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02

monocrop 2007. 10. 15. 19:47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02

                                                               글 : 고대사산책 / 2003-10-01 13:24:04 / www.coo2.net

 

 

 

7) 진사왕의 사냥  

백제본기 진사기에 보면 네 차례의 사냥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6
10월조에 「구원(狗原)에서 사냥하고 7일만에 돌아왔다」

7
7월조에 「국서대도(國西大島)에서 사냥했다.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았다」

7
8월조에 「다시 횡악(橫岳)의 서편에서 사냥했다」

8
년 「10월에 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했다.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훙했다」
    

이 기사들은 아신왕의 대진사왕 역쿠테타전역을 사냥이라고 기술한 것으로서 서기에 그 전투가 생생하게 나온다
.      

황극기에서 아신(=중신겸자)이 응신(=중대형)과 백제왜분립 밀약을 맺고 응신이 서기 390 1 1일 초대왜왕으로 즉위한 후에 서기 390년부터 392년까지 3년에 걸쳐 백제왕권을 탈환하기 위해 진사왕에 대한 역쿠데타를 일으키는데 그 내용이 서기에 여러 번 달리 각색되어 나온다. 숭준기, 민달기, 응신기에 나오는데 응신을 재등재한 서기 숭준전기 7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  

『소아마자숙니대신은 여러 황자, 군신에게 권하여 물부수옥대련을 멸할 것을 모의했다. 박뢰부황자, 죽전황자, 구호황자, 난파황자, 춘일황자, 소아마자숙니대신, 기남마려숙니, 거세신비량부, 선신하타부, 갈성신오나라 등이 같이 군사를 끌고 나아가 대련을 쳤다. 대반련교, 아배신인, 평군신신수, 판본신강수, 춘일신 등이 같이 군사를 이끌고 지기군(志紀郡)에서 삽하(澁河)의 집(=守屋의)에 이르렀다. 대련은 친히 자제와 군사를 이끌고 도성(稻城)을 쌓고 싸웠다. 대련은 의개의 박()나무 가지사이에 올라가 활을 비 오듯 쏘았다. 그의 군병들이 강성하여 집에 차고 들에 넘쳤다. 황자들과 군신들의 군병은 겁을 내어 세 번이나 퇴각하였다...(중략)...이때 적견수적도가 있어 대련을 가지 아래로 쏘아 떨어뜨려 대련과 그 아들들을 죽였다. 그래서 대련의 군사는 갑자기 스스로 무너졌다. 군병들은 모두가 조의( 衣)를 입고 광뢰(廣瀨)의 구원(勾原)에서 사냥하는 흉내를 내며 도망하고 흩어졌다. 이 전역에서 대련의 아들들과 권속들이 위원(葦原)으로 도망하여 성을 갈거나 이름을 바꾸는 자가 있었고 혹은 도망갈 데를 모르는 자도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수군대기를 "소아대신의 처는 물부수옥대련의 누이다. 대신은 헛되이 처의 계책을 써서 대련을 죽였다"라고 말했다. 난을 평정한 후에 섭진국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대련의 노비 반과 집을 나누어 대사(大寺)의 노비와 전장으로 하였다. 전일만경(田一萬頃)을 적견수적도에게 주었다. 소아대신은 또 본원에 의하여 아스까[飛鳥]땅에 법흥사를 세웠다』
          

등장인물 중에 아신계는 소아마자숙니대신(=아신), 구호황자(=귀수), 춘일황자(=침류), 춘일신(=침류) 등이다
.

가야계는 박뢰부황자(=숭준/응신), 죽전황자(=예진), 난파황자(=무내), 기남마려숙니(=무내 아들), 거세신비량부(=무내 아들), 선신하타부(=예진 아들), 갈성신오나라(=무내 아들), 대반련교(=예진 아들), 아배신인(=예진 아들), 판본신강수(=무내 아들), 평군신신수(=무내 아들) 등이다
.        

진사계는 물부수옥대련이 바로 진사왕이다
.    

이 전역은 네 차례에 걸친 진사군과 아신·응신연합군의 백제왕권쟁탈전이다. 구호, 춘일 등은 이미 죽은 인물들이지만 정통계승자를 후원한다는 의미다. 물부씨는 요속일 즉 초고대왕의 후손이며 가야계도 예진과 무내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도 무내 아들 즉 아신의 사촌들이 무려 넷이나 동시에 등장할 정도다
.                        
  
여기서 보면 「황자들과 군신들의 군병은 겁을 내어 세 번이나 퇴각하였다...(중략)...그래서 대련의 군사는 갑자기 스스로 무너졌다. 군병들은 모두가 조의(=黑衣)를 입고 광뢰의 勾原에서 사냥하는 흉내를 내며 도망하고 흩어졌다」라고 나와 소아마자측에 구호황자가 있는데 아신왕이 정통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였고 그 군병들이 정확히 세 번 후퇴하는 것이 나온다. 구원, 국서대도, 횡악지서 전역이다
.      

물부수옥을 쏘아 나무에서 떨어뜨리는 인물 적견수적도는 응신의 이칭이다. 응신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6년조, 7년조의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실패한 후에 네 번째 구원에서 물부수옥을 이기는 것이 정확히 나온다. 삽하는 한수(漢水)고 대신의 이름 守屋은 수비하는 진사왕이 백제왕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勾原은 사기의 狗原인데 지금의 김포로 비정된다. 이런 사실들을 다 알고도 사냥으로 기술하고 상세내용은 절사한 것이다
.

상세내용 고대사산책[1]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28) / 아신왕의 역쿠데타" 참조
  

이 내용은 다시 귀수대왕을 등재한 서기 민달기에도, 4차에 걸친 아신왕의 대진사왕 역쿠데타전역을 왜의 對고구려 외교사로 교묘히 꾸며 실어 놓았다
.      

상세내용 네티즌칼럼 고대사산책[1]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30) / 아신왕의 역쿠데타(달리 꾸민 내용)" 참조


4
차에 걸친 전역 중에서 제4차전역은 응신기 3년 시세조에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백제 진사왕이 즉위하여 귀국의 천황에게 실례를 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 등을 보내어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리하여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이 다시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아화는 아신이고 왜의 장군처럼 되어있는 4명의 장군은 다름 아닌 침류왕의 형인 무내의 아들들로서 아신왕의 사촌들이다
.  

사기저자들은 위의 서기기사를 해독하여 구원, 국서대도, 횡악이란 지명들을 알게 된 것 같고 지명들을 勾原>狗原으로 바꾸고, 國西大島, 橫岳之西 등으로 바꾸어 기술한 것으로 보이고 아신의 진사에 대한 역쿠데타전역을 다 알고도 잘라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고도 지리지에는 구원, 횡악 등을 미상지명으로 처리했다. 이것을 알았다는 것은 대화왕조가 가야왕조라는 것도 알았고 일본왕실이 백제왕실의 후신이란 것도 알았다는 뜻이 된다
.

또 침류왕부터 아신왕까지 백제의 왕권다툼을 다 알고도 실사는 절사하고 그 대신 고도한 은유법으로 설화로 꾸며서 실어놓은 것이 바로 도미열전이다
.

상세내용 칼럼[2] "도미설화" 참조
  

    
8)
전지태자 볼모건
  

백제본기 아신 6년기에 보면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삼았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일본서기 응신기 8 3월조에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했다. 그래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 선왕때의 우호를 다시 하였다]』라고 나온다
.    

전지왕이 왜로 간 것은 광개토대왕에게 시달리던 아신왕이 대화왕조의 응신에게 원군을 청하면서 그 대신 인적 담보로 가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신과 응신이 백제왜분립 밀약을 맺기 전에는 응신을 비롯한 가야계가 증조부인 초고대왕, 조부인 귀수대왕을 차례로 전사시키고 부왕인 침류왕을 진사왕과 협공하여 진사에게 죽게 만든 철천지원수였으므로 응신이 백제와 대 고구려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정예군을 지원해주었을 텐데 가야군을 보내주지만 아신이 그 가야군을 몰살시키고 열도로 도로 쳐들어오면 응신으로서는 정말 난감해지므로 태자를 인질로 열도에 붙잡아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보통의 인질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  

그렇게 대 고구려 연합전선에 원군을 보내주면서 인질을 잡은 사실을 직필할 수 없어 과거 초고대왕세에 가라가 백제에 빼앗겼던 땅을 마치 왜가 빼앗고 인질을 잡은 양 기술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서기 391년부터 412년까지 재위하였고 응신은 서기 390년부터 426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호태왕비문에 등장하는 모든 왜는 대화왕조의 응신이 파견한 가야군이었다
.      

상세내용 칼럼[1] "일본의 야마또[大和]왕조는 가야왕조", "가야와 백제의 동한지지 관할문제" 참조
    
        
  
9)
구이신왕 열도 망명


일본서기를 전부 해독하였다면 구이신왕이 열도로 망명한 것도 다 알았을 터인데도 8년조에 훙했다고만 기록했다. 열도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알고도 절사한 것으로 보인다.    

구이신왕이 비유왕의 쿠데타로 쫓겨나 열도에 도착한 것이 서기에 나오는데 응신을 후대에 재등재한 서기 웅략기 11 7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有從百濟國逃化來者 自稱名曰貴信 又稱貴信吳國人也 磐余吳琴彈 강手屋形麻呂等 是其後也 > 백제국에서 도망하여 귀화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자칭 貴信이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귀신은 吳國人이라고도 했다. 반여의 오금탄(吳琴彈) 강수옥형마려 등은 그 후손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이신왕이 재위 8(A.D. 427)만에 돌아가고 毗有王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웅략기 11 7월조를 보면 아래와 같이 구이신왕의 행방에 관한 기사가 있다...중략(위에 인용한 서기본문임)...이에서 久爾辛(구이신)은 貴信(구이신)으로서 동일인물이다. 웅략기는 후대에 와서 응신을 재등재시킨 기록이므로 이 기사가 웅략기에 있다하여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백제에서도 왕권이 침류계에서 무내계로 바뀐 것이 분명하며 비유왕과 개로왕이 무내계라 할 수 있다<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295p>


구이신왕의 휘가 信으로 판단되는데 마치 귀수대왕의 휘 須에 ''자를 붙여 貴須라고 시호를 지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만든 이름이 貴信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본기 전지 3, 4년기에 보면 전지왕의 서제(=異母弟)로 餘信이라는 인물을 들고 있는데 이 인물이 구이신왕으로 판단된다
.  
  
상세내용은 칼럼[1] "백제 구이신왕은 열도로 망명" 참조
    


10)
비유왕은 열도출신
            

비유왕은 구이신왕을 축출하고 위에 올랐는데 쿠데타를 어디서 일으켰을까?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  

不破連; 出自百濟國都慕王之後 毗有王也(우경제번
)
岡屋公; 百濟國比流王之後也(산성국제번
)
廣井連; 出自百濟國避流王也(섭진국제번
)      
        
백제 도모왕의 후손으로 나오는데 쯔모[都慕]는 원순모음화현상을 적용하면 쭈모>주모가 되고 고구려의 고주몽을 말한다. 고어에서 '' ''는 엄밀히 구분이 안됐다. 비류왕이 나오는데 일본왕실의 시조가 초고대왕이므로 그 선대가 일본고대사서에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사기에 초고대왕의 부왕으로 나오는 비류왕이 초고대왕의 손자로 나오는데 비유왕을 음이 비슷한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초고대왕 이전에 열도에 진출한 백제왕족은 없다. 이름이 세 가지지만 전부 같은 이름이다. 비유(毗有), 비류(比流), 피류(避流)는 전부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사기저자들은 백제의 초기왕들 이름도 몰랐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기와 성씨록을 보고서 적당히 옮긴 것 같다. 초고대왕의 부왕으로 나와있는 비류왕도 이 성씨록을 보고 거꾸로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초고대왕의 손으로 나오는데 부왕으로 기재했다. 사기저자들은 신찬성씨록까지도 다 보았다는 뜻이다
.

서기 인덕전기에 韓國에 가있던 오자롱(=진언)을 부르러 가는 어우숙니가 비유왕이다. 당시 오자롱은 백제로부터 돌려 받은 가야본토인 남해안칠국을 관장하고 있었고 웅략전기에 나오는 갈성원대신도 동일인물이다. 어우숙니는 출운계로서 무내숙니의 후손이다
.

상세내용 칼럼[1] "가야본토를 대화왕조가 일시관장 / 석우로전과 신공기" 참조



11)
문주왕은 열도에서 출병
        

백제본기 개로 21년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문주는 곧 목협만치(木협滿致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이동하여 남쪽성을 치니 성 안은 위태로움과 두려움에 싸여 왕은 성을 나가 도망했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발견하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 뱉고 죄를 헤아리며 아차성 아래로 묶어보내 죽이고 말았다』
        
      
백제본기 문주전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위를 잇자 문주가 그를 보필해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는 성을 둘러 스스로 단단히 하면서 문주를 시켜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 문주가 군사 만 명을 얻어오니 고구려병들은 물러났지만 한성은 함락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마침내 그가 왕위에 올랐다(서기 475)
  
원년 10월조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3
년기에 『4월에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장자 삼근을 태자로 삼았다. 5월에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 7월에 내신좌평 昆支가 죽었다』
    

사기 신라본기 자비기 17(서기 474) 7월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고구려왕 거련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쳤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백제를 구하게 했으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경 역시 피해를 입었다』


구이신왕의 망명기사와 비유왕, 개로왕이 구이신왕, 문주왕과는 계보가 다른 것을 보면 문주왕도 백제에 있다가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사기에 구원군이 만 명이라고 나오는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 어느 쪽에도 신라구원군의 장수이름조차 없다. 상식에 어긋나도 지나치게 어긋난다. 불과 수백 명이라도 원군을 내줄 땐 반드시 그에 합당한 장수를 딸려 보낸다. 군사만 덜렁 지원해 준다고 그 군사가 타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 같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경우 본국의 장수 없으면 전적으로 통솔 불가능이다
.  

더구나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래로 장수왕대까지도 고구려의 힘에 눌려 신속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백제가 구원병을 청한다고 고구려를 상대로 무려 만 명이라는 구원병을 장수도 딸리지 않고 선뜻 내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이것은 백제 동성대왕을 모델로 한 서동설화에서도 신라의 백관들이 처음에는 서동과의 불미스런 소문을 듣고 선화공주를 귀양보내는 구절로 나타나 있다시피 문주왕 즉위 이후 5년 뒤의 일이고 동성왕의 명성을 들었음에도 신라 조정의 분위기는 백제와 동맹을 처음에는 반대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문주왕은 비유왕에게 쫓겨 열도로 망명한 구이신왕의 후손으로서 열도에서 출병했던 것인데 연대차이가 구이신왕 망명 서기 427년 문주왕 즉위 서기 475년이므로 48년 정도 나는데 구이신왕의 손자 정도 된다. 문주왕이 지금의 구주 후꾸오까[福岡] 기꾸[]에서 출병한 것이 서기 웅략기 18 8월조에 나오고 이때 이름이 物部目連으로 나오는데 침류왕의 이칭이고 선의 이름으로 후손을 가리키는 기법이다. 개로왕은 물부토대숙니로 등장한다
.

내신좌평 昆支는 문주왕의 아우가 아니고 동성대왕의 父다. 가야왕족으로서 성씨가 김씨인데 부여씨로 기술한 것이다. 성씨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飛鳥戶造; 出自百濟國比有王也(우경제번
)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하내국제번
)        

비유왕은 동성대왕의 조부로서 아라사등(=근초고기 2년조의 眞淨)의 장남 예진의 아들이고 그 아들이 琨伎王으로 나오는데 사기 문주기 3 4월조의 내신좌평 昆支와 동일인물이다. 고대에 伎·岐와 支는 교체되어 쓰였으므로 곤기(琨伎)=곤지(昆支). 서기 웅략 23년기에는 昆支王이라고도 나온다. 마다[末多]왕이 바로 동성대왕인데 서기 무열기 4년 시세조와 웅략기 23 4월조에 나온다. 사기의 혈통계보는 잘못된 것이다
.  

백제본기 개로기의 왕 몰년은 서기 475(9)이고 신라본기 자비왕기에는 구원병파견이 서기 474(7)으로 나와 1년 차가 있다. 원병기사의 연도가 틀리고 달도 틀린다. 전투가 있었던 기간은 이레열흘 정도였다. 이 시기가 틀린다는 것도 뭔가를 암시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사기저자들 11명이 산수를 못해서 햇수를 못 맞췄다고는 보기 어렵다. 연표를 만들어 앞에 놓고 사기를 저술했을 텐데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은 열도가 阿那加耶>아시라[阿尸良]>新羅의 대화왕조이므로 이 신라를 경주신라로 돌려서 기술한 것이다
.

상세내용 칼럼[1] "백제 문주왕은 열도에서 출병" 참조



12)
일본의 무열천황은 백제의 동성대왕
  

  
사기에 동성대왕을 폄하·왜곡한 글이 있는데 사기 백제본기 동성 21년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자 신료들이 창고를 풀어 진휼하여 구하자고 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22년기에 『봄에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5장이었다.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간하는 신하들이 반대해 글을 올려도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궁문을 닫아걸었다...(중략)...4월에 우두성에서 사냥을 했는데 비와 우박을 만나 그만두었다. 5월에 가뭄이 들었는데 왕은 좌우사람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벌여 밤새도록 환락을 다했다』
  

그리고는 심하게 폄하하여 아래와 같이 평가해 놓았다
.    

『논하기를,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로우며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함에는 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명군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정사를 물었으며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간언을 고하는 북[]을 걸고 (군주의 잘못을) 비방하는 나무를 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이 간언서가 올라왔으나 살피지 않고 또 문을 닫고 이를 물리쳤다. 장자가 말하기를 "지나침을 알고도 고치지 않고 간함을 듣고서도 더욱 심해짐은 이리[] 같다 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모대왕을 두고 한 말인가?
  

이런 내용들의 근거가 된 기록이 서기 무열기에 나온다. 일본서기에 무열을 폄하·왜곡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무열 2년기에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그 태()를 보았다』
    
3년기에 『사람의 생손톱을 뽑고 (그 손으로) []를 캐게 했다』
      
4년기에 『사람의 머리털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 끝에 오르게 하였다. 나무밑[樹本]을 베어 넘겨 올라간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 쾌락을 삼았다』
    
5년기에 『사람을 둑의 물구멍으로 기어 들어가게 하고는 밖으로 떠밀려 흘러나오는 사람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쾌락으로 삼았다』
        

8 3월조에 『여자를 발가벗겨 널판 위에 앉히고 말을 그 앞으로 끌고가 교접을 시켰다. 여자의 음부를 보았을 때 젖은 자는 죽였다. 젖지 않은 자는 관비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못을 파고 정원을 만들고 새와 짐승을 가득히 하였다. 사냥을 즐기고 개를 달리게 하고 말을 시험하였다. 대풍이 불고 폭우가 와도 가리지 않았다. 옷은 따사롭게 하여 백성의 추위를 잊고 음식은 맛나게 하여 천하의 기근을 잊었다. 난장이와 창우(倡優)의 놀이를 크게 권장하고, 음란한 가무를 하게 하고, 기괴한 놀이를 벌이며, 음란한 소리를 멋대로 하고, 주야장천 궁인과 술에 잠겨빠지고, 비단으로 자리를 깔고 무늬 곱고 가벼운 비단으로 옷을 해 입은 자가 많았다』
      

또 무열기 4년 시세조에는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暴虐]한 짓을 하였다. 드디어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사실은 이 기사가 무열천황이 동성대왕이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일인학자들은 인덕과 무열이 계보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고사를 들어 폄하한 것이라 한다. 사기의 동성대왕 폄하기사는 위의 무열이 동성대왕임을 정확히 가려보고 서기기록을 적당히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면 고려시대에도 기·기 저자들이 본 것과 같은 자료가 있었던 것일까?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지어 호화사치에 기벽을 즐겼다고 써놓고 있다. 사기보다 훨씬 상세하게 나오는 기·기에도 임류각이란 말은 안나온다. 사기저자들이 위사를 쓴 것이다.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서명기에 백제대궁을 지었다고 나오는데 임류각은 이것을 보고 폄하·왜곡하여 조작한 것이다
.    

또 이것은 서기 무열기 3 11월조에는 전혀 달리 꾸며져 나온다
.

『대반실옥대련에게 조하여 신농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미마다..무라[水派邑]에 성상(城像)을 짓게 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기..[城上]라 한다』
          

대반실옥대련은 그의 증조부인 예진의 이칭인데 사실은 동성대왕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파읍이 바로 백제대궁이 자리했던 지금의 전북 익산의 王宮里로 판단된다. 성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고 성의 상을 짓게 했다는 뜻은 동성대왕이 익산에 신수도를 건설하고 천도한 지 1년만에 암살 당하여 수도로서 1년밖에는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한 말로 판단된다. 마다[]도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다
.    
        
末多王은 동성대왕의 이칭이고 嶋王은 무령왕의 이칭이다. 무령왕 출생설화에 나오는 嶋君에서 고대에 君은 王이므로 시마..기미[嶋君]>시마..오호기미[嶋王]로 만들고 다시 이두식으로 시마..오호기미[斯摩王]로 바꾼 것이 무령왕의 휘라고 하는 것이다. 마다[末多]는 가야왕족들의 수직돌림자로서 동성대왕의 고조부인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의 이칭 고노마다간기[己能末多干岐]에도 꼭 같이 들어있고 서기에 나오는 증조부 예진(譽津)을 고사기에서는 품모도(品牟都)이라 하는데 호무쯔[譽津]=호무쯔[品牟都]이며 이 이름 속에 들어있는 무쯔[牟都]가 바로 대륙사서에 나오는 동성대왕의 이름 牟都인 것이고 조부(=比有) 및 부(=昆支)와 이름이 같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牟大도 가야왕족 수직돌림자인 '마다'계열 이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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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 전부가 사실이 아님은 동성대왕의 치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기는 서기의 폄하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보고 썼다고 하는 근거는 기·기상의 왕들의 이칭을 정확히 가려서 썼으니까 보고 썼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실사내용을 다 알면서 위사조차도 일부는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내용을 누락시킨 부분을 제외하면 사기의 내용과 서기의 분식기사가 사실상 같기 때문이다. 폄하한 내용도 한 풀 더 왜곡하여 옮긴 것도 있다. 이것은 기·기저자들이 참고한 자료와 같은 자료가 고려시대에 남아있어 그걸 보고 썼을 것이라고 후세인이 오해하기 쉬울 정도로 짜 맞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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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1]의 동성대왕 관련내용 참조
  


13)
무령왕이 동성대왕 암살


사기저자들은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시해한 것도 알았던 것 같다. 이유는 진사왕 시호에서 보았듯이 휘에 斯자가 들어있고 사기보다 훨씬 상세한 기·기에도 안 보이는 마모(摩牟)라는 이칭을 사기에 쓴 것이 주목을 끌기 때문이다. 진사왕의 斯자는 열도시호 辰斯王, 陳思王 중에서 "용을 쪼갰다"는 뜻이 들어있는 지금의 이름을 골라서 기록했다고 보는데 마모의 摩자가 무령왕의 휘 斯摩의 摩와 같다. 斯摩는 "摩를 쪼갰다[]"는 뜻이 되고 "()를 쪼갰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같은 한어 음으로 摩牟의 摩는 마[]와 같고 "마동[薯童]을 쪼갰다"는 의미도 된다. 斯자가 보통 '[]'의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짜개다/쪼개다[]라는 뜻이 있다. 바로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쪼갰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사기에는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나왔으나 사기저자가 기·기에도 보이지 않는 터무니없는 글자를 쓸 때는 곡절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령왕의 휘 斯摩와 동성대왕의 이칭 摩牟를 연결하여 시해범이 무령왕이라는 것을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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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신하다 보니 진사왕과 침류왕의 경우처럼 직필을 못한 것으로 본다. 이 斯摩라는 휘도 무령왕의 출생설화를 꾸미고 설화상의 별명 嶋君의 시마[]를 다시 이두식으로 한자만 바꾼 것이고 이것은 무령왕이 열도출신이라는 의미를 담아 기·기저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런데 사기저자들은 기·기를 보고서도 워낙 실사를 많이 절사하다 보니 연결고리가 없어져 摩牟라는 새로운 이칭을 연결고리로 지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서기에는 國人이라고 나오는데 백가라는 암살자의 이름까지 설정하고 백가의 반란을 무령왕이 평정하는 것으로 꾸며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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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1] "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참조
  


14)
斯摩와 武寧은 서기저자들이 지은 이름
  

사기에 무령왕은 휘가 두 개 나오는데 원래의 휘는 중국 '양서', '남사'에도 나오는 '()'이 맞고 斯摩는 기·기저자들이 출생설화를 짓고 거기서 파생된 시마[]를 음이 같은 시마[斯摩]로 놓고 고대에 君은 王이므로 嶋君>斯摩王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기·기저자들이 지어 붙인 분식명이지 실사상의 백제 당대 휘가 아니다. 백제왕들의 휘는 전부 외자[單字]였지 복자(複字)는 없었다고 본다. 원래이름이 餘隆인 것이다. 또 사마라는 휘도 무령왕이 "열도출신이라는 것"과 진사왕과 침류왕의 관계처럼 "동성대왕을 암살했다"는 실사상의 의미를 압축하여 담아 서기저자들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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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에는 나오지 않는 마모란 이칭을 사기저자들이 지어 넣었다는 것은 이런 실사를 다 파악했다는 뜻이고 결국 기·, 풍토기, 신찬성씨록까지도 정확히 해독했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서기저자들이 사마의 摩와 한어 음이 같은 마[]라는 키워드를 이용하여 동성대왕 암살범을 무령왕이라고 암시해주고 그 글자를 이모[暑預]라고 동성대왕을 등재한 무열기에 심어놓았는데 사기저자들은 그것을 알고 연결고리를 더 구체적으로 摩牟라고 지어 붙인 것으로 판단되고 유사에는 바로 산마[薯여]라고 연결고리를 넣어놓았던 것이다. 摩牟의 牟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牟都·牟大에서 따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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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寧이라는 시호도 기·기 저자들이 지어 붙인 시호다. 뜻을 풀어보면 "크게 평안해졌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무령왕세부터 시작되는 아스까[飛鳥]시대가 바로 백제의 열도제후국의 아침을 의미하기 때문에 백제왕실 기준으로 가야와의 열도패권다툼은 끝이 나고 열도를 접수하여 백제계로만 안정적으로 열도 후왕권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뜻을 담아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백제가 망하고 8세기초에 사서를 지으면서 붙인 시호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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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1] "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2] "백제왕 시호분석" 참조
  
  

15)
아직기의 말 두 필
    

서기 응신기 15 8월조에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양마 두 필을 바쳤다고 나오고 고사기 응신기에는 백제국주 조고왕이 아지길사를 보내 숫말 한 필, 암말 한 필을 바쳤다고 했는데 이것이 삼국사기에도 아래와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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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기 23 3월조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내물기 13년에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사기의 이 기사들은 기·기의 응신기를 보고 照古王이 초고대왕인 것을 알아보고, 백제왕이 신라(=가라)의 응신에게 말을 두 필 보내준 것처럼 되어 있는 표면적인 내용대로 기술하면서 엉뚱하게도 경주신라로 보냈다고 위사를 쓴 것이다. 당대 아시아 최강자인 백제왕이 경주신라에 말을 보내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문주왕이 경주신라에서 원군을 얻어왔다는 기사와 같은 성격의 기사다. '阿那加耶>아시라[阿尸良]>新羅>대화왕조'를 경주신라로 돌려 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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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기 38(373) 7월조에 『독산성 성주가 300명을 데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내물기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무리 300명을 이끌고 투항해 오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는데 백제왕이 글을 보내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지금 대왕이 우리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며 내가 평소에 대왕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보내 주시오"라고 했다. 왕이 답하기를 "인민이란 것은 상심이 없는 고로 생각나면 오고 마음에 싫으면 가버리는 것은 정한 일인데 대왕은 백성의 불안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람이 그리 심하냐"라고 하자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아니 하였다』

이런 기사들도 백제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 지어낸 말들이다. 그 근거로는 백제가 360년대에 가라를 완전 정복하고, 370년 가을부터 371년 봄까지 귀수태자가 가야의 구주를 정벌했고, 369년과 371년 양년에 걸쳐 고구려를 강력하게 압박하면서 평양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였고, 열도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서기 374년 가을경 초고대왕이 본주친정을 나서고 있는데 그 1년 전에 경주신라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의 독산성주가 초고대왕이 싫어서 경주신라로 투항을 하고 경주신라는 그들을 돌려보내지도 않고 돌려달라는 백제대왕을 오히려 나무랬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고려인들이 소설을 쓴 것이다. 당시 아시아 최강자인 백제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 위사를 쓴 것이다.    


16)
백제왕 시호
      

사기에 나오는 백제왕들 중에 초고왕부터 무령왕까지 시호와 휘를 분석해보면 서기의 시호를 옮기거나 신찬성씨록의 시호를 가져다 쓴 경우도 있고 일부는 변조하여 실어놓은 것들도 있다. 사기저자들은 백제왕들 시호를 잘 몰랐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서기에 나오는 이름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것만 보더라도 사기는 서기의 실사를 다 파악하고도 절사·축소·왜곡하여 적당히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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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2] "백제왕 시호분석" 참조
    


17)
다사성은 담로도 출천읍
  

서기 신공기와 응신을 재등재한 계체기에 다사(多沙), 체사(滯沙), 대사(帶沙) 등의 지명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 지명들은 전부 동일지명으로서 한자만 달리 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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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수대왕을 등재한 서기 수인기 3 3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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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이 천일창에 조하여 "하리마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出淺邑) 등 이 두 읍에서 네 마음대로 살아라』
    

다사[多沙/帶沙/滯沙]는 여기 나오는 다사[出淺]와 같은 지명이다. 이때는 담로도를 가야가 장악하고 있었고 바로 이 담로도 出淺의 음이 '다사'인 것이다. 多沙는 왜어로나 한어로나 음이 같고 나머지는 한어 음은 다르지만 왜어 음이 전부 '다사'. ''의 일어 음이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서 '다스'에서 어미 ''가 탈락한 어간이고 ''은 형용사 '아사이'에서 어미 ''를 떼고 복합어를 만들 때 어간에서 ''가 탈락하면 ''가 된다. 즉 出淺>()+()()>'다사'가 된다. 응신전기에 보면 이사사[去來紗]라는 이칭이 나오는데 수인기 3 3월조에 천일창이 가지고 온 신보가 七物이라 했는데 이설에서 '이사사[膽狹淺]의 大刀'가 하나 추가되어 八物이라고 되어있다. 이런 식으로 이설을 기재해둔 것은 이 큰칼[大刀]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 이사사[膽狹淺]가 곧 이사사[去來紗]와 같은 이름으로 천일창과 응신천황이 동일인물임을 알려주는 암호인 것이다. 이 이름에서도 '얕을 淺' '[]'로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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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류왕을 등재한 서기 중애기 2 2월조에 보면 『이달에 담로둔창을 정했다』라고 나오는데 말하자면 담로도의 다사[出淺]란 곳에 백제가 둔창을 설치했던 것이다. 서기 360년대에 가야가 개척해놓은 담로도를 백제가 서기 370년에 빼앗았다는 것이 바로 아라사등의 장녀를 등재한 신공 50년기에서 다사진을 구저(=귀수태자)에게 주었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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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155p>에도 적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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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多沙, 帶沙, 滯沙등으로 표기되기도 하는 '다사'가 海西가 아닌 海東에서 어느 곳을 지칭한 地名이냐는 것이다. '垂仁紀' 三年 三月條의 天日槍 관계기사에서 '淡路島의 出淺邑'이란 지명이 나오고 있다. 이 出淺은 '다사'로도 읽혀질 수 있는데 出은 '', ''등으로 읽어 帶, 多와 그대로 일치하고, 淺은 물론 ''로 읽어 결국 出淺은 그대로 多沙, 滯沙, 帶沙 등과 동일한 지명으로 바로 淡路島인 것이다. 사실 이렇다는 것이 枕流王을 仲哀라 하여 '神功紀'의 앞에 登載시킨 '仲哀紀' 二年條에 의하면 '淡路屯倉'을 정하였다 하여 淡路島의 확보를 시사하고 있으며...


바다를 강이라고도 하긴 했지만 같은 지명이다. 계체 9년기의 多沙江이라는 말과 계체기 23 3월조에 가라왕이 「원래의 봉지 경계를 어기는 것입니다[違元所封限地]」라고 하는 문구를 보고 가라를 지금의 경남으로 설정하고 백제와의 경계로 볼 수 있는 지금의 섬진강 하류인 경남 하동에 '多沙'라는 지명을 갖다 붙인 것이다.      

반도사관에 입각한 대외연고 단절기도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열도와의 연고관계를 끊기 위해서 열도의 지명을 반도에 갖다 붙였다고 본다. 이리하여 가야의 역사는 폐기되고 백제의 대외활동사는 절사된 것이다. 사기저자들은 서기에 나오는 지명 네 개가 다 음이 같은 '다사'라는 것을 알고서 한어로나 왜어로나 음이 같은 多沙를 골라 하동에다 갖다 붙였다. 오늘날 서만주의 지명이나 북경근방의 지명도 얼핏보면 평안도나 황해도로 보기 쉬운 것도 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왜곡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지승람'에도 사기를 보고 옮긴 것인지 '광양 동쪽'이라고 나와 있다.      

상세내용 칼럼[2] "다사성 지명비정"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