을 치루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어떤 건물의 지하계단을 내려가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거
기에는 오마르라는 위구르 반군 지도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
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