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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한(漢)나라 유방은 북부여가 없었으면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monocrop 2009. 5. 8. 01:04



한(漢)나라 유방은 북부여가 없었으면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글 : 신완순 / www.coo2.net / 네티즌자유게시판 15814

중국 사람들 저들은 이야기한다.

진시황이 BC 221년 전국시대의 6국을 병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여
최초로 통일제국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때의 진(秦)나라의 이름이
차이나(China), 시나(Sina), 찌나(Cina), 시노(Sino) 등으로
세계에 알려졌노라고.

정말 그럴까?

이는 삼척동자가 들어도 웃기는 이야기이다.

진나라는 BC 221년 저들이 말하는 6국을 병합하고
저들의 나라를 통합한 것은 맞다.
그런데 소위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난 뒤 BC 206년 15년만에 망한다.  

망하기는 15년 만에 망했지만
진나라의 실권 즉 영향력을 잃은 것은 BC 209년이다.
즉 전국에서 진승 등의 반란이 일어나 다시 전란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니 진나라는 통일한 지 11년 만에 다시 쪼개지게 된 것이다.
유방과 항우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11년 만에 망조의 길로 들어선 진나라가
세계에 알려져 오늘날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알아 주었으면 하는 저들의 바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 입장에서 말하면 엄연히 반란군들의 수괴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하의 영웅 항우와 유방의 쟁패는 도적들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장기판의 그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천하를 두고 항우와 유방이 의(義)를 위하여 싸운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한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역사였다고 말한다.
지난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도
그들은 그것을 재현하여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한(漢)나라가 만약 북부여 천자국이 없었다면
과연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권 1 에 고제기(高帝紀) 제1 상편에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와있다.

유방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였을까?

유방은 여러 방면에서 실질적으로 항우에게 밀리고 있었다.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의 영양(滎陽)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결과
항우에게 영양(滎陽)을 할양하게 된다.
영양(滎陽)은 장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새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영양지역을 내어준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힘의 균형이
이미 항우에게로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유방은 어떻게 역전하였을까?

답은 북부여 천자국이 유방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위 <한서(漢書)> 권 1 에 짤막하지만 그 단서가 나온다.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
(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북맥은 사고(師古)도 주석을 달아놓았지만
"동북방에 있는 삼한지속이 모두 맥의 부류이다.(貉在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라고 하여
그 실체를 밝히고 있다.

BC 206년 경의 맥은 누구이겠는가?
<한서>에는 고구려를 맥(貊)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맥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이다.

해모수단군이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연나라 사람들과 함께 보내서
유방을 돕게 함으로써 어지러운 싸움을 끝을 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유방과 항우의 지리한 싸움은 끝이 났으며
유방은 장안에 입성을 하여 한(漢) 왕조의 기틀을 세운 것이다.

만약 해모수단군이 유방을 택하지 않고 항우를 택하였다면
역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 갔을 것이다.

지금도 국제관계에서 마찬가지이지만
천하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력은 주변에 강한 자를 세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힘이 강한 항우의 세력보다는
다소 나약하고 조금은 협조적인 유방을 도와줌으로써
한나라에 대한 통제를 원활하게 하고 대의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북부여나 고구려가 저들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는 작태는
역사를 왜곡시켜 얻는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아야 되며
북부여가 한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처럼
강한 국력과 일치된 국민들의 일치적 단결이 요구된다 할 것이며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이익순 (2009-04-27 16:37:15)  
明論 속을 후련하게 해줍니다.
김성겸 (2009-04-27 19:40:55)  
신 완순 선생님, 촌철살인할 구절을 옮겨놓으셨습니다.

대저 漢{전한즉서한 후한즉동한 모두}이라는 왕조는
소위 한무제라는 서한의 세종 劉徹이의 재위기간 일부에서만 澣海를 구경해보고 관중평원을 벗어났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모조리 우리의 북부여 역사와 초기 4국을 지우고 그 자리에 후세에 漢의 역사 등으로 도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본 (2009-04-27 22:26:19)  
저는 송동건님의 '고구려사 복원(광개토왕비문을 중심으로)'이란 책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송돈건님의 글과 아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조금 다른건 송동건님은 고구려의 기원이 진시황 말기로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은 항우, 유방과 함께 중원을 다투다, 결국 한을 도왔다고 합니다.
이는 초씨역림이라는 책에 근거한 내용임을 명쾌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슴을 쫒다란 표현이 그 이유입니다.
지나 역사상 사슴을 쫒다란 표현은 진시황이후 패권을 다투는 것을 표현하고 주몽이 사슴을 쫒았다는 내용이 초씨역림에 나옵니다.
고구려의 건국이 한의 건국과 거의 같은 시기이고 900년의 나라라나는 말과 일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