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스크랩] 일본속국으로 전락된,다라국은 과연 합천일까

monocrop 2008. 9. 20. 01:25

다라국의 위치(한반도 가야에 비정될 경우 일본 정벌지가 되어버린다)

 

일본 史家들의 의도에 의한 다라(합천)으로 비정됨.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일본 여왕 신공에 의해서 시라기(신라) 7국이 정벌되는 기사가 나온다.

시라기 7국 중 多羅가 포함되어있다.

 시라기(신라) 7국을 임나 7국으로 둔갑시키고 임나를 가야연맹체로 규정하였다. 그 중 한 곳이 다라이다.

일본사가에 의해서 정벌된 (韓地)시라기 7국이 모두 가야 땅에 비정되는 수모를 겪는다.

임나=가야연맹체라는 등식에 의해서 말이다. 합천이 다라국이라면 우린 일본 신공여왕에게 정벌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합천 옥천고분의 발견이 다라국의 실체라고 한 술 더 뜬 이연학교수(전 동아대교수)와 그 이론을 받아드린 발굴팀 부산 경성대학 고고학팀, 신문지상에 "다라국의 실체가 드러나다" 옥전고분 발견 당시의 제목이다.  우리의 고대사는 일본의 정벌 대상으로 전락되는 수모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래 글은 임나신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임나완 가야연맹체는 무관하며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임나가 존재하였던 일본 규슈를 직접 부산에서 가져간 차로 현장 답사하고 쓴 글이다. 임나신론의 공동저자 소설가 김인배씨(문학과 지성에 75년 등단)와 함께한 1994년 여름철의 일본 규슈 탐방 기록이다.

 

김인배씨가 정리한 글은 문화일보에 30여회에 걸쳐서 연재되었다. 아래글은 그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하였다. 결코 일본역사가들이 만들어 왜곡시킨 고대사의 일부를 복원하는 의미로 받아드리기 바라는 마음이다.(사진:玉田고분 석곽분/M3분 발굴현장 , 출처:취미생활(광주,전남,전북동호회))

 

"다케오(武雄)시로부터 동남방을 향해 록가쿠가와(六角川)를 건너서 아리아케우미의 서쪽 해안을 따라 한참 내려가자 사가현(佐賀縣) 후지쓰군(藤津郡) 가시마(鹿島) 마을이 나왔다.

 

거기서도 더 아래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줄곧 뻗어 있는 국도만 따라서 얼마를 더 가자, 太良(다라)촌을 만났다.

우리는 이미 지도에서 가시마로부터 동남방에 위치한 그 多良(다라) 지명을 확인하고 그곳을 목적지로 잡았으므로 중간에 가시마에서 지체할 겨를없이 곧장 여기까지 차을 몰아왔던 것이다.

미상불 후지쓰(藤津) 郡의 아리아케우미 서안에 위치한 이 지역 일대에는 太良(tara),多良(tara),  田原( tahara) 들이 연이어 나오고, 마침내 多良中山과 多良山(일명 多良岳)이 남쪽을 가로막고 섰다.

 

 

 신공기 49년조의 시가기(新羅) 7국 중 도쿠노쿠니가 얼마 전 우리가 떠나온 현지명의 다케오(武雄:다케오진쟈의 문서상으로 岳尾(다케오)]에 비정된다면, 多羅는 과거의 히젠(肥前)國에 속했던 바로 이곳 多良에 지정된다.

 

 多羅, 즉 多良(tara)는 더 정확히 말해서 지금 多良村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多良山(岳)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다라 산은 그 동쪽 면이 아리아케우미 쪽으로는 경사가 자못 완만한데 비하여 서쪽 면은 오무라(大村)만으로 급경사져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 한국으로부터 숱한 난민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한 때 무작정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일본 해안 경비대에 체포된 밀입국자들을 대거 억류 구금시켰다가 추방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던 곳으로 유명한 오무라수용소가 저 다라산의 서쪽 너머에 있다.(사진:옥전고분 출토 투구/ 제공:취미생활 카페)

 

 하여간 이 다라산에 대해서 츠쿠시 풍토기( 筑紫風土記 )에는 [藤津郡多良之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히젠풍토기[ 肥前風土記]에는 [託羅 다라)之峰]이라 나온다. 그런데 신공기의 시라기 7국명 중 하나인 이 多羅를 그동안 일본의 사가들이나 한국의 몇몇 기성사학자들이 한국땅에 비정하여 경남 합천군의 多羅里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임나 문제를 살펴보는 과정에서(필자의 책/임나신론/고려원) 명백해졌듯이(여기선 지면관계상 생략), [일본서기]를 곡해한 일종의 편견이며 앞뒤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경남합천을 [일본서기] 속의 다라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대표적 인물로 한국 강단사학계에서는 김연학 교수(전 동아대교수)를 꼽을 수 있다.

지난 1992년 합천의 玉田 고분 발굴의 결과를 놓고 조선일보(1992년 ,2.26일) 지상 논쟁에서 그는 [옥전고분은 임나 10국의 하나인 다라국 유적]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에 맞서 최재석 (전 고래대)교수는 옥전고분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본서기]의 다라국은 필자(김인배,김문배 공저/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이곳 多良村과 多良山(岳)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의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다라국 논쟁은 명확한 결론도 없이 그 정도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으나, 우리(김씨 형제)는 이번 규슈 현지 탐사를 통해 최교수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쪽에 서게 되었다.

 

 다라(多羅)는 무슨 뜻인가? 이는 한국어 [드르, 드ㄹ.(野)(현대어 들)과 비교되는 지명 내지, 고대어 山을 뜻하는 tol -toro, tal-tara 계(系)의 지명이다.

일본에서는 田羅(tara), 多良(tara), 太良(tara),칸 다라(kan-dara: 큰 들) 등으로 표기한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경상북도 경산(慶山)의 옛 이름인 押督(압독)을 <一云, 押梁>이라 하여 이를 훈독한 [누르달]로 읽는 경우 처럼, tal--tara 는 산의 뜻이었다. 또,

[僧山縣<一云, 所勿達] (삼국사기 지리지)의 경우나, [兎山郡, 本고구려烏斯含達](삼국사기 지리지, 漢州 兎山郡條)의 경우도 결국 [山=達]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오사(烏斯)는 다른 지명에서는 어사(於斯)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이는 고구려어로 [톳기(兎)](현대어, 토까) 뜻이기 때문에, 이 [오사,어사]가 일본어 [우사끼]의 어원이 됨을 알 수 있다. 일본어로 토끼(兎)는 宇佐木(우사키)로 읽는다고 [和名抄](18:19)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다라(tara)계 지명은 드르=드 ㄹ.(아래 아), 또는 달(達=山)---다라와 관련된 명칭으로 봄이 합당하다. 하여간 우리는 그러한 뜻을 지닌 다라 촌에서 다음행선지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목적지 선정에 있어, 낚시질하는 촌로가 있어, 거리나 노선에 대해 물어 보았다. 우연히 그곳 지리에 대해 다라산의 연봉(連峰) 중 하나가 시라기미네(白木峰), 즉 新羅峰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이 다라 촌 일대가 역시 시라기(신라)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현 역사학자들의 측 다라국 위치(합천으로 규정)

 

말머리가리개 /옥전고분군(가야) M3호분에서 출토된 말머리가리개, ...
사적 제326호. 합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 의해 대야성(大耶城)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며,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나오는 가야소국(임나를 일본측에선 가야 연맹체로 기정사실을 한 학설/글돋 주) 중 하나인 다라국(多羅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군은 해발 50~80m 가량의 야산 정상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85년부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고분의 입지를 살펴보면 거대한 봉토를 갖춘 고총(高塚)들은 그밖의 다른 무덤들과 떨어져서 분포하고 있으며 무덤구조는 덧널무덤[木槨墓], 대형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약간의 독무덤[甕棺墓]들로 구성되어 있다. 덧널무덤은 4~5세기에 걸쳐 이용되었다. 덧널무덤에서 나온 중요유물로는 8호분에서 출토된 투구[彎曲縱長板伏鉢胄], 42호분에서 출토된 안장꾸미개[鞍金具], 70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金製耳飾]·은상감환두대도(銀象嵌環頭大刀)·화살통[胡籙]·투구[胄]·목가리개[頸甲]·발걸이[鐙子]·안장꾸미개 등을 들 수 있다. 구덩식돌방무덤에서는 투구류의 비중이 높아진다. 20·28·35호분에는 각기 2점씩의 투구가 부장되어 있었으며 23호분에는 금동제복발(金銅製伏鉢)과 금동제소찰(金銅製小札)이 포함된 투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5·20호에서는 비늘갑옷[札甲]이 발견되었는데 20호의 경우 목가리개가 함께 출토되었고 28호분에서는 판갑옷[板甲]이 출토되었다. 특히 28호분에서는 말머리가리개[馬胄]·말갑옷[馬甲]도 출토되어 이채로운데, 이러한 유물은 고구려를 포함한 북방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3호분에서는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가 출토되어 이 고분의 피장자가 이 지역에서 최고 권위를 누렸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M3호분은 옥전고분군을 대표할 수 있는 무덤이다. 봉토는 직경 20m 가량의 평면 원형이며 내부구조는 깬돌[割石]을 이용한 장방형의 구덩식돌방으로 으뜸돌방[主室]과 딸린돌방[副室]으로 이루어졌고 각각 덧널[木槨]이 설치되어 있다. 으뜸돌방의 중심부에는 쇠도끼[鐵斧]를 널받침[棺臺]처럼 이용하고 그 위에 널[木棺]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장자는 머리를 남쪽으로 둔 채 1쌍의 금제귀걸이를 착용하고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를 패용하고 있었다. 피장자의 머리 쪽에는 금동장안장가리개[金銅裝鞍輪]·금동장말띠드리개[金銅裝杏葉]·재갈[轡] 등의 마구류와 함께 화살통·쇠살촉[鐵鏃]·투구·경갑·뚜껑접시[蓋杯] 등이 놓여 있었으며 발치에는 경갑이 달린 비늘갑옷·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발걸이·기꽂이[蛇行狀鐵器] 등이 놓여 있었다. 피장자의 왼쪽에는 용봉문환두대도·친자대도(親子大刀)·화살통·쇠살촉·말방울[馬鈴]·사지창(四枝槍)·쇠투겁창[鐵鉾]·쇠끌[鐵鑿]등이, 오른쪽에는 각종 환두대도·미늘쇠[有刺利器]·청동합(靑銅盒)·철제살포[鐵鏟]·소형토기·쇠살촉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딸린돌방에는 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목단지[長頸壺]·그릇받침[器臺]·뚜껑달린단지[有蓋短頸壺]·큰독[大甕] 등의 토기류와 쇠끌 등이 놓여 있었으며, 사슴뿔이 발견되고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봉문환두대도·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기의 경우는 고령지방 출토 토기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의 피장자가 속한 집단이 대가야연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4세기부터 5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무덤은 이 지역 고유의 요소가 강하나 이후 시기의 것들은 고령의 대가야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덧널무덤 자체의 변화과정에서도 추적되는데 M3호분은 이미 대가야권에 편입된 이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다음 백과사전 )

 

 

玉田古墳群은 결코 임나 다라국의 왕족 무덤이 아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구슬밭[玉田]에 위치하는 가야의 무덤떼.

사적 제326호. 합천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 의해 대야성(大耶城)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며,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소국 중 하나인 다라국(多羅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설명:옥전고분에서 발견된 용봉문 환두대도(윗쪽) 밑은 鳳紋/鳳凰은 동이족의 문양이고,龍은 중국의 문양이다. 용봉문 환두대도는 동이족이 중국속의 세운 나라의 문양)

 

 

 고분군은 해발 50~80m 가량의 야산 정상부에 분포하고 있는데 1985년부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봉문환두대도·말머리가리개·금동장투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기의 경우는 고령지방 출토 토기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의 피장자가 속한 집단이 대가야연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위 글은 옥전고분군을 소개하는 한국 사학계의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 드려 합천이 임나10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옥전박물관이 세워졌다. 부산대학교 신경철 고고학 교수는 저명 인사들을 모아두고 이 고분군이 다라국 수장의 능이라 확정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필자는 임나가 결코 한반도 가야국 연맹체가 아니며 다라국은 일본 규슈에 있었던 소국임을 밝힌다.

 

임나 관련 국명 또는 지명의 韓地 비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기성 사학계의 억지는 또 있다. 

[양직공도, 백제사신도경]이라는 옛 문서에는 백제의 방소국(旁小國)이라 하여 백제의 속국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 국명이 斯羅(신라),前羅(전라),卓(탁),多羅(다라),叛波 (반파),上己文(상기문).... 등이 보인다.

 

이 나라들을 각각 한국땅의 경주,함안,창원,합천(다라),고령, 남원......등지에 비정함으로써 백제가 이들 전 지역을 복속시킨 맹주국이었던 것으로 역사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이홍직(전 고려대교수:[梁職工圖論考])

 

 그러나 이는 고대 한국땅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사라, 즉 신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실상 이 같은 인식을 정당화할 문헌 기록이나 방증 자료들이 일본서기의 신공49년조의 맹신한 원인 말고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양직공도]에서 말하고 있는 백제 방소국(일종의 속국)은 당시 일본땅에 백제가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나라들을 가린킨 것으로 파악함이 옳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기의 시라기 7국명 중 하나인 이 [다라]를 그 동안 일본의 사가들이나 한국의 몇몇 기성사학자들이 한국땅에 비정하여 경남 합천군의 다라里라고 주장해 왔다. [일본서기]를 곡해한 일종의 편견이며 앞뒤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경남 합천을 [일본서기] 속의 [다라]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 강단사학계에서는 김연학 교수를 꼽을 수 있다. 지난 1992년 합천의 옥전 고분 발굴의 결과를 놓고 조선일보(1992.2.26일자) 지상 논쟁에서 그는 [옥전고분]은 임나10국의 하나인 다라국 유적]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에 맞서 최재석(전 고려대)교수는 옥전고분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일본서기]의 다라국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규슈의 아리아케우미 연안의 多良村(다라 마을),多良山(다라산) 일대에 비정함으로써 김연학 교수와의 논쟁을 벌여, 서로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한 적이 있다.

 

이른바 다라국 논쟁은 명확한 결론도 없이 그 정도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으나, 필자와 역사찾기 일행들의 규슈 현지 탐사를 통해 최교수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쪽에 서게 되었다.

 

탐사는 1994년 8월에 시작하였다. 규슈 "다케오"市로 부터 동남방 아리아케우미의 서쪽 해안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사가현(佐賀縣) 후지쓰군(藤津郡) 가시마(鹿島) 마을이 나왔다.

 

더 아래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줄곧 뻗어 있는 국도만 따라서 얼마를 저 가자, 太良(다라)촌을 만났다.  미상불 후지쓰군의 아리아케우미 서안에 위치한 이 지역 일대에는 太良(타라),多良(다라),田原(타하라)들이 연이어 나오고 마침내 多良中山(다라쥬잔)과 多良山(일명 多良岳)이 남쪽을 가로 막고 섰다.

 

일본서기 속 임나10국에 나오는 多羅는 즉 多良(다라)는 더 정확히 말해서 지금 多良村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多良山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서쪽면은 한국전쟁 직후에 한국으로 부터 숱한 난민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한 때 무작정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밀입국자들을 대거 억류 구금시켰다가 추방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던 오무라(大村) 수용소가 다라산의 저쪽 너머에 있다.

 

이 다라산에 대해서 "츠쿠시풍토기"에는 [藤津多良峰]으로 기록된 점으로 옛부터 "다라'라고 불려지고 있었다.(글돋선생)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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