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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추리도, 요-금의 황룡부(黃龍府)는 몽골 열하성 북계지역

monocrop 2009. 4. 8.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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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추리도, 요-금의 황룡부(黃龍府)는 만주 장춘 아닌 몽골 열하성 북계지역

글 : 솟대

 

 



그림 1.  하북성 현재 지도의 난하와 서요하일대 (난하가 지나는 승덕은 하북성으로 편입된 원래 몽골 열하성)
그림 2.  <중국여도>상의 황룡부(黃龍府) 추정지 일대


추리도(墜理圖)에서 대릉하(大陵河)는 압록(鴨綠)이라 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소요수(小遼水)는 현재의 난하(灤河)임은 앞에서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황룡부(黃龍府)의 위치를 확인하여야 되는데 기존의 학계의 견해는 장춘시 농안일대로 현 만주지역으로 비정해왔는데 추리도(墜理圖)로 보면 압록(鴨綠), 즉 대릉하(大陵河)의 북방에 있는 하수와 난하(灤河)상류의 지류와의 사이에 위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릉하(大陵河)의 북방의 하수는 바로 현재 지리상 서요하(西遼河)이므로 추리도(墜理圖)가 말하는 황룡부(黃龍府)는 서요하(西遼河)상류지역과 난하(灤河)상류지역사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룡부(黃龍府)는 거란이 진국(辰國)-발해-을 멸망시키기고 개칭하기전인 진국(辰國)때에는 부여부(扶餘府)라 하였고 부주(扶州), 선주(仙州)의 두 주가 있었습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 9권 지리고(地理考) 9, 발해편에서 《요사》 지리지를 인용하여 이르길 황룡부(黃龍府)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 동경도(東京道)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해동역사]


금사에 나온 요나라의 황룡부(黃龍府)를 살펴보면, 금 태조 아골타 수국 원년(1115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1월 금 태조가 친히 황룡부를 정벌하러 원정에 나서 방어에 나선 27만 요군遼軍을 무너뜨리고 9월에 드디어 황룡부(黃龍府)에서 승리하여 요주遼主(천조제)로부터 이를 빼앗습니다.

황룡부(黃龍府)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요주遼主가 놀라서 친히 70만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던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요지임은 틀림없습니다.
또한, 여러 주(州)를 거느린 부(府)의 치소이므로 그 일대에서 큰 성읍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난하(灤河)의 이 고지도상 동쪽 지류와 서요하의 두 지류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그 사이의 황룡부(黃龍府)위치를 추적할 수 있겠지요.


첫째로, 추리도(墜理圖)에서 나온 소요수(小遼水)인  현 난하(灤河)는 그림 1의 현대 지도로 보면 옛 청대의 열하성(熱河城)지역인 승덕(承德)일대로서 추리도(墜理圖)에서는 두 개의 주요 수계가 나오지만 현재지도에서는 상류의 주요 지류가 4~5곳이나 될 정도로 많습니다.

주요 상류지류를 찾기 난감한 것 처럼 보이지만 20세기초의 근대 지도인 그림 2의 중국여도를 참조해보면 추리도(墜理圖)에서 나온 두 개의 주요지류를 무난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림 3. 추리도(墜理圖)

바로 상류 지류중 가장 큰 난하(灤河)와 음마도하(飮馬吐河)가 그 것입니다.
중국여도에는 이보다 작은 하천은 청나라 황제의 여름수도였던 피서산장이 강변에 위치한 열하(熱河)정도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리도(墜理圖)에 표시된 현 난하(灤河) 상류지류중 가장 동쪽에 표시된 것이 음마도하(飮馬吐河)가 아닌가 보려했는데 추리도(墜理圖)상 가장 동쪽 지류의 끝단에 흑산(黑山)과 흑하(黑河)가 나와 있더군요.   대청광여도에도 난하(灤河)의 가장 큰 상류지류인 내몽골 정람기일대의 난하(灤河)상류 끝단중 백랑하(白狼河)에 역시 흑곡(黑谷)이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추리도(墜理圖)에 나온 난하(灤河)의 두 상류지류중 동쪽지류는 상류지류중 가장 큰 난하(灤河)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요.



둘째로, 추리도(墜理圖)의 서요하(西遼河)는 두 개의 큰 지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의 확인은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위쪽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황하(潢河)-와  그리고 아래쪽의 적봉시(赤峰市)를 흐르는 노합하(老哈河)의 두 상류 수계입니다.


Fig. 4  칠로도산맥과 황하(潢河)와 노합하(老哈河)

두 지류사이의 중앙에 끼인 것은 바로 최고봉이 해발 2037m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인 산맥으로 추리도(墜理圖)에서는 이를 사랑산(四郞山)이라 하였고 칠로도산맥군의 북쪽 산맥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산(四郞山)에 연달아 노합하(老哈河)아래로는 몰룡산(沒龍山)이 나와 있는데 이  칠로도산맥군의 남쪽산맥으로 최고봉은 해발 1,807m입니다.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와 노합하(老哈河)를 가로질러 걸쳐있는 남북의 칠로도산맥(七老圖山脈)을 모두 합쳐서 대청광여도에서는 백랑산(白狼山)으로 명기하고 동쪽의 노노아호산맥(怒魯兒虎山脈)은 용산(龍山)으로 명기하였습니다.

물론, 추리도(墜理圖)에서는 이 노노아호산맥(怒魯兒虎山脈)을 장백산(長白山)으로 명기하였습니다.


그림 5. 대청광여도

또한,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의 발원지인접의 서쪽에는 혼둔지(混屯池)라는 호수가 명기되어 있는데 현대지도를 보면 바로 알수있지만 바로 달래약이호(達來渃爾湖)입니다.
일명, 달리호(達里湖)라고도 하는데 Radio님이 남당선생님의 <고구리사초>에 나온 <서자몽西紫蒙(達里湖西沙漠之地)>의 땅이라 추정한 곳입니다.
☞ 김성겸선생님이 역주하신 <고구리사초> 완역본 第七世 <태조황제太祖皇帝> 기紀 참조


이제, 이 정도 일대 수계와 하수의 지리를 파악했으면 문제의 황룡부(黃龍府)의 위치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겠지요.

칠로도산맥(七老圖山脈)의 남쪽지맥인 몰룡산(沒龍山)의 동쪽은 바로 난하 상류지류들중 하나인 두 하천 바로 이손하(伊遜河)와 무열하(武烈河: 熱河의 상류)지역입니다.

아래 지도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되겠지만 이 일대 전체가 크게 산맥으로 에워싸여 있고 이 일대내부적으로 하천변의 평야와 산들로 이루어져 요지중의 요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6. 1950년대 CIA제작지도 : 란하-서요하일대 부분도

이 지역의 남부는 바로 청나라의 여름 수도였던 열하(熱河)로 현재는 승덕시(承德市)가 되었고 청나라 황제의 사실상 여름수도였던 황제의 별장인 피서산장이 위치하여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로서도 매우 유명한 곳으로 2차 아편전쟁시에 북경이 함락되자 청 황제가 피신해 온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의 북부는 이손하(伊遜河)의 상류인 음마도하(飮馬圖河)와 이손하(伊遜河), 그리고 열하(熱河)의 상류인 무열하(武烈河)등의 상류지류가 위치하며 음마도하(飮馬圖河)를 따라서 륭화현(隆化縣)부터 시작하여 장삼영(張三營), 변처산(邊墟山)등이 위치하고 이손하(伊遜河)를 따라서는 상류쪽으로 륭화현(隆化縣)부터 시작하여 위양현(圍陽縣)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음마도하(飮馬圖河)의 하천을 따라 있는 지명들은 대청광여도를 참고하였음.


또한, 이곳은 위 상세도에서 보듯이 산악지역에서 몽골고원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역이고 동으로는 적봉일대로 남으로는 청제국의 여름수도였던 승덕일대를 거쳐 난하를 따라 하북의 평원지대로 내려가며 북으로는 몽골고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지역이고 서북으로는 몽골제국의 여름수도인 상도(상도)로 바로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역입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하다는 황룡부(黃龍府)에 대한 설명과도 부합되며 요나라 이전에는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로 거란세력의 서진을 막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내용과도 일치하며 전략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府)에 비하여서는 부여부(扶餘府)가 두 주(州)밖에 거느리지 않은 이유도 이런 지형특성으로 볼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란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요 성종(재위:982~1031)때 이르면 발해유민들이 세운 후발해국세력들을 점차 제압하면서 전략요충지인 황룡부(黃龍府)를  5주 1현으로 확장해 넓힙니다.

금국의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로 금국이 일어서면서 황룡부(黃龍府)를 쳐서 장악하면서 거란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이로서 송나라와 고려에서도 금국에 본격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소통하기에 이릅니다.

륭화현(隆化縣)을 제외한 위에 나온 4~5곳의 음마도하(飮馬圖河)와 이손하(伊遜河)를 따라 위치한 황룡부(黃龍府) 치소 후보지에 대한 보다 세밀한 위치확정은 아마 완전히 새로운 사료의 보충이나 조사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참조로, 이손하의 상류끝단일대인 위양현(圍陽縣)과 음마도하(飮馬圖河) 상류의 Pan-chieh-t'a의 바로  서북의 고원에는 1950년대만 해도 지도에서 보듯이 장성(Wall)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아마 진국(辰國)이 거란을 통제할 군사적 전략 요충지인 부여부(扶餘府)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부여부(扶餘府)를 에워싸며 둘러있던 외성의 일부가 아닌가 짐작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황룡부(黃龍府)에서 보주(保州)는 그리 멀지 않다는 점입니다.
바로, 추리도의 보주(甫州)가 되겠지요.

금 태조가 출병하여 황룡부(黃龍府)를 공략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지병력을 나누어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주어서 보주(保州)를 공략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보주(保州)가 워낙 난공불략이라 쉽지 않자 금 태조가 군사를 더 많이 보내고 싶었지만 황룡부(黃龍府)함락 소식에 기겁한 요(遼)의 천조제가 황룡부(黃龍府)를 탈환하고자 70만대군을 보내어 반격해 오므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보주(保州)로 군사를 돌리지 못하고 더구나 고려가 보주(保州) 때문에 사신을 보낸다고 하여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함락이 쉽지 않으면 변방만을 굳게 지키라 한 것으로 보아 보주(保州)는 황룡부(黃龍府)에서 멀지않은 후방지역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