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03
글: 고대사산책 / 2003-10-01
18) 기문도 열도지명
己汶이란 지명은 열도지명으로서 초고대왕의 후손의 세거지 이름으로 신찬성씨록에도 나온다. 그런데 이 기문이라는 지명이 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지심주 9현 가운데 하나로 「己汶縣은 본래 今勿이다」라고 나온다.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반도의 출신국명은 나오지만 반도지명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春野連; 出自百濟速古王孫 比流王也(우경제번)
己汶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汶休奚之後也(우경제번)
面氏; 春野連同祖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汶斯氏; 春野連同祖 速古王孫 比流王之後也(우경제번)
비류왕이 초고대왕의 손자로 나온다. 문휴해라는 인물도 있는데 기록에 등장하는 손자로는 무내·침류·진사 셋뿐이다. 比流王은 구이신왕 다음의 毗有王의 이칭으로 보인다. 초고대왕의 선대에 비류왕이 있으나 초고대왕을 시조로 하는 일본지배층의 족보에 등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초고대왕의 손자 문휴해라는 인물의 후손들 열도 내의 세거지 이름이 己汶인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19) 고려인들은 가야를 왜라고 불렀다
전지왕 호송병은 왜병이 아니다
전지왕이 왜에 있다가 귀국할 때 응신이 그 당시 열도에 있던 백제군 또는 가야군으로 호위를 하게 했는데 사기에는 왜라고 기록했다. 응신은 대화왕조 초대왕으로 아라가야왕자였고 그 당시 열도에는 무내의 아들들인 아신왕의 사촌들과 아신왕의 조카이자 전지왕의 형제서열인 무내의 손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신왕의 사촌들은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나오다시피 아신왕을 도와서 진사왕을 타도하고 아신을 위에 오르게 해준 인물들이다.
또 설사 이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대화왕조의 응신이 붙여준 가야군이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 이들이 아니라도 일국의 태자가 움직이는데 자체 호송병 수백 명도 없이 움직였을까. 단거리도 아니고 머나먼 이역만리 장거리인데다 뱃길이므로 적어도 수천 명은 대동한다고 본다. 이 호송병 100명건도 서기 응신기에 나오는 기사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왕조는 가야왕조
응신이 열도통합을 처음으로 완성하여 이룬 대화왕조는 가야가 세운 왕조였다. 대화왕조는 서기 390년부터 479년까지 90년 간 존속했고 뒤를 이어 김씨인 가야왕족 동성대왕이 대륙 두 백제군과 본국백제, 열도의 대화왕조를 통합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동성대왕 재위기간 479년부터 501년까지였다. 이 대화왕조부터 동성대왕이 몰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신라의 대왜접촉을 신라본기에서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내물왕
9년(서기 364년) 4월 「왜병 대침」
38년(서기 393년) 5월 「왜병이 금성을 5일간 포위」
실성왕
원년(서기 402년) 3월 「왜국과 우호, 미사흔 인질」.
4년(서기 405년) 4월 「왜병이 명활성 공격」
6년(서기 407년) 3월 「왜인 동변 침공」, 6월 「왜인 남변 침공」
7년(서기 408년) 2월 「왜인 대마도 군영설치 정보, 역으로 적을 선제기습하려다 미사품이 말려 포기」
14년(서기 415년)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전투」
눌지왕
2년(서기 418년) 가을 「왜국에서 미사흔 탈출」
15년(서기 431년) 4월 「왜병 동변 침범, 명활성 포위」.
24년(서기 440년) 「왜인 남변 침범」, 6월 「왜인 동변 침범」
28년(서기 444년)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 왕이 기병 수천으로 대적했으나 패배, 절반이 전사」
* 39년 고구려가 백제 침공시 구원
자비왕
2년(서기 459년) 4월 「왜인 수군 100척 동변침공, 월성 포위, 큰 전투」
5년(서기 462년) 5월 「왜인 활개성 침공」
6년(서기 463년) 2월 「왜인 삽량성 침공」.
*10년 「병선수리」
*17년(서기 474년) 7월 「고구려 백제침공 문주에게 구원군 만 명 파송」
19년(서기 476년) 6월 「왜인 동변 침공」
20년(서기 477년) 5월 「왜인 5路 침공」
위의 기사에서 눌지왕 2년(서기 418년)까지는 왜왕 응신 재위기간에 해당되고 응신이 경주신라를 그렇게 침공할 일은 없었다. 아신왕과의 백제왜분립 밀약으로 가야본국은 백제관할이 되어있었고 그후 아신왕 때 대화왕조(=가야)가 고구려에 시달리는 백제를 도와주고 전지왕 즉위 무렵 남해안칠국을 일시적으로 도로 회복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호태왕 재위기간 동안에 고구려·신라연합과 백제·가야연합이 수 차례 충돌을 한 적이 있을 뿐이다. 그 기간에 해당하는 기록이 내물왕 38년, 실성왕 원년, 4년, 6년, 7년 정도인데 이때도 대화왕조의 가야군이지 왜군이 아니다.
남해안칠국을 회복한 후에는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이 열도에서 건너와서 약 20년 가까이 다스렸다는 것은 서기의 몇 가지 기사를 해석해보면 알 수 있는데 이때 혹 신라와 충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록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기간이 대략 전지왕부터 구이신왕 때까지로 보이고 백제에는 비유왕이 즉위하고 열도의 대화왕조에는 진언이 2대 왜왕으로 즉위할 때인 서기 427년경 다시 백제가 관할하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위의 기록들은 전부가 가야가 세운 대화왕조 때의 침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경주신라와 국경(=경남지역)을 맞대고 있는 백제도 아니고 열도에서 건너온 대화왕조의 가야군도 아니고 도대체 왜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상세내용 칼럼[1]의 "석우로전", "가야와 백제의 동한지지 관할문제", 대화왕조 관련 글 참조
20) 미사흔 인질건은 위사
실성왕 7년조에서 미사품이 선제공격을 말릴 때도 인질로 가있는 동생 미사흔 얘기는 전혀 없다. 이것도 미사흔 인질건이 위사라는 근거가 된다. 미사품은 내물왕의 아들이고 나중에 실성왕을 죽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눌지왕이다.
실성왕 14년 8월조에 풍도에서 왜인들과 싸웠는데도 역시 인질은 전혀 언급이 없다. 인질이 있는데도 왜와 이렇게 전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질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이고 이것도 인질건이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제상전의 원전으로 볼 수 있는 서기 신공기 5년 3월조 기사 자체가 위사라는 점이다. 위사라는 근거는 등장인물 중에 갈성습진언은 백제 귀수대왕의 장자 무내숙니를 달리 꾸민 이름이고, 신라포로라고 잡아간 사람들이 桑原, 좌미(佐미), 高宮, 忍海 등 4읍의 漢人들의 시조라고 나오는데 신찬성씨록 아지왕조에 桑原村主, 佐味村主, 高宮村主, 忍海村主 등이 아지왕이 데리고 간 사람들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지왕은 백제 아신왕이며 이들은 백제인들인 것이다. 또 漢人이라는 것도 아지사주가 倭漢直=東漢直=漢直 등 漢氏의 조가 되었다고 한 데서 딴 것이다. 육하원칙 첫 번째 등장인물[who]이 전혀 다르므로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또 다다라.노.쯔[蹈비津]는 세또내해의 小豆島의 다다라[盾津/료津/多多羅]이며 지금의 草壁港이다. 구사라기[草羅城]는 초벽항의 고명 구사까.노.쯔[草香津]를 살짝 바꾼 이름으로 보인다. 활동공간이 세또내해인 것이다.
※ 상세내용 칼럼[1]의 "박제상전과 신공기", "석우로전과 신공기" 및 [2]의 "다다라 지명비정" 참조
21) 제라동맹기간에도 왜가 침범
소지왕
3년(서기 481년) 3월 「백제·가야군과 함께 고구려 침공 격퇴」
4년(서기 482년) 5월 「왜인 변경 침범」
8년(서기 486년) 4월 「왜인 변경 침범」
15년(서기 493년) 3월 「백제 동성왕과 혼인」, 7월 「임해진, 장령진 설치 왜적 방비」
*16년(서기 494년) 7월 「고구려와 살수 들판에서 전투, 백제 동성왕이 구원군 3천 파견 구원」
*17년(서기 495년) 8월 「고구려 백제 치양성 포위 신라 덕지장군 구원군 파견」
18년(서기 496년) 2월 「가야가 白雉 선물」
19년(서기 497년) 4월 「왜인 변경 침범」
22년(서기 500년) 3월 「왜인
신라 소지왕 재위기간은 백제 동성대왕세로서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으로 편입되어 대왕의 아들이 후왕으로 열도에 부임한 기록도 일본서기에 있고, 백제와 경주신라가 유사이래 제일로 돈독한 제라동맹을 맺은 기간이고 위에서도 보다시피 고구려의 침공에 수 차례 공동대응을 하고 있으며 가야군까지 합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가 경주신라를 네 차례나 침공했다고 기록했다. 또 소지왕 15년 7월조에는 왜적에 대해 방비를 했다고 되어 있다.
열도출신 가야계 동성대왕이 백제왕으로 있으면서 신라와는 사상 유래 없이 돈독한 동맹기간인데도 왜가 신라를 침범했다고는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제라동맹은 소지왕 3년, 15년, 16년, 17년조에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3년조에는 동성대왕의 가야군까지 연합군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기 웅략기 23년(서기 479년) 4월조의 동성왕 즉위기사 바로 뒤에 이어 축자의 안치신, 마사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고 나온다. 축자는 열도에서 가야의 기반이 가장 탄탄한 곳이었다. 당시 열도를 출입하던 군대는 전부가 백제군, 가야군 외에는 없었다.
위의 인용기사 전부가 동성대왕세(479∼501년)에 발생한 사건이므로 가야인을 왜인이라고 부른 사례들이다. 또 눌지 39년기와 자비 17년기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을 때 구원군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자비 17년기는 대외연고를 끊기 위해 문주왕의 열도출병을 가린 위사이고, 눌지 39년기도 그 당시는 장수왕대로서 신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백제에 원군을 보내줄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동성대왕과 소지왕세에 돈독한 제라동맹을 희석시키기 위해 넣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22) 동성대왕세부터 열도는 백제의 동조
동성대왕 이후 통합왕국은 부여씨 무령왕이 물려받아 백제가 망할 때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열도에는 백제의 후왕조인 東朝만 있었다. 백제왕들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열도에 후왕으로 파견된 기록들이 여러 번 나온다. 동성대왕의 아들들은 흠명기에 東城子言, 東城子莫古로 나오고 무령왕의 아들은 '사마의 아들'에서 머리글자를 따서 이두식으로 표기하여 斯我라고 나오며 그 아들 법사군은 왜군의 조가 되었다고 했는데 倭君이 곧 倭王인 것이다. 그 당시 지배층은 역시 백제·가야인들 뿐이었다. 이 기간이 서기 479년∼660년까지다. 일본은 백제의 멸망을 백제부흥전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663년으로 보고 있다. 이 백제가 망한 연도를 663년으로 잡는 것도 일본왕실이 백제왕실의 후신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대왜 접촉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신기
6년 5월조에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삼았다」
11년 5월조에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12년 2월조에 「왜국에서 사자가 오니 왕이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전지기
즉위전기에 「(태자 전지를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 호송하였다...중략...전지는 왜인을 머무르게 하여 호위하게 했다」(* 둘째 아우 설례가 첫째 아우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자 전지가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는 말임)
5년기에 「왜국이 사신을 내어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자 왕이 후히 대접했다」
14년기에 「왜국에 사신을 내어 백면 10필을 보냈다」
비유기
2년 2월조에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종자가 50명이었다」
의자기
13년기에 「왕이 왜국과 우호를 통했다」
20년기에 「무왕의 조카인 복신이...중략...왜국에 볼모로 가있던 부여풍을 맞이하여...후략」라고 나온다. * 구당서 백제전에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豊 立爲王」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보면 왜왕 응신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고 대고구려 연합전선을 형성했던 아신왕과 전지왕대에는 기사가 비교적 자주 나오고 열도출신인 비유왕대에 한 번 기록이 있는 반면에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으로 편입된 동성대왕 이후는 기록이 완전히 두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후국과는 외교관계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백제가 망하는 의자왕세에 다시 우호를 맺었다고 나오는데 위사일 뿐이다. 볼모건은 아신왕과 의자왕 때 두 번이나 나오는데 신라와 백제는 어찌하여 왜국과 우호를 맺을 때마다 왜에 볼모를 보낼까. 볼모를 보낼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리가 없다. 다만 기·기를 지으면서 입장을 거꾸로 하여 분식했을 뿐이고 사기는 왜곡된 그 표면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뿐이며 현대의 연구가들이 이런 사정을 몰라볼 뿐이다.
의자 13년기에 왜국과 우호를 통했다는 기사도 그 전에 서기
서기 천지기 7년 4월조에
서기 황극기 2년 시세조에 보면 「백제태자 여풍이 꿀벌통 4개를 놓아 삼륜산에서 양봉을 했으나 끝내는 번식하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 말도 안 되는 위사일 뿐이다. 어찌하여 열도의 후왕이 양봉을 했을까. 그런데 실사를 모르는 연구가들은 이런 구절을 믿는 듯하니 딱하다는 얘기다. 삼륜산은 나라에 있는 산이다.
왜라는 별도의 실체는 없어
열도는 서기 390년부터 가야의 대화왕조이고 479년부터는 663년까지는 백제의 후국인 동조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도 열도에 출입하던 모든 군대는 가야군, 백제군뿐이었다. 다만 가야군과 백제군에 편입된 병사들 중에는 물론 열도의 원주민출신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외도 아닌 것이다. 왜를 열도원주민들의 조직화된 세력으로 보는 기존의 설들은 전부 잘못된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 왜라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특정집단이 있었다는 막연한 추측도 역시 잘못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야를 제외하고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신라와 충돌할 정도의 세력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것이다.
가야계 동성대왕 이후 여씨인 무령왕세부터 등장하는 왜는 백제계 후왕조이므로 백제인들로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반도에서 열도로 건너가는 것은 전부 절사하고 열도에서 반도로 건너오는 세력은 가야인이든 백제인이든 전부 왜로 기술한 것이다.
23) 기타 같은 내용의 기사
사기 백제본기 의자기 15년 5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붉은 말[성馬]이 북악의 오함사(烏含寺/烏會寺)에 들어와 울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당을 돌다가 죽었다』 성(馬+辛)
동 20년 6월조에 『...왕흥사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마치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처럼 생긴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기슭으로 와서 왕궁을 향해 짖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왕도의 많은 개들이 길 위에 모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흩어졌다』
여기서 붉은 말은 신라를 상징하고 들사슴 같은 개는 당나라의 소정방군을 상징한다. 돛대라는 것도 당나라의 수군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가 서기에도 나온다.
서기
위에 인용한 백제본기 의자기 15년 5월조는 이 서기기사를 보고서 적당히 꾸며 넣은 것으로 보인다.
24) 일본서기의 新羅는 加羅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라라는 국호는 거의 전부가 가라를 지칭한 이름이다. 그리고 사기에는 가야인을 왜인이라고 기술했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에는 가야를 왜와 가야 둘로 기록하고 일본서기에는 가라의 원래 국호였던 新羅와 임나, 가라 등으로 기록함으로써 양국에서 동시에 공중에 띄워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아나가야도 아시라[阿尸良]>新羅라는 국호를 썼다고 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 나오는데 아직도 아무도 못 알아보고 있으니, 기·기상에서 가라를 가리켜 신라라고 기·기저자들이 바로 기록하기는 했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라가야왕자 천일창(=응신)의 설화에서 보다시피 기·기나 성씨록상에서도 신라가 가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도 전부 경주신라로 오해를 하여 가야계 신사를 전부 경주신라계라고 오인하여 박혁거세신사니 뭐니 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 유명한 일본의 초대천황 신무도 신라왕족이라고 신찬성씨록에 기술되어 있어도 아무도 찾아보지도 않고 있다.
※ 상세내용 칼럼[1]의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최대의 키워드 '아침'' 참조
25) 삼국유사
유사저자인 일연도 일본서기를 완전히 해독했었다는 것을 바로 연오랑·세오녀설화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而非眞王也 > 일본제기를 상고해 보면, 전후하여 신라인으로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이는 변읍의 소왕이지 참왕은 아닐 것이다』
구주에 있었던 야마다국을 정확히 보고 있고 유사 탑상 '금관국 파사석탑'조에 「...兼以鎭南倭...」라 하여 5세기 중반(8대 질지왕대)의 가야가 세운 대화왕조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에 안나오는 동성대왕 관련내용도 일본서기의 무열기 기사를 보고 숨어있는 키워드를 찾아내 암호 같은 이름을 짓고 서동설화로 꾸며서 실어 놓은 것이다. 일본서기의 천황들을 전부 가려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유사는 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사실들을 알려주려고 애를 썼으나 그 전에 正史라고 편찬된 삼국사기의 범위를 크게는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기란 帝가 왕을 天皇으로 기록한 일본서기를 가리키는 것이며 일본서기의 천황 중에 연오랑과 세오녀는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는 열도 통일왕국의 왕은 아니었고 변읍의 소왕 즉 구주에 있던 야마다의 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는 반도에 있다가 반도 밖으로 이주한 경우인데 사기에서 절사되자 알려주려고 설화로 꾸며 넣어놓은 것이고 석탈해 설화에서 선주지를 연나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맨 말미에 석탈해의 쿠데타를 설화형식이긴 하지만 사기보다는 조금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건국신화도 싣고 있고 기원전의 역사도 사기보다 더 많이 알려주고 있다.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에서는 구당서·신당서를 인용한 백제의 강역설명에 사기에서는 잘라버린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데 「서쪽으로 바다 건너 越州, 남쪽으로 바다건너 倭」라고 하고 있다. 편년체의 기사는 아니지만 일화형식의 스토리는 사기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수로부인설화도 사실은 석우로전과 물계자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만들어 실은 것이다. 같은 내용을 담은 기사를 보면 유사가 대부분 상세하다. 그러나 유사도 고려시대의 시대적인 한계를 제대로 넘을 수 없었던 사서인 것이다.
26) 삼국유사의 서동설화
유사에 실려있는 서동설화를 분석해보면 일연도 동성대왕이 열도출신임을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설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동성대왕이라는 것도 서기를 봐야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화에는 武王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니다. 이것은 수로부인설화에서 신라 내해왕 때의 사건을 성덕왕 때라고 기술하고 있고, 사기 도미열전에서 진사왕을 개루왕이라고 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서기 무열기는 모든 천황 중에서 가장 나쁘게 기록해 놓았는데 나쁜 행실을 묘사한 글 중 한 문장에 서동이 동성대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키워드가 들어있다. 일연은 바로 이 키워드를 보고 서동설화를 지어 유사에 실어 놓았던 것이다.
무열기 3년 10월조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 (그 손으로) '이모[暑預]'를 캐게 했다』
서기 인덕전기에 "가야계 대반씨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모[妹]'가 왕위에 오를 것이다"라는 뜻을 담은 예언형식의 노래가 나온다.
『새(璽)를 다투는 사람[千早人], 토도의 나룻터에, 그 나룻터 건너에 서있는 재궁단(梓弓檀)을 베어버릴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차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겠지만 머리부분[本邊]은 당신[君]을 생각하였고 끝부분[末邊]은 이모[妹]를 생각하였다. 슬픔이 그곳에도 있고 또 이곳에도 있으니 재궁단을 베지 말고 가시오』
이것은 가야계 대화왕조에서 왕이 배출된 아라사등의 세 아들 집안의 왕배출 순서를 노래한 것이다. 머리부분[本邊]은 대산수황자 즉 대화왕조 초대왕 응신을 가리키고 끝부분[末邊]이 곧 장자 예진별명의 손자인 동성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운뎃부분[中邊]이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계 세 왕 珍, 濟, 武인 것이다. 이 진언계 세 왕을 인덕전기에서는 三載, 삼일, 응신기 13년 9월조에는 中枝의 三栗, 응신기 22년 9월조에는 三野 등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말변의 이모[妹]가 바로 음도 같은 무열기의 이모[暑預]인 것이다. 이모[妹]=이모[暑預]=이모[薯]로 전부 같은 말이다. 감자를 조선시대 마령서라 했는데 '감자 薯'이기도 하고 '고구마 薯', '마 薯'이기도 한 것이다. 서동을 마동[薯童]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牟都, 牟大, 末多, 末通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마 薯'의 훈을 쓴 것이기도 하다. 마동[薯童]이라고 읽는 것은 (훈독+음독)인데 왜어에서는 흔한 조어법이다. 사실은 말통이란 이름을 '마동[末通]'으로 읽고 '마 薯'와 '아이 童'자로 글자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은 무왕이 아니고 동성대왕인 것이다. 설화에서 산마[薯 ]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는 말은 설화와 실사와의 사이에 핵심적인 인물을 비정하는 연결고리인 것이다. 설화에서 산마[薯여]는 무열기에서 이모[暑預]다. 뜻도 같고 글자도 거의 같은 것이다.
※ 상세내용 칼럼[1]의 동성대왕, 대화왕조 관련 글 참조
27) 무령왕능지석과 사택지적비
무령왕능지석에 있는 斯麻라는 휘는 8세기초에 서기저자들이 지은 휘다. 이런 휘가 6세기초의 능에서 나온 지석에 어떻게 올라 있을 수 있을까? 무령왕능 발굴시 능 안의 유물이 교란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침수 또는 인위적인 교란 등의 설이 있다고 한다. 인위적인 교란과 관련하여 사기 신라본기 헌덕기 14년 3월조에 공주에서 있었던 김헌창의 반란기사를 들기도 한다.
『균정(均貞)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워 멸하고 여러 군이 웅진에 이르러 크게 싸워 참(斬)하기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헌창은 겨우 몸만 피해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여러 군이 포위공격하기 열흘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자(從者)가 머리와 몸을 잘라 따로 매장했는데 성이 함락된 후 그 시신을 고총(古塚)에서 찾아내 다시 베었다...』
이 기사에서 '고총=무령왕능'으로 보고 설명하는 설이다. 그러나 지석에서 핵심은 斯摩가 8세기초에 일본서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위의 헌덕기 기사도 고려인들이 지석을 위작하여 넣어둔 후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꾸민 기사일지도 모른다.
사택지적비도 백제 당대의 비로 보기 어렵다.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 정월조에 백제 조문사절이 구주에 도착하고 2월에 백제 조사의 종자가 「그 전해 11월에 대좌평 智積이 졸했다」고 했는데 7월조에는 지적이 아들 둘을 데리고 왜에 사신으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 왜는 백제의 제후국이었고 대좌평이라면 왕과 태자 다음 가는 나라의 3인자인데 연로한 대좌평이 아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제후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황극이란 천황도 신공을 재등재한 인물로서 가공의 인물이고 그 전에 몰한 서명천황은 백제 동성대왕을 꾸민 인물인데 무슨 조문사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도무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기저자들이 황극기의 대좌평 지적이라는 이름을 보고 사택이라는 성씨를 붙여 성명을 만든 후 비를 위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서기의 겉보기내용을 옮긴 백제본기의 신뢰성을 얻기 위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상세내용 칼럼[1]의 "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참조
◎ 사기는 반도밖의 활동사를 절사한 사서
사기에는 원래 반도 밖에 있었거나 반도에 있다가 반도 밖으로 나간 세력은 전부 절사하고 기술했는데 예를 들면 시대를 수백 년씩 소급해가며 부여의 후예를 말갈이라 하고 열도를 개척하고 정복했던 가야를 왜라고 하여 마치 이민족처럼 기술했는데 현대와 고려시대의 민족의 개념은 다르겠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있는 대로 기술한다는 사서기록 본연의 자세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태도임에는 틀림없다 할 것이다. 사기에 이런 식으로 기술한 것은 아래와 같은 발상일 것이다.
가. 일찍 열도로 진출하여 개척하고 백제와의 패권다툼을 하다가 대화왕조를 세운 가야역사를 무시하고, 열도가 백제의 제후국이 된 것도 절사하고, 후에 그 지배층이 대거 열도로 건너 가버린 백제의 역사를 절사하고 축소하여 열도와의 연고관계단절을 꾀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한 고려로서는 신라를 왜인들보다 약했다고 기술해도 고려의 체면과는 무관하다는 발상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신라는 무능했지만 고려는 신라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신라를 비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사상으로는 없었던 신라나 백제의 인질건만 보더라도 왜가 고래로 반도의 나라들보다 강국이었다고 사전에 설정하고 서기내용에 맞추어 옮겨 넣은 것으로 판단된다.
다. 고려시대에도 종종 반도로 침입하던 왜구에 대한 원망감을 가야, 백제인에게 다 돌리고 백제 귀수대왕의 시호에 '원수 仇'자를 넣어 "왜구[仇]의 시조[首]"라는 시호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이 귀수대왕의 시호만 보더라도 사기저자들은 기·기를 해독하고 일본왕실이 백제왕실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라. 대외활동사는 절사하고 항상 외적들에게 당한 것을 강조하여 고려인들에게 우리는 옛날부터 고려땅에서만 살았고 항상 남보다 약했으니 밖으로 나갈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말라는 의식을 담아 쓴 것으로 보인다. 즉 진취적인 기상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시 허약하던 고려왕실을 보전하고 귀족세력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 같다. 이런 정황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고등학교 국사(상)/교육부/2001년/120∼121p>에 간략히 나와있다. 「문벌귀족사회의 모순과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겪은
반도에서 살다가 반도 밖으로 나갔거나 만주를 무대로 활동한 동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역사를 잘라버리고 반도사관을 주입한 결과 어느새 우리민족은 힘없는 약소민족으로 전락하고 외침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상황을 몇 번이나 당하면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국민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의 반도사관
半島史觀이란 고려 인종과
위에서 보았다시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일본서기ㆍ고사기ㆍ풍토기ㆍ신찬성씨록까지도 완벽하게 해독한 후에 가야ㆍ백제인들의 열도개척, 정복사는 전부 절사하고 적당히 축소, 왜곡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에 열도의 지명도 반도 내에다 옮겨 붙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대사를 담은 유일한 정사라는 삼국사기도 실사와 위사를 엄밀히 가려보아야지 표면적인 내용 그대로 믿다가는 우리 고대인의 반도 밖의 활동사를 결코 복원할 수 없는 중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모든 연구가들은 이 점을 분명하고도 냉철하게 인식한 후에 연구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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