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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다로 사라진 최초의 요동군 추정지 발견

monocrop 2008. 9. 14. 22:01

 

명대 정문빈(鄭汶彬)의 주변찬의(籌邊纂義)에 수록된 구변도(九邊圖)중의 1변도

붉은 선이 패수로 추정되는 경로도인데 발원이 개주의 니하로부터 북류하여 요하와 합류하며 다시 서남류하여 산해관 주변으로 흐른다

 

 대청광여도(大淸廣與圖) 日 江戶시대 (1603~1867) 작자미상 일본 명치대 부속 도서관 소장

지도상에 보이는 요동 광위와 달황도는 완전히 바다로 윤몰되었습니다. 산해관의 동쪽에 있던 갈석도 역시 바다로 윤몰되었는데 지도에 보이는 대로 세개의 산중에 어느 산일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력한곳은 산해관의 남쪽 바다안으로 떨어져 있는 산입니다. 이 산의  윤몰 사실은 수경주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크릭하여 보시면 더욱 선명합니다. 원본 제공: 향고도



<최초의 요동군과 험독(險瀆)은 바다로 사라져. >


국경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국내륙 안에 있던 그 많던 열국들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고조선의 국경을 획정하는 경계선은 별별스런 강물 이름들이 어렵게 등장을 합니다.

내륙에 있는 물 이름은 강江, 하河, 수水라는 이름이면 다 알 수가 있는데 조선과의 국경에 따라다니는 물 이름들은 까다로워서 전문학자들도 완전한 분석을 한사람이 없습니다.
이중에서도 만번한과 패수(浿水) 라는 이름은 앞에서 대강 말씀드렸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것이 없고 그저 설왕 설내만 있을뿐입니다. 그 외에 또다시 등장하는 험독(險瀆)의 왕험성(王險城)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놓고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제 역시  패수(浿水)를 난하나, 영정하 등의 단일 강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일부 주장때문에 혼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습수, 산수, 열수가 합수되어 패수가 된다는 그 합수 좌표점이 단일 강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패수가 단일 강이라면 구태여 세 개의 강을 들먹일 이유가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

이러한 와중에서 필자는 최근에  패수로 추정되는 물길을 밝힌 지도를 발견하였습니다. 위에 올려진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분석하면 요동만의 위치에서 수몰 전에 물들이 합수되었던 지점이 패수로 이루어진 경로를 확인할 수 가 있는것이지요. 그곳의 위치는  사서들의 기록대로 난하의 동쪽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학자들이 지금은 바다밖에 없는 난하의 동쪽을 연구하지 않고 동북쪽인 산해관 방향으로 착각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비정하는 관계로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도 엉뚱한 방향으로 비정하여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하의 입해구(入海口) 동쪽은 산해관 지역이 될 수 없습니다. 구 왕검성이 있던 험독현은 요동만 위치에 있었는데 그 주변이 바다로 윤몰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낙랑군 험독의 동쪽에 위치하며 구 왕검성과는 다르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곳은 삼신산이 있던 지금의 장도로 추정이  됩니다.

 

다음은 최초의 요동군 지역이  요동만 지역으로 윤몰되었다는 사서들의 기록입니다.

 

 * 秦漢時遼東郡地唐沒於渤海


<독사방여기요> 의 기록입니다. 진.한시의 요동군 땅은 당나라때 이르러 발해로 윤몰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요동만 내의 초기 요동군 땅을 말하는것이겠지요.

* 通雅 明 方以智 撰 권15


夾右碣石入于河 非長城所起之碣石也 平州石城縣西南有碣石 即漢右北平郡驪山縣 水經注曰 驪城枕海今歴乆為水所 淪入海去岸五百餘里 此則禹貢夾右碣石入于河之碣石也...今以平州之赴海者為右碣石以髙麗中為左碣石 <거의 같은 내용이 아래 수경주소에 있음으로 번역을 생략합니다.>


* 鹽鐵論, 卷10, 和親 第48 『燕塞碣石絶邪谷繞援遼』(연나라 장새는 변방의 갈석을 지나, 사곡에서, 요수에 접하였다.) 

 

 

** 역도원의 저서 <수경주> 에 대하여 <수경주소> 로서 해설한 기록입니다.

昔在漢世,海水波襄,吞食地廣,當同碣石,苞淪洪波也.守敬按:《河水注》,漢王璜曰,往者天嘗連雨,東北風,海水溢,西南出,侵數百里.故張晏云,碣石在海中,蓋淪于海水也.

"해수가 양평땅에 슴여들어, 넓은땅을 침식하니, 같은 지역에 있던 갈석도 넓은 파도에 휩쌓여 윤몰 되었다". <하수주 河水注> 한나라 시대의 왕횡이 말하기를 "가을비가 쉴사이 없이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대더니 서남쪽으로 해수가 넘쳐 수백리의 땅을 침식 하였다". 옛날 장안이 말하기를
"바다에 있던 갈석은 산머라까지 바다물에 빠저버렸다."

다음은 험독의 위치에 대한 저명한 학자들의 의견과 북한의 주장입니다.

 

《고조선의 력사 개관》 박득준 편 97쪽~98쪽 북한의 요동관.

첫째로, 기원전 3세기초 연나라 장수 진개의 동방침공으로 후 조선은 만반한(료양하류역)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이때 연나라는 소위 5군을 두었는데 그 제일 동쪽에 있는 군이 료동군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료동의 동단은 만반한 계선에 있었고, 그 이동은 고조선 땅이었다.
이것은 <료동>이 란하 이동임을 중시한다.

둘째로, 기원전 3세기말 진나라의 만리장성의 동단은 지금 산해관 부근의 갈석지방이었다.
중국에서의 고고학발굴(1984)로 장성동단은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장성 동부지역을 두고 사마천(기원전145~기원86)의 《사기》나 반고(기원32~92년)의 《한서》에서는 《료동》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료동》이란 현 료하의 동쪽이 아니라 현 란하의 동쪽을 가리킨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기원 후에 와서도 산해관 지방을 《료동》이라고 불렀다.

(중략).......

셋째로 《한서》 지리지 료동군 험독현에 대한 주석가들의 견해를 따져보면 료동군 험독현은 원래 조선왕 만의 구도로서 현 료하 하류서쪽 북진 동남쪽 지방이었다.
이것은 험독일대가 고조선 지역임을 말해준다.
이 자료와 기원전 175년에 료동, 현도성을 쌓았다는 자료를 결부시켜보면 료동군이 현 료하 동쪽으로 옮겨온 것은 기원전 1세기 초의 일이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료동군 험독 왕검성이 만(滿)의 구도라는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응소와 신찬의 해설을 기피한 것입니다. 더구나 만약 그곳이 만의 구도였다면 만의 신도로 보이는 낙랑군 패수 이동의 왕험성 기록이 등장해야 됨에도, 현 평양을 만조선의 도읍지로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들 역시 《한서》 지리지의 낙랑 험독의 왕험설을 기피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들은 《고조선의 력사 개관》 109쪽의 ‘후조선의 멸망과 만조선의 성립’ 이라는 제하에서는,

“만은 기원전 3세기 말에 고조선에 온 다음 《사기》 조선렬전에서 전하는 《진고공지 상하장》 즉 패수(대릉하 이동), 요양하 이서지역에 발을 붙이고 험독에 후국수도를 정하였으며, 여기서 고조선의 서변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라고 하고, 동책 107쪽에서는 만은 고조선 사람이라는 해설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영수 단국대 교수의 험독의 위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는 《한국사 시민강좌》제2집 45쪽~50쪽을 통하여 험독과 왕검성이라는 글을 다루고 있는데, 내용이 길어 전문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험독의 위치에 대한 결론만 추출하여 소개 드립니다.

...전략
이러한 검토의 결과 우리가 처음에는 전제한 바와 같이 ‘아사달’이 최초의 조선(朝鮮)의 위치와 같고 초기 고조선이 ‘아사달’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란 점을 고려한다면, 고조선인들이 《古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였던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는 요동의 험독(險瀆)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험독’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사기》에서 검토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그 위치는 대체로 요하이동 천산(千山)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되며,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라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결론의 끝 부분에,

“결과적으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으며, 요동지역에 있었던 초기 고조선의 중심은 요하 이동 천산(千山) 이서의 험독일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쓴 고조선 강역에 대한 서영수 교수의 글을 국사편찬위원가 발행한 《한국사》권 4. 79쪽에도 응용하였지만 위로부터 여섯째 줄에 기록된 천산(千山)을 天山으로 기록하는 착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사 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사》는 현재의 한국사를 총망라한 대표적인 책이고 또 북한으로도 전질이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 千山과 天山은 수 천리 이상 떨어진 아주 다른 산입니다. 혼동이 걱정됩니다.

이상으로 여러 학설들을 통한 험독 왕검성의 위치는 요동반도의 천산(千山) 서쪽에서 요하(열수, 패수) 동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곳이 발해의 바다가 아니고 어디란 말입니까?
이곳에서 찾아야 될 험독의 왕검성과 발해의 남쪽에서 찾아야 될 위만조선의 왕도인 왕험성은, 타당한 이유 없이 고구려의 별도였던 한성(일명 남평양. 현 평양)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엉뚱한 자리에 지명들을 옮겨 놓고 그곳을 단군 조선의 왕도인 왕검성이 있던 곳이라 합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신설한 낙랑군을 <<전후 한서>>와 《원사 지리지》의 기록을 무시하고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 발해 해협에서 현 평양까지의 선조들의 국토를 이유도 없이 기권한 것입니다.  만주 대륙을 통째로 말입니다.  만주 대륙은 못난 사학자들의 농간으로 오늘도 그 혼이 구천을 맴돌고 있습니다.


 

 

 

 

 

 

 

 

 

 

 

 

《만주원류고》를 비판하시니 혹시 신라의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주 대도독’이나 성덕왕에게 내렸던 ‘영해군사’라는 직책이 무엇을 하던 벼슬인지 대답해 주실 수 있겠소?
《삼국사기》로 해설하실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

바비님!
지도를 제작하시고 또 기억을 살려 찾아다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때 송님과 만들었던 지도들은 유감스럽게도, 저의 주장 강역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시지 말고 북위 37°53′30″~38°23′58″ 동경 120°35′38″~120°56′26″사이에 있는 섬들의 입체지도를 부탁드려도 가능할지?(묘도 군도입니다)
그리고 바비님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점에 대한 정리소견은 공감하는 바 많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무명 (2004-09-04 13:31:14)  

하하하.
그래 저를 파리에 비유하시군요. 저가 쇠파리 하겠습니다.  



대필 (2004-09-04 13:31:43)  

윗글 중 <패수의 좌표>에 관한 도표가 빠져 있습니다. 한글2002로 만들어서 개체묶기로 만들었는데 올라가지 않네요. 올리는 방법을 아시는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명 (2004-09-04 13:56:02)  

서영수 선생의 견해는 상당히 신뢰할 만합니다. 논리의 무리가 적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관계에서 윤모교수의 무리한 논법에 비할바가 아니죠.
서영수 선생이 말한 千山과 장동균님이 말하는 천산과는 차이가 많을 듯 합니다.

<<험독 왕험성의 위치는 요동반도의 천산(千山) 서쪽에서 요하(열수, 패수) 동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곳이 발해의 바다가 아니고 어디란 말입니까?>>


님은 천산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千山산맥은 요동반도로 쭉 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천산의 서쪽, 요하의 이동에 험독현이 있을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험독은 발해만 속에 있다는 논지를 펼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영수가 말하는 천산과 요수사이라는 말은 지금의 해성이나 대주지역을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영수는 千山이란 용어를 그냥 산이름 천산으로 사용한 것이기때문입니다.
즉 서영수는 험독이 지금의 안산,해성인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죠.

아직 잘 모르시겠나요?
천산산맥이 아닌 그냥 천산 즉 지금의 안산시옆에 있는 천산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천산의 서쪽은 발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영수가 한국사시민강좌에서 말한 요하는 지금의 요하를 지칭한 것입니다.
서영수는 遼東外요와 遼東古塞사이에 초기의 패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동외요를 지금의 양평으로 생각하고 있죠.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다른 학자의 논지를 왜곡인용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대필 (2004-09-04 22:22:32)  

(九山 張東均님의 대필입니다.)

무명님.
여전히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앞에 제시했던 '양평이 바다로 사라졌다'고 한 글은 벌써 잊어버리셨군요.

서교수는 험독이 어디인가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서교수가 험독의 장소를 알아서 글을 썼다면 이 사람이 나타나서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서교수는 양평이 수몰된 사실을 모르고 글을 쓴 것입니다.
동쪽으로는 천산산맥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지요.

그나저나 질문 드린 문제는 어떻게 답변이 준비되셨는지요?  



바비 (2004-09-05 01:57:01)  

부탁하신 지도는 며칠 안에 만들어서 올리도록 하겠어요.  



무명 (2004-09-05 11:41:21)  

장동균님은 모든것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양평이 바다로 사라졌다라는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400년간 바다속으로 사라졌다가 서기190년경에 위치를 옮겨서 나왔다라고 하는데 근거가 없습니다.
한서와 후한서 곳곳에서 양평에 관한 기록은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발해만의 특성을 잘 모르시나본데,,,
옛날의 해안선은 지금보다 더 뒤로 육지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발해만의 수많은 해안쪽 도시들은 당나라시기에도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지금의 동영시나 기구, 첨화, 황화시 같은 도시는 아예 기원전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죠. 바다속에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육지에서 토사가 흘러들어와 얕은 바다를 메꾸어 지금의 지형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발해만은 옛날의 바다가 육지가 된 것이지,
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옛날에는 육지였는데 지금은 수몰되어 바다로 보인다라는 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님은 거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에는 별로 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논쟁의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에 그렇지요. 그냥 책을 보시면 다 나와 있습니다.

저가 도로 질문드리지요.
문무왕이나 성덕왕에게 내려졌던 직책중에 개부의동삼사 상주국은 무슨뜻이지요?
통전이나 자치통감, 아니면 당서를 인용해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바비 (2004-09-05 12:50:47)  

Chang, 1984

  



바비 (2004-09-05 12:54:14)  

일부연구에서는 황해의 경우 해수면이 지금부터 약 6천년전과 2천년 사이 두 번에 걸쳐서 최고에 달했다고 보기도 해요 (e.g., Gao and Li, 1985).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iscuss&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450  



출처 : 品 石 齋
글쓴이 : 구산(九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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