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삼국사기와 밀본서기 비교 01

monocrop 2007. 10. 15. 19:43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비교 (1)    

글 : 고대사 산책 / 2003-05-12 19:33:49 / www.coo2.net

 

삼국사기의 문제점

삼국사기는 지금 실려있는 내용도 상당부분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가야사의 경우는 130년이나 늦은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일부 나오는데 거의 전부를 절사한 사서다. 일연조차도 가락국기가 상세하다는 말만하고 전해주지 않으면서 대폭 축소된 기록만 남기고 있다.

백제사의 경우 쿠데타로 집권한 왕이 적어도 다섯이나 되는데 전부 정상적인 왕권승계로 기술하고 있다. 다섯 왕은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동성왕, 무령왕 등이다. 그리고 백제왕들 중에는 열도출신이 넷이나 있는데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에 안나온다. 열도출신 왕들은 비유왕, 문주왕, 동성왕, 무령왕이다. 동성왕은 가야왕족 김씨인데 백제왕족 여씨로 기술되어 있다. 신라사에도 석탈해 같은 경우는 쿠데타로 집권했는데 성씨가 다른 왕으로부터 양위 받았다고도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실제의 역사를 설화로 꾸며 알아보기 어렵게 해두었다
.
고구려의 경우도 안원왕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그 뒤를 이은 양원왕은 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올랐는데도 정상양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쿠데타와 왕자의 난이 일본서기에는 사실대로 나온다
.

고대에 반도 밖에서 반도로 이주해온 경우와 반도에서 반도 밖으로 이주한 경우도 많은데 그런 내용은 전부 절사하고 허위기술한 여러 가지 근거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석탈해는 연나라 용성국출신으로 발해만에서 이주해온 집단인데 왜국 다파나출신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다파나는 어원을 추적해보면 대마도로 추정된다
.
지금의 영일과 월성에 있다가 일본 구주로 이주한 연오랑·세오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나마 연오랑과 세오녀가 구주로 갔다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대륙의 실사기록과 대조해 실사적으로 분석을 해보아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김수로왕의 아들·딸인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무리 3천을 이끌고 구주로 이주하여 야마다를 세운 기록도 안나온다
.      

신라에서 실성왕 2년에, 후에 눌지왕이 된 미사품의 아우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도 위사로 판단되고 그와 관련된 박제상전은 일본서기 신공기 5년조에 나오는 위사를 원전으로 하여 꾸민 열전으로 판단된다
.    
또 백제 아신왕 6년조에 나오는 전지태자 인질건도 보통의 인질건과는 성격이 판이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분쟁을 하는 아신왕에게 가야의 대화왕조 응신이 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열도에 체류한 것이지 보통의 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사 두 가지를 보면 인질 보낸 이유가 단지 「왜국과 우호를 맺고」라고만 나온다. 도대체 어찌하여 왜국과 우호만 맺으면 인질을 내주었을까? 이런 것은 전통적으로 왜가 백제나 신라보다 강국이었다고 미리 설정한 구도에 맞추어 기록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왜국보다 약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나타내어 고려인들에게 우리는 옛날부터 이렇게 약했으니 묘청처럼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식을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또 삼국유사도 백제 동성왕이 열도출신이고 가야왕족이며 백제에 불교를 처음 도입한 왕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를 설화로만 꾸미고 실사에는 내용이 없다. 삼국사기에서 이런 내용을 전부 절사해 버렸기 때문에 삼국유사조차도 실사는 싣지도 못하고 설화로 꾸며놓은 것이다
.

백제불교는 침류왕 때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침류왕은 반도 내에 있지도 못하고 열도에서 전사했다고 일본서기에 누누이 나온다. 삼국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기사는 서기에 침류왕이 전사하는 상황을 달리 꾸민 기사가 있는데 거기에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때의 침류왕의 분식이칭을 정확히 알아보고 위사인 줄 알면서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불교는 실제로 동성왕이 신라 소지왕의 도움을 받아 경주신라로부터 도입한 것이 처음이고 그것이 지금 전북 익산의 미륵사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동성왕을 등재한 서명기 11 7월조에 보면 익산에 신수도를 건설하는 기사가 나오고 「서쪽백성은 궁을 짓고 동쪽백성은 절을 지었다」라고 나오는데 이때 동쪽백성이라는 것은 백제인이 아니고 백제의 동쪽에 있는 신라의 소지왕이 보내준 경주신라 기술자들이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는 동성왕의 스토리이고 「동성왕이 말년에 웅진에서 익산으로 천도한 내용과 신라로부터의 불교도입, 제라동맹을 담은 설화」인 것이다
.      

삼국사기를 지을 때 백제본기는 허위로 꾸민 일본서기를 해독하여 그 사실을 많이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표면적인 내용이 위사라는 것을 알고 그 이면에 숨긴 실사가 있다는 것도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심지어는 일본의 풍토기 내용을 약간 변조하여 옮긴 것도 있다
.
일연도 일본서기를 해독하여 가야인이 대화왕조를 세운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도 삼국유사에 나온다
.  
일본서기의 이면실사를 알았다는 강력한 근거로는 사기의 백제왕들 시호는 대부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시호를 옮기거나 적당히 바꾼 것들이고 일부는 대륙사서에 나오는 왕의 휘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열도시호를 합성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시호는 바꾼 것이고 그 전 선대의 초고왕과 구수왕의 시호는 近자만 떼고 그냥 적당히 갖다 붙인 것이다
.

백제본기 근초고기 말미에 나오는 박사 고흥이 書記를 지었다는 기록도 일본서기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근초고왕을 등재한 이중기 4 8월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중천황이 근초고왕을 등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

백제왕들 중에는 일본열도에 원정 가서 전사한 왕이 셋이나 있는데 이것을 알고도 기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근구수왕이 서기 384 4월에 몰한 것으로 나오는데 일본서기를 해독해 보면 열도 미에[三重] 근방의 근강전투에서 서기 384 2 5일 가야군의 기습수공에 말려 전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의 기원전 7세기 기록에 근강전투기록이 나오고 2 5일에 전사했다는 사실은 근구수왕을 모델로 창작한 성덕태자 기록에서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제본기 근구수 몰년기를 보면 2월조에 이상한 암호문이 나오는데 그 문장 속에 일본열도를 의미하는 日이 나오고 미에[三重]현을 의미하는 三重이 나오고 근구수왕을 은유한 宮中大樹가 저절로 뽑혔다[自拔]고 되어있다. 이것은 근구수왕이 일본열도의 삼중현 근방 근강에서 2월에 전사한 것을 알았다는 근거가 된다. 알고도 열도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다 잘라서 버린 것이다. 일본서기의 분식기록들을 일일이 다 식별했었다는 뜻이 된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近仇首王의 시호에 들어있는 仇首는 「원수[]의 시조[]」라는 뜻으로 삼국사기 저자들이 붙인 시호로 판단된다. 원수[]는 倭寇를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이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지은 사람들은 "고귀하신[] 시조님[]"이라는 뜻으로 백제 근구수왕의 시호를 지었던 것이다. 또 근구수왕의 휘인 須를 넣은 시호도 있는데 역시 "고귀하신[] 수님[]"이라는 뜻이다. 근구수왕의 열도시호는 貴首·貴須다. 또 신공기에 나오는 근구수왕의 이칭 '久 ' "영원한[] 시조님[ ]"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침류왕이 진사왕의 쿠데타로 패하여 전사했는데 이런 사실은 잘라버리고 도미열전으로 꾸며 맨 끝에 실어놓았다. 그마저도 왕실내부의 왕권쟁탈전을 여염집 부인의 지극한 정절을 강조한 스토리로 알아보기 어렵게 꾸며 실어놓았다. 都彌는 시호 枕流의 도미[]를 이두식으로 한자만 바꾼 것이다. 도미열전은 삼국사기 저자들이 지어서 실은 것으로 판단된다
.

신라 내해왕세의 석우로를 모델로 하여 꾸민 물계자전의 주인공 역시 가공인물이고 이 열전은 석우로의 내해왕대의 활약만을 따서 물계자로 꾸며서 만든 설화다
.    

또 만주에 살던 동족인 말갈을 오랑캐 취급하고 가야인을 倭라고 한 것이 고려인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왜는 전부 가야를 가리킨다. 반도에 있다가 열도로 건너가 버렸다고 우리민족으로부터 떨어낸 것이다. 말갈은 여러 설들이 많지만 부여로 판단된다
.    

기원전의 우리 역사도 거의 없다. 삼국사기보다 130년이나 늦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國祖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기원전 대륙에서 있었던 우리 고대인의 활동사도 없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예인 부여, 예맥, 옥저, 삼한에 대한 기록도 부실하다. 이것은 중국보다 우리 역사가 훨씬 뒤진다는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한이나 변진이나 마한도 기원전에는 대륙에 있었다. 그런데도 반도로 이주한 후 반도 안에서 있었던 기록만 겨우 조금 기술했을 뿐이다. 그것도 연대를 후대로 낮춘 것 같기도 하다
.      

이런 저런 근거를 대자면 훨씬 더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 든 여러 가지 근거만 가지고도 삼국사기에는 반도 밖의 연고를 끊기 위해 반도 밖에서 일어났던 많은 우리 고대인들의 활동기록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절사하고 다른 기록들도 축소·왜곡하여 지은 잘못된 사서로 보지 않을 수 없다
.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이 대륙사서 아홉 종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어렴풋이 짐작도 하기 어렵게 백제본기 동성기에 겨우 한 줄 나오고 대륙사서를 다 보고도 옮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기 10년조의 한 줄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구절과 같다. 다만 최치원전에서 백제·고구려의 전성기 판도가 한 줄 더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    

일본서기의 내용을 해독하여 다 알았다는 것은 일본왕실의 시조가 근초고왕, 근구수왕이라는 사실을 다 알았다는 뜻이 되고 일본 고대의 대화왕조가 가야인이 세운 가야왕조라는 사실도 다 알고도 절사했다는 뜻이다. 가야사를 폐기한 것도 그 주력이 열도로 건너갔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고도 남아있던 일부가 신라에 흡수된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것은 가야왕족인 동성왕이 백제왕족인 무령왕에게 암살 당한 직후다
.  

고려인들이 삼국사기를 이렇게 절사, 축소, 왜곡하여 지은 것은 반도 밖의 연고를 주장하는 묘청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고 왕실 내분을 포함한 각종 내란을 방지하여 고려왕실을 보전하고 권신들의 지위를 오래도록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도 그런 그 당시의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어서 수많은 사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서 빠진 사실 일부만 겨우 조금 더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한 내용의 일부를 보완하는 데 의미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한 것이기는 하다.                    

삼국사기는 이와 같이 절사, 축소, 왜곡되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고 그것만이 옳다고 믿으면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삼국사기를 대부분의 연구가들이 관찬정사라고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지금의 통설은 반도사관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관찬정사일수록 문제가 되는 것은 통치이념에 반하는 모든 사실이 삭제된다는 것이다. 관찬정사라고 후세인을 위해서 고대에 있었던 사실을 충실히 알려주려고 썼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사내용 하나하나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서는 위사와 실사가 섞여 있다. 따라서 위사와 실사를 가려보는 안목이 중요하지 관찬정사는 옳고 믿을 만하고 비정사는 믿기 어렵다고 하는 연구가가 있다면 그는 연구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도 못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  

고대사의 복원은 아래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

1)
왜곡된 史實을 바로 잡아야 한다
.  
2)
축소된 史實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    
3)
절사된 史實은 찾아서 보완해야 한다
.    

이런 작업을 하는데 있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부득불 우리 고대사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고 기타 우리의 다른 사서와 대륙측 사서, 일본사서에서 추려낸 실사를 더하여 보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의 실사를 분석해본 결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일종의 위서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고대인의 반도 밖의 활동사가 거의 대부분 절사된 위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서를 정사라고 금과옥조처럼 신봉을 하니 반도 밖에서 있었던 대륙관계사나 열도관계사의 설을 내세우면 오히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발로에서 견강부회한다며 극렬하게 비난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려인들이 반도사관을 주입하기 위해 교묘하게 반도내의 사건만 기술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어리석은 연구가들의 상투적인 행태다
.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대비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는 일본서기를 보고 중요한 사항들을 옮겨 적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내용들에 대해 하나하나 두 기록을 다음과 같이 대조하고 비교해 보았다
.  


1)
백제본기 근초고 2년기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에 임명하였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 성품이 사납고 비뚤어져[한戾] 어질지 않고 일에 임해 까다롭고 잘며 나이[]를 믿고[] 제멋대로 하니 국인(國人)이 그를 미워하였다』
      

이 기사는 일본서기 신대기5단 사신출생장 기사와 흡사하다. 사신출생장 기사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    

본문에 『...다음 소잔명존(素 鳴尊)을 낳았다. 이 신은 용맹하고 사납고[有勇悍] 잔인한 일을 태연히 했다[爲安忍]. 또 늘 소리내어 슬피 우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이설2에 『...다음 소잔명존(素 鳴尊)을 낳았다. 이 신은 성질이 惡하고 항상 울고 화를 잘 냈다[常好哭 ]. 국민이 많이 죽었다』  
이설6 말미에 『是時素잔鳴尊 年已長矣...중략...常以啼泣에恨』
  

이설6의 「年已長矣」라는 구절은 사기의 「나이를 믿고[恃歲]」라는 구절과 흡사하다. 사기의 진정 소개기사는 서기의 신대기 사신출생장 기록을 보고 소잔명존이 진정인 줄 알아보고 옮긴 것으로 보인다. 진정의 서기상의 이름은 眞井, 磐井, 淸 등 많이 있는데 이름도, 음은 井과 같고 뜻은 淸과 같은 '맑을 淨'을 골라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인물은 일본 고대 대화왕조 초대왕인 응신의 부왕이며 아라가야왕 아라사등으로 비정된다. 진정=소잔명존=아라사등이다
.
            
사기에는 이 기사 이후 18년 간 기사가 공백상태다. 이 동안 초고대왕과 귀수대왕은 대륙경략에 착수하여 대륙에 두 곳의 백제군을 설치한 것이고 소잔명존은 열도를 개척했던 것이 서기에 신화와 설화로 남아있다. 이런 대외진출사는 전면 절사해 버린 것이다
.      

상세내용 칼럼[1] "백제왕과 좌평이 일본서기 신대기에 등장" 참조



2)
근초고왕 국사편찬
  

사기 근초고기 말미에 국사를 편찬한 사실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  

『古記에 "백제가 나라를 연 이래 문자로 일을 기록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때 와서 박사 高興을 얻어 비로소 書記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흥은 한 번도 다른 책에 나타난 일이 없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초고대왕을 꾸며 등재한 서기 이중기 4 8월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처음으로 제국(諸國)에 國史를 두었다. 온 나라에 이르기까지 말[]과 일[]를 기록하여 남겼다』
  

위의 두 기사는 같은 내용인데 서기의 이중천황이 백제 초고대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백제본기를 기록할 때의 古記란 바로 일본의 기·기가 아닌가 생각되는 점들이 바로 이런 구절들이다. ·기상의 수많은 분식이칭을 정확히 가려본 듯이 기·기의 표면분식기사와 중요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열도진출사는 모조리 다 삭제하면서도 이런 것은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고흥이라는 이름을 지어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사기저자들 자신들이 적당히 지어 넣은 가공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


3)
근구수태자 말발자국[馬跡] 이야기
  

근구수 즉위전기에 보면 고구려와의 치양성 전투에서 돌아올 때의 일화가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오늘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하였다. 그곳에는 마치 말의 발굽[] 같은 자국이 난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태자의 말발자국[馬跡]이라 부른다』
  

그런데 일본의 상륙풍토기 '나가[那賀]'조에 귀수대왕의 이칭 하나가 생겨나게 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                      
    
『평진역가(平津驛家)의 서쪽 12리에 언덕이 있다. 이름을 오호구시[大櫛]라고 부른다. 오랜 옛날에 한 사람이 있었다. 체격이 엄청나게 커서 몸은 언덕에 있으면서 (바다의) 대합[]을 잡아먹었다. 그 잡아먹은 조개껍질이 쌓여 언덕이 되었다. 사람들이 오호구찌[大朽]라는 뜻을 따서 지금은 오호구시[大櫛]의 언덕이라 부른다. 그 거인의 발자국[踐跡]은 길이 30여보 너비가 20여보나 된다. 방뇨(放尿)로 패인 자리[穴址] 20여보 정도나 된다』


평진역은 지명인데 고대에는 평진이었을 것이다. 역가란 역마를 갈아타거나 지나며 쉬는 역참이고 언덕이름을 '오호구시'라 불렀다는데 이 이름은 귀수대왕의 '구시[//久志]'계열 이칭이다. 뜻은 '오호[]>[]>'이고 구시[] '' ''가 교체되어 쓰이므로 구스[貴須]와 같아 오호구시[大櫛]>오호구스[大貴須]는 近仇首인 것이다.      

대단한 거인으로 묘사했는데 이름의 유래가 거인이 잡아먹은 조개껍질이 쌓여 언덕을 이루고 그것이 "썩는 냄새가 많이 났다"는 뜻의 오호구찌[大朽]에서 나왔다고 했으나 그냥 이칭을 만들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  

엄청난 과장법이긴 하지만 걸음을 걸을 때 거대한 족적이 생겼다는 것인데 여기서 압반(押磐)이란 이칭을 지어 쓴 것이다. 이것은 원래 뜻이 아라사등의 이칭을 반정(磐井)으로 지어 가야를 대표시키고 귀수대왕은 오호구시라는 거인으로 꾸며 백제를 대표시킨 것이다. 근구수가 반정을 눌렀다 즉 백제가 가야를 눌렀다는 뜻이다. 압반존은 침류왕을 꾸민 현종천황의 부왕으로 나온다
.  

이 설화가 있는 상륙은 서기 382∼384년까지의 귀수대왕의 본주원정 경로에 해당되고 서기 경행기 일본무존의 동국정토 이야기에 상세히 나온다. 지금도 오호구시[大串]라는 지명이 남아있으며, 구지[久慈], 久慈川 등의 지명도 있고 가까운 곳에 經津主神을 제신으로 모신 고수[香取]신사도 있다. 경진주신은 귀수대왕이며 구지[久慈] 역시 '구시'계열 이칭이다
.  

사기저자들은 일본의 이 풍토기기사를 보고서 사람을 말[]로 바꿔서 이야기를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기·기는 물론 풍토기까지도 다 해독하고 귀수대왕의 이칭도 정확히 가려보았다는 뜻이다
.      


4)
사기의 근구수왕 열도전사 기록
  

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 근구수기 몰년 2월조에 아래와 같이 묘한 천문현상과 괴변이 실려 있다
.

『日有暈三重 宮中大樹自拔 > []에 三重의 햇무리가 끼이고 궁중의 큰 나무[大樹]가 저절로 뽑혔다[自拔]
      

그런데 이 문구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천문현상이 아닌 것 같다. 고도의 은유로 이루어진 암호화된 기사로 보인다. 이 문장에 대하여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1987/하나출판사/208p>에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  

『日()은 통상 王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쓰임은 물론 '宮中大樹'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궁중의 大人에 해당하여 왕위에 있는 분말고는 쓰일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한다. ()에 비견되는 왕에게 삼중으로 햇무리가 둘러싸이고 궁중의 大樹격인 왕이 自拔하였다는 것은 4월이 아니고 2월에 근구수왕이 적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다만 '四月王薨'이라 한 것은 虛記일 따름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위사인 점에서는 삼국사기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삼중은 지금 伊勢지역이 삼중현이란 지명으로 남아 있는데 景行記에 의하면 일본무존이 불파관을 넘어들어 갔다가 기습을 당한 후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와 삼중현에 도착하였을 때 일본무존이 말하기를 '내다리가 三重으로 휘어지는 것처럼 몹시 피곤하다'하였으므로 해서 그곳이 三重이란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서 볼 때 이 삼중이란 말이 근구수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일본에서는 三重이란 지명으로 삼국사기에는 '日有暈三重'이란 기록으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의 해석처럼 사기의 천문현상은 아무래도 고도한 은유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이 천문현상과 괴변을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을 이용하여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사기 경행기의 왜건명이 서기 경행기의 일본무존과 동일인물이고 야마또다께루..미꼬또[倭建命/日本武尊]로 음도 동일한데 성씨록에는 倭建尊으로 풍토기에는 倭武天皇으로 나오고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인물이다
.

. 日이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 세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      

(1)
日은 원래 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2)
日은 고대인의 신화·설화에서 王을 상징한다. 인간세계의 왕은 자연계의 태양과 같다고 보는 태양신 숭배사상과 관련 있다. []를 왕으로 비유하는 경우는 고대에 왕권다툼이 있을 경우 「하늘에 해[]가 둘 있을 수 없다」라는 식으로 흔히 표현되고 있다
.    

(3)
日은 日本를 가리킬 수 있어 귀수대왕의 원정지인 열도의 본주를 가리킨 것으로도 해석된다
.

. 유운삼중(有暈三重)은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      

(1)
일반적인 천문현상으로 보면 세 겹의 햇무리를 의미할 수 있어 "해에 세 겹의 햇무리가 끼었다"는 뜻이다
.      

(2)
지명과 상징성을 이용하여 해석하면 "일본열도 미에[三重]에서 불길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천문현상을 해석할 때 햇무리는 불길한 일을 의미한다
.

지금 여기서도 보다시피 미에[三重]란 지명도 귀수대왕이 실제 전사한 시점에 생긴 것처럼 되어 있으나 수공에 말려 익사하여 시신도 수습 못했으므로 훨씬 후대인 8세기초 기·기 저술시 꾸민 이야기다. 미에[三重]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사기 경행기에서 왜건명이 한 말 「吾足如三重勾」>「내 다리가 삼중으로 휘어지는 것 같다」라는 문구에서 나왔다고 한다
.    

. 大樹는 뜻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      

(1)
한어 음이 같은 大樹>大水로 놓고 이것을 다시 한어로 훈독하여 이두표기하면 大水>큰강>近江이 된다. 近江>大水>大樹로 만든 것이다. 열도 미에[三重]현 근방 오오미[近江]를 의미한다
.        

(2)
한어로 역시 음이 같은 大樹>大須로 놓고 大의 훈을 이두표기하면 큰>近이 되어 大須>近須가 되는데 須는 귀수대왕의 휘이므로 近仇首의 준말이다. 또 近仇首>仇首에서 仇를 음이 같은 구다라[百濟]>구다라[大國] ''로 보면 크다[]는 뜻이므로 大樹>大須·近須와 같다. 귀수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

(3)
大樹는 위인을 상징한다. 그냥 단순히 봐도 大樹=巨木으로 현대에도 위인을 상징하는 말로 흔히 쓴다. 宮中大樹는 곧 王인 것이다. 궁중대수가 저절로 뽑혔다는 것은 王이 죽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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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풀이를 조합하여 해석해보면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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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순천문현상으로 직역하면 「해에 햇무리가 삼중으로 끼이고 궁정의 큰 나무가 저절로 뿌리가 뽑혔다」라는 정도로 해석 가능하고 의역하면 「궁중에 지극히 불길한 일이 발생했다. 즉 궁중의 위인(=)이 죽었다」라는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이 경우도 4월에 왕이 훙했다는 사기기사는 허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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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귀수대왕의 열도전사를 알고서 그 내용을 암호화하여 기록해둔 경우는 「일본열도 미에[三重] 근방의 오오미[近江]에서 귀수대왕이 전사했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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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이 기사는 아무래도 귀수대왕이 일본열도 미에[三重]현 근방의 오오미[近江] 전투에서 2 5일에 전사한 것을 사기저자들이 다 파악하고서 천문현상으로 교묘히 위장하고 암호화하여 근구수기 몰년 2월조에 기록해 놓은 문장으로 보인다. 귀수대왕이 2 5일 전사한 것은 서기 추고기 성덕태자의 일화에 나온다. 달도 정확히 2월로 기록한 것을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연이라도 이렇게 맞아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고대사서인 일본서기·고사기·풍토기·신찬성씨록 등을 정확히 해독하여 가야·백제의 열도진출·정복을 전부 다 파악하고서도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의도적으로 절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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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침류왕 불교도입설
    

백제본기 침류기 원년 9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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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진()에서 와 왕이 그를 궁내에 맞이하고 예경(禮敬)하니 불법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2 2월조에 『한산에 가람을 창건하고 승려 열 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이 기사들은 사실이 아니다. 비슷한 내용이 일본서기의 분식기사에 나오기 때문이다. 침류왕을 등재한 서기 효덕기 대화 5(서기 649) 3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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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소아신일향(字 身刺)은 창산전대신을 황태자에 참언하기를 "제 이모형(異母兄) 마려(麻呂), 황태자가 해변에서 노시는 것을 엿보고 해치려고 합니다. 모반하는 것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황태자는 그 말을 믿었다. 천황은 대반박련, 삼국마려공, 수적교신을 소아창산전대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 모반의 허실을 물어보았다. 대신이 답하기를 "물어보신 것은 천황 계신 곳에서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천황은 다시 삼국마려공과 수적교신을 보내 모반사정[反狀]을 물었다. 마려대신은 역시 전처럼 답했다. 천황은 군사를 동원하여 대신의 집을 포위하려고 했다. 대신은 두 아들 법사(法師)와 적저(赤猪/일명 秦)를 데리고 모정도에서 도망하여 왜국의 경계로 갔다. (25) 대신의 장자인 흥지(興志)는 그 전에 왜에 있어[山田의 집에 있음을 말한다], 그 절을 짓고 있었다. 지금 갑자기 父가 도망해 온다는 말을 듣고 금래(今來)의 대규(大槻)로 마중하여 가까이 가서 먼저 절에 들어갔다...(중략)...대신은 산전사의 여러 승, 장자 흥지 등 수십 인에게 "신하된 사람으로서 어찌 주군에 반역을 꾀하겠는가. 어찌 父에 효를 잃을 것인가. 무릇 이 절은 원래 나 자신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서약하고 짓는 것이다. 지금 나는 신자의 참언에 걸려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렵다. 작으나마 바라는 것은 황천에 가서도 오히려 충성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절에 온 이유는 마칠 때를 편히 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는 불전의 문을 열고 우러러 발원하여 "원컨대 나는 세세생생 군왕을 원망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서원을 끝내고 스스로 목매 죽었다. 처자가 죽는데 순사자가 8명이었다. 이날 대반박련과 소아일향신을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대신을 쫓았다. 장군 대반련 등이 흑산에 이르렀을 즈음, 토사련신·채녀신사주마려가 산전사(山田寺)로부터 달려와 고하기를 "소아대신은 이미 삼남일녀와 함께 스스로 목매 죽었습니다"라고 했다...(중략)...이날 저녁 목신마려, 소아신일향, 수적신교는 군사를 이끌고 절을 포위했다. 물부이전조염을 불러 대신의 목을 베게 했다. 이에 이전염은 칼을 즉시 뽑아 그 몸을 찌르고 질타제규(叱咤啼叫)하면서 시신을 베었다. 소아산전대신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은 전구신축자, 이리도덕, 고전추웅[醜를 '시고'라 한다], 액전부탕좌련[이름이 빠졌다], 진오사 등 전부 14인이었다. 교수형을 당한 자 9, 유형을 당한 자 15인이었다』


이 사건을 보면 소아신일향(=진사)이 이복형 창산전대신(=침류)을 황태자에게 모함하여 황태자(=천지/응신)가 대반박련, 삼국공마려, 수적교신 등을 보내 창산전신을 추문하고 창산전신은 아들 둘을 데리고 왜국의 경계로 도망하고 장자 흥지(=아신)는 山田의 집에서 절을 짓고 있었다고 하고 대반박련(=가야장수)과 소아신일향이 다시 추격하고 창산전신은 아이들과 자결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 후에 진사왕을 일인이역시켜 이전염이 시신을 잔인하게 처리하고 창산전신 편에 섰던 사람 몇이 죽은 것으로 나오는 스토리다. 아베[阿倍]신은 응신(=예전)의 형 예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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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을 보면 침류계는 소아창산전, 법사, 적저(), 흥지(=아신), 전구신축자(=무내 아들), 이리도덕(=침류), 고전추웅(=전구신축자), 액전부탕좌련, 秦吾寺 등인데 법사와 적저는 아신왕의 아우로 나오는데 침류왕과 함께 일찍 죽은 인물들일 가능성이 있다. 무내 아들 중에 침류왕과 같이 죽은 인물이 하나 있다. 액전부는 침류왕의 후손 성씨다. 하다[]는 요속일과 궁월군, 아지왕을 조로 하는 성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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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계로는 황태자(=천지/응신), 대반박련(=예진 아들), 삼국공마려(=응신 아들), 수적교신(=무내 아들), 채녀신사주마려(=무내 아들), 목신마려(=무내 아들) 등이 등장하는데 가야계에다 무내 아들들이 가세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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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계로는 소아일향신(=字가 身刺/진사), 토사련신, 물부이전조염(=진사) 등인데 반도에서 열도의 야마구찌[山口]현까지 쫓아나와 가야군과 협공하여 침류왕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토사련은 원래 무내계 성씨지만 끝에 身자를 붙여 字가 身刺인 소아일향신계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내와 진사는 동복이었다. 소아일향의 字 무사시[身刺]는 무내 후손 성씨 무사시[武藏]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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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침류왕이 진사군과 가야군의 협공을 받아 사지에 몰렸을 때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절도 천황(=침류)을 위해 짓는다고 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 기사는 이 효덕기의 스토리를 보고 꾸며서 옮겨 놓은 위사다. 서기의 표면적인 연대 649년의 사건을 사기에는 384년으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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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1]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24) / 진사군과 가야군이 침류군 협공" 참조
  


6)
진사의 왕위찬탈
  

백제본기 진사기에 「침류가 죽자 태자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즉위했다」라고 나오는데 사실은 위에서 보았다시피 이복형인 침류왕을 강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그 시신마저 팔단하여 참혹하게 처리했고 왕위를 찬탈한 것인데 별 문제없는 것으로 기술했다. 이 기사가 서기 신공기 65년조에 「침류왕이 훙했다. 왕자 阿花는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라고 정확히 나온다. 서기를 해독하여 실사를 알고도 찬탈을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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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이 다시 귀수대왕을 등재한 서기 민달기 원년 5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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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은 고려의 국서를 받아 대신에게 주었다. 여러 史官을 불러모아 해독시켜보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 이때 船史의 조인 왕진이가 있어 능히 해독해 바쳤다. 그래서 천황과 대신이 함께 칭찬하며 "잘했구나 진이여, 훌륭하다 진이여, 네가 만일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능히 해독할 수 있었겠느냐. 이제부터 궐 안[殿內]에서 근무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야마또가후찌[東西]의 여러 사관에게 조하여 "너희들이 익힌 업이 웬일인지 진보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많아도 진이만 못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고려가 올린 문서는 까마귀깃털에 적혀있었다. 문자가 깃털의 검정색 때문에 아무도 알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진이가 깃털을 밥김[飯氣]에 쪄서[] 부드러운 비단으로 깃털을 눌러 글자를 모두 베꼈다. 조정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고려국서란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백제왕권을 고려국서로 은유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려국서를 해독을 못했다는 것은 왕위에 못 올랐다는 뜻이 되고 왕진이가 해독을 했다는 것은 진사가 왕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상한 방법으로 해독했다는 것이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했다는 뜻이다. 궐 안에 근무하라고 한 것도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귀수대왕이 진사에게 왕권을 허락했다는 것이 아니고 8세기초에 선대의 결과를 놓고 꾸민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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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史의 조로 나오는 王辰爾가 진사왕이다. 「백제王 중에 이름에 辰자 들어간 인물[]」 또는 「王인의 아들 중에 이름에 辰자 들어간 인물[]」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칭이다. 물부씨의 시조인 요속일이 「요[]>[]씨 성의, 이름에 速자 들어간 왕[]」 즉 速古王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기법으로 만든 이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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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原宿니; 菅野朝臣同祖 鹽君男 智仁君之後也(우경제번
)
船連; 菅野朝臣同祖 大阿郞王三世孫 智仁君之後也(우경제번
)
菅野朝臣;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 貴首王也(우경제번
)  

'
궁원숙니'조의 염군(鹽君)이 효덕기 대화 5 3월조에서 침류인 창산전대신을 난자했다던 물부이전조염(=진사)인 것이다. 이들은 관야조신과 일족으로서 전부 貴首王의 후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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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왕의 왕위찬탈은 일본서기에 다양하게 꾸며져 여러 차례 실려 있는데 황극기에서는 5)에서처럼 이모형을 모함하여 죽이는 것으로 꾸몄고 중애기 원년 윤11월조에 노발포견별왕(=진사), 「越人이 중애에게 바치러 가는 백조 네 마리를 가로채면서 백조라도 구우면 흑조가 되지」 라고 하는 대목에서도 나타나 있다. 월인이란 월국을 개척한 가야계를 가리킨다. 아라사등의 이름 앞에 월국의 중심지인 쯔누가[角鹿]라는 지명을 붙일 정도이기 때문이다. 월인이 침류왕을 꾸민 중애에게 백조를 바친다는 것은 가야군이 근강에서 귀수대왕을 전사시킴으로써 침류가 자연스레 백제왕이 되었다는 말을 우회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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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는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일본무존의 혼령이 화한 새로서 지금 여기서는 네 곳의 백제영토를 은유한 것이다. 대륙 두 백제군 백제본국, 열도다. 백조는 백제와 음도 비슷하다. 포견별왕이 천황의 이모제라고 되어 있다. 윤공기, 안강기, 용명기, 숭준전기에도 달리 꾸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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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칼럼[1]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 (23) / 진사왕의 쿠데타와 백제왜분립", "(29) / 침류왕의 최후상황과 전사시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