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oo2.net/ 네티즌 자유게시판 / 15756 2009-04-07
[단독 발굴] 광개토대왕 북경까지 공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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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글을 읽어보다가 잠시 작업을 멈추고 몇자 토를 달아봅니다. 세칭 일류대학의 역사전공{학과기준 아님} 교수자들의 우리겨레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역사와 역사강역 인식이 우리 같은 그네들이 말하는 무지렁이들이 찾아내는 것들에 의하여 조만간 한조각도 남지 않고 산산조각이 날 것으로 봅니다. 고구리의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도성{石}을 쳤다는 얘기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들이 우리 겨례의 역사와 역사강역을 지금도 주무르고 있음이며, 학교를 통하여 한 것으로 모자라서 다시금 역사고시를 동원하여 보수교육까지 하고 있음을 어찌 해야 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금년 여름에 남당유고 추모경 완역 초역판을 세상에 내보낼 일을 마무리 하고 있는 중입니다. 추모경에 비치는 고구리 창세기 즉 대연방천제국 후기의 북부여 재생기의 역사 강역을 이해하게 되면, 지금껏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이손 저손으로 주물러서 각색하여 놓은 소위 김부식과 일연의 삼국사와 삼국유사가 아닌 조선총독부와 식민반도사학들이 편집하여 완성하여 놓은 한 없이 구겨진 우리겨레들의 역사와 역사강역에 대한 개념을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산산조각 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무신제와 태조 및 광개토대왕 치세의 역사강역이 대연방천제국 대부여 및 북부여를 재생시킨 즉 고구리 창세기를 이끌어낸 추모대제의 역사강역을 다물하는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함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래의 기록은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즉 영락대제의 서역 땅 인근 선비의 일파인 비리국을 다시금 복속시키는 원정과 관련한 기록들을 뽑아서 간략히 하여 놓은 것입니다. 아래 기록 중에 나오는 염수鹽水는 북막지경의 파산・부산・부산을 지나서 卑离를 재차 복속시킨 후에 다다른 곳입니다. 바로 현금 지도상의 기련산맥 북변정도의 염수・염하・염지・염호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 - - - - - - - - <國罡上廣開土平安好太王>則<永樂大帝>의 <卑離>征伐 終着地 <鹽水>位置는? <추모대제기> ● 八年辛卯, 正月, 沿<黑水>立亭. <黃龍>主<宝得>殂, <于仁(從弟)>立. 八月, <卑離(西扶餘)>・<紫蒙>來貢. ○ 8년{단기2304년/BC30}신묘, 정월, <흑수黑水{白河東黑河?; 山西平陽黑水?; 山海關東北黑水? 河套九原東北邊 大黑水河?, 嫩河東北黑龍江?}>를 따라 역참을 세웠다. <황룡黃龍>주 <보득宝得>이 죽고, <우인于仁(종제)>이 섰다. 8월, <비리卑離(서부여)>와 <자몽紫蒙>이 조공하여 왔다. <태조황제기> ☯ 十一年壬戌, 二月, 上, 復引<馬韓>・<勾茶>・<盖馬>三國兵, 伐<川西>・<勾麗>拔之. <姚光>, 逃走, 爲其部下所殺. <仇台>, 逃入<西紫蒙>自稱<西扶余>, 後爲<宇文>所逐. ○ 11년{단기2455년/AD122}임술, 2월, 상이 다시금 <마한馬韓>・<구다勾茶>・<개마盖馬> 3국의 군병을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리勾麗>를 쳐서 빼앗았더니, <요광姚光>은 달아나다가 자기 부하 손에 죽었고, <위구태仇台>는 <서자몽西紫蒙>땅으로 피하여 들어가 <서부여西扶余>를 자칭하였으나 후일 <우문宇文>씨들에게 쫓겨났다. <고국천제기> ● 十五年癸酉, 二月, ※<冨山><則忽白>等侵<最彘>・<盖馬>. 四月, <盖馬>大加<優居>・主簿<然人>等伐<冨山>. <公孫度>請助戰, 不許. <則忽白>等走漠北. ○ 15년{단기2526년/AD193}계유,... 2월, ※<부산冨山>의 <즉홀백則忽白> 등이 <최체最彘>와 <개마盖馬>를 침략하였다. 4월, <개마>대가 <우거優居>와 주부<연인然人> 등이 <부산冨山>적을 토벌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이 싸움을 돕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즉홀백> 등은 막북漠北{사막 북쪽}으로 도망갔다. ※☞<삼국사기><신대왕>5년{AD169}조에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大守<公孫度>, 討<富山>賊.” 즉,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서 <부산>적을 토벌하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어, 비슷하나 감이 다름! ☞ 이 기사는 <冨山>의 위치가 산서성 북부에 있던 <개마국>과 <막북>간일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라 본다! <영락대제기> ☯ 三年癸巳, 七月, 征<契丹>拔<川西>. 上, 命二后, 親選國中壯女爲兵而習騎射. <平昜[=陽]>后夢見, 佛來授童子, 曰;“此, 是<無量壽>也.” 上, 聞之, 命創寺于「平壤」及三都, 以洪佛道, 是乃「九寺」之始也. 八月, <莘>聞我征<契丹>, 以爲虗而使<眞武>侵<石峴>, 又侵<関彌>, 不克而去. ○ 3년{단기2726년/AD393}계사, 7월 <거란契丹>을 쳐서 <천서川西>를 빼앗았다. 상이 두 후에게 명하여서, 친히 나라 안의 건장한 여인들을 가려 뽑아서 병사로 삼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게 하였다{女騎射隊를 養成하였다는 얘기!}. 8월, <아신莘>이 우리가 <거란契丹>을 정벌한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의 나라 안이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眞武>로 하여금 <석현石峴>성을 치고 또 <관미関彌>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삼국사기>엔 <광개토왕>2년{AD393}추8월 기사로 되어있다!!}. ● 五年乙未, 二月, 上, 以<卑離>漸違王化, 親征<叵山>・<冨山>・<負山>至<鹽水>, 破其部落七百余所, 獲牛馬羊豕万數. 二后亦騎馬而從上. 上, 以<吐>后有身止之, 而不聽. [歸]生女, 名以<三山>. 八月, <眞武>又乘虗入寇. 上, 以七千騎馳到<浿水>上, 虜獲八千余級. <末曷>侵<羅><悉直>. 十一月, <莘>, 欲雪<浿水>之恥, 將七千人過<漢水>至<靑木岺>, 遇大雪多凍死, 廻歸<漢城>而勞軍. ○ 5년{단기2728년/AD395}을미, 2월, 상은, <비리卑離{弱水印의 西扶餘?}>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부산冨山{현 산서‧섬서 북방이며 북막의 남방에 해당}>・<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鹽水{甘肅祁連山・合黎山附近・蒲昌海? 인근}>까지 이르면서, 그{卑離}들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양・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두 후{平昜과 吐山} 역시 기마하여 상을 따랐다. 상이 <토吐>후는 임신 중이라 말렸어도 듣지 않았고, 돌아와서 딸을 낳았더니, {이 세 산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삼산三山>으로 하였다. 8월, <진무眞武>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서 <패수浿水{或沮水?}>위쪽{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삼국사기>에는 4년 기사로 되어있음} <말갈末曷>이 <신라羅>의 <실직悉直>을 침입하였다. 11월, <아신莘>이 <패수浿水>에서의 수치를 설욕하려고 7천병으로 <한수漢水{長江支流漢水?}>를 건너서 <청목령靑木岺>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서 많은 이가 얼어 죽었더니,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漢山城? 長江中流漢陽府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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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가 또 버그인지...바로 잡습니다. 고구리의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도성{서도 西 都}을 쳤다는 얘기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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