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역사관련 글들

조선 '대리청정'했던 왕들의 의문사

monocrop 2008. 5. 4. 09:37

조선 '대리청정'했던 왕들, 의문사 했다는데…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8.05.03 21:48 | 최종수정 2008.05.03 22:38


임금 재가받아 국정 주도했던 문종·경종 일찍 죽거나 의문사 정통성 시비속 당쟁 휘말린 광해군·사도세자 비참한 최후

조선은 군주제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군주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었다. 나이가 어릴 경우 대비들이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C%F6%B7%C5%C3%BB%C1%A4&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고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C%F6%BE%E7%B4%EB%B1%BA&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수양대군처럼 영의정이 되어 어린 조카 단종을 대신해서 사실상 통치를 한 것은 '섭정승(攝政丞)'이다. 반면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4%EB%B8%AE%C3%BB%C1%A4&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대리청정(代理聽政)은 말 그대로 임금의 재가를 받아 임금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수렴청정은 유군(幼君-어린 임금)이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친정(親政)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다지 파란이 일지 않았지만 대리청정의 경우는 달랐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나마 임금이 연로하거나 중병이 생겨 대리청정을 할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전쟁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아 임금이 국면전환의 한 방법으로 대리청정을 실시할 경우 세자는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앉았지만 세종의 초창기 4년은 견습왕에 불과했다. 군국기무(軍國機務)는 상왕이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세종은 세종 27년(1445년) 세자(훗날의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함으로써 제왕 수업을 시켰다. 세종 자신이 이때는 격무로 인해 각종 병환을 앓고 있었다. 세종을 모든 면에서 쏙 빼닮았던 문종은 대리청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했기에 마침내 세종의 뒤를 잇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검증된 세자'의 즉위였기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
문종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인물이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C%F7%C1%BE&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숙종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C0%E5%C8%F1%BA%F3&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장희빈 사이에서 난 경종이다. 그도 위태위태하긴 했지만 숙종 43년(1717년)부터 3년간 어렵사리 대리청정의 터널을 통과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4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반면에 임진왜란의 와중에 세자도 아니면서 대리청정을 해야 했던 광해군에게는 어쩌면 이미 비극이 예고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C%B1%C1%B6&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선조는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선위(禪位)파동을 통해 난국을 돌파해야 했다. 선조 자신이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라는 열악한 지위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 내지 정당성 콤플렉스에 시달린 데다가 전란의 책임까지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적 능력 면에서 분명 광해군은 '검증'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선조와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C0%CE%B8%F1%BF%D5%C8%C4&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인목왕후 사이에서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F%B5%C3%A2%B4%EB%B1%BA&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503214802692" target=new>영창대군이라는 '적통'이 탄생하는 바람에 광해군은 정통성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통성에서 밀린 현실의 군주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바람에 반정(反正)의 빌미를 제공해 권좌에서 내몰리고 말았다.

■■
가장 논란이 되는 대리청정은 영조 25년(1749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아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경우다. 15세의 어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강행한 것부터가 의문이다. 참고로 문종이 대리청정을 했을 때 나이가 32세, 경종은 24세, 광해군은 19세였다. 선조보다 정통성이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무수리의 아들' 영조는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어린 아들마저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높은 기대치로 아들을 몰아세운 영조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를 일삼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똘똘 뭉친 사도세자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빚어내다가 결국 1762년 사도세자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서 갇혀 죽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가 대리청정의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훗날 익종(翼宗)으로 추존되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순조 27년(1827년) 2월 순조는 자신이 병이 깊어 격무를 감당할 수 없다며 18세의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세자는 대리청정 초기부터 아버지 순조를 포위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도가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했고 순조도 이를 방관했다. 순조는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 외척 세도가들을 제거해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조정에도 뭔가 새로운 기운이 도는 듯했다. 그러나 대리청정 불과 3년 만에 효명세자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하고 말았다. 정통성과 능력이 뒷받침되는 권력교체는 그만큼 어려웠다. 운(運)도 물론 따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