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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양에서 먼저 연구한 ‘1350년 전의 한류’

monocrop 2008. 2. 9. 03:45

 

서양에서 먼저 연구한 ‘1350년 전의 한류’



한국의 연예인이나 스포츠인들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받게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최고의 경지로 찬사를 받는 한민족의 우수성은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한류’의 역사는 매우 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류’에 우리보다 먼저 주목한 것은 서양 학자들이었다.

서양 역사학자들이 고구려 유민의 활약상을 연구하게 된 까닭은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의 활약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기록은 평범한 일상사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 기록이 자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는 저널리즘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활발히 활약하는 우리 민족의 기질로 인해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에 대한 많은 사실이 중국 정사에 하나의 열전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필자는 고구려·백제 유민에 대한 서양의 기존 연구 성과를 알아보기 위해 1999년 미국으로 연구년을 떠났다. 인디애나대학에서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는 크리스토퍼 베크위즈 교수와의 만남으로 미국에서의 고구려·백제 유민 연구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은 미국인 민속학 교수와 결혼한 한국인 교수가 필자의 연구계획을 듣고 주선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의 고구려 유민 활동을 연구하려는 생각은 고구려·백제 유민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테마가 설정되면서 고선지, 이정기 일가, 왕모중, 왕사례, 흑치상지, 이유 등에 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인디애나대학에서의 연구는 크리스토퍼 베크위즈와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는 “아직도 한국에서 고선지나 흑치상지에 대한 연구가 없느냐?” 고 물었고, 필자는 “고선지, 흑치상지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라고 화답하였다.

무척 반가워하며 아직 발표하지 않은 고구려와 일본 언어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주었던 것이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다. 그는 학회지에 발표하지 않은 자신의 글이라면서 출력한 논문을 내밀었다. ‘일본어와 고구려어의 공통분모에 대하여: 고구려 고유명사 체계의 재분석(Toward Common Japanese-Koguryoic: A Reexamination of the Old Koguryo nullomastic Materials)’이라는 제목이었다. 논문 제목을 보는 순간 당황하였다. 고구려 유민 연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 그는 동명동인이었다. 순간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연구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졌는데, 이 사람은 고구려 역사는 물론이고 고구려 언어까지 연구하고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한마디로 백인인 그가 고구려 역사와 언어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데 이제 겨우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연구하겠다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겼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이런 속내를 눈치 챘는지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한국의 연구자를 만나니 무척 반갑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 제국(The Tibetan Empire in Central Asia)’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티베트를 상대로 전투를 하였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백제 유민 흑치상지의 치밀한 활약상을 소상하게 언급하였다.

인디애나대학 도서관에 있는 필자의 연구실 옆방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린 A. 스터브가 소개해준 자신의 제자 로드스칼리지 사학과 마이클 R. 드롬프 교수와의 만남은 필자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터브의 전공은 명·청 시대사인데 그의 제자 드롬프는 몽골과 고구려·백제 유민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서툰 한글로 또박또박 ‘흑치상지’를 써 가면서 설명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티베트에서 고선지의 활약상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때 자신만만한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구려 유민에 관한 서양 연구자들의 많은 업적을 보게 된 것은 일 년 동안 체류한 인디애나대학 도서관에서 얻은 결과였다. 1900년대 초에 간행된 서양의 책들이 천으로 양장된 묵직하고 낡은 책이라 그런지 책을 잡을 때마다 느끼는 중후함은 필자의 마음을 더 사로잡았다. 게다가 방문학자로 그 방대한 옛 책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도서관 8층에 묻혀 연구에 몰두할 때 블루밍턴 시내 서점에서 구입한 영국인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는 고선지의 활약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준 흥미로운 연구서였다. 이러한 책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는 자료를 접할 때 연구자만이 갖는 무한한 행복감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많은 자료들을 복사하려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복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할 생각으로 일 년 내내 싼 식빵과 커피로 점심을 때웠지만 그 기억은 뿌듯하고 유쾌하여 지금도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도서관 서가의 낮은 곳에 꽂힌 책은 도서관 바닥에 주저앉아 살펴보고, 높은 곳에 있는 책은 원통 의자에 올라가 꺼내어 보면서 인디애나대학 도서관 서가를 샅샅이 뒤졌다. 고구려 유민에 관한 서양인의 연구물을 찾으면 우선 도서관 안에 있는 작은 개인 연구실로 옮겼다. 많은 책을 먼저 찾아 놓아도 다른 연구자가 그 책을 찾으면 도서관 사서들이 쪽지를 남겨놓고 가져가기 일쑤라서 다시 책을 찾으러 도서관 안을 이리저리 뒤진 적도 무수히 많았다. 그때 인디애나대학 중앙도서관과 대학 부속 예술도서관에서 찾은 고구려 유민 관련 복사물들이 지금도 나의 연구실에 꽤 많다. 찾고자 하는 책이 다른 대학에 있으면 중국계 사서 존 리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책이 집으로 배달되는 시스템이었다. 필자에게는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고구려 유민에 관한 글로는 1912년 런던에서 출판된 오렐 스타인의 ‘중국 사막의 유적들(Ruins of Desert Cathay)’에 고선지의 747년 티베트 원정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스타인이 직접 답사한 험준한 다르코트 고개(Darkot pass)를 통과한 사진까지 곁들여 설명할 정도로 고선지의 대원정에 대해 자세하게 실었다. 계속하여 오렐 스타인은 1933년에 ‘고대 중앙아시아의 길(On Ancient Central-Asian Tracks)’에 고선지의 티베트 원정로를 다시 소개하면서 고선지가 해발 1만5400피트나 되는 다르코트 고개뿐만 아니라 엄청난 빙하지역을 통과하였던 사실은 세계전쟁사에 유일한 사건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70년에 스튜어트 레그는 그의 저서 ‘핵심지역(The Heartland)’에 고선지의 747년 티베트 원정을 소개하면서 한 발 나아가 751년에 타슈켄트의 길목 탈라스 계곡에서 벌어진 당군과 아랍연합군의 포위로 원정이 참패한 사실과 아울러 그 전투로 야기된 동서문명의 전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영국이 고구려 유민의 발자취를 연구하게 된 경위는 동방 진출을 모색한 20세기 초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영국처럼 동방 진출과 맞물려 고구려 유민의 발자취가 연구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고구려 유민 고선지의 행적을 다룬 연구도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역사학자 에두아르 샤반느는 파리에서 간행된 ‘동돌궐에 관한 문헌’(1900년에 설립된 왕립아카데미에서 출판)에서 고선지에 대한 행적을 20여쪽이나 할애할 정도로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프랑스에서 간행된 학술 잡지 ‘퉁파오’에 1929년에 발표된 폴 펠리오의 ‘751-762의 아바시드 도읍지의 중국 장인들’에서는 고선지가 이끈 당나라 병사들이 탈라스 전투 패배로 포로가 되어 아바시드에 중국 문물이 퍼져 나가게 된 문명교류사 측면의 사실을 주목하여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는 1933년에 조르주 드 뢰리쉬가 쓴 책 ‘중앙아시아의 발자취에 관하여’에서도 고선지 장군이 힌두쿠시산맥 안에서 특별한 전술로 티베트 병사를 제압하였던 사실까지 밝혔다.

1975년 퉁파오에 실린 에두아르 샤반느의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았다. 그는 ‘고구려(高句麗)’ ‘호태왕(好太王)’이라는 한자를 사용하면서 비문을 정확히 해석하려 노력하였다.



1975년 퉁파오에 실린 에두아르 샤반느의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았다. 그는 ‘고구려(高句麗)’ ‘호태왕(好太王)’이라는 한자를 사용하면서 비문을 정확히 해석하려 노력하였다.

고구려 유민과 관련해 독일에서 출간된 글은 1978년 중국인 류 젠카이가 쓴 ‘당의 신당서에 나타난 조소하며 저항한 반신에 대하여’(동아시아 인문·자연과학엽회 보고서, LXIV, 함부르크 출판)로 고선지와 이정기의 사촌형 이유와 이납에 관한 사실을 독일어로 소개하였다. 그 외에 고구려 유민에 관해 독일에서 출판된 글이 다수 있으리라 짐작되나 그 이상은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찾지 못하였다. 또 서양학자들이 쓴 고구려 유민에 관한 연구 업적의 성과는 필자가 쓴 ‘고구려 백제 유민 이야기’에서 인용하였다.

최근 고구려 관련 역사 드라마가 인기절정이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이 그 예이며, 고구려 멸망 후 대량으로 발생한 유민에 관한 드라마는 ‘대조영’이다. 고구려 관련 드라마는 우리 고대역사의 관심을 한 단계 높였기 때문에 역사 이해를 쉽게 해준 공로는 칭송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진실성과 함께 재미를 더하기 위해 가미되는 드라마적 요소로 인해 그 시대의 인물 설정 등이 빗나갈 경우, 역사 드라마의 선순환 측면 못지않게 가공할 정도의 부정적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역사의 중요성이 희박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의 이 시대 시청자들은,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로서 역사를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의 역사관을 만든다. 따라서 역사 드라마가 재미를 첨가하는 드라마적 요소는, 역사의 줄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역사성과 더불어 드라마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더 빛을 발할 것이다. 또한 옛 시대의 문화에 대한 고증도 드라마적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성과 전통에 기반을 두며, 한 차원 높여 제작됐을 때 드라마를 통해 우리 역사가 다시 살아나리라 믿는다.


/ 지배선 연세대 교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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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大 교수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
고구려 심포지움 참가 외국 학자들 “중국 역사 왜곡은 억지”
미디어다음 / 신동민 기자 media_dongmin@hanmail.net&CC=&BCC=" target=new>
"중국의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빈약"
28일부터 30일까지 고구려연구회가 개최한 ‘고구려의 정체성’ 심포지움이 개최됐다. 사진은 심포지움 장면. ⓒ미디어다음 신동민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제3국 학자들의 논문과 리포트가 잇따라 소개돼

눈길을 끌고있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가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28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한 ‘고구려의 정체성’ 심포지움에서 美 하버드대학 바잉톤(Mark E. Byington) 교수 등이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바잉톤 교수는 심포지움에 제출한 리포트를 통해

“중국은 국민들이 중국을 소수민족의 집합체 또는 근대 민족국가로 인식하도록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는 한국과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바잉톤 교수는 또 “고구려의 강역을 계속해서 중국의 영토로 두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가 빈약하다”고 꼬집으면서

“옛 고구려 영토가 현재 중국의 영토에 있을 뿐

고구려사는 과거 천년이상 한국의 역사로 인식되어왔다”고 지적했다.

몽골 러시아 학자들도 "중국이 억지 부린다"

아 오치르(A Ochir) 몽골국립역사박물관장은 28일 직접 심포지움에 참가해

고구려는 한국인들이 세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국가”라며

“고구려를 만든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며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아바에프(Abaev N. Viatcheslavovtich) 러시아 투바대학 교수도 30일 심포지움에 참석해

“고구려 등 북아시아 씨족은

고대 중국, 특히 중원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 관계가 없다”며

“오히려 남만주 지역의 한국인들이

중국 본토로 들어가 중국인들의 인종적, 민족적 원류를 갖추는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중국의 손진기(遜進己, 심양동아연구중심) 등 중국 학자들은

심포지움에 제출한 리포트를 통해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버릴 것

▲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민족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은 속국 등

기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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