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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明史>의 자백,고려-조선초 난주灤州는 산해관인근아닌 영정하일대

monocrop 2009. 2. 14. 02:07

솟대 (2009-02-13 00:26:37, Hit : 298, Vote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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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史>의 자백,고려-조선초 난주灤州는 산해관인근아닌 영정하-북운하일대


그림 1. 19C전반의 여지도 직예성지도의 순천부일대 (량수하凉水河와 통주通州, 무청현武清縣, 노구교 표시)
[<명사明史>에 따르면 북경시 아래녁의 상기 지도의 3번과 4번의 수계일대에 난주<灤州>가 위치함]

위에 뜬금없이 올려드린 노구교<廬溝橋>관련 소개내용이 갑자기 왜 필요한가 의문을 가지신 분이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明史>내용의 노구교<廬溝橋> 범람과 홍수피해기록은 현재의 한중일 사학계의 고려 한반도설의 철옹성을 붕괴시키는 중요한 기록이며 그들이 미쳐 삭제하지 못한 <明史>에 살아남은 고려역사와 강역에 대한 이정표이자 증거이며 지금까지의 강단의 강역비정을 모조리 허구로 만들어 버릴 단초입니다.

노구교<廬溝橋>의 지리와 위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난주<灤州>는 현재의 진황도시秦皇島市와 당산시唐山市일대인 난하灤河(간자체:滦河)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최소한 고려시대까지도 그러한 것으로 대부분 추정하여 왔습니다.


아래는, 난주<灤州>에 대한 <明史>의 설명입니다.

◎ 신교본명사新校本明史/志/卷 40     志第十六  ' 地理 一 '

[풀이]
난주<灤州> 홍무洪武 2년 9월 주<州>의 치소를 의풍현<義豐縣>으로 살피어 들어갔다. 남쪽은 해<海>에 임박하고 동으로는 난하<灤河>가 있으며 다시 남으로 가면 개평중둔위<開平中屯衛>가 있다.
영락永樂 원년 2월, 사욕<沙峪>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기어 설치하였다. 동북으로 부<府>와의 거리는 40리이고 령<領>을 받는 현은 하나다.

[원문]
灤州  洪武二年九月以州治義豐縣省入。南濱海。東有灤河,又南有開平中屯衛,
永樂元年二月自沙峪移置於此。東北距府四十裡,領縣一:      //


하지만, 조선왕조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치세때까지도 명<明>나라의 난주<灤州>가 현 북경시 이남의 영정하와 북운하 일대에 위치하였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같은 명사<明史>내 <五行一水/水潦>편에 나와 있습니다.


● 신교본명사新校本明史/志/卷二十八     志第四  ' 五行一水/水潦 '

[풀이]

명明 인종仁宗 주고치朱高熾 홍희洪熙 원년(1425년) 6월, 갑자기 비가 내려 백하<白河>가 가득 넘쳐서 하천 서쪽의 무<務>, 백부<白浮>、송가<宋家> 등의 강어귀의 둑기슭<堤岸>에 부딪혀 제방이 무너져 범람하였다.
임장<臨漳>의 장漳、부滏의 두 하수의 둑기슭<堤岸> 24곳도 무너져 범람하였다.
진정<真定>의 호타하<滹沱河>도 크게 홍수가 일어나 3州 5縣의 밭<田>이 물에 잠기었다.
洪熙元年六月,驟雨,白河溢,沖決河西務、白浮、宋家等口堤岸。臨漳漳、滏二河決堤岸二十四。真定滹沱河大溢,沒三州五縣田。

홍희洪熙 원년(1425년) 7월, 용성<容城>의 백구하<白溝河>가 범람하여 벼농사한 것이 해를 입었다.
혼하<渾河>가 노구교<廬溝橋> 동쪽지역을 무너뜨려 낭와구<狼窩口>,순천<順天>、하간<河間>、보정<保定>、난주<灤州>가  함께 홍수를 당하였다.
七月,容城白溝河漲,傷禾稼。 渾河決廬溝橋東狼窩口,順天、河間、保定、灤州俱水。 //



위 기록의 마지막 문장은  혼하<渾河>, 즉 현재의 량수하<凉水河>가 범람한 기록입니다.
노구교<廬溝橋>가 영정하위의 제방사이에 놓여진 다리임은 앞의 노구교<廬溝橋>소개글에서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위 내용은 혼하<渾河,=량수하>가 홍수로 범람하여서 인접한 서쪽의 노구교<廬溝橋> 동쪽의 제방을 무너뜨려서 영정하와 범람한 혼하<渾河,=량수하>가 함께 섞이어  영정하(永定河)와 혼하의 하류지역인 낭와구<狼窩口>,순천<順天>、하간<河間>、보정<保定>、난주<灤州>가 함께 심한 홍수피해를 입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피해지역에 난주<灤州>가 들어가 있어 난주<灤州> 또한 영정하<永定河>와 혼하<渾河,=량수하凉水河>의 하류지역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림  2. 노구교盧溝橋 위치가 그려진 북경시일대 지도 [노구교는 북경시 서남 영정하일대에 표시한  파란 박스]


그림  3. 북경시일대 수계도상의 '혼하<渾河=량수하凉水河>'와  영정하


바로 난주<灤州>는  이 기록이 쓰여진 1425년에도 현재의 영정하<永定河>와 량수하<凉水河>의 하류지역에 위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림 3의 지도를 보면 북경시 서남쪽 풍태<豐台>란 지명 왼쪽옆에 노구교<盧溝橋(간자체: 卢沟桥)>라 영정하<永定河> 강흐름위에 표시한 것이 보이실 것입니다.
바로, 영정하<永定河> 오른쪽 옆으로는 혼하<渾河=량수하凉水河>의 무수한 상류지류들이 가까이 아래위로 산재하여서 홍수시에 범람해 평원지대를 덮치면 곧 영정하<永定河>로 넘쳐 흐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明 인종仁宗이 다스린 1425년은 이웃한 조선왕조에서는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이 재위하던 시절입니다.
명明 인종仁宗 주고치朱高熾는 1328年년에 태어나 1425年에 죽었으며 그 재위기간은 1424年~1425年로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측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최초로 난주<灤州>가 등장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털어서 난주<灤州>가 나오는 것은 인조 8년, 인조 22년, 정조 9년, 순조 21년의 4번 뿐입니다.
덧붙이면 승정원일기에 조선말엽인 고종 2년의 기록에 유일하게 난주<灤州>가 나옵니다.


너무 시기가 늦으니 난하<灤河>로 찾아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단 2개의 기록 밖에 없으며 하나는 세조 8년, 하나는 인조 22년의 기록입니다.
역시, 승정원일기의 난하<灤河>는 고종 5년의 기록에 하나 나옵니다.

빨라야, 세조때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위치로 추정할만한 조건을 보여주는 난하<灤河>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나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 임오(1462, 천순 6)    2월 11일(병자)   :  실록상의 난하<灤河>에 대한 명나라때 최초 기록

주문사 매우가 통사를 보내 변방의 정세에 대한 사목을 올리다

주문사(奏聞使) 매우(梅佑)가 통사(通事)를 보내어 사목(事目)을 가지고 먼저 와서 아뢰게 하기를,
“이달 25일에 영평부(永平府) 난하역(灤河驛)에 이르니, 서반(序班) 왕충(王忠)이 해서 달자(海西達子) 칙독로온(勅督魯溫)·대가합(大加哈)·창안노(昌安奴) 등을 호송(護送)한 다음 이 역(驛)에서 되돌아 갔는데, 신 등이 그 적의 성식(聲息)을 묻자, 왕충이 대답하기를, ‘달자(達子)를 호송(護送)하여 개원(開原)에 이르렀더니, 그 관하(管下)의 달자(達子) 1천여 인이 와서 맞이하였는데, 서로 이르기를 「지난번에 건주 도독 지휘(建州都督指揮) 조삼파(趙三波) 등이 조선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여 사로잡아 갔으니, 저 사람들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라고 어찌 가서 침략하지 않겠는가? 지금 바야흐로 군마(軍馬)를 정비(整備)하는데, 눈이 녹고 풀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침략하겠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름지기 이 뜻을 가서 전하(殿下)께 아뢰어서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하십시요.’ 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로서, 문종대왕때나 빨라도 최소한 세종대왕때까지는 명나라의 난주<灤州>는 산해관일대가 아닌 영정하-북운하일대인 영정하<永定河>와 혼하<渾河,=량수하>의 하류지역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려왕조후기인 대원 울루스<元>때에도 역시 난주<灤州>는 영정하<永定河>와 량수하<凉水河>의 하류일대에 위치하였을 것입니다.


자, 이제 난주<灤州>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난하<灤河>는 어떤 강을 가리켜야 할까요?

원사<元史> 에서 하북성일대에서 중요하고 큰 강이면서도 이상하게 언급되지 않은 강일테지요.

'원사元史  지志 第十六' '하거河渠  一'편에서 언급된 하북의 수계는 아래와 같습니다.

>> 통혜하通惠河 / 패하 壩河 / 금수하金水河 / 륭복궁전하隆福宮前河 / 쌍탑하雙塔河 / 노구하盧溝河 / 혼하渾河 / 백하白河  / 어하御河 /  란하灤河 / 하간하河間河 / 치하冶河 / 호타하滹沱河 / 회통하會通河

심지어, 저 남쪽아래의 호타하滹沱까지 언급되었는데 영정하<永定河>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대원 울루스<元>때에는 영정하<永定河>란 강이 없어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난하<灤河>의 후보로서 가장 의심을 받아야 될 강은 바로 하북성에서 몇 안되는 혼하<渾河,=량수하>보다 훨씬 큰 하수임에도 불구하고  원사元史에서 빼어먹은  영정하<永定河>입니다.


원사元史는 영정하<永定河>에 관해 수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대의 강 이름인 난하<灤河>로 기록한 것뿐이라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참조> 19세기말의 하북성 수계도 :  "  http://www.coo2.net/bbs/data/con_4/39_66.jpg "



그림 4. 고려강역과 난주<灤州>의 위치를 밝힌 단초가 된 노구교盧溝橋(Lugou Bridge) 전경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Free Use, 상업용도사용금지, 사진제공자 : Vmenkov ]



그림 5. 하북성 전체수계 이해를 위한 하북성 수계도 [ 혼하<渾河,=량수하>는 빠져있으므로 혼하는 그림 3참조]



김성겸 (2009-02-13 11:15:49)  
위에 인용하신 명사의 기록과 조선의 기록 발굴은
소위 려말선초의 역사강역 비정에 기점을 삼을만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모조리 고구리 서도 인근의 저지대에서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솟대 선생님, 건승건필하세요!
솟대 (2009-02-13 22:56:52)  
네, 선생님도 건승건필하세요.
난주<灤州>와 난하<灤河>가 조선초엽까지도 북경이남의 혼하(량수하)와 영정하수계에 있으니 이와 관련된 모든 지명들 예를 들면 갈석산등은 모두 영정하이서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삼국시대지명을 거론하면서 갈석산을 현 난하 운운도 식민사학의 추종이 될 지경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