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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허왕후는 인도 남부에서 왔다”-아요디아 쿠뺨

monocrop 2007. 10. 22. 15:10
2005년 8월 12일 (금) 11:24  뉴스메이커

[화제]“허왕후는 인도 남부에서 왔다”

‘삼국유사’ 기록 등으로 볼 때 ‘아요디야 쿠빰’이 출신지로 추정돼



인도에서 배를 타고 서기 48년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許黃玉, 32~189)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인도 북부 산악지대인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야(Ayodhya)가 아니라 남동부 해안의 같은 이름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유사에서 허왕후가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喩陀國) 출신의 공주”라고 주장함에 따라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가 아유타의 뿌리를 찾은 끝에 인도 최대 주인 우따르 프라데시주의 아요디야라고 결정했다. 이는 인도의 수많은 지명 가운데 아유타와 발음이 가장 흡사한 곳이 아요디야이기 때문이다. 아요디야는 ‘싸움이 없는 곳’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힌디어의 뿌리)로 그 발음도 당시엔 ‘아요다’였다.

이에 따라 오늘날 600여만 명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성씨인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가락중앙종친회 등이 주도하여 아요디야시 갠지스강 일원인 사류강(Saryu River) 주변 10여만 평에 ‘가락공원’을 조성한 데 이어 경남 김해시는 아요디야시와 자매결연을 하고 허왕후 유허지 기념비와 김해박물관 앞 문화의 거리 2㎞를 ‘아유타로’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에 ‘아요디야’는 두 곳

하지만 인도에 ‘아요디야’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또 하나의 아요디야는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수백 개가 되는 타밀어를 쓰는 인도 남동부 타밀 나두주(州)의 주도 첸나이(영어 이름 마드라스) 동쪽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다. 힌두교 국가 인도와 인접한 회교도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도 힌두교 마을 아요디야(현지의 뱅골어 발음은 아조다)라는 지명이 있어, 인도대륙에만 아요디야가 모두 3개나 존재한다.

필자는 지난 수년간 캐나다 토론토대학 서아시아연구센터 책임자인 타밀 출신의 셀바 카나가나야캄 교수 등 인도학 교수와 힌두교 성직자, 인도 북부 출신의 아리안 인도인, 남부 출신의 타밀인과 접촉하고 여러 도서관에서 인도와 타밀에 관한 연구서 및 역사지도책 등을 추적한 결과 허왕후가 말한 야유타를 아요디야 쿠빰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유타가 인도 북부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으로 추정하는 필자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는 히말라야산맥 아래 갠지스강 중류에 위치한다. 허황옥이 배를 타고 동아시아로 향하기 위해선 무려 1000㎞나 되는 강줄기를 따라 갠지스강 하류의 인도 북동부 캘거타까지 와서 벵골만의 바닷길로 나서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출발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집채만한 파도가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 삼킬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해” 허황옥은 출발지로 되돌아가 부친을 만난다.

만약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야에서 출발했다면 갠지스강의 물줄기를 역류시켜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약 2000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집채 만한 파도’도 바다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왕후가 서기 48년 벵골만에 속하는 인도 남동부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에서 배를 타고 동아시아를 향해 출발했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또 허왕후가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친으로부터 받은 파사석탑(婆娑石塔) 문제도 있다. 약간 붉은빛의 반문이 있는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축소형 돌탑인데, 이 파사석이 인도의 내륙지방이 아니라 동부 바닷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왕후 후손으로 김해 금강병원 원장이자 배달문화연구회장인 허명철 박사는 필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파사석은 우리나라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고 인도 동부 해안 벵골만 동쪽의 안다만군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돌”이라면서 “이 돌이 바닷가가 아닌 인도 내륙 아요디야의 허황옥 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부친이 왕의 지위에서 특별히 입수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셋째 근거는 언어의 유사성이다. 허왕후가 가야의 초대 왕후인 만큼 가야 사람에게 자신의 고향 말을 전했을 텐데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쓰이는 힌디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언어상 유사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요디야 쿠빰 및 타밀 나두주의 언어인 타밀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유사점이 아주 많다. 타밀어와 우리말은 뜻글이자 소리글로서 완전히 같거나 아주 비슷한 단어가 수백개나 되고 어순도 같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말인 타밀어를 가야 사람에게 전해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말에 남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원로언어학자 강길운 교수는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가야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1992년)라는 논문에서 가락과 가야는 모두 드라비다 계통의 말로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가락은 구(舊)드라비다어로, 가야는 신(新)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드라비다어는 타밀어의 뿌리다. 따라서 타밀어의 뿌리로 물고기를 뜻하는 가락·가야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이름이 된 것은 허황옥이 타밀 계통의 사람이며 가락국으로 이동해 왔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우리말에 남은 타밀어의 흔적

넷째, 타밀 나두, 안드레 프라데쉬, 카르나다카, 케랄라, 인도 남부 4개주에 집중 거주하는 드라비다인은 부계사회의 북부 아리안 인도인과는 달리 어머니의 성을 부여하는 등의 모계사회였다. 허왕후가 10명의 아들 가운데 2명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부여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모계 성을 탄생시킨 것도 드라비다인의 모계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여섯째, 허황옥이 김해에 도착하여 보여준 비단바지 등은 아요디야 쿠빰과 근접한 당시 인도 최고의 비단생산지 칸치푸룸에서 구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단바지뿐만 아니라 금수능라(錦繡綾羅:옷감)·의상필단(衣裳疋緞:의복류)·금은주옥(金銀珠玉:패물류)·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최고급의 결혼 예물은 아요디야 쿠빰에서 불과 70㎞가량 떨어진 칸치푸룸에서 생산된 것이다.

칸치푸룸은 힌두교 7대 성지중 하나이며 당시 인도 남동부지역의 중심지로서 중국의 비단 제조술을 배워 이미 기원전 1세기에 실크를 로마제국으로 수출할 정도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선 비단 및 손으로 짠 비단 사리(Silk Saree)의 최고 산지로 손꼽히고 있다.

일곱째, 김수로왕릉과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 힌두교사원에 있는 쌍어문양(雙魚文樣;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똑같다고 하여 아요디야 고향설을 뒷받침하고 있으나 물고기 무늬는 인도의 다른 힌두교 사원들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물고기 무늬는 타밀인 등 드라비다족 전통의 문양이기도 하다. BC 1500년께 아리안족이 침입하기 전 인도 북서부 인더스강가에 드라비다족이 건설한 하라파(Harappa) 문명에서 물고기 문양이 사용됐다. 물고기 문양은 인도뿐만 아니라 스키타이족, 티베트, 몽골, 중국 등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에서 물고기 무늬가 대거 발견된다고 이것이 곧바로 허왕후의 출신지라고 단정하기에는 논리의 비약이 크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근거로 필자는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가 아니라 남부의 ‘아요디야 쿠빰’으로 추정한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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