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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crop 2009. 7. 17. 02:54

백제 사람들이 전개한 일본열도의 후기 고분시대
[홍원탁의 동아시아사 바로보기] Archeological Break : Event or Process
 
2005년 06월 08일 (수) 00:00:00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3세기 말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했다. 말뼈 혹은 말과 관련된 도구들은 초기 고분에서 발굴된 적이 없다. 초기 고분시대(대략 300-375) 문화의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문화로의 전환은 갑작스런 것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말뼈와 말에 관련된 다양한 도구가 별안간 출현한다는 것이다.

후기 고분시대 문화는 야마도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나는 일본열도가 370-390년 사이에 백제사람들에 의해 정복됐고, 오오진이 야마도 왕국의 시조로서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며, 정복의 시작된 시점부터 정복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마구류와 함께 매장된 시점과의 사이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6세기 후반 사철이 발견되기 이전의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이 가야와 백제에 철의 공급을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 사건 혹은 과정

백제 사람들이 전개한 일본열도의 후기 고분시대

홍원탁 (서울대 교수)


후기 고분시대 문화

전통적으로 일본열도에서의 고분시대는 초기(대략 300-375), 중기(대략 375-475), 후기(대략 475-650 혹은 700)로 구분됐다. Egami(1962, 1964)는 고분시대 중기와 후기의 문화가 본질적으로 유사한 반면에 초기의 문화는 이들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근거로, 중기와 후기를 통합해 전통적인 (초기-중기-후기) 3분법을 (초기-후기) 2분법으로 수정했다. Egami에 의하면, 본질적인 고고학적 분기점은 초기 고분시대의 끝 무렵에 가서 단 한번 발생한다는 것이다.

초기 고분시대 문화의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문화로의 전환은 갑작스런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말뼈와 말에 관련된 다양한 도구가 별안간 출현한다는 것이다. 3세기 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했다. 1 말뼈 혹은 말과 관련된 도구들은 초기 고분에서 발굴된 적이 전혀 없다. 2 반면 한반도에서는,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407년 5만의 보병과 기병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일본서기는 백제로부터 말의 공식적 도래를 오오진 15년(404)조에 기록하고 있다. 4

Egami에 의하면, 후기 고분시대의 문화는 호전적인 지배계층의 세속적인 취향을 보여주며, 북아시아 기마민족의 실용적, 전투적, 귀족적 성격을 시사한다. 무기들은 더 이상 값 비싼 혹은 샤머니즘적인 물건들이 아니었고, 일상 사용되던 것들을 부장품으로 묻었다. 후기 고분들에서는, 철제 말 재갈, 목제 혹은 철제 등자, 안장, 마구에 부착하는 청동 방울, 말 투구, 말 갑옷 등의 유물을 포함해서, 말을 타는 사람들의 물품이 대량 출토됐다. 이들 고분엔 대량의 철제 무기(칼, 창, 갑옷, 화살촉, 투구 등)와 금동관, 회색의 경질토기, (사슬 달린) 금 귀고리, 세련된 금동제 관, 혁대고리, 노리개, 신발, 잎 모양 등을 한 작은 금제품들, 옥 귀걸이, 동경, 구슬 등과 같은 개인 장신구, 식기류, 그 외에 사후 저 세상에서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 다양한 물품들이 묻혀있었다. 그들은 또, 철제 농기구와 (화살 통, 말 안장, 배, 전사, 짐승, 남자와 여자, 의복, 두건 등 형상의) 점토로 만든 하니와(토용, 埴輪) 등을 분묘 내부와 주변에 묻었다. 5

Egami(1964: 52)는 이 모든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쌀 농사를 짓던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토착적 발전과정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야요이 사회 스스로, 자신들 전통 문화의 기본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도로 외부 문화를 의도적으로 수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전환은,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했음을 반영하는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후기 고분시대 문화(대략 375-675)는 야마도 왕국이 이룩한 것이다. 난 백제사람들이 370-390년 사이에 일본열도를 정복했고, 오오진이 야마도 왕국 시조로 왕위에 오른 것은 390년이며, 정복이 시작된 시점과 정복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마구류와 함께 매장된 시점과의 사이엔 얼마 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기 고분시대의 개시는 오오진과 그 아들 닌토쿠의 거대한 무덤으로 상징된다.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서 평지에다 흙을 쌓아올려 거대한 분묘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전방후원형, 혹은 원형이었고, 분묘 주위는 둑을 쌓고 해자로 둘러쌓다. Barnes(1993: 227)는 “횡혈석실분은 백제 지배층이 5세기 초 일본열도에 도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Kidder(1985: 121)는 “5세기 중반 이전의 모든 마구류는 외국에서, 즉 한반도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Farris(1998: 78-79)는 “초기의 마구류는 간단한 투-피스 말 재갈과 철과 나무로 만든 말 등자 등인데, 이들 모두 북큐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시사한다. 5세기 전반엔 몇 개의 말 안장 조각들과 함께 원시적인 마구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데, 이들 대다수는 아마도 한반도에서 만든 제품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Mizuno에 의하면, [후기 고분시대에] 이런 거대 분묘들의 출현은, 수많은 전통적 공동체들이 하나의 강력한 지배자 아래 통일됐음을 의미하며, 또 새 지배자가 피정복자들 마음 속에 경외감을 심어, 신생국가의 절대적 지배자로서 피정복자의 복종을 받기 위해 그처럼 거대한 분묘를 세웠음을 의미한다. 6 Barnes(1988: 16)는 “팔찌와 청동 거울 같은 의례적인 품목들이, 보다 실용적인 도구와 무기로 바뀐다는 것은, 5세기 지배층의 위상과 세력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일본열도의 고분 발굴물을 분석해 보면, 각종 철제품, 철 덩이, 대장간 도구들을 위시해, 경첩과 대갈못을 사용하는 새로운 철공법, 어려운 모양을 단조하는 능력을 시사하는 물증 등이 5세기가 시작되면서 극적으로 늘어난다. Barnes에 의하면, 아리야마 고분(오오진 능의 부속묘) 한 개에서만, 철로 만든 검과 각종 철제 도구가 3,000점 이상 나왔다. 7

새끼줄 문양의 조몽토기와 민무늬의 야요이 토기가 각기 전 단계의 시대들을 대표하듯, 경질의 스에키 토기는 후기 고분시대를 대표한다. Kidder(1985: 103-4)는, 스에키가 애초에 한국 제품이었고, 이 경질토기가 일본열도에 등장하는 것은 마구류가 고분에서 출현하는 시점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일본열도에서 가장 오래된 스에키가 굽는 가마와 함께 큐슈의 후쿠오카현(縣)에서 발굴됐는데, 이들은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Barnes에 의하면, 스에키는 옛부터 조선-토기라고 계속 불러왔는데, 바로 얼마 전인 1950년대에 와서 일본사람들이 새삼 8세기 만요슈(萬葉集)에서 그릇을 지칭하는 스에라는 표현을 택해 스에키라 부르기 시작했다. 8 후기 고분시대 300년을 대표하는 유물을 계속 "조선 토기"라 부른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9

고고학적인 단절 현상: 급작스런 사건에 의한 것인가 혹은 점진적 진화 과정의 산물인가?

Egami의 기마민족설을 증오하는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Edwards(1983)가 쓴 논문 한 개를, Egami는 물론 Kidder와 같이 훌륭한 고고학자의 연구결과를 모두 불신해 버리기에 충분한 근거로 간주한다. Edwards는 마구류 존재의 고고학적 증거가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보다 “5세기 말”에 실제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는 절대로 급작스레 발생한 게 아니라, 아주 점진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오히려 Egami가 초기와 후기의 유물 사이에 무슨 커다란 단절이나 있는 것처럼 과장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야기했다고 비난했다. 1983년 Edwards의 논문이 나타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주장은 아주 몰비판적으로 수용되고, 그의 말은 열광적으로 되풀이됐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Farris(1998: 78-9)는 “마구류는 4세기 중엽, 혹은 말엽의 정복이라는 사건과 관련시키기엔 너무나 늦게 나타날 뿐 아니라, 일본열도에서의 마구류 확산은 매우 점진적이었다”고 주장한다. 10 이제, 많은 학자들이 몰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그 Edwards 논문의 핵심 내용을 검토해 본다.

Edwards(1983)는 Egami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137개 고분의 고고학적 자료를 표로 만들어 제시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Edwards가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연출한 자료 표를 나 같은 사람이 보면, 오히려 Egami의 2분법을 정당화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Edwards는 Egami와 정반대로, 중기 고분시대(대략 375-475)는 초기(대략 300-375)와 합쳐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기의 그 거대 고분들이 상징하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기마민족의 정복이라는 “사건”에서 파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Egami를 반박했다.

Edwards 자신이 직접 정리해서 제시한 고고학적 자료 자체를 검토해 보면, 대략 “5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대륙적”(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일본식 표현) 유물이 발굴된 여러 개 고분들이 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dwards는, 고분 부장품들이 “현저하게” 대륙적 성격을 띠는 것은 “5세기 중반 이후”며, 따라서 오오진의 능이나 닌토쿠의 능은 기마민족의 능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dwards는 자신이 5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대륙적 문물의 유입이 실제로는 4세기 중에 발생했을 수도 있고, 따라서 4세기 역사의 틀에 연관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Edwards는, 어찌되든 간에 오오진과 닌토쿠의 능을 포함하는 모든 전통적인 중기 고분들은 대륙적인 문물 유입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중기 고분들은 기마민족의 성격을 띤 마구류나 어떤 다른 두드러진 대륙적인 요소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11

그러나 전통적 중기(대략 375-475) 고분들의 기마민족적인 성격과, Egami가 말하는 초기(대략 300-375)와 후기(대략 375-675) 고분들 사이의 단절 현상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난 일본서기와, Barnes, Kidder, 그리고 Farris의 연구 결과에서 그 증거들을 찾는다.

첫째, 일본서기의 유랴쿠(雄略)조에는 오오진 능에 말 모양의 하니와가 있었다는 얘기가 적혀있다. 즉, 햐쿠손이라는 사람이 출산한 딸 집에 갔다가 말을 타고 밤에 귀가하던 중, 오오진 능을 통과할 무렵, 붉은 색 말을 타고 자신의 점박이 말을 따라잡아 쏜살같이 앞서 가던 사람이 되돌아와, 말을 교환하자고 말했다. 햐쿠손은 기쁜 마음으로 말을 교환했다. 그는 집에 돌아와 그 준마를 마구간에 넣고 잠이 들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놀랍게도 그 붉은 색 말은 흙으로 빚은 하니와로 변해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니, 자신의 점박이 말이 오오진 능의 (말 모양) 하니와들 사이에 매여 있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12

두 번째, Barnes에 의하면, 1872년 닌토쿠 능의 한 귀퉁이가 흙 사태로 무너져내려, 수혈식 석실의 일부가 드러났다. 그 닌토쿠 능에서 출토됐다는 철제 갑옷과 무기류, 청동 장신구, 청동 거울, 원형 고리 칼, 말방울 등이 보스턴의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13 Kidder(1985: 102-3)는, 천황 능의 발굴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 유물의 보존은 정말 뜻밖의 행운이라면서, 닌투쿠 능에서 나왔다는 조그만 말방울과 말 머리 모양의 하니와는 바로 기마민족적 특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고 말한다.

세 번째, Kidder(1985)는 기마민족적 성격을 가진 고고학적 물증만을 특별히 한데 모아 그 목록을 작성했는데, 이들은 모두 “5세기 초” 야마도 왕국의 오오진-닌토쿠 시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고분들에서 발굴됐다. 마루야마 고분(오오진능의 부속능)에서 발굴된 금동 장식 안장, 닌토쿠 능에서 발굴된 청동 말방울과 말 머리 모양 하니와, 료오난 유적지에서 발굴된 2개의 목제 안장과 땅딸막한 말 모양 하니와, 그리고 리츄(履中) 능의 부속능에서 발굴된 안장, 재갈, 등자, 청동 고리 등이 목록에 들어있다. 14 금은 8세기가 될 때까지 일본열도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철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로부터의 공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6세기 후반까지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Farris(1998: 71-73)는, 일본에 있는 모든 유형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철의 양이 5세기 초에 극적으로 늘며, 6세기 사철(砂鐵)이 발견될 때까지는 이들 철 거의 대부분의 공급원이 한국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6세기 후반 사철이 발견되기 이전 일본열도에서는 철의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철은 가야 혹은 백제로부터 덩어리 형태로 수입한 것이다. 15 Farris는 “초기 일본사회가 철, 철제 무기, 각종 철제 도구, 철을 만드는 기술자 등을 한반도 남부 국가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사실엔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Edwards 자신도, 대륙의(즉, 한반도의) 선진적 측량술과 건축술이 없었다면 중기의 거대 고분들은 축조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Kobayashi(1955)의 주장 뿐 아니라, 중기 고분들에서부터 철제 유물의 숫자가 극적으로 늘었음을 지적한 Mori(1965)의 주장을 인용한다. 16 그러나 놀랍게도, Edwards는 기내(畿內)지역에서 출현한 토착세력이 먼저 한반도를 침입해 철을 얻어가고 돌아와서, 그 철로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일본을 통일했다는 Inoue(1960)의 주장을 인용하고 만다. 17

Egami(1964: 51)는 “(정복활동을 수행할 만한 군사적 요소가 없는) 초기 고분시대 일본열도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무장이 훨씬 잘 된 그곳 사람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거기서 기마민족 문화를 배양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통일을 했다는 발상은, 역사의 일반적 법칙에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9 (2005. 6. 4.)
정리: 강현사 박사

[각주]

1.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倭... 其地無牛馬

2. Kidder(1985: 106)는 “초기 고분시대 유적지에서는 아직까지 말뼈가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廣開土王碑文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4. 百濟國主照古王 以牡馬壹疋 牝馬壹疋 付阿知吉師以貢上(K: 248)
應神 十五年 秋八月 百濟王遣阿直伎 貢良馬二匹 卽養於輕坂上廐 因以阿直伎令掌飼 故號其養馬之處 曰廐坂也(NI: 371)

하리마 풍토기에는, 호무다(오오진)가 사냥을 하다가 말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시종들에게 누구 말인가를 물어보니, 시종들이 호무다 자신의 말이라고 대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리마 풍토기는, 이런 연고로 그곳을 “내-말-들판”이라 부르게 됐다고 말한다.

播磨國風土記 飾磨郡 少川里... 英馬野... 所以號英馬野者 品太天皇 此野狩時 一馬走逸 勅云 誰馬乎 侍從等對云 朕君御馬也 卽號我馬野 (F: 278)

5. Kidder(1985: 98-99) 참조.

6. Hiroshi(1969: 72) 참조.

7. Barnes(1983: 4. 245) 참조. 놀랍게도 Edwards(1983)는 아리야마 고분을, 대륙적 유물을 하나도 포함하지 않는 묘로 분류한다.

8. Kidder(1985: 103-4)와 Barnes (1983: 7. 256)를 참조.

9. 한반도 사람들은 기원 후 1세기 중 어느 때인가 900-950°C에서 구워지는 회색이나 붉은 색의 와질토기(瓦質土器)를 생산키 시작했고, 1~3세기 사이 어느 때인가 좀 더 높은 온도(950-1150°C)에서 굽는 경질토기를 생산키 시작했다. Barnes(2001: 121-3) 참조. Farris(1998: 85)는 “경질토기가 일본에 도입되는 시기와 철물 생산이 대폭 확산되는 시기가 대략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들 제조기술은 모두 고온에서 열처리하고 성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고온에서 철기를 만드는 기술이 고온에서 경질토기를 만드는 기술로 원용된 것이다. 하리마 풍토기(F: 326)는, 야마도 왕국의 시조인 호무다가 순행하던 중 “토기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흙”을 발견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10. 언어학자인 Unger(2001: 84-5) 역시 “기마민족설을 비판하는 Walter Edwards와 Gina L. Barnes의 글을 읽고, 나도 몇 해 전부터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11.  Edwards(1983: 273, 283, 284, and 286) 참조.

12. 雄略... 伯孫女者... 産兒 往賀壻家 而月夜還 於... 譽田陵下 逢騎赤駿者... 仍停換馬... 驟而入廐... 其明旦 赤駿變爲土馬... 還覓譽田陵 乃見驄馬 在於土馬之間(NI: 485)

13. Barnes(KEJ, 1983: 6.8)

14. Kidder(1985: 100)는, 나무틀에 금동 장식을 한 안장은 한국에서 만든 것과 유사한데, 아마도 같은 공장에서 생산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Edwards(1983: 275, 295)는 마루야마 능의 축조 시기와 내용물의 성격을 4세기 말로 추정하면서, 이 마루야마 능은 대륙적 성격이 두드러진 유물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 능으로 분류를 했다.

Edwards는 또, 금동 장식 안장이 마루야마 능에서 발견은 됐지만, 부속 능을 주(主)무덤(오오진능)과 동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이 무덤은 5세기 중엽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해, 자신이 만든 표의 내용 자체를 스스로 부정했다.(주7 참조.)

15. 神功 攝政五十二年 秋九月 久氐等...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NI: 359)

698년(혹은 708년) 동광이 발견되기까지 일본열도에서는 동도 생산이 안 됐다. 일본엔 아예 청동기 시대가 없다.

16. Edwards(1983: 289) 자신도, 고분들 크기는 한국에서 사용한 길이 계산법의 합리적인 배수로 돼 있다고 말한다. Kidder(1985: 95)는 초기와 후기 고분들 모두 설계와 건설에 고구려 척도(고마척, 35-36 cm)를 적용했다고 말한다.

출처 : 사슴농장
글쓴이 : 가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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