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스크랩]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임나`가 규슈에 있었다는 증거

monocrop 2010. 3. 20. 20:51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임나'가 규슈에 있었다는 증거

 

임나가 일본 규슈에 있어다는 주장을 필자는 줄 곧 주장해 왔었다.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곳이 규슈의 서북부

가라쿠니(豊國/현재 규슈의 別府(벳부)에 있었던 국가)라고 필자의 저서 <임나신론/고려원/95년>에 피력해 왔었다.

 

그 증거의 하나로 일본학자小田富雄 (磐井의 반란/구주고고학연구 고분시대편/학생사1979년/189쪽)도 

일본서기 安閑紀에 나오는 여러 미야케(御宅/국가의 시설)가 筑紫(축자/규슈의 옛명칭) 豊(규슈에 있었던 國이름) 火  (규슈에 있었던 國의 이름)에 설치

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미야케 설치가  임나일본부의 동일한 개념이다

(2002/고대일본어의 부활/정광산인/아이올리브199페이지자료 인용)

 

玉田古墳群은 결코 임나 다라국의 왕족 무덤이 아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구슬밭[玉田]에 위치하는 가야의 무덤떼.

사적 제326호. 합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 의해 대야성(大耶城)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며,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소국 중 하나인 다라국(多羅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설명:옥전고분에서 발견된 용봉문 환두대도(윗쪽) 밑은 鳳紋/鳳凰은 동이족의 문양이고,龍은 중국의 문양이다. 용봉문 환두대도는 동이족이 중국속의 세운 나라의 문양)

 

 

 고분군은 해발 50~80m 가량의 야산 정상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85년부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봉문환두대도·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기의 경우는 고령지방 출토 토기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의 피장자가 속한 집단이 대가야연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위 글은 옥전고분군을 소개하는 한국 사학계의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 드려 합천이 임나10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옥전박물관이 세워졌다. 부산대학교 신경철 고고학 교수는 저명 인사들을 모아두고 이 고분군이 다라국 수장의 능이라 확정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필자는 임나가 결코 한반도 가야국 연맹체가 아니며 다라국은 일본 규슈에 있었던 소국임을 밝힌다.

 

임나 관련 국명 또는 지명의 韓地 비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기성 사학계의 억지는 또 있다. 

[양직공도, 백제사신도경]이라는 옛 문서에는 백제의 방소국(旁小國)이라 하여 백제의 속국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 국명이 斯羅(신라),前羅(전라),卓(탁),多羅(다라),叛波 (반파),上己文(상기문).... 등이 보인다.

 

이 나라들을 각각 한국땅의 경주,함안,창원,합천(다라),고령, 남원......등지에 비정함으로써 백제가 이들 전 지역을 복속시킨 맹주국이었던 것으로 역사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이홍직(전 고려대교수:[梁職工圖論考])

 

 그러나 이는 고대 한국땅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사라, 즉 신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실상 이 같은 인식을 정당화할 문헌 기록이나 방증 자료들이 일본서기의 신공49년조의 맹신한 원인 말고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양직공도]에서 말하고 있는 백제 방소국(일종의 속국)은 당시 일본땅에 백제가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나라들을 가린킨 것으로 파악함이 옳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기의 시라기 7국명 중 하나인 이 [다라]를 그 동안 일본의 사가들이나 한국의 몇몇 기성사학자들이 한국땅에 비정하여 경남 합천군의 다라里라고 주장해 왔다. [일본서기]를 곡해한 일종의 편견이며 앞뒤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경남 합천을 [일본서기] 속의 [다라]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 강단사학계에서는 김연학 교수를 꼽을 수 있다. 지난 1992년 합천의 옥전 고분 발굴의 결과를 놓고 조선일보(1992.2.26일자) 지상 논쟁에서 그는 [옥전고분]은 임나10국의 하나인 다라국 유적]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에 맞서 최재석(전 고려대)교수는 옥전고분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일본서기]의 다라국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多良村(다라 마을),多良山(다라산)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의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한 적이 있다.

 

이른바 다라국 논쟁은 명확한 결론도 없이 그 정도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으나, 필자와 역사찾기 일행들의 규슈 현지 탐사를 통해 최교수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쪽에 서게 되었다.

 

탐사는 1994년 8월에 시작하였다. 규슈 "다케오"市로 부터 동남방 아리아케우미의 서쪽 해안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사가현(佐賀縣) 후지쓰군(藤津郡) 가시마(鹿島) 마을이 나왔다.

 

더 아래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줄곧 뻗어 있는 국도만 따라서 얼마를 저 가자, 太良(다라)촌을 만났다.  미상불 후지쓰군의 아리아케우미 서안에 위치한 이 지역 일대에는 太良(타라),多良(다라),田原(타하라)들이 연이어 나오고 마침내 多良中山(다라쥬잔)과 多良山(일명 多良岳)이 남쪽을 가로 막고 섰다.

 

일본서기 속 임나10국에 나오는 多羅는 즉 多良(다라)는 더 정확히 말해서 지금 多良村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多良山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서쪽면은 한국전쟁 직후에 한국으로 부터 숱한 난민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한 때 무작정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밀입국자들을 대거 억류 구금시켰다가 추방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던 오무라(大村) 수용소가 다라산의 저쪽 너머에 있다.

 

이 다라산에 대해서 "츠쿠시풍토기"에는 [藤津多良峰]으로 기록된 점으로 옛부터 "다라'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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