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향가·만엽가·일본서기 해석

에도시대 고증역사학자 후지와라 사다모토의 고백

monocrop 2007. 10. 12. 20:41

저명한 학자였던 그는 [충구발 衝口發-쇼오꼬오하츠]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일본기(서기)를 읽으면 처음 이 나라가 마한, 진한이란 두개의 한에 의해 열렸고 , 아울러 변한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고래, 韓으로부터 日이 비롯되었다는 것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일이란 나라만으로 무엇이나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어를 왜어로 보고서 가지가지 설을 내세운 나머지 마참내는 본 뜻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일본 역사는 마한, 진한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한편으론 변환과도 영향받은 관계를 알지 못하고 읽었다면 진정 일본기(서기)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설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도 있었으니, 그는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 지도자였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 1293~1354년)였다.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 에는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桓武, 781~806년 재위)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칸무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北山�夫 ‘王朝政治史論’ 岩波書店 1970).


‘신황정통기’의 저자 기타바타케 치카후사는 당대에 예리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였고,
 14세기 일본의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감히 역사 비판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가 칸무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 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로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하는데,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嵯峨, 809~823년 재위)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 칸무천황이 명령을 내려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그 이후 한일동족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서기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한국에서 영항받은 관계를

알아야한다고 했던 후지오라 사다모토 외에도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의 도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을 비롯해서

메이지 (明治)시대(1868~1912년)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일제 군국주의 치하에서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년)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돼 왔다.

 

이처럼 일본이 성립된 배경에 대해 '진실'을 말해 왔던 일본인 학자들이 계속 있어 왔음에도

오늘날 일본서기를 비롯한 만엽집등을 어떻게 고대 한어로 읽을 수 있느냐하는 일본인들이 있고,

야마토정권이 한반도와 관계없는 만주의 기마족이 수립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의견을 늘어 놓는

일본인들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그들의 열등감이 뿌리 깊은 것인지 우리에겐 상상조차 힘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마왕으로 알려진 무열왕이 열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만을 들며 이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전투에서 밀려 감나루를 버리고 열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백제 응신천황의 상황은 이해하지 않고, 신라계였던 이즈모지역이나 구주조차 다 제압하지 못했던 당시의 열도의 망명정부에서  반도를 지배한 증거라고 말해야만 하는 일본인들의 사고 이면을 접하면 상상을 초월한 열등의식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음을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그 옛날 후지오라 사다모토의 고백을 보면서 다시금 일본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