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스크랩] 화타(秦)족, 고조선의 이주민이 세운 와다쯔미 신사

monocrop 2008. 9. 20. 01:28

화타(秦)족, 고조선의 이주민이 세운 와다쯔미 신사

 


            <와다쯔미 신사의 동영상/2008.5.7일 상대마도 仁位(니이)에 있는 고조선 유민 신사>

 

 

 대마도 페리여객선 안내도

가운데 빨간 색에서 나온 노란화살 쪽

부분이 "바다족(화타족) 들이 세운

와다쯔미 신사 가 있는 仁位(니이)지역-고구려 계통이 오래동안 분치한

 

위 지도에 보면 이즈하라항 윗쪽 시라다케산 옆 [계지] 란 지명이 보인다

조선 중기 이맥선생이 쓴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계지(게치)'는 백제가 분치한 지역이었다. 

 

상대마 박제상 순국비가 있는 땅이 佐護사호(사코)이다. 현재 지명이 남아있다.

좌호는 신라에 속하였다

 

 대마도는 한국인 땅이었다.

[환단고기] 에 자고로 구주,대마도는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삼한 분치 지역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3가라가 되었으며

좌호신라 속하고,

인위 가라는 고구려

계지 가라는 백제 속한다고

 

대마도 출신 문장가 강수도 자신이

임나(대마도) 출신이라 한 적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 편에

원래 임나는 대마도였다.

후일 광개토대왕(호태왕)이 수군 5만을

이끌고 임나(대마도),구주를 정벌하고

임나 10 국 연방으로 나눠

3국은 해변가에 7국은 내륙에 두어

호태왕의 영역안에 두었다.

 

결론적을 말해 임나(대마도),구주는 한민족의

영역에 있었다는 말이다.

 

환단고기 내용과 일치하는 임나 역사서

(임나신론/1995년 고려원 발행/김인배,김문배 공저)

구체적인 地名考가 나와있다.

 

위의 대마도 지도에 분명히

계지,

인위,

좌고

란 지명이 있다.

 

와다쯔미 신사는 仁位(니이)에 속해있는 신사였다.

고구려가 분치하던 땅에 있었다.  

 

36세 단군 매륵買勒 재위 58년

 

갑인 38년(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BC723년)언파불합 장군을 熊襲(웅습/습-옷 한벌 두벌 )(구마모토 벌(벌판/이두식표기/글돋 주) 웅습(지금의 일본 구주 구마모토 )에 보내 삼도를 평정하였다

 

언파불합의 아들이 협야후 배반명이다. 배반명의 동생이 협야노이다. 일대 신무 천황이 된다/BC660년이다)

 

 

*협야후 배반명: <일본서기>의 <니기하야히노미꼬도>를 배반명이라 하는데 진국과 부여의 조상에 해당된다. 뒤에 부여의 협보는 구마모또에 진출하여 다라국多羅國을 세우고 휴우가(日何)안라국安羅國 연합하여 사마대국邪馬臺國을 세운 인물이다. 단군 가륵조嘉勒朝의 그 후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바다로 도망쳐 해상에 웅거하여 삼도에 살면서 천왕을 참칭하다’한 대목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삼도: 여기 삼도는 당연히 오늘의 일본이다. 니기하야히 곧 배반명이 일본을 평정하였다는 이 기사는 한국족桓國族의 조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저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본 그림은 2차 대마도 역사 탐방 때 찍은 사진이다.

만조 시에 도리이(鳥居)가 물에 잠겨 있는 사진이다.

 

바다 신(해신)들이 이곳으로 들어온 상징적

도리이

이 번 3차 탐사 때는 썰물인 관계로 이런 사진을

못 찍었다(2005.1.24일 사진)

 

  천수만으로 들어와 내륙의 해변가에 신들이 들어왔다

화타족(秦)은 고조선 유민들이다.

 

'화타'란 한국어 '바다'에서 유래한다

이 '바다'(한자 波多,波陀 )를 일본식 독음

"하타"로 읽는다.

 

한반도의 도래인들이 가지고 왔던 베짜는, 직조술을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일본말 "하타오리(베틀로 베를 짜는 일)"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또 "오리(織리)라는 말도 한국어<실오리>

한 올, 두 올, 실의 단위인 "올,오리,오라기" 가 그 어원

 

 

 신사에는 도리이(鳥居)는 모두 5개가 있다, 바닷 속에 2개 바다와 육지가 접하는 곳1개

신사 입구에 오도리이(큰 鳥居)와 또 하나의 도리이 모두 5개이다.

 

육지가 접한 곳에 서있는 도리이는 태풍에 쓰러져서

平成(헤이세이/현재 일본왕 년호)16년에 세웠다

옆 석등 2기도 신축된 것

 

모두 灣만 쪽으로 보고 있다. 서쪽으로 서 있다.

일부 한국사람들 중 가야 수로왕 계통의 신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야쪽인 서쪽의 의미를 굉장히 부여하는 쪽이다.

 

하지만 이 신사의 유래(일본서기)는 신대기이다. 풍옥희(용왕의 딸)

년와는 가야 건국과는 600,~700년 년대 차이가 난다.

 

오히려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편에 의하면

단군 36대 매륵 (BC667) 갑인38년 협야후 배반명을 왜에 보내

일본열도를 친다. 배반명의 동생이 협야노이며바로 일대 천무천황(BC660)이다

 

                                 일본서기에는 豊玉姬(도요다마히메)에

                              의해 놓은 아들의 조카(협야존/사노노미코토)가

일대 천황 神武(덴무)천황이 된다.

 

일본 천황의 탄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신사이므로

비록 대마도란 작은 섬이지만

 

히로히토천황, 아키히토천황,왕세자들이 꼭

찾아오는 신사이다.

신사의 拜禮殿(사이례덴)엔 천황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만큼 천황가에서 이 신사가 바로

자기 계통의 신을 모시는 곳을 의미한다 

 

 가라파(河童의 전설이 남아 있는 일본 구주 八代야스시로 구마천

이 가라파(하동/ 마치 거북이 모양의 해양인들의 전설이다)

"가라파"라는 "가라" 한반도 인들이다.

화타족으로 "바다 족"이다.

 

꼭 "가야" 족 만이 아니다. 이 곳 해설은 중국 인으로 표현해 놓았다.

물론 지금의 중국에서 왔지만 고조선, 고구려(고마),신라,백제, 부여...포함된다.

 

일본 규슈에 20여년 전 북큐슈 이만리,가라쯔 지방 근처에서

波多(파다)란 지명을 너무 많이 보았다.

 

八番宮(하찌만구)신사가 규슈에 많았다. 주신이 應神왕이다.

부여계통이라는 설이 통설이다.

화타족의 신사이다. 즉 바다족(도래인들이다)이다.

 

야쓰시로시를 흐르는 구마천(球磨川) 센가와교

 바로 옆에 세워진 하동도래비(河童渡來碑)를 찾았다.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에는

 『지금으로부터 1천수백 년전 3천여명의 하동(河童)이

 이곳에 와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축제를 베풀었다.

 

 

 썰물에 도리이 전체를 드러내 놓은

전경

3년 전엔 만조 때라 썰물 때를 놓쳤다.

오히려 나로 선 좋은 기회를 잡았다

갈색 파래 해조류가 수로를 따라 자라고 있다

갯벌로 나가는 주민이 보였다

 5월의 땡볕이 갯벌을 태우고 있었다

파란 색의 바다 빛과 어우러진 풍경

근래에 세운 도리이의 속살이 너무 하얗다

 

도리이 위에 돌멩이들을 올려놓은 습관

한국인들의 탑 쌓는 불심의 흔적?

 

재주도 좋다. 깔린 자갈을 얹지는 기교~~~

밀물이 되면 바닷에 서

있는 또 하나의 도리이

히로시마 겐(廣島縣)

미야지마(宮島) 이쯔쿠시마(嚴島)신사

도리이

주홍과 푸른 바다와 만남

색채의 조화

신이 들어온 통로

강력한 세력들이

온 바닷길-지금은 신으로(고조선 유민 등 대륙인들의 이동)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마침 와타츠미 신사에 와서 생각났다.

 대마도의 토요타마�오(豊玉町)에 있는

와타츠미 신사 찾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단군 영정과 비슷한 사진을 모셔놓고

 

 항웅(恒雄-환웅과 비슷한 발음)이라 한다고 합니다.

단군신화에 관한 기사는 오히려 8세기 일본에서의 기록에서도 보이니

그 저자 또한 항웅(恒雄)이라 했다.

 

단군신앙은 오히려 고대의 일본열도에서 그 존재성이

 각 신사에서 부각된다는 것은 고조선 주민들의

대거 이주를 나타나게하는 대목입니다 

 

 신들이 들어오는 물-도리이 행렬

그 옆 다리 아래로

해신들이 들어게 수로를 �어

그 수로가 배례전과 본전 까지

이어져 있어

밀물 때는 배례전,본전 옆 수로 까지 물이 들어온다.

 

물론 龍蛇(용사)해신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놓은 배려

 

마치 문무대왕을 위해서 감은사지 밑 통로를 만든 신문왕의 배려

생각이 연결된다

 도리이 옆으로 난 수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도리이

특이 한 것은 삼각형 도리이가 하나로 세워져 있다

3 방향에서 각각 봐도 도리이이다.

밑에 안내판이 보인다. 아래 표지판에 적혀있는 것을 보니

도리이 가운데

바위균열이 용비늘 같은 바위이다.

용황의 장녀 풍옥희(도요다마히메)의 동생인 해신의 정체가 龍蛇였고 磯良惠比須(이소라에비스)자연상태이 비늘모양이 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이것은 원초의 身體(신체)로 여기며

신령의 장소로 제를 지내고 있다.

혹은 磯良(이소라)의 墓이라는 전설도 있다.

 

磯良惠比須(이소라에비스)바위가 마치 용 비늘 거북무늬 균열조각들 자연석으로 되어있다.

海龍의 신체의 일부라 생각하여 신사가 생기기 전엔

이 곳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다.

 

또 磯良(이소라)의 墓(무덤)이라는 전설도 내려 오고 있다.

밀물이면 神禮石(신례석)이 잠긴다.

 

 

 

  해신신사의 유래
天照大神(천조대신:아마데라스오오미까미)의 아들과

 高皇靈尊(고황영존:다까미우스비)의 딸이 결혼하여

天孫인 니니기노미꼬도 낳았다.

그 첫아들인 海幸産(해행산:우미노사찌)과

둘째 아들인 山幸産(산행산:야마노사찌)이 있었는데,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야마노사찌는 용궁에 들어가

해신의 딸 豊玉姬(도요타마 히메)와 결혼하여 3년을 보냈다.

 풍옥희는 해변에서 애기를 낳을 때 자기 모습을 보지말라고

당부하였는데 天孫인 산행언은 용이되어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豊玉姬의 모습은 원래가 용이었다. (一書에는 악어라고도 되어 있음)

 

 그리하여 豊玉姬는 "부끄러워 하여 남편과 아들을 놓아 두고 바다로 돌아갔다.

예전에는 와다즈미 라 불러왔다.

 

14세기 15세기 땐  對州神社誌에는 渡海宮이라고 되어있다.

 

중세에서 근세초기에 걸쳐서는(14세기 15세기의 기록에 渡海宮으로 되어 있다.)

 

 渡海라고 쓰고 와다쯔미라고 불렀다.

 

渡(와타)都(쯔/의에 해당하는 일본어)海(우미)=

와타쯔우미(우미는 앞에 복합된 글자가 첨부되면 "미"로 바뀌는 경향이있다

 

와타쯔미(글돋선생 주)

 

18세기초부터 和多都美신사라고 다시 쓰여진 것 같다.

 

위의 내용으로 봐서 "바다 건너온 사람들의 신사"이다 

 

 이 신사의 제신은 海神豊玉姬曖과 그 아들이다.

 

이 인위에는 해신의 전설이 많다. 

 안내판을 알아볼까? (짧은 일본어 실력이지만 ..)

 

이소라헤비수

 

(바위)등 부분에 비늘상의 거북무늬 균열이 보여진다.

이 암석은 지금도 신성한

영적 장소로 여겨제사지낸다.

이 것을  '이소라'의 墓(묘)이라는 전설이 있어

신사의 건물이 세워져 신을 모시기 전의 옛날 제사 지낸

영의 제단(靈座) 자리나

그렇지 않으면 神禮石(신의 예를 다한 돌)은

아닐까 생각한다( 글돋선생의 해석)

 

 

 

 

  

아래 글은 북규슈지방의 단군,환웅 신앙을 엿 볼 수 있는 글을 싣는다

북규슈는 대마도주(이후 번주) 宗氏(소오 씨)도

화타족(바다족)이다. 북규슈에 정착하다

대마도로 와서 백제계통 원주 阿比留(아히루)족과

일전을 벌려서 宗氏의 승리로 도주로 자리 잡는다.

백제계,아히루족, 고구려계,신라계

신들이 대마도에 모두 바다신사에 만난다.

해신신사인 와다쯔미 신사 

 

和多都美

 

 

    단군신앙의 또 다른 메카로는 히코산신궁(英彦山神宮)이 있다.

이 신사는 북규슈지방 후쿠오카(福岡)현과 오이타(大分)현 경계에 위치한

히코산(12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신궁에 모셔진 제신이 바로 우리 건국시조인 단군과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다.

 또 히코산신궁 봉폐전 남쪽에 위치한 다마야신사,

 일명 수험굴(修驗窟)에는 어깨를 덮을 만큼 긴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도복을 차려입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환웅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환웅의 수험도(일명 天驗道)임을 알 수 있어

한국방 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한편 히코산 정상의 삼봉(三峯;북악, 중악, 남악) 중에서 가운데에 있는

 중악의 정상에는 한반도를 향해 북향으로 안치해놓은 상궁(上宮)이 있는데,

일본 초대천황인 진무가 동정을 할 때 제사지냈다는

 전설에 따라 서기 74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히코산신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벳푸대 나카노반노(中野幡能)교수는

『이 신앙은 분명히 한국의 단군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 삼악의 신령들은 한국의 백두산 신, 즉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삼신』이라고 주장해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도 있다. 이 환웅의 수험도가 전성기 때인

6세기에는 수도하는 수험도사(修驗道士)가 무려

 규슈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0여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신앙에 대한 숭앙심과 우리 민족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늘날에도 이 지방 주민들은 수험도를 신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마늘을 간장에 절인 마늘장아찌를 먹거나 선물로 주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환웅이 마늘을 먹고 21일간 수도한 끝에

 사람으로 인정받은 웅녀(熊女)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아남회장 김향수 글 중)

 

북규슈는 대마도주(이후 번주) 宗氏(소오 씨)도

화타족(바다족)이다. 북규슈에 정착하다

대마도로 와서 백제계통 원주 阿比留(아히루)족과

일전을 벌려서 宗氏의 승리로 도주로 자리 잡는다.

백제계,아히루족, 고구려계,신라계

신들이 대마도에 모두 바다신사에 만난다.

해신신사인 와다쯔미 신사 

 

和多都美

 

이 글이 한민족의 이두식표기라고 생각해 보면

일본식 "와다쯔미" 독음은 의미가 없다

 

향찰식 표기로 읽어보자

和多(화다)는 "바다"가 변한 것

都(훈독/모도(고어)/모두)=모두

美(맛나/食享也)=맛나(훈차)

 

[和多都美=바다(족) 모두 만날]

 

[바다족 모두 만날(meet) 神社]

 

신천지를 찾아 일본 열도를 가는 도중

화타족들이 만나는 신사(화타족의 신을

모신 곳이다)(정광산인 글돋선생 향찰식 설

 

 

화타족(秦/바다族)은 고조선의 유민,부여인들중 바다로 이주한

세력을 말한다.

 

배 선단을 앞세운 신진 세력들의 이동이 무수히 대마도에 도착하였다는

대목들이다.

강력한 철기문화를 앞 세운  세력들

바다族-와타-화타족 -바로 神들의 출현이다.

고조선의 유민과 이 후. 협보(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운 사람/어떤 연유로

마한에 살다 곧 바로 쿠마모토 북안(구야한국)에 도착 

 

남쪽에서 흘러 북상하는 쿠류시오(黑海流)의 지류인 쓰시마(대마해류)해류에

편성할 경우 도착하는 쿠마모토 북안이다

(고대로 흐르는 물길/세종출판사/김인배 저/1995년/글돋선생과 공동연구자)

 

 "협보(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세운 사람)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가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일본 큐슈-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남단으로 내려가 류큐(오키나와)에서 쿠루시오 지류인 쓰시마해류를 따라 북상하면 바로 큐슈의 동 서부 해역에 도착한다.즉 구마모토 현으로 도착하는 물길이다. (고대로 흐르는 물길/세종출판1995년 김인배 저)에 이르니 곧 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용성국/석탈해가 이곳에 도착한 후 금관가야 ,이후 경주로 옮김)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삼천포 勒島(굴레도<구라도<구야島/ 글돋 학설)를 비롯한의 사람들이 한 때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현재 강단사학자들은 김해라고 한다.이는 잘못된 비정/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비정을 그대로 답습/글돋 註)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부여)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다라국(일본학자 비정/합천 설)은 안라국(일본학자 비정/아라/함안 설: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글돋선생 주)과 함께 이웃하여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 구주의 웅본성(구마모또 시로)이 그것이다.(조선 중기 학자 이맥선생이 쓴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 중)"

 

 위의 내용과 일치하는 책 필자가

1995년 고려원에서 출간한 "任那新論임나신론(金仁培,文培" 공저)에는

임나 십국의 위치가 모두 일본 규슈에 있다.

물론 안라국,다라국 구야한국을 비롯한

위치 비정이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원론을

구체화 시킨 것 처럼

물론 일본서기를 해석하던 하고

임나는 원래 대마도였고

나중에 규슈로 옮겨 다는 연구와

태백일사와 너무나 일치하였다.

 

옛 기록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분석하여

더욱 발전시키는 작업을 한 셈이었다.

원론에서 각론으로 임나신론은 발전한 책이다.

임나신론을 최종하기 위해1차 대마도 탐방은

규슈 하카다에서 대마도행 여객선을 타고 1988년

온 기억이 어제 같다. 이 번의 탐방은

아메노모리호오슈 선생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한

목적이 주된 것이었다.

 

온 김에 와타쯔미 신사에 대한 화타족(秦) 즉 해양족(바다족)

인 진국,고조선 유민,부여유민들의 신사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신경을 썼다

 

이 블로그 작업은 목요일 사진 정리,토요일,일요일 꼬박,

이 일에 매달렸다. 

 神禮石이라 생각되고, 용의 신체 일부라 여기는 '이소라헤비수' 신령석

해신신사의 龍蛇(용뱀)신체의 일부로 생각하는 암석

 

썰물 때라 바닷물이 빠진 상태, 낙옆이 수로 바닥에 있지만

함부로 청소도 못하는 모양이다

 . 배례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씻는 곳 세수대(데미즈야)가 있다.

필자도 20년 전 큐슈 덴만구신궁에 갔을 때

물국자로 물을 먹은 적이 있었다.

물론 먹어도 되지만

제일 먼저 오른 손으로 물국자를 잡고

왼손을 씻고

다음은 오른 손을 씻고

다음은 왼손으로 물을 받아 입에 물을 넣고

입을 헹구고

오른 손을 잡고 국자로 왼손을 씻어 내는 것이 순서다

 

<사진:다음자료>

 


 

 오도리이

돌 이끼가 끼여 세월이 묻어있네

도리이 앞에 자연석이

놓여 있다

무슨 의미일까?

이소라헤비수 신령석 나무 도리이가 보인다

알길이 없다.

 스모장을 만들어 놓았다

새해 행사 때 스모 민속놀이을 하는 모양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금

옆에 해신이 본전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만든 수로가 보인다

 이소라헤비스 자연석을 지나 수로.

다리 밑으로 밀물 때 해수가 들어온다

 

해신신사이니 당연

 본전까지 연결된 수로

건물들은 높은 습도 때문에

지상에

높이 공간을 쌓아

건물을 높혀 놓았다.

고구려 창고 즉 부경 (京곳집 경) 건축 모습이다

제주도 민속촌에 가 보면 부경이 보이며

 

集安(지안)의 미선구(麻線溝) 제1호묘에 보이는

귀틀집(高床式 건물)은 일본의 동대사 부속 건물, 쇼소잉〔正倉院〕

 쌍창(雙倉)으로 연결된다는

학설이 발표된 적이 있다 

수로를 타고 다녔던 해상교통의 배

전통식 일본 왜선이다.

아마 육로가 생기기 전엔

 

신사 참배 및 교통의 수단으로

이 배가 사용된 것이 틀림이 없다. 

 

한국 배는 밑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례전 앞

지붕을 보면

팔작지붕이다.

즉 옆으로 문이 나와 있다.

건물 정문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절의 대웅전 정문으론  신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옆 문을 이용하듯

 

이 배례전의 사람들의 참배 입구를 옆으로 만들었다.

본전 입구는 배례전과 다르다.

 

거의 모든 신사의 배례전의 입구 형태가 이러하다.

 

 

신사 앞 도리이

배례전이 보이고

뒷편 본전 지붕이 보인다

 

황태자 덕인 친왕 성혼 기념비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까지 와서

조상에게 참배하는 이유

 

그들의 정체성은 바로 한국신과 연결됨 

名神 大社(이름있는 큰 절) 와타즈미 신사

명사

이름있는 절-대륙계통의 조상의 절 

평성 원년 오도리이(大鳥居)

 건립 기부금명단비 

신사 입구 오도리이 -석화가 끼인 것이

건 버섯 핀 것 처럼 지저분한 느낌이다.

화강암 재질이 아닌 것 같다. 이암(진흙 암석)같다.

고마이누(瑞獸)

 고구려 개이다. 풍산개,삽살개 모습이다

 신사 양쪽에 고마이누가 지키고 있다.

오른쪽 입을 벌린 개-움(범어) 오메가와 같은 의미는 마지막

입을 다문 고마이누(고구려개)

 

범어 阿(아)에 해당하는  형상-알파(시작)

 

우리나라 사찰에는 한쌍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의 흔적들이다

 


 신사에서 돈을 함에 던져놓고 방울을 울리고나서

두번 묵례하고 두번 손뼉치고 다시 묵례하며 빕니다.


 배례전 안쪽

본전은 제관들만 들어 갈 수 있다.

배례전에서

일반 참배객들은 참배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왕세자 신사 방문 사진

천황 방문 사진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이 신사가 제 일대 신무천황과 관련된 신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무천황은

단군 매륵이 보낸 언파불장군 아들이 천황이 된다.(BC660년)

 절이나 신사의 수입원중

하나가 부적이다.

새해에나 수험철엔

일본에도 합격 기원을

바라고 신사 나 절은 많이 찾는다.

 

부적 파는 자동 코인 부적 판매기

귀한 부적이기에 금줄을 쳐 놓았다.

 

코인을 넣고 버턴을 누르면

아래 종이로 말린 부적이 떨어진다

 

이 부적을 <오미꾸지>라 하여 읽고

부적은 나무가지에 매달아 놓고 온다.

새해엔 나무에 오미꾸지가 달려

온통 하얀 눈처럼 보인다. 

 

대마도는 인구가 면적에 비해 적기 때문에 <오미꾸지>나

 

판떼기에 그림이나 소원을 적어 걸어두는 판자가 보인다.

에마(繪馬)라 한다.

 

愛馬부인 연상 시키면

섹스 어필되어 효험이 떨어진다  

 

신사에서 치르는 행사는 1년에 5~10회 정도가 있습니다.

대부분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사를 찾는데

 

아이가 태어났다던지 이사를 갔다던지

결혼 또는 합격 기원, 기타 소원이 있을 때 신사를 찾습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쯤은 대부분 찾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새해 제야의 종이 울리고 참배하는

하츠모오데(初詣)가 있습니다.


신사에서는 운세 같은 것을 점칠 수 있는 괘를 팔기도 하고 부적도 팝니다.

가끔 소원을 적어서 매다는 경우도 보셨을거라 생각이 되는데 부적을 받고 나서

에마(繪馬) 라고 불리우는 작은 나무 판에 소원을 적어서 매답니다.

本殿(혼덴) 건물,-본전은 신물을 모시는 장소로

일반 참배객은 들어 갈 수 없고 오직

신관 만이 들어간다.

 

신관으로 채택 된 사람은

엄격한 자기 관리를 해야만 된다

 

신관의 경우 입구는 배례전(하이례덴)과 연결되어 있다

일반객들은 배례전 참배실에서 참배하고

 

일반인들은 동전을 던져 넣고(복전함) 방울과

줄 앞에서 방울을 흔들고,2拜 와 손바닥 2번 치고

다시 묵례하면서 기원하는 예를 바깥에서 한다  

 

 오른쪽 행량처럼 연결된 건물이 배례전(하이례덴)

뒷편 높은 지붕이 본전(혼덴)이다.

옆에 신사 두기가 있다.

금줄이 처져 있다

 본전 옆에 붙어있는

두 신사

해신에 관련된 신이 모셔져 있겠다

 본전 옆에길  豊玉姬(도요다마히메) 묘소 가는 숲길 옆

입구 "이소라헤비수"

 비늘 균열 자연석 처럼,

 

이 자연석은 전설에 의하면

 磯良舞(이소라마이)라 하여

이 또한 해신의 신체라고

생각하여 제사 지낸 신령석이다

 

나무 도리이가 삼면으로 서 있다

 본전 뒷편 삼나무 숲으로 싸여있는

곳에 도리이가 서 있다.

이 도리이는 豊玉姬(도요다마히메)의 묘소가 있다.

[도요다마히메]는 일본의 시조 [天祖大神]의 아들과

 결혼하여 天孫인 남편 산행언은 용이되어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리하여 豊玉姬는 "부끄러워 하여 남편과 아들을 놓아 두고 바다로 돌아갔다

 

수령이 수백년된 삼나무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일본인

금줄이 쳐있네...

신화의 고장이니

모든 곳에 신이 거한다

 자연석에

"풍옥희 지 분묘"

적색으로 새겨논 돌

앞에 복전함이 좀 그렇다~~~

봉헌된 음료수병 또한

 버려놓은 것 처럼 느껴진다

 

지난 2005년1월 역사 탐방 때는 비가 내렸고 흐린 날씨로 음산한 감이 많이 들었고

시간에 쫓겨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기억이었다. 이 번엔 좀 욕심을 내어 돌아 봤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있다.  항상 아쉬움은 조금이라도 블로그를 읽는

 사람들의 필요한 정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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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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