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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고비사막에 로마군단의 후예들 (하)

monocrop 2009. 4. 6. 15:09

사실 고비사막 간쑤성에 로마군 패잔병이 산다는 것은 기록에 관해서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고전에도 언급돼 있다.

중국의 최고의 고대역사로 꼽히는 후한서 등에 따르면 한나라 원제의 명령으로 서역 지방 개척에 나섰던 서역 부도호 천탕

(陳湯)이 기원전 36년 골칫거리이던 흉노를 대파시키는 가운데 머리가 노랗고, 코가 우뚝한 이상한 모습의 병사 1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흉노와는 전혀 달랐다.



흉노족 밑에서 용병으로 살아

 

 

자신들을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해 온 리첸 농민들이

로마군사 복장을 한 채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다

후한서는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 ‘25사(史)’ 가운데에서 사마천의 (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

(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히는 역사서다. 또한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사서다.

천탕 장군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이름을 중국어로 로마를 뜻하는‘리첸(驪 革+干, 영어로는

 Liquian)’현이라고 붙였다. 이곳 거주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의 포위망을 뚫었으나 다시는 서쪽 로마로 가지 못하고 추적을

피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로 옮겨왔다. 결국 이들이 흉노에 의지하면서 용병생활을 해온 로마의 후손

들임이 판명된 셈이다. 그들은 흉노들에게 세계 최고의 군대로 자처했던 로마군대의 전쟁방식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영국 학자들의 관심이 돼 계속 추적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서북민족대학

관이취안(關意權) 교수와 호주 애들레이드대학 데이비드 해리스 연구원 등은 파르티아와 벌인 ‘카래(Carre, 오늘날 Harran)

전투’에서 로마군단이 사라진 뒤 20년이 지나 리첸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타났다는 데 착안해 연구를 본격화했다.

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호머 H 더브스 교수는 기원전 36년 로마사절단이 중국 한나라에서 갖고 온 문서에서 기원전 53년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도망간 로마 군사들이 중국 변방에서 훈족의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문서를 찾아냈다.
더브스 교수는 이러한 이론을 정리해 <고대 중국의 로마인 도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나 학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와 작가들이 고대 중국의 로마인도시 리지엔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첸’은 로마의 중국식 옛날 지명

중국과학원 유전자 및 발육생물 연구소 소속 학자들과 공동으로 이들은 최근 지난 리첸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DNA검사를 벌였

으며 이 일대에서 유럽인의 체형 특징이 완연한 99개의 시신을 발굴해 이들이 로마 군단의 후예임을 확인했다고 문회보는 전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동안 중국인들과 비교해 피부 색깔이 붉고, 키가 크고, 코가 우뚝 솟고 갈색 머리여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차별을 받아왔다. 그러다 이번 학자들의 발견으로 자신들이 로마 집정관의 후예임이 밝혀지자 마을 전체는 경사

분위기다.

 

융창현은 이에 따라 최근 리첸연구회와 로마군단 후예 전문 연구팀을 구성해 이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에 착수했다.
간쑤(甘肅)성 융창(永昌)현의 한 마을에 사는 400여 명의 유럽인을 닮은 농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과의

전투 이후 행방이 끊어진 로마 집정관 크라수스의 아들을 비롯한 로마인의 후예들이다. 크라수스(기원전 115~53년)는 제1차

삼두(三頭)정치 당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던 로마의 정치인.



삼두정치를 벌인 크라수스의 군대

 

 

로마의 첫 삼두정치를 하게 된 크라수스는 당시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기원전 53년, 3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 등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왕국 원정에 나섰다가 ‘카래의 전투’에서

파르티아 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본인은 전사하고 병사들은 대부분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이때 제1군단장으로 참전했던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당시 6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이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잠시 그때 로마의 상황을 보자. 당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던 카이사르는

당선되기 위해 두 가지가 부족했다. 지지자와 선거자금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도했다. 품페이우스는 동방정벌에 공훈을 세운 부하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목적으로 농지분배를 시도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혀 고심 중에 있었다. 또한 로마 제일의 부자인 크라수스는 자신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를 저버릴 수 없는 처지

였다.카이사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옛 부하들의 표를 몰아주면 그들에게 농지를 분배해 주겠다며

설득했다. 다시 크라수스에게는 선거자금을 대주면 한자리 주겠다고 약속했다.

크라수스는 이러한 제안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가 파산

이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입장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대단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품페이우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던 관계

로 카이사르의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카이사르는 그 후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 유명한 갈리아 정복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로마의 최고의 장군으로 존경 받게 된다. 크라수스는 초조했다. 품페이우스는 이미 동방정벌로 많은 명성을 얻었던 상태이고 그

에게 질투를 느끼던 크라수스의 업적이라고는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많은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어야겠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크라수스 역을 맡는다.

기원전 56년 삼두정치의 루카회담에서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취임한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유임되며, 품페이우스는 당시 에스파니아,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결정되었습니다.



“크라수스, 돈은 많았으나 戰備에는 허술”

 

 

로마군대의 핵은 중무장한 보병이다.

그러나 회전(평야전투)에서는 강하나 다른 지형이나 전투에서는 약점도 많다.

 

각자의 병력은 모두 10개 군단을 소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1개 군단은 중무장한 6천명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으로 각각 6만을

보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크라수스는 55년 11월 시리아에 도착하여 전임총독 가니비우스에게 2개 군단을 인도받고 스스로

편성한 6개 군단을 합하여 8개 군단을 보유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로마군단은 보통 600명 정원의 1개 대대(코르호스) 10개가

모여 1개 군단을 이루는데 반해 크라수스의 군단은 8개 대대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8개 대대뿐이어서 8개 군단병력이 정원

4만 8천에 못 미치는 3만 8천명에 남짓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8개 군단이라 하더라도 1만 명이나 모자랐다. 더구나 한심스러웠던 것은 돈이 많아 자비로도 병력이 충실한 10개

군단 6만 명을 편성할 수도 있었지만 군자금 부족을 이유로 포기해 버렸다.하여간 기원전 54년 크라수스는 1개 군단은 본진방어

병력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7개 군단 2만9천600명의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 4천 기병 4천을 포함한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 정벌에 나선다. 파르티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신으로 로마와 인접하고 있었으며 카스피해, 흑해, 그리고

지중해를 인접한 강대국이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비옥한 땅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소위 안식국(安息國)으로 불렸으며

동과 서를 잇는 관문이자 비단길 통로였다.

중무장한 보병의 평야전투가 장기, 그러나 힘을 발휘 못해

현재로 치면 북부이라크 사막지대라고 할 수 있는 파르티아의 사막으로 진격한 크라수스는 수레나스라고 알려진 파르티아의

장수에게 농락을 완전히 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중무장 보병인 로마군단을 상대하기는 벅차다고 생각한 수레나스는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주력으로 계속 유격전을 벌이면서 로마군단을 내륙 깊은 곳까지 유인한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지 얼마 후 드디어 로마

군대는 그들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중무장을 한 보병을 중심으로 한 평야전투(회전)에 돌입하려고 했지만 수레나스의 기병대는

계속 로마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직접 싸우지는 않고 화살만을 날린다. 로마병사들은 특유의 진형을 유지하고 적의 화살이

다 떨어져 자신들의 공격간격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레나스의 기병대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낙타에 화살을 가득

싣고 대기하였다가 화살이 떨어지면 다시 보급을 받아 계속 공격했다. 계속되는 농락에 화가 난 젊은 크라수스는 휘하의 2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파르티아 1만기의 기병에게 몰살당한다. 젊은 크라수스는 전선을

이탈했지만 포위망을 뚫을 가망성이 없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고 전한다.



흉노와 싸우다가 결국 흉노에 편입

크라수스는 아들이 죽자 시니카로 피신하여 전열을 재정비 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로마군대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레나스와 강화협정을 맺으러 갔다가 도중 수레나스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시니카에 머물고 있던 로마병사들 중 도망친 일부

를 제외하고는 1만병이 포로로 잡혔다. 기원전 50년경의 이야기다. 아마도 도망친 포로들은 중앙아시아에 강자였던 흉노족과 싸웠

을 것이다. 또 파르티아와도 싸웠다. 그러나 로마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흉노에 편입되어 당시 중국의 지배자인 한나라와

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흉노의 용병으로 생활하면서 한나라와 싸웠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된 곳이 고비사막의 오지

간쑤성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라진 미스터리 로마군단의 후예들이 역사와 DNA 과학을 통해 다시 발견됐다. 그러나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들의 피는 계속 중국에 동화됐기 때문에 ‘로마냄새’는 ‘중국냄새’에 거의 가릴 정도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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