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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순영릉(恭順永陵)

monocrop 2009. 4. 16. 10:08

 

2008-08-06일 휴가 여섯 째 날

 

맑게 갠 하늘에 드문드문 뭉게구름이 떠 있다.

울산, 경주 다녀온 여독도 하루 쉬어 풀린지라

나흘 전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겠다는 예보에

그만 주저 앉았던 파주 일대를 답사하기로 했다.

 

 

공순영릉(恭順永陵)

 

파주시 조리읍 능거리 55에 있는 공순영릉(恭順永陵)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세 능을 합쳐 부르는 말로

달리 파주삼릉이라고도 한다. 

 

 

 

 

재실(齋室)

 

 

관리 사무소로 쓰는데 번듯한 한옥이 거의 사라져 이런 데서나 볼 수 있다.

 

 

공릉(恭陵)

 

예종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한명회 딸)의 능이다.

한명회(韓明澮)는 기가 드센 인물이었다. 거기에 치었는지 왕비를 만들려고

기껏 왕실에 들여보낸 두 딸- 공릉에 누운 장순왕후와 순릉의 공혜왕후 모두 일찍 죽는다.

 

 

 

사진: 공릉 입구

 

홍살문 오른 편 안쪽 바닥에 능에 온 임금이 절하는 배위(拜位)가 있고

박석이 깔린 참도가 직각으로 한번 꺾이면서 정자각까지 벋어 있다.

정자각 뒤 급경사 사초지를 올라가면 능상(봉분)이 있다.

 

 

 

사진: 공릉 능상 전경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는 예종 등극 전 나이 열 일곱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죽었다.

그 후 왕비로 추존 되지만 한 번 쓴 묘 또는 능은 더 치장하지 않는다는

조선 왕조의 관례에 따라 이름은 능이로되 석물은 세자빈묘 그대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문인석만 있고 무인석이 없다.

병풍석은 세조(世祖)가 없앴으니 그 며느리 장순왕후 능에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난간석도 두르지 않은 것은 원래 세자빈 묘였기 때문이리라.

망주석(望柱石)도 없되 능상 주위 곡장 안으로 석호와 석양은 있다.

 

 

 

 

사진: 공릉 능상 후면

 

능상 뒤 얕은 언덕-풍수에서 이야기하는 용맥이 혈(穴)로 들어가기 직전

입수처에서 능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순릉(順陵)

 

성종의 원비(元妃)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이웃 공릉에 있는 장순왕후 동생으로

역시 한명회(韓明澮) 딸이다.

예종과 성종은 숙질(叔姪) 이니 자매(姉妹) 사이에

시집와서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된 것이다.

 

 

 

사진: 순릉 입구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을 가르는 냇물-금천(禁川)을 넘어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너머 벋은 참도가 끝나는 곳에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뒤 급경사 사초지 위에 능상이 있다.

 

사진: 순릉 능상 전경

 

같은 아버지 자매로 같이 왕가에 시집왔지만 언니 장순왕후는 세자빈으로 죽고,

동생 공혜왕후는 왕비가 된 뒤 죽었다. 그 차이가 석물에서 드러난다.

곧 공릉에 없던 무인석이 있고, 능상 둘레로 난간석을 돌렸다.

망주석도 공릉에는 없지만 이곳 순릉은 곡장 안 좌우에 세웠다.

 

 

사진: 순릉 무인석(동쪽) 얼굴

 

 

사진: 순릉 문인석(서쪽) 얼굴

 

 

 

필자 스냅 한 컷

 

 

 

 

 

영릉(永陵)

 

위 두 릉-장순왕후의 공릉과 공혜왕후의 순릉 시대로부터

250 년 뒤 진종(眞宗)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의 능이다.

 

공릉 장순왕후 한 씨 (1445-1461)

순릉 공혜왕후 한 씨 (1456-1474)

영릉 진종 (1719-1728), 효순왕후(1715-1751)

 

진종(眞宗)태정태세문단세에 나오는 임금이 아니다.

영조의 맏아들로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추존한 묘호(廟號)다.

따라서 효장세자(진종)는 사도세자의 형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뒤 세손-정조로 하여금 친아버지가 아니라

큰아버지 효장세자 뒤를 잇게 한다. 이것은 괜히 심술이나 말 장난이 아니라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표준 역사해석과 왕권 정통성 확립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드라마 이산에도 나오다시피 정조 즉위 일성(一聲)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요 이었다. 뭐 어쨌던 계통 상으로 아버지니

진종(眞宗)으로 추존(追尊)해 올릴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는 당대 소론(少論)대신 조문명의 딸이다.

 

그런데 진종은 추존을 한 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고종황제가 건원칭제할 때 황제로 다시 한번 올려진다.

그러다 보니 영릉 비각에는 세 종류의 비석이 남아 있다.

 

 

사진: 세가지 비석. 물론 저런 형태로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찍어 3장을 합성하였다.

 

왼쪽이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 부좌

가운데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

오른쪽이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 부좌

 

 

 

사진은 종묘 영녕전 신위 봉안도로 제 14실에 진종 신위가 있다.

 

그 오른 쪽 제 15실 장조(莊祖)는 사도세자의 추존 묘호다.

16실 의민황태자 영왕은 영친왕 인바, 세자로 죽어 종묘에 들어간 예가 없었다.

또 의민황태자면 충분하니 영왕은 필요 없으며, 굳이 붙인다면 영왕이 아니라

영친왕으로 해야 한다.

 

 

사진: 영릉 입구

 

앞에 두 릉(陵) 배치에 대한 사진과 멘트를 붙였으니

이제는 조선조 왕릉 배치-금천과 홍살문, 참도와 정자각, 비각,

능상에 대한 공간개념이 잡히리라.

 

 

 

사진 : 정자각 위로 본 영릉 능상

추존은 되었지만 죽을 당시는 어린 세자의 묘(墓)이기에

왕비릉인 순릉에 비해서도 격이 많이 떨어진다.

 

곡장을 두르고 석호, 석양,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을 두었을 뿐

무인석도 없고 봉분 주위 난간석도 없다.

 

 

 

사진: 영릉 능상 정면

사진 상 왼쪽이 진종, 오른 쪽이 효순왕후 조 씨다.

혼유석은 각각 놓았으나 장명등은 가운데 하나만 두었다.

정조 친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융릉은 당시 이미 사라진 풍속

병풍석을 되살려 붙였지만, 양아버지 진종의 묘는 세자묘 그대로다.

 

 

사진: 영릉 후면

 

 

 

사진 : 망주석

조선 후기가 되니 석물 세공이 꼼꼼하고 사실적이다.

 

 

사진: 망주석 세호(細虎) 접사(接寫)

 

 

 

사진: 혼유석 다릿돌-고석(敲石) 조각

 

 

 

 

사진: 정자각에서 본 박석, 참도와 홍살문

 

그리 알려지지 않은 왕릉을 가는 재미는 소박한 조선 왕조 능원을

방해하는 사람 없는 가운데  즐기고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출처 : 구룡초부
글쓴이 : 구룡초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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