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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북공정에 대한 국내학계의 반박자료

monocrop 2008. 8. 27. 02:01
“영토제국주의 드러낸 허점투성이 논리”
쟁·점·별로 살펴본 국내 학계의 반·박

최근 중국 정부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국책사업을 노골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연구자들은 “정치적인 요소를 걷어내면 그들의 논리에 허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의 논리는 무엇이고, 이에 대한 국내 학계의 반박 논리는 무엇인지 쟁점별로 짚어본다.

 고조선사도 중국사?

중국측 주장 - “단군신화는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영이며, 기자조선은 상주사(商周史)의 일부로서 은(殷)나라의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권이다. 위만조선 역시 전한의 외신(外臣)으로 속국이었다.”

반박 -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독자적 문화권

계통과 문화가 다른 고대종족을 ‘고민족(古民族)’이란 개념으로 모두 중국사에 포함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단군신화 중 곰 숭배신앙은 중국신화와의 상관성을 찾을 수 없다. ‘기자동래설’은 이미 한국학계의 연구노력을 통해 허구라는 것이 입증됐다. 위만정권이 ‘외신’이라 하더라도 이는 중국의 내적통치질서에 편입된 것이 아니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 지역의 독자적 문화내용은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된다.(조법종 우석대 교수 ‘동북고대종족 및 고조선 연구동향과 문제점’)

 고구려는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

중국측 주장 - “고구려 민족의 원류는 서한(西漢=전한)시대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변강 민족인 부여족 일파를 기반으로 예맥족(濊貊族)·한족(漢族)·선비족(鮮卑族)·숙신인(肅愼人) 등이 흘러들어 이들 민족이 점차 융합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지배는 그 연원이 오래됐는데 ‘일주서(逸周書)’ 왕회해편(王會解篇)에 나오는 고이(高夷)라는 인물은 고구려의 선조였고, 이는 서주(西周) 때부터 중국과 신속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박 - 예맥족은 본래 한반도·만주 일대 거주

‘예맥’이란 명칭은 선진(先秦) 시기부터 요하 동쪽에 거주하며 농경을 영위하던 예족(濊族) 일반에 대한 범칭이다. ‘예’와 결부되지 않은 ‘맥(貊)’은 중국 북방의 족속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들과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집단을 직접 연결시킬 수 없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본래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예맥족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기원전 107년 한 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전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것이므로 압록강 중류 일대가 본래부터 중국의 고유영토였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일주서’의 ‘고이’라는 인물을 고구려의 조상으로 설정하지만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조차 결여된 허구에 불과하다.

주(周)나라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일주서’는 대부분 전국시대 이후에 씌어진 믿을 수 없는 사료이고, 고구려의 ‘고(高)’자는 본래의 족속 명칭엔 없다가 나중에 첨가된 글자이기 때문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고구려의 족속 기원과 건국 과정’)

 평양 천도 이후도 중국사에 포함된다?

중국측 주장 -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중국 강역 내부에 있던 고구려사의 정치·문화 중심이 이동된 것일 뿐 민족의 속성이나 정권의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므로 결국 중국사의 지방정권으로 해석해야 한다.”

반박 - 현재의 정치적 목적 위해 자의적으로 역사 해석

중국학계는 1980년대 이후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해 ‘중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여기고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평양 천도(서기 427) 이후의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돼야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도 과거에는 고대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댔다. 이는 결국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근거를 스스로 폐기한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공석구 한밭대 교수 ‘고구려의 영역과 평양 천도 문제’)

‘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이 중국 민족’이라는 중국측의 논리는 근대 이후 형성된 ‘국경’ 개념을 전근대 시기까지 소급해 현재의 영토 내의 모든 민족의 귀속권을 일방적으로 강탈한 영토지상주의 역사관이며, 역사적 사실이나 논리적 정합성에 근거한 역사관이라기보다는 고대민족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배타적 통할권을 매개로 국가적 힘의 논리를 앞세운 문화패권주의다.(윤휘탁 동아대 연구교수 ‘현대 중국의 변강·민족의식과 동북공정’)

 중국 역대 왕조에 ‘신하’로 자처?

중국측 주장 - “고구려는 줄곧 중국 역대 왕조와 신속(臣屬)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이것은 고구려 왕이 중원 정권을 대신해 고구려 지역의 백성을 다스린 것이며, 오랜 기간 고구려는 중국과의 신속관계를 통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박 - 책봉·조공은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형식일 뿐

고구려와 부여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대회’를 열었다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의 기록은 이들이 제후국이 아닌 독자적인 정치체제였음을 시사한다.(최광식 고려대 교수 ‘동북공정의 배경과 내용 및 대응방안’)

고구려 왕이 ‘책봉’을 받았다는 것을 중원 정권을 대신해 통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아선 곤란하다. 남북조시대에 중국 세력이 분열돼 주변 국가에 대한 규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선 책봉·조공은 실질적으로 종속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러 왕조가 주변국과 갖는 외교관계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은 정치적 정세에 의해 여러 차례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고구려가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더 이상 현도군 치소(治所)에 오지 않았다’는 내용은 고구려가 전한의 예속관계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남제서(南齊書)’ 고려전에도 “고구려는 강성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기록돼 ‘신속’과는 거리가 멀었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여러 차례 북위 황제의 조서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남조의 송(宋)과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나 ‘중원 고구려비’ 등엔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天下觀)이 보이는데, 고구려왕은 ‘대왕(大王)’ ‘태왕(太王) ‘성왕(聖王)’ 등을 자처했고, ‘영락(永樂)’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신라를 ‘동이(東夷)’라 칭하며 속민(屬民)으로 설정했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중국 및 유목민 세계와 대등하면서도 그와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던 것이다.(양기석 충북대 교수 ‘류쯔민(劉子敏) 옌볜대 교수에 대한 토론 요지’)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漢族)에 융화?

중국측 주장 - “고구려 멸망 후 대다수의 유민들이 한족(漢族)에 흡수·융화됐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70여만명이었는데 당 태종과 고종 때 30만명이 중원으로 이주됐다.”

반박 - 고구려의 자의식은 신라·발해가 계승

당나라로 이주한 고구려인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었고, 당은 시종일관 고구려 유민들을 전쟁포로로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지배도 복속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로 간 유민의 경우엔 모두 자의적인 선택이었다. 신라는 당과 달리 ‘삼국의 통합’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두었고,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보덕국을 만들고 유민들을 신라의 중앙군단인 서당으로 편제하기도 했다. 이후 고구려의 자의식은 신라와 발해를 계승한 고려에서 이어졌다.(김현숙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의 거취문제’)

 고구려와 수·당 간의 70년 전쟁은 내전?

중국측 주장 - “‘고구려가 본래 한사군의 땅’이라는 당 태종의 언급은 수·당이 고구려에 대해 영토의식과 수복의식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반면 백제·신라에는 이런 영토의식이 없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원 통일정권이 변강 소수민족 할거세력을 통제하며 전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반박 - 당사국의 국익 추구에서 비롯된 ‘국제전’

‘구당서(舊唐書)’는 당의 창업주인 고조(高祖)가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낸 공문편지에 ‘이제 두 나라(고구려와 당)가 서로 화평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쓰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잡힌 수나라 군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한 기록을 수록했다. 고구려가 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당당한 외국 독립국가였다는 의미다.(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의 2003년 12월 9일자 조선일보 기고문)

중국측이 제시하는 사료에서 드러나는 수·당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인식은 고구려·백제·신라를 모두 ‘이(夷)’로 파악하고 있어 유독 고구려만 중국의 ‘대내정책’의 관철 대상이라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고구려는 국세의 팽창 과정에서 말갈·거란·실위(室韋) 등 이민족에 대한 지배권의 관철을 꾀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독자적인 생존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중국 남북조의 북위(北魏) 정권조차 고구려가 만주와 동몽골 일대의 구이(九夷)를 제압한 독자적 세력권을 확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결국 고구려의 대수·대당전은 고구려가 국초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대륙정책’이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지배질서를 확립하려는 ‘세계정책’과 충돌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박경철 강남대 교수 ‘중국학계의 고구려 대 수·당 70년 전쟁 인식의 비판적 검토’)

 고려·조선은 고구려와 상관 없다?

중국측 주장 - “고구려는 멸망한 지 250년 후에 등장한 ‘왕씨고려’와 하등 계승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의 활동범위는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왕씨가 전한 당시 낙랑군의 귀족임을 생각하면 한족(漢族)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왕씨고려’와 ‘조선’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한 정권이었다.”

반박 - 당시 중국도 인정한 ‘고구려 후예’

고려 태조 왕건은 자손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5조에서 “서경은 아국(我國·고려)의 지맥의 근본(根本)이다”라고 했는데, 당시의 풍수설을 빌려 표현했지만 본뜻은 “고려의 근본은 고구려(평양)”임을 자손에게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왕씨의 선조가 고려(고구려)의 대족(大族)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의 ‘고려세계’에도 왕건의 조상이 백두산을 유력(遊歷)했다고 기록해 왕건의 조상이 고구려나 발해에서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했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바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확히 했다. 고려의 수도인 송악 역시 본래 고구려 땅인 부소갑(扶蘇岬)이었다. 한반도 중부 일원에는 고구려에 속했던 주민들이 거주했고, 이들은 여전히 ‘고려인’으로 불리었다. 고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왕건을 비롯한 개성·평주·정주 등 한반도 중부 일원 출신들로 고구려 지향적인 토착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성종 12년 요(遼)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는 요장 소손녕과 회담하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며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으며,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의 동경(東京)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백히 했다.

고려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발해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이 쓴 ‘송사(宋史)’에서도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 한다’며 ‘고려열전’을 시작했고,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승계한 국가라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의 역사의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명사(明史)’에까지도 유지됐다.(안병우 한신대 교수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적 계승성’)

유석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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