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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추리도에 대하여

monocrop 2009. 4. 8.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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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추리도에 대하여

글 : 장진근 (봉오선생)

 

 


위 지도에서 보듯이 고려는 통일신라를 계승하였다. 통일신라는 발해와의 국경을 사진에서 보듯이 그 선에서 유지하였으며 그 국경선은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 그리고 요를 멸망시킨 금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가 자기 조국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바라지 않을 사람이 있으리료만 그 역사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 고려는 공민왕 때 북원과 신흥 명나라가 건곤일척 싸우고 있을 때 철령이북의 함흥까지 원나라 세력을 밀쳐내고 고구려의 구강을 일부나마 회복하였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고려가 남의 집에 불이 난 틈을 타서 대대로 자기들의 영토를 도둑질해 갔다(趁火打劫)면서 내어놓으라고 조선개국 초기에 외교문제를 일으킨 된 일도 있었다. 오늘날의 압록강 두만선 경계선이 확정된 영특한 세종임금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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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도(墜理圖)= 거란지리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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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머리에

 필자는 coo2.net에 가끔 잡문 나부랑이를 싣고 있다.
그 이유는 본인이 따로 운영하는 카페를 통해 글을 쓰는 것보다 여기에 쓰는 것이 네티즌들의 관심과 호응이 훨씬 났기 때문이다.

요사이 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더니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추리도(墜理圖)》를 소개한 분이 있어 내용을 훓어 보았다.
퍽이나 얻기 어려운 자료를 입수, 소개하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면밀히 살펴 보았다.

이 자료를 공개한 분의 말씀에 의하면 거기에 나와 있는 "高麗新羅女眞渤海四屬之地"란 말에 근거해서
압록강 바깥 쪽에 소위 왕씨 고려의 판도가 미쳤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다음과 같이 논급하고자 한다.


2.  추리도(墜理圖)란 무엇인가

중국의 돌에 새긴 고지도로서 《지리도(地理圖)》라고 부르며
석각에 쓰여 있는 글자 그대로 《추리도(墜理圖)》라고도 한다.

이 지도는 원래 남송의 황상(黃裳)이라는 사람이 1189~1190 년간에 만든 것을
왕치원(王致遠)이란 사람이 남송 순우(淳佑) 7년(1247) 돌에 새긴 것이다.

제원은 새로 197센티미터, 가로 101센티미터로
현재 쑤쪼우시(蘇州市) 비각박서관(碑刻博曙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황상이 소희(昭熙) 원년(1190) 가왕(嘉王) 조확(趙擴)에게 바친 8개 지도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지도는
산맥을 사경법(寫景法)을 사용하여 표시하고,
삼림과 장성은 모두 형상적 부호를 사용하여 표시하여 자못 입체감을 가지고 있다.

장성 이북의 산마루나 삼림의 밀림은 문자로 주기하여
"평지로 소나무 숲의 넓이가 수천 리(平地松林廣數千里)"라고 표시하였다.

하류는 단곡선(單曲線)으로 표시하고
강 이름 바깥에 둥그런 괄호로 테두리를 둘러 강물의 근원이 있는 곳을 주기하였다.

도면상에 황하(黃河)의 원류에 대한 주에서 적석(積石)에 있다고 하였고,
장강(長江)의 원류는 민산(岷山)에 있다고 주기하였는 바,
《상서(尙書) · 우공편(禹貢篇)》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그려진 장강의 주류는 여주(濾州)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 분명하게 남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강으로 그려져 있으나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다시 북쪽으로 간 것이 민산(岷山)이 아니다.

황하(黃河)의 하류는 창주(滄州) 이북의 오늘날 천진(天津) 부근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하구(河口) 라는 두 글자가 주기해 있다.

산이름과 땅 이름은 모두 바깥쪽에 네모난 괄호로 테두리를 했다.
해안선과 산동반도의 윤곽 및 황하중류의 구부러진 모습 등은 모두 대체로 정확하다.

(《중국대백과사전(中國大百科辭典)》 CD-ROM, 《지리도(地理圖)》 조 참조)  


3.  어느 나라의 강역을 그린 지도인가

이 자료는 원래 지도 부분과 문장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문장 부분을 판독할 수가 없어 확대경을 사용하여 제작 년도를 확인한 바, 순우(淳祐) 7년으로 명기가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도가 석각으로 완성된 것은 1247년임에 확실하다.

이 때 송나라는 북방 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서울을 변경에서 강남으로 옮겨가 남송이란 이름으로 맥을 못추고 이민족에게 시달렸고,

결국
요나라를 이은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에게 휘종 · 흠종 두 황제마저 붙들려 가고
매년마다 많은 세폐를 주기로 화약을 체결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역시 북방 민족인 몽고족에게 망하고 난 몽고 정종 2년 때였다.

그당시는 아직 국호를 원나라로 바꾸기 이전이었다.

그리고
이 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1189~1190년간으로 남송 순희(淳熙) 말년인16~소희(昭熙) 원년간이다.
금나라로는 세종말년인 29년과 장종 원년이 된다.

지명 등을 검색해 본 바,
《송사(宋史)》 · 《요사(遼史)》 · 《금사(金史)》 지리지에 나오는 이름들로서 다 확인이 되는데
유일하게 보주(甫州)만이 확인이 안 된다.

또 거기에 나와 있는 여러 지명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가운데 오늘날 백두산(白頭山)으로 부르는 곳이 장백산(長白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거기에 사는 조수들은 모두 흰색이라고 주기하였다.

장백산에 흘러나오는 산으로 압록(鴨綠)과 소요수(小遼水)가 있다.
압록강의 주향으로 보아서는 오늘날의 압록강의 흐름의 방향과는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고 본다.

압록강 안쪽에 신라국계(新羅國界)가 표시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라는 935년에 왕건의 고려에 의해 멸망당했다.

금나라는 아골타가 정식으로 칭제 건원한 것은 1115년이었으나
《금사(金史) · 세기(世紀)》나 《대금국지(大金國志)》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그 이전에 그의 선조들인 함보(函普)가 고려 또는 신라에서 여진 땅 아르츠크로 건너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하여 기반을 구축 결국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금나라는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기 이전부터 요나라의 통치하에 있으면서
고려와 끊임없이 국경 문제를 야기시켜 왔었다.
소위 윤관의 9성을 쌓은 일들은 요나라 때 있었던 일이었다.

아골타의 선조들은 요나라에서 대대로 절도사란 직책을 세습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사는 여진족들을 다스려 왔다.

위 지도를 보면 "女眞舊界" 옆에 "高麗新羅女眞渤海四屬之地" 라는 말이 쓰여 있는데
이 부분의 고려는 소위 왕건의 왕씨고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고려(高麗) · 구려(句驪) 등으로 표기해 왔으며
일본도 마찬 가지로 고구려를 고려(高麗)로 쓰고 고마로 읽었고
신라는 신라(新羅)로 쓰고 읽기는 시라끼로, 백제는 백제(百濟)로 쓰되, 읽기는 구다라로 각각 읽어왔다.

따라서
이곳은 "(이 일대는) 고구려 · 신라 · 여진 · 발해 네 나라에 속했던 땅"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그리고
"여진구계(女眞舊界)"라 함은 요나라와 여진족과의 옛날 경계선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자료는 결코 요나라 때 만들어 질 수는 없다.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이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그의 이름자인 "眞"자를 피해서 "女眞"을 "女直"으로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왕씨 고려는 통일신라와의 평화적 정권 교체로 물려 받았는데
신라와 발해와의 국경은 대동강 원산 이남이라고 배워왔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와 신라의 국경도 더 이상을 벗어나지를 못했으며
나중에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와 고려와의 국경도 대충 그런 정도였을 것이다.

이 지도상에도 신라국계(新羅國界)가 압록강 안쪽에 그려져 있다.

보주(甫州)라는 지명은 지금 중국의 역사책에서 일응 검색해보았으나 검색이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 예천의 고지명이었던 보주(甫州)를 혹여 이곳으로 비정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 점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주 일대를 지배하였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신라가 만주 일대를 판도로 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적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필자는 역주한 바 있는 《만주원류고》에는
이 책을 직접 쓰도록 명령한 청나라 건륭제의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正謬)》라는 논문 한 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삼한(三韓)이 오늘날의 봉천 동북쪽 길림 일대에 있었다고 하였으며,
길림(吉林)이라는 말는 당나라 때 계림(鷄林)에서 온 말임을 언어적 · 지리적으로 검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의하면 만주에 신라산(新羅山)이 있다고 하였는 바,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가 만주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황제까지 나서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며
더우기나 위 지도에서 신라까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무언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 여론

이 지도에는 갈석산과 장성까지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난수 · 요수 등이 그려져 있어
《진태강지기(晉太康地記)》에서 말하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거기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것임을 확신케 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생각이 된다.


4.  맺는 말

이 지도가 원래 만들어진 연도로 보거나 석각으로 제작된 연대로 볼 때
이 석각도(石刻圖)는 결코 원나라와 관련시켜 생각 할 수 없고

굳이 따진다면 송나라와 요 · 금관계도라 할 수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 지도상에 있는 "高麗新羅女眞渤海四屬之地"라는 귀절 가운데 "高麗"는 왕씨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高句麗)"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국명의 기록된 순서라든가 발해와 신라의 북쪽 경계 등에 관한 지금까지의 통설에 비추어 무난한 해석이 가능한 만큼 보주(甫州)를 근거로 압록강 이북이    
고려의 판도였던 것으로 속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09. 04. 06.
                                                                                    봉오선생



관리자 (2009-04-07 15:48:36)  
자료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제국고려의증거 (2009-04-07 16:42:42)  
장백산에 흘러나오는 산으로 압록(鴨綠)과 소요수(小遼水)가 있다.
압록강의 주향으로 보아서는 오늘날의 압록강의 흐름의 방향과는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고 본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진덕여왕1년 신라본기

무산성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자 함경감사가 무산성밖에 가옥을 짓고 요충지에 군사기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다.(고려사에는 무산성에 관한 기록이 없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평안도의 영변대도호부에 무산성이라는 성이 예부터 전해져 온다고 적고있다. (조선의 평안도 영변대도호부는 비류수즉 혼하가 있는 곳이다)또한 수도제강에는 토문강(토문강은 송화강의 서쪽지류이다)근처에 무산성이 있다고 한다 .즉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상당히 북쪽이다. 동잠성은 독산성과 같이 등장한다. 즉 독산성근처에 있다는 것인데 조선말기에 쓰여진 임하필기에는 독산성이 압록강의 서북쪽에 있다고 한다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소부리성은 소부리주에 속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고구려의 석성을 빼앗고 소부리주를 설치했다 석성의 위치를 찾아보면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은 본디 예(濊), 맥(貊)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가 되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가 되었다. 궁전(宮殿)이 있으며, 경주,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일을 도독(都督)하였다. 옛 현은 6개로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벽곡현(壁谷縣), 웅산현(熊山縣), 백양현(白楊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축조하였으며, 성 둘레는 20리이다. 당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웅산에서 싸우다가 활 잘 쏘는 자를 석성(石城)에서 사로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요사지리지를 보면 석성이 북한 압록강 이남이라고 주장할수 없다. 게다가 공통적으로 웅진혹은 웅산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백제 역시 압록강 이북에도 땅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최치원이 말하길 신라땅은 고죽국과 이웃해 있다라고 하였고 고려의 이첨은 고려의 해주가 고죽국이다라고 하였다. 당대에 고죽국은 하북성노룡을 고죽국으로 생각했으며 이를 토대로 만주원류고가 신라의 영토가 원래 동서 1천리인데 동서 9백리가 더 늘어나 해주에 이르렀다고 표현한 것이다.

솟대님이 주장한 것을 토대로 요사 금사 대명일통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대부분 검토해본 결과 모두 들어맞았으며 만주원류고에서 왜 오랍까지가 신라땅이다라고 했는지 근거를 알수 있었습니다. 제 블로그에도 올려두었으니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