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 왕능은 중국 양주에, | |||||||||
[1]. 박혁거세왕능은 중국 양주에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중략) [삼국사기 신라 본기] 20년(BC:37년)에 경성(京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유체(遺體)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5체(五體)를 각각 장례하여 5능(五陵)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사능(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에 이 능(陵)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대한민족의 반역자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1]. 금성(金城) => 이병도는 註(주)에서 금성(金城)은 여지승람(輿地勝覽) 경주고적조(慶州古蹟條)에서 재부동서리(在府東西里). 토축(土築)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2]. 담엄사(曇嚴寺) =>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증서도 없이 임의대로 註(주)에서 담엄사(曇嚴寺)->경주(慶州) 남천(南川) 남(南)라고 했다. [개가 멍멍 짖는다] (2)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형제간이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고 성모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본문:[仙桃山神母本 中國帝室之女,名娑蘇] : 선도산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북부여 해모수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辰韓:신라)에 도착하여 성자(聖子: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神)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중국제실지녀(中國帝室之女(중국 부여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진한: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즉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상기의 본문을 고찰]해 보면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부인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며, 이를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의 어머니는 같은 사람이며, 형제간이 된다. [상기와 같은 역사적 고증을 한,중,일 학자들 중에 그 누가 부정한단 말인가?] 선도산 정상의 성모사(聖母祀)-사진
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궁궐의 유적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무덤의 도시입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의 각 유적 물에 대하여 1945년 8.15광복 이후 학문적 토론의 비평이나 단 한번의 검증도 없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시로 믿고 있는 얼빠진 민족입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언제까지 왜곡된 국사로 국민을 호도하며 기만 할 것인가? ◆. 경주 김유신의 묘는 남의 무덤이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내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 공명(功名)을 기록하고 또 민호(民戶)로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라. 라고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835년(흥덕왕 10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묘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운 비석이 있고 석상은 최근 묘를 수리할 때 세운 것이다. 즉 김유신의 묘는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가짜 묘이며 다른 사람의 무덤입니다. ◆ 금산원(金山原)에 대한 이병도의 주(註) 이른바 금산원이 어디인지 이것이 당시의 지명인지 혹은 후세의 그것인지 또 혹은 誤傳(오전)인지 아닌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전김유신묘[傳金庾信墓]란 것은 당당한 왕능으로 진정한 김유신묘가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밝힌바가 있다. [金載元 博士 回甲紀念論文集 所載 拙文 [金庾信 考] 愚見으로는 [傳 金庾信墓]는 실상 명칭상의 와전(訛傳(神武. 興武)으로 신무(神武)왕능과 혼동한 것 같고 진정한 유신묘는 저 서악하(西岳下)의 태종무열왕능에서 전면 약 60여미터 위치한 김양묘(金陽墓)의 전면인 세칭 각간묘(角干墓)가 그것이라고 인정 된다. 자세한 내용은 전기졸문(前記拙文)을 참고하기 바란다.(同上) 라고 이병도는 임의로 지정했습니다. [여보시오 소가 빙긋이 웃고 있습니다] ◆ 김유신의 묘지는 강소성 楊州(양주)에 있습니다. 금산원(金山原)은 金山寺(금산사)가 소재하고 있는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에 있습니다. 금산은 중국 楊州(양주)에서 爪州(조주)를 떠나 鎭江(진강)으로 들어가면 강의 왼쪽 앞에 커다란 탑이 있는 작은 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金山(금산)이다. 금산은 높이가 44M인 작은 섬이며 長江(장강)의 기슭에 있다. 金山(금산)에 절이 창건된 것은 東晋(동진:317-420년)이다. 이후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많이 찾았다. 당나라 宣宗(선종:847-859년) 시대에 法海(법해)라는 사람이 法海洞(법해동)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섬에서 금을 캐어 이 금을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황제는 받은 금을 佛堂(불당)이나 탑 伽藍(가람)의 수복 비용으로 충당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이 섬을 金山(금산)이라 부르게 하고 절의 이름도 東晋(동진) 시대에 澤心寺(택심사)에서 오늘날의 金山寺(금산사)로 바뀌게 되었다. 金山(금산)의 서쪽에는 塔影糊(탑영호)라는 호반이 있고 호반의 서쪽에 中冷泉(중냉천)이라는 샘이 있다. 이곳의 샘물은 맛이 좋아 天下第一泉(천하제일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養生之道(양생지도)를 잘 알고 있는 한 노인이 금산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산중턱에 오목히 들어간 큰 암석을 발견하고 파헤쳐 보니 고대의 독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 독항아리 속에 수십 종의 귀중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이 물건을 갖고 떠나기 전에 금산(金山)의 서쪽에다 옮겨 놓고 石翁徙貧帝里(석옹사빈제리)라는 진어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금산을 翁山(옹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292년 원대의 과학자 곽수경은 昌平(창평:하북성 북경 북쪽) 일대의 泉水(천수)를 옹산 아래로 끌어들여 하나의 큰 저수지를 만들어 옹산박이라 이름을 붙혔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 인공호수를 대박호 서호 서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무제는 장안에 있는 昆明池(곤명지)를 개간하여 호수 이름을 곤명호라 하였다. 명나라 무종(1506-1521년) 시대에 이 옹산을 다시 金山(금산)이라 불렀으며 옹산박도 金海(김해)로 개명하였다. ★ 지금 중국의 楊州(양주)는 인구 28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9세기 초에는 이 양주가 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처음 도착하는 도시였다. 양주시가는 사방이 운하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부와 동부의 운하는 수나라 煬帝(양제)시대에 만든 오래된 운하이다. 양주(楊州)에서 爪州(조주)를 거치면 鎭江(진강)에 이른다. ▶ 진강(鎭江)이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孫權:222-258)이 이곳에 한때 도읍을 정했기 때문이다. 진강(鎭江)의 명소는 長江(장강) 연안에 있는 金山(금산). 北固山(북고산). 焦山(초산)의 3개의 바위산이 있다. 이 北固山(북고산)을 가운데 두고 金山(금산)과 .焦山(초산)은 각각 시의 동쪽과 서쪽 끝에 있다. ▶ 후백제의 견훤은 양주 금산사(金山寺)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50권-열전10-甄萱(견훤).] 견훤은 尙州(상주:吉林省(길림성) 영안현) 加恩縣(가은현) 시람이며 本姓(본성)은 李(이)씨였으나 후에 甄氏(견씨)가 되었다. (중략) 견훤은 金山寺(금산사:전북 김제군 금산사)에서 있은 지 석 달 만인 6월 초하룻날 막내아들 能乂(능예)와 딸 哀福(애복)과 애첩 姑比(고비)등과 錦城(금성)으로 급히 도망쳐 나와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만나 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黔弼(검필)과 萬歲(만세)등을 파견하여 “ 鎭江(진강)”의 水路(수로)로 들어가 위로하고 데리고 와서 고려에 이르니 고려의 태조는 후한 예로 환대하였다. 견훤은 태조보다 나이가 10년이 더 많아 尙父(상부)로 받들어 南宮(남궁:강소성)을 주어 직위를 백관들 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楊州(양주:강소성)를 食邑(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金帛(금백)과 蕃縟(번욕)과 奴婢(노비) 각 40명과 內廐馬(내구마) 열 필을 하사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은 한반도 속의 전북 김제군 金山寺(금산사)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 金山寺(금산사)로 들어갔다. 金山(금산)은 중국 楊州(양주)에서 爪州(조주)를 떠나 “鎭江(진강)”으로 들어가면 강의 왼쪽 앞에 커다란 탑이 있는 작은 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金山(금산)이다. 견훤은 강소성 양주(楊州) 金山寺(금산사)에서 있은 지 석 달 만인 6월 초하룻날 막내아들 能乂(능예)와 딸 哀福(애복)과 애첩 姑比(고비)등과 錦城(금성)으로 급히 도망쳐 나와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만나 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黔弼(검필)과 萬歲(만세)등을 파견하여 “鎭江(진강)”의 水路(수로)로 들어가 위로하고 데리고 와서 고려에 이르니 고려의 태조는 후한 예로 환대하였다. 견훤은 태조보다 나이가 10년이 더 많아 尙父(상부)로 받들어 南宮(남궁:남경의 궁전)을 주어 직위를 백관들 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양주(楊州)를 食邑(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金帛(금백)과 蕃縟(번욕)과 奴婢(노비) 각 40명과 內廐馬(내구마) 열 필을 하사하였다. 왜독에 중독돼 넋을 잃은 7천만 한겨레여...! 후백제의 견훤은 전북 김제군 금산사에 있었는가? 중국 강소성의 양주에 있는 금산사로 들어갔는가? 대답하라...! ▶ 따라서 중국의 강소성 양주(楊州)는 신라의 땅인 동시에 후백제 또한 고려의 영토이었습니다. 넷티즌 여러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가 형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지방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대표 박병역(朴炳譯 |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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