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향가·만엽가·일본서기 해석

[스크랩] 일본호류사1300여년전의 백제징집장인의 백제어 낙서-"늘 울고 상한몸"

monocrop 2007. 10. 11. 16:19
 
<법륭사 오중탑 사진 다음 블로그 제공>
일본호류사1300여년전의 백제징집장인의 백제어 낙서
"늘 울고 상한몸"

  <큐우슈우도요스탄광 한국인 합숙소 벽에 쓰인 한글낙서>

 

법륭사 오층탑의 낙서 九文字

일본의 고찰 법륭사는 쇼도꾸(성덕)태자에 의해서 스이코(推古) 천황 15년(A.D607)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천지9년(670년)4월30일 밤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재건하여711년에 공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중탑의 첫층 천장의 판자 받침대에 쓰인 낙서가 별견된 것은 1947년의 일로서, 이 탑의 수리작업을 위해 해체 수리 도중이었다 한다.

 

그 아홉문자는 다음과 같다

奈爾波都爾佐久夜己


일본학자 小松茂美의 [가나]란 저서(岩波新書刊)속에 이에 관해서 꽤 소상히 소개되어 있다. 그 해설에 따르면 이 것은 유명한 일본의 상대가요 헤이안전기 [古今和歌集]의 서문에도 소개되어 있는 노래 한 수의 첫부분 아홉 글자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먼저 그 상대가요가 어떤 것인부터 보자.

 

니와 쯔니 사꾸야고노와나 冬고모리 이마와화루베도사구야고노하나”

 

이 노래는 백제에서 간 왕인박사가 지었으며 당시의 황실의 융성을 비유한 노래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옮겨 놓고 있다.

 

나니와즈에 피누나 나무의 꽃 긴 겨울 잠

이 봄이 다할세라 피는가 나무의 꽃“

 

그런데 [奈爾波渡爾佐久夜己]의 九文字(아홉글자)는 일본식 독법에 따라 풀이된 위의 노래 줄친 부분,즉 “ 니와쯔니사쿠야고”에 해당한다는 것이 일본학자의 설명이다.

 

이것을 통해 일본학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고 있다.

 

[보다시피 一字一音씩을 취하고 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일은 그것이 오중탑의 재건공사에 종사한 목수의 심심풀이의 솜씨였으리라는 점이다. 당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힘이 이런 사람들의 층에까지 이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단서가 된다.]

 

여기서 한국의 학자 박병식은 몇가지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나의 의문의 첫째는 왜 아홉글자로 그만뒀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본의 [와까]라면 5.7.5.7.7의 31문자를 모두 쓰지 않더라도 하다 못해 첫 구 17자까지는 썼어야 함이 상식 아니겠는가.....또, 지금부터 약1300년 전의 목수에게 와까를 즐길 정도의 소양이 있었을까?

 

가령 있었다 치고라도 직공이 중요한 작업중에 그런 가사의 낙서를 할 심리가 될 수도 있었을까 등등 별 의심이 다 났었다.] 운운.

 

그래서 박병식의 결론은 첫 두글자를 받침대의 좌단에 [약간 크게 세로로]쓴 다음 이번에는 가로로 아홉글자를 연달아 작게 쓴 데는 나름대로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奈爾

 波都爾佐久夜己


말하자면 [奈爾]가 두 번씩이나 나오는데 한번은 세로로 크게 적고 다음번에는 연달아 좀 작게 아홉글자로 끊었으니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노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和歌(화가)였다면 5.7.5의 17문자로 받침대를 나누어 쓸 수도 있었을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고, 그 받침대 크기 만큼 공간에 다 들어갈 수 있도록 가로로 연이어 쓴 아홉글자의 크기 만큼의 공간에 다 들어갈 수 있도록 가로로 연이어 쓴 아홉 글자의 크기가 작게 조정되었다는 것은, 본래 쓰고 싶은 것이 그 아홉자뿐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남겨놓은 아홉문자가 어쩌다가 고대 가요의

  첫 구처럼 읽혀버린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박씨는 덧붙이고 있다.

 

 이 해석을 일본인은 순수 일본어 독법으로 해독하였다.

 그러니 불완전한 문장으로 마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륭사를 지었던 쇼도쿠태자는 백제에서 보낸 박사가 스승으로 있었다.

 법륭사를 지은 사람은 백제계통의 고건축장인들이 동원되어 현재에 1300여년의 세월 속에 현존하는 백제 건물이다.

 

일본인도 법륭사건물은 한민족 백제 형식의 건물임을 익히 알고 있다. 담징의 금당벽화와 백제관음상 등 일본 국보가 보존된 백제식 건물. 이 건물을 지을때 그 장인이 새겨놓은 글자는 한반도에 동원된 도래 백제인임 틀림없다. 이 노래를 해독함으써 그 시대의 말과 장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위의 수수께끼같은 아홉글자를 필자의 방식에 따라 한국어로 읽는다.


奈(어찌할고)爾(니)波(너울)都(모도)爾(니)佐(도울)久(구)夜(해진)己(몸)

 

[어찌할거니, 늘  못 오니 또 울구, 해진(傷한,혹은 헤어진)몸]


 문자풀이를 하면 奈(어찌할 나)爾(니, 爾의 약자)

 波(너울 파)都(모도>모두 도)佐(도울 좌)久(구)夜(해질 (야)]己(몸 기)


 위의 풀이에서 보듯 두 번 사용된[爾]는 일률적으로

  한국어의 어미[-니]로써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오중탑의 받침대에 좌단에 세로로 약간 크게

  [奈爾]의 두 글자만 따로 적어놓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띠고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즉,[奈爾]의 두자로써 [어찌할거니]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지, 결코 일본식으로 [나니와]라 표현하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가로로 좀 작게 연달아

 

  [波都爾佐久夜己]라고 쓴 일곱자를 해독함에 있어,

  奈爾/波都爾/.....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하는 논리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단서가 곧 좌단의 세로 글자로 낙서된 [奈爾]인 셈이다.

 

법륭사 五重塔(오중탑)의 재건공사에 종사한 백제목수의 [신세타령]이 이 글의 내용임은 이로써 분명해지는 듯하다.

백제에서 파견되어온 이국땅에서 늘 못오는곳 (가족들과 아내가 늘 못오는 법륭사현장)에서 혼자 쓸쓸히 울고 또 마음과 몸까지 상한 신세를 한탄하여 새겨놓은 글이다.

 

고마쓰(小松)교수는 말마따나 [당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이런 사람들의 층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단서]라고 가정할 때 8세기 당시

 

(법륭사의 재건 공양이 이뤄진 것은 711년)까지만 하더라도 고대한국어가 일본열도에서 그대로 통용되고 있었던 하나의 증거이며,이 장인들은 백제에서 파견되었거나 도래한 이들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어의 향찰식 표기(이두식)가 백제유민들에게 보편적 현상이었음을 강력히 보여주고 있는 유력한 단서인 것이다.

 

이 문자들로부터 연상되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가령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징용자들이나 정신대여인들이 전쟁터로, 탄광으로 곳곳에 끌려가 죽음의 참호 속에서 또는 지하의 깊숙한 갱속에서 ,

 갇혀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를 뒤척거리며 담벽에   개발개발 낙서를 끼적거렸던 사실들은,오늘날 같은 일본의 번영이 있기까지의 또 다른 하나의 이면인 것이다.

 

[엄마,보고싶어].[나 배고파].[살고싶다] 따위의 한글로 쓰인 낙서가 일본열도 곳곳 지하 갱 속의 벽면에 적혀 있던 광경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이들 원혼의 안타까운 절규가 일본열도의 지하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한, 일본인은 이들의 원통한 넋을 달래주어야

  할 의무를 영원히 한국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글돋선생 김문배>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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