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비쳐진 세상

일본인들의 역사관에 대해 01

monocrop 2007. 10. 17.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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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부산시 북부의 예안리(禮安里) 고분군(1∼6세기)을 한국과 합동으로 발굴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북규슈형의 야요이사람이 이들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실을 알았다.


이밖에 89년 야요이시대의 대표적 유적(吉野ケ里)에서 나온 인골을 정밀 측정한 학자(松下孝幸·長崎대 의학부)는 『이 인골이 조선반도 남부의 조도(朝島)의 조개 무지, 예안리 고분인, 동북 조선의 초도(草島)인, 중국 북부의 서하(西夏)인과 비 슷하며 조선반도로부터의 도래인으로 생각된다』고 못을 박았다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는 최근 우리 겨레의 일본 이주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서 다른 어용 일본인 학자들과 큰 대조를 보였다. 그는 1995년 11월10일에 낸 책(『日本人の成り立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긴키(近畿) 지방의 고분시대(古墳時代)인의 특징은 대체로 이 지방 현대 일본인에 가깝고 또 조선반도의 현대인과도 닮았다. 이 사실은 당연히 도이가하마 유적의 야요이인과도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규슈 동부의 고분인처럼, 긴키의 고분인도 도래계 집단의 특징이 우세한 셈이다. 긴키인, 특히 기내인(畿內人, 奈良·京都·大阪지방 사람)은 각별히 조선인 집단과 가까운 뜻에서 「특수한 일본인」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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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시대 우리 겨레의 일본이주는 다음의 네 차례로 나눌 수 있다(上田正男).
제1기. 서기전 2백년께 이주 집단의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2기. 4∼5세기로 이주민들은 여러 소국가들을 통합, 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가는 동시에 긴키지방에 조정을 세워서 국가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3기. 5세기 후반 ∼6세기 초로 백제계의 많은 기술자들이 건너와 농경·기술·학문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4기. 7세기 후반으로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으로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은 사람이 건너갔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8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性氏錄)에 따르면 기내(畿內·京都에서 가까운 山城·大和·和泉·攝津의 다섯 곳)의 1천1백82씨족 가운데 거의 3분의 1을 한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더욱 두드러지는 씨족은 신라계의 진(秦)씨와 백 제계의 한(漢)씨 그리고 고구려계의 고려(高麗)씨들로 8세기에는 동부 일본에 까지 퍼져 나갔다. (초기는 물론 가야계의 김씨와 백제의 부여씨로부터 수천가지 성이 생겨났고, 쉽게 창씨하는 문화는 그뒤에도 이어졌다.)

 

1984년에 나온 통계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다(小山修三). 한국인의 대거 이주는 서기전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1천년 동안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 죠몬시대 말기에 7만5천으로 줄어들었던 인구가 야요이시대에는 60만으로 불어나고 고분시대에는 5백4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은 전세계 인구증가율(당시)을 1%로 봤을 때도 4%에 이르는 수치여서 대량의 인구 유입을 나타내는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

 

뒤를 이어, 하니하라 가즈로오는 당시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이 1:8.6이라는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계산한 나 자신도 놀랐을 정도의 엄청난 숫자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더 더욱 놀랄 것』이라는 소감을 적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엄청난 숫자고 일본 학계나 국민에게는 「폭탄선언」과 다름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7세기에는 일본 전인구 10명 가운데 한국인이 약 9명이고 일본인은 1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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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재명(齊明)여왕이 2만7천여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일본서기』)은 또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학자들이 추정하는 당시의 인구 5백6십만명에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이 다.

그 반(2백80만명)을 남자로 잡고 노인과 어린이를 다시 반으로 치면 전인구의 2 0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나선 셈이다. 이들의 패망소식이 전해지 자 당시의 귀족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겼으니 조상의 무덤에 두 번 다시 못 가게 됐다」고 통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663년 9월7일조에 전한다.'


한마디로 7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이 백 제가 망하고 10년 뒤(670)에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이 무렵에 나온 역사서를 『일본서기』라 하여 나라 이름을 앞세운 것도 그 내용이 백제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7세기 후반 이전까지의 일본은 한국에 있는 나라들의 해외 영토였던 것이다. 백제멸망 후 1천3백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와 일본은 완전히 남남 이 되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기질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 오고 있으며 일본어란 말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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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에 5세기가 되면서 엄청난 규모로 고분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 대형 고분은 모두 오사카와 나라지역에 본포되어 있음은 주목할 사실이다. 이들 고분에 부장되어 있던 수많은 부장품들은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였다.(3세기까지 말(馬)이라는 것을 없었다.)

바로 가야와 백제인들이 전투에 쓰던 마구와 당시의 최신 무기인 철제무기들이었다.

(옛 천황들 무덤들인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이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도쿠 왕릉이 무너져 이를 수리하게 되었을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 대학의 쓰노다 류시쿠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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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가야, 백제인들의 기마부대에 의한 야마토정벌을 부인하고 싶다면 닌도쿠 왕릉등 현재 일본에 있는 유적부터 발굴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가야와 백제유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러한 발굴을 뒤로 덮어 두고 무슨 역사를 추적하겠다는 것인가. 먼 원류가 아닌 직계 성립세력의 문화를 덮어 두고 어디에서 그 원류를 찾고자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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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일본의 성립세력에 대해 밝혀 놓은 연구들은 무수히 많다.

…지금의 일본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서양학자들에게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은 일본의 보물 법륭사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중국, 인도, 그 위의 멀리 로마와 그리이스를 들먹이면서 정작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날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는 소리를 더 들어야 하겠는가.

 

,제철, 태양숭배, 천신사상들, 그리고 무속신앙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시 이론을 만들어야 하겠는가.

 

1300여 년전부터 역사왜곡을 하는 민족이라는 오명은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본서기의 기록부터 겉(다테마에)과 속(혼네)이 다른 일본인의 문화가 생겨났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가야와 백제가 일본성립의 주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공동의 민족 원형을 터놓고 찾아야 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더 원류로의 연구를 힘을 합해 공동으로 찾아나가야 진정한 뿌리가 옳게 찾아질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정작 상대해야 하고 찾아내야 하는 주제는 다음 중국인들의 언급에서 말하여지는 것들이라고 본다.



"은나라 성립 이전부터 주나라의 춘추전국시대까지 중원을 지배했던 실질적인 세력은 동이족이었다"
- 대북대학 서량지 교수
 
"천산산맥과 곤륜산 사이 타림분지의 한족들이 중원에 들어오기 전의 호북, 호남, 강서, 절강, 강소 지방은 치우천황이 이끌고 있는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 왕동령의 [중국민족사]

'춘추전국시대의 패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 나라를 세우고 그 도읍을 지금의 협서 장안평으로 정했는데 그곳은 황하와 장강 그리고 주강의 삼유역으로 옛날의 쥬신(조선)의 땅이었다.

-[중국고금지명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