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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진 장성의 끝과 산해관의 진짜 위치는?

monocrop 2009. 2. 14. 02:09

 님의침묵 (2009-02-13 10:36:00, Hit : 62,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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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 진(秦)의 30 만 대군이 축조한 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 관까지 라는 데?



《永 平 府。大 明、大 淸 兩《統 志》。俱 屬 直 隸。卽 冀 域。距 北 京 五 百 五 十 里。距 我 東 三 千 二 百 餘 里。此 以 漢 都 王 京 距 里 計。則 如 此。而 若 自「箕 子」所 都 平 壤 計 永 平。則 不 過 一 千 九 百 七 十 五 里 也。今 之 永 平。卽 古 幽、營 之 外 域。而 通 稱 朝 鮮。則 孤 竹 國 亦 在 提 封 之 內 矣。初 雖 封「箕 子」於 永 平。有 箕 子 城。「箕 子」避 周 之 所 封。來 居 今 平 壤。亦 非 理 外 也。高 句 麗 卽 統 朝 鮮 地。則 永 平 亦 入 其 幅 員。故「裴 矩」之 言 有 以 也》

◈ 영 평부 는, 대명(大明), 대청(大 淸) 양통지에 의하면, 모두 직례(直隷)에 속했다. 즉 기성(冀 城)이다.

북경(北京)에서 550 리 떨어져 있으며,
아(我)의 동쪽 3,200 여리 떨어져 있다.


여기서 아라는 것은 이것은 한도(漢 都) 왕경(王京 : 장안을 말하는 것임)에서 떨어진 거리이다【이 글을 보면 理解키 어려운 구절이 있다. 위의 내용은 분명히 “遼나라 지리지이며, 남경도”편이다. 따라서 아(我)란 “나”를 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요(遼)”를 말해야 함에도 (我東 3,200여리) 다음 문장에 <이것은 漢 都 왕경거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장안”이 요나라의 도읍지였다는 말이 된다.

또 하나 현 북경은 장안에서 동쪽에 해당되지 않는다. 대륙의 역사서에는 동북(東北)지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하면 동북이면서 북쪽지방이래야 맞는 말이다. 참으로 理解키 어려운 구절이다? 】
이구절은 잘못된 듯하다.

<기자>의 도읍지인 평양(平壤)計영평(永 平)이다. 불과 1,975리이다. 지금의 영 평(永 平)이다. 곧 옛 유주, 영주의 바깥 땅이다. 통칭 “조선(朝鮮)”이다. 고죽국 역시 이때 봉 받은 곳 내에 있다. 처음 기자가 봉 받은 영 평(永 平)이다. 이곳에 기자 성(箕 子 城)이 있다. 기자가 피해간 곳을 “주(周)”에서 봉하였다. 와 거한 곳이 지금의 “평양(平壤)”이다. 고구려(高句麗)는 곧 큰 줄기의 “조선(朝鮮)땅”이다. 영 평 곧 그 넓이와 길이이다. 옛 배구(당나라 대신)가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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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bold체의 구절은 영평부가 북경에서 단지 550리 떨어지고
장안(아)의 동쪽으로 3,200리 떨어졌다했음으로
이말은 장안을 기점으로 북경은 동쪽으로 3200리에서 반경550리 동서남북 위치의 한 지점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지내요.

그러면 저 위에 올려놓은 위성사진에서와 같이 황해바다가운데가됩니다.
그리고 정히 둔다면 산동성청진쯤이네요.

그리고 현 북경이 당시의 북경이 맞다면 역으로 따져야 겠지요.
물론 북경에서 동서남북 사방 어느지점에 영평부가 있고
이 지점에서 서쪽으로 3200리 저점에 장안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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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秦)의 30 만 대군이 축조한 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 관까지 라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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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유학자가 기록한 연행록에는 현재의 하북성 산해관=유관까지의 장성을 진나라 때 몽념이 쌓은 것이라 했고, 대륙학자들이 기록한 대륙의 역사서에는 현 섬서 서북방 황하주위라 했으며, 이곳에서는 태행 산맥을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나라 시황제 때 쌓기 시작해 시황제가 죽고 난 후에 중단된 대장군 <몽 념>이 쌓은 장성은 과연 어느 곳에 있었던 어떤 장성(長城)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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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겨냥하여 비난, 비방키 위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며, 경어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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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灤 水 = 灤 河 <요사지리지 남경도편 “灤 州”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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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 平 府。大 明、大 淸 兩《統 志》。俱 屬 直 隸。卽 冀 域。距 北 京 五 百 五 十 里。距 我 東 三 千 二 百 餘 里。此 以 漢 都 王 京 距 里 計。則 如 此。而 若 自「箕 子」所 都 平 壤 計 永 平。則 不 過 一 千 九 百 七 十 五 里 也。今 之 永 平。卽 古 幽、營 之 外 域。而 通 稱 朝 鮮。則 孤 竹 國 亦 在 提 封 之 內 矣。初 雖 封「箕 子」於 永 平。有 箕 子 城。「箕 子」避 周 之 所 封。來 居 今 平 壤。亦 非 理 外 也。高 句 麗 卽 統 朝 鮮 地。則 永 平 亦 入 其 幅 員。故「裴 矩」之 言 有 以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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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 평부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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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명(大明), 대청(大 淸) 양통지에 의하면, 모두 직례(直隷)에 속했다. 즉 기성(冀 城)이다. 북경(北京)에서 550 리 떨어져 있으며, 아(我)의 동쪽 3,200 여리 떨어져 있다. 이것은 한도(漢 都) 왕경(王京 : 장안을 말하는 것임)에서 떨어진 거리이다【이 글을 보면 理解키 어려운 구절이 있다. 위의 내용은 분명히 “遼나라 지리지이며, 남경도”편이다. 따라서 아(我)란 “나”를 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요(遼)”를 말해야 함에도 (我東 3,200여리) 다음 문장에 <이것은 漢 都 왕경거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장안”이 요나라의 도읍지였다는 말이 된다. 또 하나 현 북경은 장안에서 동쪽에 해당되지 않는다. 대륙의 역사서에는 동북(東北)지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하면 동북이면서 북쪽지방이래야 맞는 말이다. 참으로 理解키 어려운 구절이다? 】<기자>의 도읍지인 평양(平壤)計영평(永 平)이다. 불과 1,975리이다. 지금의 영 평(永 平)이다.  곧 옛 유주, 영주의 바깥 땅이다. 통칭 “조선(朝鮮)”이다. 고죽국 역시 이때 봉 받은 곳 내에 있다. 처음 기자가 봉 받은 영 평(永 平)이다. 이곳에 기자 성(箕 子 城)이 있다. 기자가 피해간 곳을 “주(周)”에서 봉하였다. 와 거한 곳이 지금의 “평양(平壤)”이다. 고구려(高句麗)는 곧 큰 줄기의 “조선(朝鮮)땅”이다. 영 평 곧 그 넓이와 길이이다. 옛 배구(당나라 대신)가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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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 句 麗 卽 統 朝 鮮 地 : 高句麗(고구려)는 큰 줄기의 “朝 鮮 地(조선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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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括 地 志》所 云。孤 竹 古 城 在 盧 龍 縣 南 十 二 里。今 永 平 地 方 十 八 里 堡。卽 古 盧 龍 塞 也。永 平 府 卽 漢 之 右 北 平。「夷」、「齊」廟 在 永 平 府。至 灤 河 口 渡 灤 河 橋。橋 百 餘 間。北 涯 有 山 阜。依 阜 築 城。乃 孤 竹 舊 墟。從 城 門 入。有 牌 樓。曰 淸 節 祠。元「世 祖」時。名 淸 聖 祠。皇 明 時 改 今 名。牌 樓 傍 牆。左 書 淸 風。右 書 百 代。左 碑 曰 忠 臣 孝 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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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괄 지 지(括 地 志)>에 따르는바, 고죽의 옛 성은 <노 龍 현> 남 20 리에 있다. 지금의 영 평 지방 18 리에 있는 보(堡:작은 성)이다. 즉 옛 <盧 龍 塞노룡새>이다. <영 평부>는 곧 한(漢)나라의 <우 북 평(서쪽의 북 평)>이다. 백이, 숙제의 묘가 <영 평 부>에 있다. 난 하(灤 河) 입구에 이르러 <란 하 교>를 건너는데 다리는 “백 여간(間)” 이다. 북쪽 물가 끝에는 산언덕(阜)이 있는데, 이 산 언덕에 의지해 성(城)을 쌓았다. 이것이 “고죽”성의 옛 터이다. 성을 따라 문안으로 들어가면 패루(牌樓 : 간판이 달린 루)가 있는데 “청절 사”이다. 원(元)나라의 세조(世祖)때 “청성 사”라 이름 했는데 황명(皇 明)때 이름을 고쳤다. 담장 곁<牆(담 장) 傍(곁 방)>의 패루(牌樓) 좌(東)측에 있는 서(書: 글씨)는 “청풍”이고, 우(西)측의 서(書 : 글씨)는 백대(百代)이다. 좌측의 돌 비석에는 이르되 “충신효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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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 하 (灤 河)와  란 주 (灤 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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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灤 河(란 하) : 란 주 (灤 州)는 란 하(灤 河) 유역이다. <요사(遼 史) 지리지 남경도>편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남경도>에 관한 지리지 내역을 이곳에 모두 설명할 수 없으므로 중요한 곳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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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灤 州 ,永 安 軍 ,中 刺 史。本 古 黃 洛 城。灤 河 環 繞 ,在 盧 龍 山 南。齊 桓 公 伐 山 戎 ,見 山 神 俞 鬼 ,即 此。秦 為 右 北 平。漢 為 石 城 縣 ,後 名 海 陽 縣 ,漢 水 為 公 孫 度 所 有。晉 以 後 屈 遼 西。石 晉 割 地 ,在 平 川 之 境。太 祖 以 俘 戶 置。灤 州 負 山 帶 河 ,為 朔 漢 形 勝 之 地。有 扶 蘇 泉 ,甚 甘 美 ,秦 太 子 扶 蘇 北 築 長 城 嘗 駐 此; 臨 榆 山 ,峰 巒 崛 起 ,高 千 餘 仞 ,下 臨 渝 河。【灤 州 (란 주) = 灤 : 새어 흐를 란 , 요서(遼西)지방 물 이름 란. 繞 ; 두를 요. 둘러싸다. 두르다. 兪: 그러할 유. 峰 : 봉우리 봉. 巒 : 산봉우리 만. 崛 : 우뚝 솟을 굴. 仞 : 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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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灤 州 (란 주), 영안 군, 중 자사-------≫ 본시 옛 황락성이다. 란 하(灤 河)가 띠를 두를 형상이다.  노 룡 (盧 龍)산 남쪽에 있으며, 제의 환공이 산융을 벌할 때 “유괴”신을 본 곧 이곳이다. 진(秦)나라의 “우 북 평”이며, 한(漢)나라의 “석성 현(石 城 縣)”이며, 후에 이름이 “해양(海 陽)현”이다. 한수(漢水)를 공손도“(公 孫 度)”가 소유했었으며, 진(晉)이 후에 굴복시킨 요서(遼西)이다. 석진(石 晉)이 이곳을 나누어 평 천(平 川)지경이며, 요(遼) 태조가 항복한 민호들을 모아 설치했다. 란 주(灤 州)는 뒤에 산을 지고 있는 형국이며, 앞에는 하천이 띠를 두를듯하며 이곳은 한(漢)나라의 형승지지(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며, 이곳에 부소 천(扶 蘇 泉 : 진시황제의 장남으로 황태자의 이름을 한 우물)이 있으며, 이 우물 맛은 감미롭다. 진시황제의 황태자 “부소(扶 蘇)”가 북쪽의 변경지방에 장성(長城)축조하는 일에 감독관으로 나와 상주한 곳으로 ; 림 유 산(臨 榆 山)의 봉우리 뫼는 우뚝 우뚝 솟아 날아오를 듯 높이가 천여인(仞)에 달하며, 그 아래에 “림 유하(臨 渝 河)”가 있다(渝 河가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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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기록은 “수 경 주” 하수편의 장성 축조기록과 림 조에서 갈 석까지 에서의 기록과 같은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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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臨 楡 縣 : 漢陽樂海陽二縣之地.隋盧龍縣地.遼置遷民縣.明置山海衛.淸臨渝縣屬直隷永平府 ; 림 유 현 ; 한 나라 때의 양락, 해양 2현의 땅이다. 수나라 때의 盧룡현의 땅이며, 遼나라에서 “천민 현”을 설치했으며, 명나라에서 “산해 위”를 설치하였고, 청(淸)나라 때 “림 유 현”은 직례 “영 평 부”에 속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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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臨 渝 縣 : 漢置,亦作臨楡.後漢因之.在今遼寧瀋陽縣西境. : 림 유 현 : 한(漢)나라 때 설치했는데, 또 림 유(臨 楡)하 했고, 후한(後漢)이 일어난 곳이며, 지금의 遼녕 심양 현 서쪽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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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灤(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물이)새서 흐를 란. 遼西 水 名(요서지역의 물 이름 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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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대륙 사의 기록에 따라 “조선”의 강역을 찾아보면 明나라의 <산해 위 곧 산해 관>의 위치는 양관 즉 옥문관지역이며, 포창해(염 택 : 3백여 리에 달했다고 한다)동북방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럴 때는 어느 하천을 기준하여 요동, 요서라 했는가 하는 문제와 어느 하천이 요하(遼河)였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청해”를 흐르는 황하를 기준하여 그 북방을 “하 북 지대”라 했다는 자치통감 후한(後漢)편의 기록으로 대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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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에는 사기(史記)에 있는 진시황 본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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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진 본기 시황제 본기>를 보면 ;【 <地 東 至 海 暨 朝 鮮 ,西 至 臨 洮 、 羌 中 ,南 至 北 嚮 戶 ,北 據 河 為 塞 , 並 陰 山 至 遼 東> : <본문> ; 그 땅은(6국통일 후) 동쪽으로 海(바다?) 및 조선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臨조, 강중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北향호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황하의 성채에 의지하였고, 함께 음산에서 요동에 이르렀다. 】(曁 :및 기, 및, 함께, 미치다, 다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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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➊ 括 地 志 云: 「 臨 洮 郡 即 今 洮 州 , 亦 古 西 羌 之 地 , 在 京 西 千 五 百 五十 一 里 羌 中 。 從 臨 洮 西 南 芳 州 扶 松 府 以 西 , 並 古 諸 羌 地 也 。: 임조군은 곧 조주이다. 또 옛 서강(西 羌)의 땅이다. 경사(서울)로부터 1,510리 강중(羌 中)에 있다. 임조 서남으로 가면 방주의 부송부의 서쪽이며, 이곳 역시 옛 여러 강(羌)들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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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集 解 地 理 志 西 河 有 陰 山 縣 。謂 靈 、 夏 、 勝 等 州 之 北 黃 河 。 陰 山 在 朔 州 北 塞 外 。 從 河 傍 陰 山 , 東 至 遼 東 ,築 長 城 為 北 界 (曁 :및 기, 및, 함께, 미치다) : 집해지리지에 따르면, 서하(西河)에 음산(陰山)현이 있다. 령 주, 하주, 승 주 등 주(州)의 북쪽에 황하가 있는 곳이다. 음산(陰山)은 삭주의 북쪽 새외지방에 있다. 황하를 따라 음산(陰山)이 곁에 붙어 있는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며, 북쪽 경계에 장성을 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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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본인은 위의 본문내용을 가지고 따져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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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❶ 동쪽으로 바다 및 조선에 이른다는 말은 바다 건너 반도 땅에 조선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海(해)가 현대의 의미인 “바다”인지 아니면 大河(대 하천) 또는 湖水(호수)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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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북쪽으로는 황하의 성채에 의지하였고, 함께 음산에서 요동에 이르렀다>는 말은 당시 함양에서 볼 때 河북성 동쪽지방을 북쪽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반도에 조선이 있었다고 했을 때 방향으로 보면 동쪽방향이 옳은 말이다. 위의 내용은 진나라에서 볼 때 북쪽지방에 음산과 천여 里 떨어져 있던 “遼 東(요동)”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북쪽에는 陰山(음산)에서 遼 東(요동)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요동(遼東)이란 말은 음산(陰山)과 연결된 장성(長城)의 요동(遼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황하)를 벗어날 수 없고, 때문에 산서 성 지방으로 연결될 수가 없다. ▶만약 이때의 장성(長城)이 하(황하)를 벗어나 동쪽지방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면  이건 창작소설(지적소유권이 보장된)이지 인간의 역사이야기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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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해지리지에서 이르기를 ; <음산은 삭주 북 새외지역에 있고, 하(황하)의 곁에 음산이 따라 있고, 동쪽으로 요동에 이르며, 장성을 축조한 것은 북계(북쪽의 땅)이다.>라 했으므로 그 북쪽은 바로 河를 따라 축조된 장성지역이며, 그 종점이 遼 東이란 말이며, 산서 성이나 河북성이나 그 동쪽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몽고를 흐르는 황하 북방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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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임)臨조 역시 요동에 속했다(또는 요동은 임조에 속했다)>라는 기록이며, 대한민국의 여러분들은 어찌 이런 중요한 핵심부분을 슬그머니 빼먹고 번역하고, 해석하여 역사해설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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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본인은 여러분에게 문제제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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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나 이곳 토론방이나 모두 다 조선(朝鮮)의 역사를 또 다시 왜곡(歪曲)하고 있다고 본인은 말한다. 근대조선 시대의 조정의 대신들이 경사(京師 또는 경조京兆)를 가는 기록에 진(秦)나라의 시황제 명령으로 <몽 념>과 그 휘하 장병들이 축조했다는 장성을 지난다는 수많은 연행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산해 관(山海 關=유관)주위를 지나면서 옛 진(秦 : 秦韓=辰韓)나라의 시황제와 그리고 그의 태자였던 “부소”와 진(秦)나라의 충신이었던 “蒙 氏(몽 씨)” 가문의 마지막 대장군이었던 “몽 념(蒙 恬)”을 회상하는 여러 기록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대신(大臣)들의 연행기록에 존재하고 있는 실정에서 그곳이 <현 하북성 산해관> 주위라고 주장하고, 해설하고, 설명한다면 도대체 옛 역사서(원전이나 원문)는 언제, 어떻게 삶아 먹으려고 아껴두고 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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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연행록을 보자.(많은 기록이 있으나 일부를 예로 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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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燕 轅 直 指(연 원 직 지) 출강 록(出 疆 錄) / 1832, 순조 32) / 산해관기(山 海 關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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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왕 대(吳 王 臺)에서 서쪽으로 3 리를 가면 산해 관에 이른다. 관은 곧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몽 염(蒙 恬)이 성을 쌓을 적에 유관(楡 關)에서 그쳤다 하고, 왕 응인(王 應 獜)의 《지리통석(地理通釋)》에서 ‘연(燕)의 유관’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중략). 열하일기에 ; 아! 몽 염(蒙 恬)이 장성을 쌓아 호(胡)를 방어하였는데 실상 진(秦)을 망친 호는 소장(蕭 墻)에서 양육하였으며, 중산 왕이 이 산해 관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하였는데 오삼계가 관문을 열고 적병을 맞이하여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천하가 무사할 적에 한갓 상려(商旅)들만 조사하여 세금을 받으니, 내가 관에 대하여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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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계기정(燕 薊 紀 程) ○ 무자년 (1828, 순조 28)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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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楡 關)은 곧 진 나라 장수 몽 염(蒙 恬)이 느릅나무를 심어 울타리로 삼은 곳으로 주민들이 매우 번성하고 부유하다. 시중에 벤 나무들이 많은데 나무들은 모두 아름드리로서 집의 대들보와 수레 만드는 재목인데 저자에서 나온다. 객점들이 굉장히 크며, 붉은 흙을 바르고 유리를 끼웠다. 세 사신 일행이 모두 400여 명, 말이 모두 300여 필, 태평거가 60여 대로, 수레는 각각 두 마리의 노새가 멍에 메고 있다. 또 중국의 상인으로 수레를 탄 사람이 무수한데 그들이 모두 한 객점에 들어가고도 여유가 있다. 그 객점 안의 심부름꾼 아이나 장정들이 응접을 거침없이 한다. 노새와 말의 고삐를 풀고 넓은 뜰에 흩어놓고 먹이를 먹이는데, 큰 돌구유[石槽]가 3, 40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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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몽 경 당 일사(夢 經 堂 日 史) 오 화 연 필(五 花 沿 筆) / 년(1855, 철종 6) 11월 /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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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해관 청국 말로 札객관(札 喀 關)이며 한어로 변관(邊關)이다. 은 즉 옛날의 유관(楡 關)인데 서 중산(徐 中 山)이 북 평(北 平)을 진수(鎭 戍)했을 때에 여기에 옮겨 설치하였으며, 五화관(五 花 關)이라고도 한다. 동서에 나성(邏 城)이 있어서 관문의 나성과 연해서 다섯 곳이 둘러 있으므로 五화성이라 한다. 당 태종 때부터 거란족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미 이런 이름이 있었다. 몽 염(蒙 恬)이 쌓은 것을 노 변장(老 邊 墻)이라 하고, “서 중산”이 쌓은 것을 신 변장(新 邊 墻)이라 한다. 동가구(董 家口)에서부터 쌓아서 징 해루(澄 海 樓)까지 온 것이 즉 지금의 관성인데, 성첩이 튼튼하고 초루(譙樓)가 굉장히 크다. 바깥 편액을 山 海 關이라 하여 제1문 홍예(虹 蜺)ㆍ석 미(石 楣)에 새겼다. 혹은 이사(李 斯)의 글씨라고 하는데 요동 벌 밖에서도 액자(額字)를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은 모두 허황한 소리여서 믿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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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연행록 기록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조선사를 왜곡하는 실상에 대해”이야기를 계속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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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연행록은 근대조선의 철종과 순조대왕시절의 기록으로 약 200년도 안된 기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분명히도 “연행사신”들은 산해 관을 유관이라 했으며, 이곳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진시황제 때의 “몽 념”이 축조(築造)한 것이라고 애써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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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해 관 즉 유관>은 섬서 성 서북방지역(내몽고 황하 주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인은 수차례에 걸쳐 주장했다. 그 근거가 증거나 고증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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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침구하는 북호(北胡)들을 방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으라는 명령을 내린 <진시황>이나 그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태자 부소>나 장성을 축조하는 총 책임자였던 <대장군 “몽 념”>이나 이들 모두는 죽었다. 진시황은 병으로 죽었고, 태자 부소는 자결하고 장군 몽 념 은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 모두의 죽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에는 장성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하를 따라 축조하다가 내몽고 음산(陰山)의 북쪽 양산(陽山 :황하 북쪽) 쪽을 향해 쌓아가던 만리장성이 중단되었으며, 그 만리장성의 유허 지는 양산 북쪽으로 향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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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몽 념”이 쌓던 만리장성의 종점(終點)은 중원(中原)의 북방 내몽고 황하(黃 河) 북방의 양산(陽山) 북쪽 외몽고 접경지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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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연행기록과 접목을 시켜보자. 어떻게 <산해 관 즉 유관>이 현 하북성 남쪽 해안가에 있을 수 있을까를? 이것은 조선의 역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이곳 카페의 주장 역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의 주장을 무시한다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한다면 이러한 글을 쓸 이유가 없다. 또한 이곳 카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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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행록의 기록을 재구성해보면 당시의 북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통전과 사기 본기와 사기 열전과 한서 본기와 진서(晉 書)의 해당되는 곳을 참고로 설명한 것이다. 본인은 여러분들에게 강한 메 세 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왜곡되고 조작되어진 “조선의 역사 해설서”에서 벗어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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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느 역사서를 막론하고 옛 식민사관의 틀에서 벗어나 진정 새로운 조선사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나 그 시도가 있는가를..........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과 같이 다 고만고만한 처지에 누가 누굴 비난하고 욕할 수 있겠는가.  기존의 사관을 미련 없이 버리지 않고는 조선의 역사를 찾을 수 없다.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분, 이곳의 단골손님께서는 자신의 사관에 맞추려는 의도에서 옛 기록의 방향이나 지명의 위치조차 바꿔버리는 일을 스스럼없이, 망 서림 없이 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런 분들은 무엇 하려고 조선의 역사를 알려할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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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작금의 사회상을 보라. 인사청문회니 뭐니 하면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사회에서 정도를 걷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정직하게 세금내고, 편법을 쓰지 않고 땅을 사고 , 부동산 투기 같은 일확천금은 노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의료보험료 내고, 소득세 내고, 연금 내고, 주민세 내고........뭐 이러한 것들을 정직하게 이행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 아니면 출세를 못하는 것일까, 매번 나오는 자들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니 그 토양에서 뭐가 바뀔까...........정말 답답하다. 사회적인 큰 사건이 터져도 책임지는 자는 없다. 정책 실패를 하여 수십억, 수백억 원의 국고를 손실했어도 의자에 앉아 있는 분은 똑같다. 법치주의는 뭔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똑같은 잣대로 법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닌가.【대한민국 사회에서 <저 분은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야> 하는 칭찬은 <저 분은 바보 같은 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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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십 년전 만 하더라도 누님이나 누이동생이 맞선을 보고 오면 아버님이나 어머님, 또는 조부나 조모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무개야 그 사람의 부모는 법 없이도 살아갈 분들이다. 아무 걱정 말아라>........ 이 말은 이분들이 착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네가 그 집의 맞선을 본 청년에게 출가를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요즈음은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 같으니 안 되겠다.”합니다. 이 말은 착하고 순진해 남을 밟고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으니, 남에게 이용만 당할 것 같으니 시집을 가봐야 고생문이 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웃기는 세상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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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불평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또 이야기를 계속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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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 “通 典 卷 第 一 百 九 十 五 / 邊 防 十 一 . 匈 奴 下”편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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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單 于 驩 喜, 上 書 願 保 塞 上 谷 以 西 至 燉 煌, (中略). 臣 聞 北 邊 塞 至 遼  東 ,外 有 陰 山, 東 西 千 餘 里, 草 木 茂 盛, 多 禽 獸, 本 冒 頓 單 于 依 阻 其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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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가 한(漢)에게 자청해서 상곡으로부터 돈 황에 이르는 새(塞)를 보존하겠다고 하였다. (중략). <응>이 이르기를 <주나라 및 진나라 이래 흉노가 난폭하여 변경을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고, 한(漢)이 흥 하면서 그 해는 더욱 심하였다. 신(臣 : 즉 응)이 견문키로 ➡➡➡“북변의 새에서 요동에 이르기 까지, 밖에 음산이 있으며 ➡➡➡ 동서 천 여리이다.” 이곳은 초목(나무와 풀)이 무성한 곳이며, 많은 날 짐승들이 있다.》라고 하여 ▶<음산에서 요동까지 천여 里>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위에서 말하는 시황제의 명으로 장성(長城)을 축조한 지역이며, 이곳의 장성은 河(황하)에 의지한 장성 즉 “河 爲 塞(하 위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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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본기 시황본기로 돌아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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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曰 「 亡 秦 者 胡 也 」 。始 皇 乃 使 將 軍 蒙 恬 發 兵 三 十 萬 人 北 擊 胡 , 略 取 河 南 地 >------≫ 正 義 今 靈 、 夏 、 勝 等 州 , 秦 略 取 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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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秦(진)록도 서에서 연유된 “秦(진)을 망하게 할 자 호(胡:오랑캐)이다.”에 시황제는 장군 “蒙 恬(몽 념)”에게 명하여 30만 병사를 발병하여 북쪽의 호(胡)를 쳐 하남(황하의 남안지방 :하남지방)의 땅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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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잠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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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➊ 한서 무제기를 보면 : 【夏 , 朝 鮮 斬 其 王 右 渠 降 , 以 其 地 為 樂 浪 、臨 屯 、 玄 菟 、 真 番 郡  : 한 무제가 조선을 정벌, 왕 우거를 참하고, 그 땅에 낙랑, 림 둔, 현토, 진번 등 4 군을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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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수백 년이 흐른 뒤  “진서(晉 書 / 卷 一 百 一) / 재기(載 記)”【然 則 燕 築 造 陽 之 郊 , 秦 塹 臨 洮 之 險 , 登 天 山 , 絕 地 脈 , 苞 玄 菟 , 款 黃 河 , 所 以 防 夷 狄 之 亂 中 華 , 其 備 豫 如 此 : 그리하여 연나라에서는 <조양>의 밖까지 성을 축조 했고, 진(秦)나라에서는 <림 조>의 험한 지형에(이용하여) 구덩이를 파고(해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랐으며, 땅의 연결됨을(잇달음을) 끊고, ▶▶▶“현토(玄 菟)”를 감싸고 있는 황하의 성채이다(河 爲 塞). 이러한 것은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고, 미리 대비하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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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사의 기록을 보면 ; 즉 진 시황제 시 축조된 장성(長城)주위에 소위 반도사관에서 말하는 한사군(漢四郡)이라는 조선사의 “고구려사군(낙랑. 임둔. 현토. 진번)”의 하나인 “현토(玄 菟)”가 황하가 흐르는 지역 즉 당시 시황제의 명으로 몽 염이 쌓은 장성 주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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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史記) 열전 몽 념(蒙 恬)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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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始 皇 二 十 六 年 , 蒙 恬 因 家 世 得 為 秦 將 , 攻 齊 , 大破 之 , 拜 為 內 史 。 ▶秦 已 并 天 下 , 乃 使 蒙 恬 將 三 十 萬 眾 北 逐 戎 狄 , 收 河 南. (正 義 謂 靈 、 勝 等 州)  築 長 城 , 因 地 形 , 用 制 險 塞 ,起 臨 洮(集 解 徐 廣 曰 : 屬 隴 西), 至 遼 東. 正 義 遼 東 郡 在 遼 水 東 , 始 皇 築 長 城 東 至 遼 水 , 西 南 至 海 ( 之 上 ),延 袤 萬 餘 里 。 於 是 渡 河, 據 陽 山,(集 解 徐 廣 曰 : 「 五 原 西 安 陽 縣 北 有 陰 山 。 陰 山 在 河 南 , 陽 山 在 河 北)  逶 蛇 而 北 。◀ 暴 師 於 外 十 餘 年 , 居 上 郡。 是 時 蒙 恬 威 振 匈 奴 。 始 皇 甚 尊 寵 蒙 氏 , 信 任 賢 之 。 而 親 近 蒙 毅 , 位 至 上 卿 , 出 則 參 乘 , 入 則 御 前 。 恬 任 外 事 而 毅 常 為 內 謀 , 名 為 忠 信 , 故 雖 諸 將 相 莫 敢 與 之 爭 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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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 이미 秦의 천하가 되었다. 이에 파견사 “蒙 恬”장군은 30만 무리로 북쪽의 “융적”을 뒤 쫒아 물리치고, 하남의 땅을 거둬들였다. 長城을 축조하는데 지형을 이용하여 수비하기에 용이하도록 험한 곳에 성채를 만들어 “臨조로부터 요동에 이르렀는데, 연맥(동서남북 꾸불꾸불하게) 만여 里이다. 이때에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뱀처럼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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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의 글에서 보다시피 이때의 장성은 臨조로부터 이어져 꾸불꾸불 황하를 따라 축조되었으며(河를 의지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는데, 황하를 건너 양산에서 북쪽으로 장성이 이어졌다고 하였다. ❈ 이 기록 어디에 長城이 동쪽으로 뻗어 山서성 太행산맥이니 河북성 山해관의 碣(갈)석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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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2,030 - 2,050 년이 지난 근대조선 왕조(王朝)의 순조와 철종시대에 연경(燕京) 즉 당시의 경사(京師=경조京兆)로 사행 차 가던 조정(朝廷)의 대신들 모두가 <산해 관 즉 유관>을 보고 또 그 주위의 장성(長城)의 유적을 보면서 “진시황제와 부소와 몽 념 과 30만 대군을 회상하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또한 열하일기 내용에는 <몽 념과 그 휘하 장병들>이 장성을 쌓기 위해 산의 허리를 자른 곳을 보면서 “저렇게 지맥을 절단했으니 그 죄가 누구에게 미치겠는가?”탄식을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때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대신(大臣)들은 이러한 유적지를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붓으로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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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말이다. 대륙의 역사학자나 대륙 왕조의 대신들은 말하기를 이 장성(長城)은 현 하북성 지방이 아니라 수천里 서쪽지방의 황하 북방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장성(長城)을 축조한 당사자들의 열전 내용 역시 이러한 장성(長城) 축조 장소는 황하가 흐르는 곳에 있었으며, 황하를 의지해 성채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장성(長城)은 하(河 = 黃 河)를 따라 축조하다가 황하의 북쪽 양산(陽山)의 북쪽으로 향하였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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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면 조선왕조의 대신들은 어떻게 존재하지 않은 진나라의 장성(長城)을 현 하북성 지방에서 보았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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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결과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누가 거짓 기록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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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대륙의 학자나 대신들, 그리고 근대조선왕조의 대신들 모두는 거짓 기록을 남길 리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현대의 반도 대한민국 백성들인 우리가 역사서 기록에도 없는 엉터리 해설서(한글로 된)를 읽고, 외우고 하는 세뇌성 교육의 탓으로 이러한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즉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땅에 <근대조선> 왕조의 서울(황성=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조작된 해설서만을 외우고, 또 외운 우리들은 그것의 진위여부와는 관계없이 잘못 해설(해석)된 해설서를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논하려니 궤변을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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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서(두우의 통전)에는 “신이 볼 때 북변의 요새로부터 요동에 이르기 까지, 밖의 陰山(음산) 있고, 동서 일천 여리 이다. <臣 聞 北 邊 塞 至 遼  東 ,外 有 陰 山 ,東 西 千 餘 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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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열전 “조고”편을 보면 ; <起 臨 洮 屬 之 遼 東 , 城 塹 萬 餘 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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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長 城 이)시작된 “림 조”는 遼 東(요동)에 속하였다.( 이 말은 요동이 (임)臨조에 속하였다고 해도 똑같은 상황이다)> 라고 하여 “림 조와 요동”은 모두 “河 爲 塞(황하의 성채 또는 진지)”이며, 성 참(城 塹)은 만여 리라 하였다. 이 만여 리라는 것을 가지고 떠드는 자들은 역사서 원전을 보지 못하는 자이다. 장성을 만드는데 그곳의 지형, 지리를 이용하다보니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져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또 서쪽으로, 남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꾸불꾸불 그것이 만 里처럼 길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 직도로 이천 里(2,000 리)라도 꾸불꾸불 동서남북으로 왔다 같다 이어진다면 오천 里, 육천 里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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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記 列傳 趙 高 편 : 【凡 臣 之 言 , 非 以 求 免 於 咎 也 , 將 以 諫 而 死 , 願 陛 下 為 萬 民 思 從 道 也 。 」 使 者 曰 : 「 臣 受 詔 行 法 於 將 軍 , 不 敢 以 將 軍 言 聞 於 上 也 。 」 ▶蒙 恬 喟 然 太 息 曰 : 「 我 何 罪 於 天 , 無 過 而 死 乎 ? 」 良 久 , 徐 曰 : 「 恬 罪 固 當 死 矣 。 ❈起 臨 洮 屬 之 遼 東 , 城 塹 萬 餘 里 , 此 其 中 不 能 無 絕 地 脈 哉 ? 此 乃 恬 之 罪 也 。 」 乃 吞 藥 自 殺】 (喟:한숨 위. 呑: 삼킬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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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 蒙 恬이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한숨을 쉬고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어떤 죄를 지어 무사하지 못하고 죽어야 되는가? 하니 파견사 “서氏”가 이르기를 “당신의 죄는 오로지 죽어야 할 죄이다. (장성이 시작된)일어난 臨조는 요동에 속했으며, 城참은 만여 里이다. 이것은 그 중에서 지맥을 절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당신의 죄이다.”하였다. 이에 “몽 염”은 독주를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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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열전 “이 사” 편 ; 【始 皇 有 二 十 餘 子 , 長 子 扶 蘇 以 數 直 諫 上 , 上 使 監 兵 上 郡 , 〔 二 〕 蒙 恬 為 將 。 少 子 胡 亥 愛 , 請 從 , 上 許 之 。餘 子 莫 從 。 〔 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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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正 義 上 郡 故 城 在 綏 州 上 縣 東 南 五 十 里 。
>〔 三 〕 集 解 辯 士 隱 姓 名 , 遺 秦 將 章 邯 書 曰 「 李 斯 為 秦 王 死 , 廢 十 七 兄 而 立 今 王 」 也 。 然 則 二 世 是 秦 始 皇 第 十 八 子 。 此 書 在 善 文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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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황제에게 이십 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 “扶 蘇”가 수차례에 직간을 하여 상군에 감군(監軍:감독관)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몽 恬(념)”이 장군이었다. 차자였던 “胡 亥”는 시황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시황제를 따랐고, 남은 아들 막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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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使 者 至 , 發 書 , 扶 蘇 泣 , 入 內 舍 , 欲 自 殺 。 蒙 恬 止 扶 蘇 曰 : 「 陛 下 居 外 , 未 立 太 子 , 使 臣 將 三 十 萬 眾 守 邊 , 公 子 為 監 , 此 天 下 重 任 也 。 今 一 使 者 來 , 即 自 殺 ,安 知 其 非 詐 ? 請 復 請 , 復 請 而 後 死 , 未 暮 也 。 」 使 者 數 趣 之 。 扶 蘇 為 人 仁 , 謂 蒙 恬 曰 : 「 父 而 賜 子 死 , 尚 安 復 請 ! 」 即 自 殺 。 蒙 恬 不 肯 死 , 使 者 即 以 屬 吏 , 繫 於 陽 周。 〔 一 〕】 (泣: 울 읍. 소리 내서 울지 않고. 繫: 맬 계. 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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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集 解 徐 廣 曰 : 屬 上 郡 。正 義 陽 周 , 寧 州 羅 川 縣 之 邑 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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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使 者 還 報 , 胡 亥 、 斯 、 高 大 喜 。 至 咸 陽 , 發 喪 ,太 子 立 為 二 世 皇 帝 。 以 趙 高 為 郎 中 令 , 常 侍 中 用 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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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파견사)가 도착하여 서신이 오자 “부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사(內舍)에 들어갔다. 자살(自殺)을 하려고 하였다. “몽 염”이 이를 막으며 “부소”에게 말하기를, 폐하(시 황제)는 밖에 있으며, 태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신(몽 염)은 30만의 무리들과 변경을 수비하고 있고, 공자(부소)는 감군(監軍:감독관)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무거운(중한) 임무입니다. (“부소”가 말하기를) 금일 사자(使者)가 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자결하라고) 하지 않겠는가? 몽 염이 또 청하고 청하였다. 그리고 또 청하였으나 이후 해가 지기 전에 죽었다. 사자(使者) 수 명(여러 명)은 (호해에게)달려갔다. 몽 염이 말하기를, “부소”는 자애로운(어진)사람이다. 蒙념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음을 내리다니,(중략), “몽 염”은 죽지 않았으나 사자(使者)와 관리들이 몽 염을 양주(陽 周: 녕 주의 나천 현이라 한다)에서 매달았다(斬했다. 독주를 마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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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기 기록을 보다시피 秦(진) 시황제 때 만들어진 장성(속칭 만리장성)은 현재의 <감 숙성 림 조>로부터 내몽고 양산(황하 북안에 있음)의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부소와 대장군 몽 염이 자결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장성축조는 황하를 따라 건설되었으며, 중원 북방의 황하 북안에 있는 양산의 북쪽까지이다. 더 이상의 장성축조는 없었다. 왜냐하면 시황제도 죽고, 태자 부소 및 몽 염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이 축조된 구간은 <감 숙성 림 조로부터 요동의 황하 북안(양산의 북쪽)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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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유학자들이 기록한 시문집에서 말하는 《 朝鮮의 龍灣(義州)에서 하늘이 시황제의 長城과 맞닿았다》는 말은 용만(의주)이 이곳 황하의 남안(南岸)에 있었다는 말이며, 반도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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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조하면 ; <부소>와 대장군 <몽 염>이 이민족들의 침략과 약탈에 장성을 축조한곳은 섬서 서북방지역의 내몽고자치구 황하(黃 河)의 남쪽과 북방지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사기 장성 축조기록을 보면, <몽 염>이 축조한 장성은 <임조로부터 갈 석까지>며, 이는 하남장성(河 南 長 城)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하남은 대륙의 하남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섬서 성 북방지대, 寧하성 지역, 甘숙북방지대의 河투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황하가 흐르는 남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秦(진)의 장성은 롱서, 북지, 상군지역에 축조했는데 이는 胡(호)들을 방비키 위해서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섬서 서북방 상군(上 郡)에 있는 당시 부소와 몽 염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에 아주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샘이 있었는데, 그 우물 이름이 “부 소 천”이라 하여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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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몽 염) 만리장성 축조에 대한 결론을 말하면-------▶ 당시의 장성 축조는 함양의 tj북방지역인 “임조로부터 요동까지”이며, 이 <임조는 요동에 속>했으며, 이곳은 현 감 숙성, 영화회족자치구, 섬서 북방 내몽고 황하주위를 벗어날 수 없다.  즉 황하의 남안과 북안지대, 황하의 동안과 서안지대를 벗어 날 수 없다. 이는 이때의 장성이 “하 위 새(河 爲 塞)”라는 것이 증명하며, 이는 또 당시에 “하남장성(河 南 長 城)”이라 했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위의 설명을 벗어나는 당시의 장성 축조 기록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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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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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 : 문  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