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광개토태왕비와 임나의 실체

[스크랩] 광개토대왕 비문 / 독고혁

monocrop 2007. 11. 2. 03:30

 

 

광개토대왕 비문

 

출처 : 독고혁

중국조선족 저널리스트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391~412)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호태왕"(好太王) - 일본, 중국학자
"광개토왕"(廣開土王) - 한국, 일본학자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한국학자
따라서 한국인들은 '호태왕'이 누구인지 모르고, 중국인들은 '광개토왕'이 누구인지 모른다. 완전히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더구나 '대왕'이란 칭호는 한국에서만 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생략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호칭을 위해서는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때 고구려인들이 쓴 금석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호가 나온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광개토태왕 비석 (위 왼쪽 그림참조)
"국강상광(대?)개토지호태성왕" (國岡上廣(大?)開土地好太聖王)
- 모두루묘에 쓰인 글 (위 오른쪽 그림참조)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 경주 호우에 쓰인 글 (아래 그림참조)
    호우 :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뚜껑이 딸린 합. 1946년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호우총(壺塚)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높이 19.4cm, 그릇의 깊이 10cm, 몸통의 지름 24cm이다.  그릇과 뚜껑의 각 표면에는 3가닥씩의 융기대(隆起帶)를 돌리고, 뚜껑에는 다시 윗부분에 1가닥을 돌린 위에 화형(花形) 10 꽃잎의 유좌에 구슬 같은 손잡이 꼭지가 달려 있다. 그릇 밑받침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도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고 돋을새김한 4행 16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태왕이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이며, 이 글귀는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태왕릉용 호우'라는 뜻이다. 또 이 글자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과 같은 웅건한 한예체(漢隸體) 이다. 이 제기(祭器)가 어떠한 경로와 이유로 신라의 서울에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제조연대가 뚜렷한 고구려 때의 공예품이란 점에서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여기서 '국강상'은 태왕릉이 있었던 땅 이름이므로 제하고 나면, 공통된 호칭이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기록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굳어졌고, 중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국토를 넓혔다는 뜻을 가진 '광개토왕'보다는 호태왕'을 선택한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태왕'(太王)이란 당당한 칭호를 쓰지 않고 '왕'이라 낮추어 쓴 것은 당시 사대주의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사대주의 사가들의 과오를 또다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중국은 건국신화인 3황5제에서 '황제'를 따내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황제(始皇帝)라고 했다.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칭호를 쓰기 위해 '천황'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왕중왕'이라는 뜻을 '대왕' 또는 '태왕'이라고 불렀는데, 광개토태왕은 특히 '태왕'이란 칭호에 가장 걸맞는 성군이었다.
     이 '태왕'이란 칭호는 연호(年號) 사용이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天際) 등과 함께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당시의 이런 기록을 제대로 살려 고구려의 진면목을 밝히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임무일 텐데, 우리 스스로 이런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1996년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에서 '광개토호태왕 연구 100년'이란 주제로 처음으로 국제회의를 가졌을 때 '광개토태왕'이나 '광개토호태왕'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자는 공식 제안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제안에 따라 중국학자, 심지어는 일본학자까지도 '광개토호태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태왕을 쓸 수 없다고 통보해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이었다. 이유는 교과서에 태왕이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민족의 장래를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언제까지 이렇게 닫힌 논리를 물려줄 것인가.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을 높이고 민족적 자긍심을 살리려면 과감하게 '태왕'이란 명칭을 써야 할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서거한 뒤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했지만 재위 기간동안에는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영락태왕'이라고 일컬었다 (그림참조 , 비문 탁본 중 일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뜻을 가진다. 연호란 임금이 자리에 오른 해에 붙인 연대적 칭호인데 다음 임금이 자리에 오르면 그 이듬해에 이 칭호를 고치게 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우리 선조들이 우리나라 자체의 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할 수 없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에 이르는 동안 명나라에서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네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고,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사가들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면서 옛날 고구려와 신라가 썼던 연호를 중국에 대한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스스로 빼 버린 것이다. 역사책에 연표를 만들 때도 맨 위쪽에 중국의 연호를 써 넣고 그 밑에 우리나라 왕조들을 맞추어 배열하는 한심한 역사 기술을 했다. 때문에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나라도 연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삼국사기보다 700년 이상이나 일찍 씌어진 비문에서 광개토태왕이 중국과 대등하게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난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확실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는 광개토태왕비 1,775자 가운데 딱 두 자뿐이다. '영락 5년'으로 시작되는 부분인데, 비문이란 간단명료하게 쓰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처음에만 연호를 쓰고 그 다음부터는 '영락'을 생략한 채 6년, 8년, 9년, ......20년 하는 식으로 햇수만 적었다.
 
 
가. 개관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비석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거대한 것이 바로 광개토태왕비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발표이며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높이 6m 39cm, 가로 폭 2m, 세로 폭 1.46m. 광개토태왕비는 이러하기에 그 규모면에서 가히 세계 최대의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돌은 채석장에서 캐어 다듬은 것이 아니고 자연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집안 현지에서는 이런 돌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돌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는 돌의 질을 각력응회암이라고 발표했는데 현지에서는 백두산 천지에 있던 강용석(降龍石)이라는 전설이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우리 눈 높이보다 네 배나 높기 때문에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여서 그 웅장함에 압도되지만,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자체가 커서 멀리서 보면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비각은 1928년 집안현 지사의 발기로 처음 세워졌는데, 이 2층으로 된 비각이 1976년까지 계속되다가 현재는 1982년 중국 당국에 의해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철책으로 된 담이 설치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으로 되어 있는데,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이다. 길이 3.35m, 너비2.7m의 장방형으로 제3면을 빼놓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비신은 사각기둥 모양인데 어느 정도 다듬은 부분도 있으나 거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돌의 몸과 머리 부분만 약간 손질하고 거칠고 투박한 돌 네 면에 글자를 쓴, 소위 4면환각비(四面環刻碑)는 잘 다듬어서 글을 새기는 중국의 비석 제작방법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 고유의 '고구려식 비석'이다. 이것은 선돌(立石)에서 변천된 우리 고유의 형식으로 거석(巨石)문화의 유풍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크기에 있어서 가히 세계 최고, 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지만, 광개토태왕비의 위대성은 네 면에 빽빽하게 기록된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태왕비 네 면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이 조각된 면적은 각 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5.5m 높이부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가로줄을 긋고 각 줄마다 약 13cm 간격으로 가는 세로줄을 그었다. 여기에 고구려 특유의 웅장한 필체로 1,775자의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글자 한 자의 크기가 14~15cm나 된다. 현재 글자의 깊이는 5mm 정도이다. 글자 수는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정밀 조사한 현지 박물관장 왕건군에 따르면 1,775자이고, 1960년대 현지에서 조사를 마친 북한 학자 박시형은 1,802자라고 해 2면에서 23자, 4면에서 4자가 더 많다. 광개토태왕비의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풍부하여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몽골 학자가 광개토태왕비를 일컬어 '바위책'이라고 표현했는데, 매우 적절하고 인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광개토태왕비는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선 기록이고, 또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금석문이다. 문헌이라는 것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시대의 상황에 따라 빼고 더한 것이 많고, 베끼는 과정에서 오자.탈자가 많을 수 있지만, 금석문이란 당시 기록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는 자료이다. 우리는 이처럼 광개토태왕비가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기록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 고대사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역사학적 가치에서 으뜸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기록 내용이 기년식(紀年式)으로 되어 있어 중국, 부여, 신라, 백제, 가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주변 국가의 연구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더 활발한 형편이다. 우리는 광개토태왕비의 내용을 연구함으로써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특히 지금까지 중국 위주였던 우리나라 사서의 역사 서술방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확실한 잣대가 생겨 사대주의 사가들이 스스로 비하시킨 우리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되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것이다. 또한 광개토태왕비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서법(書法)자료의 하나일 뿐 아니라 동양의 금석학(金石學)상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광개토태왕비에는 비신의 웅장함, 서체의 질박함, 자품(字品)의 근엄함 등 독창적인 면이 있고, 중국의 옥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식 글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1880년 개간을 하던 농부가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하고 관청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현의 지사가 금석문에 밝은 관리를 보내 조사케 하였다. 그가 비에 덮인 이끼와 덩굴을 태우고 탁본을 하여 금석 애호가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비로소 이 비가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탁본은 비문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만 했을거라고 보고 본격적으로 전문을 탁본한 것은 2년 뒤의 일로 본다.
     비문 전체가 탁본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으로 보는데 그렇게 탁본된 비문은 다음 해에 일본으로 반입되고, 이때부터 일본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약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연구된다. 그리하여 1889년(고종 26년)일본에서 회여록 제5집에 그 내용이 발표되면서부터 광개토태왕비는 갑자기 한.일 관계사의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사국인 한국과 비석이 서 있는 중국에서는 아직 연구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당시, 일본은 무엇 때문에, 그것도 육군참모본부가 일본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5년 동안 압록강 각에서 발견된 옛 비석의 내용을 파헤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던가? 광개토태왕비의 수수께끼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 일본사서의 임나일본부관련 광개토태왕비 인용
     1973년도 검정필 신일본사(삼성당)의 '조선반도 진출'이란 항목에는
AD 3세기경 조선반도 남부에는 그 무렵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韓)민족이 소국가군(小國家群)을 만들어 마한.진한.변한의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일본의 통일을 전후하여 4세기 전반경에는 마한과 진한이 각기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개의 한 민족 국가로 통일되었다. 4세기에 들어오자 야마토(大和)정권의 세력은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아직 소국가군 상태에 있었던 변한을 영토로 삼고, 이곳에 임나(미마나)일본부를 설치하였으며, 391년에는 또다시 군대를 보내 백제.신라도 복속시켰다. 조선반도 남부에 지배력을 구축한 야마토 정권은 조선의 부와 문화를 흡수하여 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국내 통일이 크게 촉진되었다. 조선반도 북부에서 만주에 걸쳐 일찍이 퉁구스족이 세운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어 낙랑군을 병합하여 세력이 강했다. 391년 일본의 조선 출병(出兵)은 지금도 중국 동북부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호태왕)비에 씌어져 있다. 이 비에 따르면 일본군은 조선반도 중부까지 북상하여 신라를 구하기 위해 남진한 광개토왕 군대와 싸우고 있다.
     이 '지배와 출병'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사료가 바로 한국인 선조가 직접 쓴 금석문, 광개토태왕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에 비슷하게 실려 있으며, 해방 이후 정설로 정착되고 또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로 여겨지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에 대해서 일본 학자 자신들도 많이 인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교과서가 있고, 모든 일본인들의 머리 속에는 '고대 한국지배에 대한 임나일본부설'이 굳어져 있어 '한반도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일본이 지배해 온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본인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본사료로 사용된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는 한.일 관계사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 쟁점이 되는 두 부분과 그 해석
     임나일본부설의 핵심내용인 일본이 4세기 말에 한국을 지배한 근거라고 주장하는 비문의 내용은 어떤 것이며 그 진상은 어떠한가. 대표적인 논쟁점인 두 가지 기사를 살펴본다.
(가) 영락 5년 (신묘년, 395) 기사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기 때문에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나)영락 10년 (경자년, 400) 기사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을 지나 신라성에 다다랐을 때 왜병(倭兵)이 그 안에 가득하였으나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이하 원문 8자 훼손)...... 되돌아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이르러 계속하여 성을 함락하니 성이 곧 함락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주둔군이 ...... 신라성 ...... ?성 ...... 왜(倭)가 가득하였다. 왜(倭)는 성을 무너뜨렸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拔 新羅城?城 倭滿倭潰城大......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기사를 근거로 하여 첫째,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고 둘째, 임나에 일본 주둔군이 상주하는 일본부(日本府)가 있었다는 정설을 정립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정한론(征韓論)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조직과 관학에 의해 만들어진 이와 같은 역사 왜곡은 일찍이 구한말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에 의해 그 부당성이 지적되기 시작했다. 광무 9년(1905년) 황성신문에서는 5회에 걸쳐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해석을 해설하며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4년 후인 융희 3년(1909년)에도 서북학회월보에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신채호.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 35년간 우리역사를 말살하고 왜곡시킨 상황에서 연구가 진전될 수도 없었고 연구했다고 해도 발표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 성과는 일제 강점기 때 연구한 것을 해방 뒤 1955년에 발표한 정인보의 논문에서부터 드러난다. 정인보의 업적에 이어 1963년 현지 조사를 실시한 북한의 박시형과 김석형의 연구 성과가 1966년에 나온다. 세 사람의 원문 판독 성과는 거의 비슷하지만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먼저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이다.
-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으로 삼았다.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정인보 등 한국 학자 해석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서 쳐부쉈다. 백잔(제)이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위 두 문장의 차이는 구두점 두 개의 위치가 다를 뿐이지만 번역문의 내용상 주어가 바뀌어 버린다. 구두점 하나가 이렇게 다른 뜻이 되어 버리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결국 한문이란 어떻게 띄어쓰기를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뜻이 바뀌는 것이다. 마치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고 잘못된 것을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로 바로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1970년대 이후에도 문정창.정두희 등이 위와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는데, '고구려 태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문에 어떻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신하가 된 사실을 기록했겠느냐'는 상황 논리도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태왕비에서 가장 문제되었던 것이 위의 신묘년 기사인데 이에 못지 않게 큰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 경자년 기사이다. 그러나 경자년 기사의 허구성은 간단히 드러났다. 1981년 중국 기관에서 정밀한 탁본을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주운대탁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탁본에서 글자가 새롭게 판독되면서 전혀 새로운 해석이 나온 것이다. 두 가지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 회여록의 내용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滿倭潰城?......
(왜군이) 되돌아 추격하여 임나가라까지 이르러 계속 성을 공격하니 성이 곧 함락되었다. 안라인 주둔군이...... 신라성...... ?성 ......왜가 가득하였다. 왜는 성을 무너뜨렸다.
- 100년 뒤 중국 주운대의 정밀탁본을 바탕으로 한 중국학자 왕건군의 풀이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鹽城 倭寇大潰 城大......
왜군을 뒤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계속 성을 공격하니 곧 함락되었다. 안라인(신라인) 수자리군사가 신라성염성을 공격하자 왜구(倭寇)가 크게 무너졌다. 성내......
    '?래'(?來)가 '자왜'(自倭)로 밝혀짐에 따라 '추격하던 일본군'이 '추격을 당하던 왜군' 형상이 되고, '왜만왜궤'(倭滿倭潰)가 '왜구대궤'(倭寇大潰)로 밝혀짐에 따라 '가득 한 왜군이 성을 무너뜨렸다'가 '왜구가 크게 깨졌다'로 뜻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비문이란 갈수록 마모되고 탁본을 많이 하다 보면 그 부분이 훼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100년 전의 글씨가 틀리고 100년 뒤의 글씨가 더 정확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림 중 왼쪽의 사카와 쌍구가묵본은 마치 붓글씨로 쓴 것처럼 정확한데도 불구하고 상태가 훨씬 나쁜 오른쪽 주운대의 탁본을 훨씬 더 인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여기에 사카와가 만주에서 일본으로 가져온 탁본의 진위 문제가 나오게 된다. 그림에서 쌍구가묵본의 만(滿)자는 마치 쓴지 얼마 되지 않은 붓글씨처럼 명확한데, 1981년에 정밀탁본한 것을 보면 분명히 구(寇)자이다. 지금도 '구'자는 아주 쉽게 식별할 수 있는데 100년 전에 실수해서 '만'자로 그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누가 변조한 것인데 그 주범이 누구일까? 이것을 이본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이진희 씨다.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탁본과 달리 비문 위에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거나 이미 한 탁본을 대본으로 하여 복사하는 것인데, 이런 작업을 쌍구(雙鉤)라 한다. 쌍구한 것을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면을 먹으로 칠해 탁본처럼 만든 것을 가묵(加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탁본하는 사람이 그 글자를 보고 나서 그 모양 그대로 그리는 과정에서 명확하지 않은 글자는 자의적으로 고치거나 가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쌍구가묵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정확하게 비면의 상태를 복사하는 탁본과는 다르며, 좀더 분명하게 정의한다면 탁본이 아닌 것이다.
 
3) 광개토태왕비의 변조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변조설이 광개토태왕비의 주된 테마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진희 씨가 쓴 '광개토왕릉비의 탐구'란 한 권의 책이 그 기폭제가 된다. 이진희씨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온 사람은 현지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사카와 중위 라는 것과, 그렇게 들여온 쌍구가묵본을 이용해 일본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참모본부가 임나일본부설을 창출해내는 과정을 추적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이진희 저, 이기동 역,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일조각)
     한편 이진희 씨는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한 사실을 들어 그 당사자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석회를 발랐는지를 추궁해 나간다. 비면의 요철이 심해 탁본하기가 어려워 글자가 없는 곳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하기 때문에 석회를 바르는 과정에서 비문을 변조할 수 있게 된다. 이진희 씨는 태왕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사카와의 쌍구가묵본을 보강하기 위해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저지른 일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진희 씨의 주장은 한.일 양국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따른 연구열도 높아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태왕비에 석회를 발랐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 학자들이 일찍이 밝힌 일이고 중국 학자들도 확인하고 있다. 또 석회를 바르고 뜬 탁본도 상당히 존재하고, 그 내용이 사카와의 쌍구가묵본과 거의 같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석회를 발랐느냐 하는 것인데 일본은 그 행위를 부인하고 있고 중국의 왕건군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 왜곡을 위해 저지른 헤아릴 수 없는 죄과들을 보았을 때 숨겨진 것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억울하게 뒤집어쓴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그만큼 무슨 일이든 용의주도하게 추진하기 때문이다.
 
4) '왜=일본'이 아니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에 나오는 임나는 옛날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 있었던 부족국가, 즉 임나가야를 줄인 말로 신라에서는 금관가야 다음으로 6가야의 맹주국이었다고 해서 대가야라고 불렀다. 그런데 바로 이 임나에 왜(倭)가 일제 강점기의 총독부처럼 '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 임나일본부설인데, 이는 712년 편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고사기는 원래 고대의 신화.영웅전설.민간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일본이 한반도 경영설을 주장하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정한기사(征韓記事)를 보면 그 값어치를 쉽게 알 수 있다.
황후(신공)는 신이 지시한 대로 서정(西征)을 시작하였다. 바다로 건널 때 물 속의 크고 작은 고기들이 전부 모여 배를 떠밀고 항해하였다. 도중에 순풍이 크게 일어 배는 풍랑을 타고 전진하였는데 배가 일으킨 파도가 신라국의 국토를 절반이나 물에 잠기게 하였다.
     이런 황당한 신화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 학자들도 고사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선조가 세운 광개토태왕비에 임나가야가 나오고 왜가 등장한다는 것이 사카와가 그려 온 탁본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는 이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여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살려 줌과 동시에 한국정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였던 것이다.
     문제는 광개토태왕 당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없었는데 어떻게 '일본부'를 세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이란 국호는 광개토태왕 시대보다 거의 300여 년이나 뒤인 7세기 후반에 가서야 쓰게 된다. 여기에 대한 일본의 답은 왜=일본, 즉 광개토태왕비에 나온 왜는 바로 일본의 선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 연구 성과들이 최근 북한 학자들에 의해 쏟아져 나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먼저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서 광개토태왕 당시는 야마토 정권이 서부 일본을 통일하지 못했고, 강력한 기마군단을 가진 고구려와 맞서 싸우거나 이미 기마전투 방법을 알고 있던 가야를 격파하여 200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조희승), 더 나아가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는 '북큐슈 일대의 백제의 조종 밑에 움직이던 친백제, 친가야적 존재'(김유철)라고 주장한다.
     최근(1994년)에 나온 '가야사'에서 조희승은 왜를 '북큐슈 이토지마 반도에 있었던 가야 계통 소국'이라고 더욱 구체화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왜가 백제나 가야에서 건너간 유민들이고, 당시의 전투는 고구려.신라 대 백제.가야.왜의 연합세력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왜는 당연히 본국을 도와 싸워야 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중국의 학자들도 동조하고 있다. 광개토태왕 연구의 권위자인 왕건군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한다.
첫째, 4세기 말 일본열도에서는 아직 통일된 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다.
둘째,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왜는 해적처럼 한반도 남부를 침범한 세력이지 신라와 백제를 신하국가로 삼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연구 성과는 '왜=일본'이라는 근본적인 설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문의 조작이나 탈락 같은 것을 논의하기 이전에 일본에 대한 본질적인 부정이 되어 임나일본부설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라 주목된다.
 
출처:[가리산 신령]
 

 

독고혁

중국조선족 저널리스트

출처 : 자유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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