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이종호-한민족의 기원

[스크랩]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4) -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

monocrop 2007. 10. 5. 03:04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4) -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인돌별자리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 중의 하나는 천문 현상 관측이다. 천문 현상을 왕권의 존립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 받는 3명의 제왕이 있다. 요, 순, 우가 그들인데 그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 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 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이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해 완벽한 천문 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 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결국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 순,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 룡덕리 고인돌과 실측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년경이다.  ⓒ

즉 하늘은 제왕만이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제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자연관은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천문학이 고대에서 통치 기술로 접목될 수 있는 것은 천문학이 농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파종하는 등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절기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하늘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1년의 시작, 한 달의 시작점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시계가 없던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은 어떠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역(歷)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었다. 4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였으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제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작물의 생육조건과 하늘 즉 기후와 연계시킨 노하우가 축적돼 있을 때 특정 작물이 잘 자라며 또 수확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하늘의 정보는 하늘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이상 징후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함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는 것이며,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빠른 천문도가 우리 나라의 고인돌에서 발견된다.

▲ 지석리 고인돌(좌)와 원화리 고인돌(우) 별자리 실측도.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는 주로 평양의 고인돌 무덤 중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는 2백여 기나 된다. 고인돌의 두껑돌에 새겨진 홈구멍이 천문도임을 알게 되기 전에는 이 홈구멍에 대한 견해가 구구했다.

고인돌의 뚜껑돌에 있는 홈구멍은 고인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거나 불을 일구는 발화구멍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며 하늘과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일부는 민간에서의 장수를 의미하는 발자국으로 인식하기도 했고 피장자의 족보로도 보았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회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수량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인돌 무덤에 새겨진 홈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최첨단의 과학기술 정보를 돌 위에 적은 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됐다.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별자리를 기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위에 직접 별자리를 새겨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 자체를 하나의 별로 간주해 바위들을 별자리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인돌별자리의 추정 연대이다.

고인돌별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이다. 평양에서 북서쪽으로 약 44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이 무덤의 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밤에 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한 별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또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연중 계속 볼 수 있다.

▲ 강동군 항목2리 별자리 고인돌.  ⓒ

그 당시의 북극성은 오늘날 용별자리의 알파(α)별이다. 이 별을 중심으로 80여 개의 구멍은 큰곰별자리, 사냥개별자리, 작은곰별자리, 케페우스별자리 등 11개의 별자리를 나타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歲差運動)을 감안해 연대를 측정하면 고인돌의 별자리는 4800±215년의 하늘을 보여준다. 또 같은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를 핵분렬비적법으로 측정해 4926년(±741년)이란 결과를 얻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2900~30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양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무덤도 기원전 30세기 전반기의 무덤으로 뚜껑돌 위에 80여 개의 홈구멍이 새겨져 있으며 크기도 제각각 다르다. 그 중 큰 홈구멍은 6개가 있는데 5개는 북두칠성의 국자와 자루를 연상시킨다. 북두칠성의 놓임새에 따라 나머지 별들을 관찰하면 큰 별 하나는 5제좌(사자별자리의 β별)에 해당하며 작은 별자리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자미원(당시 북극)과 테미원, 천시원에 속한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신들이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운영하며 별자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자미원은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담(북극성)을 의미하며 태미원은 옥황상제가 정사를 논하는 장소, 천시원은 백성들이 생활하는 시장을 뜻한다. 이 고인돌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는 4800년 전 여름이다. 은천군 정동리 ‘우1-19호’ 별자리는 약 4,700년 전으로 나타났으며 계절은 여름경이다. 즉 여름경 밤하늘의 별을 새겼다는 뜻이다.

또한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 고인돌에 그려진 별그림은 길이 3.45미터, 폭 3.20미터, 두께 0.60미터의 뚜껑돌에 있다. 구멍의 크기는 가장 큰 것이 직경 10센티미터, 깊이 3.5센티미터이며 여러 가지 크기로 구분돼 있는데 용별자리, 작은곰별자리, 큰곰별자리 등을 나타낸다. 연대는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된다.

은천군 ‘ㅎ-3호’ 고인돌은 구멍수는 28이지만 별자리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인돌에는 븍극5, 구진, 자미원(당시 북극), 천리, 북두칠성, 등이 보이는데 연대는 3,944±215년이다. 강동군 화강리 고인돌에는 전사, 화개(케페우스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학적 연대는 3700년 전 여름경이다.

함경남도 함남 함주군 지석리의 고인돌 무덤에서 발견된 별그림은 기원전 1500년경의 것으로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중심점(북극점)을 기준으로 해 큰곰별자리에 속해 있는 북두칠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곰별자리, 카시오페아, 케페우스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특히 뚜껑돌 우측을 따라 은하수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은하수가 별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관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석리 고인돌에는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4부류로 구분해 새겼는데, 그 크기는 직경 10, 6, 3, 2센티미터 순이고 깊이는 3~3.5센티미터 정도이다. 이 돌에 새겨진 별을 관찰하면 동지, 하지, 춘분, 추분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특히 지석리 고인돌 별그림을 보면 그 이전 시기의 것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자리 별을 기준으로 볼 때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에 해당하는 구멍들의 간격이 용덕리 고인돌보다 더 정확하며, 4등성 이하의 별까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별을 관상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천군 ‘ㅂ-1호’는 오덕형 고인돌로 구멍수가 134개나 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5, 정수(쌍둥이), 삼수(오리온)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으로 추정됐다.

▲ 황해남도 은천군 정동리 우녕동 별자리 고인돌,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

용덕리 고인돌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별자리의 α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보다 1500년 후의 지석리 고인돌별자리 그림에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다. 이것은 당시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북극점이 세차운동에 의해 변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당시의 천문관측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백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二十八宿)를 비롯해 모두 40여 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의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 성단들도 새겨져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2002년에는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에서 매우 특이한 고인돌이 발견됐다. 모두 9기의 고인돌이 배치돼 있는데 이들 모양은 누가 보아도 북두칠성이 분명했다. 이들 9기의 고인돌은 대체로 350미터 거리에 분포돼 있다.

유물로 돌활촉이 20개, 돌도끼 1개, 반달칼 1개, 질그릇 2개 등이 발견됐는데 돌활촉은 모두 점판암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들었다. 이들 고인돌은 구조형식상 북방형고인돌이다. 고인돌무덤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는 것은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에서도 나왔다. (계속)


참고문헌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지석묘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태용, 『대한문화재신문』 제16호, 2004년 7월 15일
「고조선의 석각천문도」, 김동일, 조선고고연구, 2003년 1호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렬되어 있는 구서리고인돌무덤 발굴보고」, 김동일, 조선고고학학회, 2005년 3호
/이종호 과학저술가  


2007.09.30 ⓒScience Times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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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과학 기술!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http://cafe.daum.net/tkawhstkdwpsla/IzMK/64

 

 

기원전 3000년 경에 정확하게 하늘을 관찰하여 고인돌에 천문도를 새긴 우리 선조의 과학 기술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로 이어진다.

 

천상열차분야의 '천상天象' 은 하늘의 형체이고

'열차(列次)' 는 황도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 12차이며

'분야(分野)' 는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역이다.

곧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천상도, 열차도, 분야도라는 세 지도를 합친 지도를 뜻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말기, 당나라 군이 쳐들어온 672년 대동강 물에 빠뜨렸는데,

다행히 그전에 제작해둔 탁본 한 장이 조선 초에 발견되었다.

이덕일 박사는 당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석각본을 수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천문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천하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나라가 석각 천문도를 수장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본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다.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의 역사는 삼가성도에서 비롯되지만 이 천문도는 현존하지 않으며

그 역사적 실존 여부도 불확실하다. 

다만 그 별에 대한 정보는 당나라 때 '보천가' 라는 책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281좌 1,445개에 달하는 동아시아 별자리의 표준이 되었다.

 

[보천가]

 

 

그러나 이것은 천문도로 그린 것이 아니며 본격적인 전천 천문도로 1247년에 만든 중국 소주의 '순우천문도' 가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보다 무려 9세기나 늦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_채색 필사본]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_국립박물관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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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천문도 따로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805190102 / 2008. 05.19 03:01

 

 

 


연세대 소장 ‘건상열차분야지도’ 등 2점

“현존 최고 국보 228호보다 시기 앞선 듯”

핼리혜성 관측 일지 ‘성변등록’도 공개


15일 오후 연세대 학술정보원(옛 중앙도서관) 내 전시실. 옛 천문도와 천문학, 수학 관련 고문서 40여 점이 13일부터 전시 중이다. 다음 달 28일까지 계속되는 ‘한국 과학의 전통과 연세’를 주제로 한 전시회다.

전시작 중 조선시대의 필사본 천문도 한 점이 눈길을 끈다. ‘건상열차분야지도(·가로 74cm, 세로 140cm)’. 이 천문도의 별자리 그림은 국내 최고() 천문도인 국보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각석’은 돌에 새겼다는 뜻)을 닮았다. 이름도 맨 앞 글자만 다를 뿐이다. ‘’도 하늘이란 뜻이니 의미는 같다.

‘국보 228호의 필사본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유물을 소개한 글이 눈에 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을 위해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자료다.” 이 추정이 맞다면 국보 228호보다 제작 시기가 앞서는 국보급 천문도인 셈이다.

그 근거는 뭘까. 발문에 적힌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홍무() 28년’으로 1395년(태조 4년)이다. 국보 228호의 제작 시기는 1395년 음력 12월로 제작 연도가 같다.

‘한국천문학사’를 펴낸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보와 같은 계통의 천문도이면서 구성이 다르고 국보 제작을 주도한 권근(1352∼1409)의 이름만 발문에 적혀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보에는 권근 등 제작에 참여한 학자 12명의 이름과 관직이 적혀 있다.

이 유물은 또 국보와 달리 별자리 그림 바깥 둘레에 주천도수(·하늘의 둘레를 나타낸 눈금)가 없다. 국보 천문도는 18세기까지 절대적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국보 이후 제작된 같은 계통의 목판본, 필사본 천문도는 구성과 별자리 그림이 국보와 똑같은 데 비해 이 천문도는 국보와 달라 후대 유물로 보기 어렵다는 게 나 교수의 설명. 나 교수는 “권근의 이름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천문도를 돌에 새기기 전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만든 여러 시안 가운데 한 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필사본 천문도(가로 83.5cm, 세로 139cm) 한 점도 주목된다. 이 천문도는 국보 228호 계통의 천문도지만 별자리 그림의 방위가 국보에 비해 시계 방향으로 90도 틀어져 있고 별자리 그림을 28구역으로 나눈 ‘28수(宿)’의 구획을 나타내는 방사선, 적도와 황도, 주천도수가 없다.

나 교수는 이 천문도가 고려 13세기 말∼14세기 초에 제작된, 국보의 모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후대의 필사본이라면 국보와 천문도의 구성이 다를 리 없고 별자리 그림 이외의 구성 요소가 이처럼 간략할 수 없다는 것.

국보 228호는 고구려의 천문지식을 기초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교수는 “‘고려사’에, 탁월한 천문학자 오윤부(?∼1305)가 ‘일찍이 스스로 천문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다 취하여 이를 본받았다’고 적혀 있다”며 “천문도의 아이디어가 조선시대에 갑자기 나타났을 리 없는 만큼 고려시대에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작 중 조선시대에 천문, 지리학 등의 사무를 맡았던 관청인 관상감의 핼리혜성 관측 기록이 적힌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2호 성변등록()도 흥미롭다.

 

이 유물은 1759년 3월 5일 출현한 핼리혜성이 3월 29일 소멸할 때까지의 변화상을 빠짐없이 관측 기록한 것이다. 날짜별로 혜성의 이동 경로, 혜성의 꼬리 길이, 모양, 색깔까지 자세히 기록했고 3월 27일 혜성이 보이지 않는데도 혜성이 소멸한 것으로 추측할 뿐 관측을 계속해 29일 소멸을 확정했다.

김영원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연구실장은 “당시 핼리혜성은 전 세계에서 관측돼 기록으로 남았지만 ‘성변등록’처럼 상세한 기록은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