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이종호-한민족의 기원

[스크랩]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3)

monocrop 2007. 10. 5. 03:01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3)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

고 인돌에 대한 연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매우 늦게 시작됐다. 고인돌을 선사시대의 중요한 유물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고인돌이 처음 발견됐을 때 학자들은 원시인들이 커다란 돌들을 편의에 따라 적당히 늘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의 스톤헨지를 비롯한 거석들의 구축 연대가 기원전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고, 아무 계획 없이 그 큰 유적을 건설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면서 고인돌에 대한 문화사 연구가 시작됐다.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발자취〉

▲ 울산시 언양읍 서부리 고인돌.  ⓒ
먼저 고인돌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고인돌의 정확한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19세기 말까지는 대체적으로 제단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외형적으로 웅장함을 드러내는 대형 거석일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령지방의 탁자식 고인돌 중 일부는 후대에 종교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고인돌을 선사시대의 돌무덤, 즉 지석묘(支石苗)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며 거석문화의 한 자취로 간주한다.

고인돌의 주요 기능을 무덤으로 해석하는 근거로는 고인돌이 한 곳에 무리를 지어 분포하고 있고, 결정적인 증거로 사람뼈와 함께 부장품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3년을 기준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고인돌의 경우 76곳에서 인골(人骨)이 출토됐다. 학자들은 한국의 토양 대부분이 산성이라는 지질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한다.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무덤 5호 고인돌에서는 38명에 해당하는 인골이 나왔다. 인골이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은 평안도이고 그 다음은 황해도와 충청도다. 충청북도 제천시 황석리 고인돌에서는 남자 시신을 펴서 묻은 인골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굴됐고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서는 어린 아이의 머리뼈까지 나왔다.

고인돌에서 나타난 인골의 특징은 대체로 뼈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체질인류학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생전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며 살았으며 이들이 사회를 지배한 상층계급이었음을 알려준다. 고인돌에 묻힌 어린 아이 인골을 통해서도 당시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비록 어린 아이였을지라도 보호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만한 혜택을 누렸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황규호는 적었다.

고인돌이 제단의 기능보다 무덤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인돌이 무덤으로 축조됐다면 당시의 사회상뿐 아니라 매장자의 성격까지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에 대한 현재까지의 논의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고인돌이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묘제(墓制)로 이용됐다는 견해로 고인돌 사회는 사회적 계층화가 진전되지 않은 평등사회(egalitarian society)였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고인돌이 사회적 계층화가 이루어진 족장사회의 지배 상층계급(ruling elite)의 묘제로 고인돌 사회는 족장의 주도 아래 사회가 영위되는 계층사회(ranked, or stratified society)였다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부장품 가운데 사회적 계층화를 가리키는 뚜렷한 유물이 없음을 들어 고인돌 사회는 계층화가 진전되지 않은 평등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인돌이 평등사회에서 마을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협동작업으로 축조돼, 일반 주민들의 무덤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고인돌이 축조되는 시기에 부의 집중이나 노동의 전문화와 같은 증거도 보이지 않으며 고인돌의 분포와 밀도가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두 번째 주장은 사회계층화를 나타내는 부장품들이 보이지 않는 점을 고인돌이 세워진 시기가 워낙 오래돼 파괴되거나 도굴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인돌군에서 대형 고인돌이 한 기씩 존재한 이유는 바로 촌락공동체에 우두머리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북한의 석광준의 경우 이 고인돌들이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소국 통치자들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M. 넬슨도 고인돌 사회를 계층사회의 물적 증거로 간주했다. 그녀는 고인돌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며 고인돌이 넓은 분포도를 보이는 것은 인구가 계속해서 증가했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특히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무문토기시대나 청동기시대로 부르는 것보다 ‘거석문화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 화순 대신리 고인돌.  ⓒ
학자들은 고인돌에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 잘 살기를 비는 마음과 남은 후손을 위한 기도의 마음이 함께 깃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무덤이 아니고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고인돌은 처음에는 무덤으로 만들어졌지만 고대인들의 조상 숭배와 조상에 대한 종교적 제사 활동을 진행하던 성지로 활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요동반도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에는 최근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는 대상으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고인돌이 마을을 보호하고 잡귀의 출입을 예방하는 수호신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고 송호정은 적었다.

묘표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묘표석으로서의 기능에는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 묘역 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것,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 등이 있다.

이는 고인돌 떼 안에 존재하는 것인데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단 고인돌과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떼의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위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소형으로서 그 자체는 방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고인돌 = 국가 탄생〉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고인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만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인돌 자체만을 갖고도 청동기 시대에 축조됐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고인돌의 연대가 올라갈수록 바로 그 시기부터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부장품이 함께 발굴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화살촉과 돌검이 중심을 이루고 돌도끼 등의 석기와 민무늬토기 계통의 토기류, 옥(玉) 장식품과 청동기 등도 발견된다. 이 부장품들이 고인돌을 만든 시대와 사회생활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고인돌이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중국 동북 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령 지역 고인돌 분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요동반도의 신금현 쌍방, 한반도의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천 적량동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됐다. 이는 비파형동검 문화가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달리 사람뼈와 함께 부장품이 출토된다는 사실이다. 부장품으로는 여러 가지 토기와 화살촉 같은 석기들뿐만 아니라 청동검, 옥, 석검 등도 발견된다. 부장품이 있다는 것은 고인돌의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이를 근거로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매장 방식을 보면 북방식 고인돌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 즉 주검 칸이 지상에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은 주검 칸이 지하에 설치돼 있다. 특히 북방식은 비교적 넓고 편평한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 모양의 방을 만든 다음 바닥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남방식은 큰 굄돌로 괸 바둑판식(지하에 판석이나 할석 등을 이용해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낮은 받침돌로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과 개석식(蓋石式 : 받침돌 없이 뚜껑이 직접 지하 돌방을 덮고 있는 것)으로 나뉘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강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대부분 땅 밑에 판돌을 맞춰 넣어 만들거나 깬돌이나 냇돌 등을 쌓아 돌널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다. 무덤 위에는 큰 뚜껑돌을 얹으므로 일반적으로 뚜껑돌만 보이므로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왕바위재 고인돌.  ⓒ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고인돌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북방식은 주로 우리나라 북부에 분포하고 탁자 모양을 하고 있지만 강화, 인천, 수원, 이천을 연결하는 선을 한계로 분포한다. 물론 남부에도 북방식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는 특별한 예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사적 137호)은 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 80톤으로 남한 최대의 것이다.

학자들은 받침돌을 좌우에 세우고 한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무덤방을 만든 뒤 시신을 안치하고 다른 한쪽을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양끝의 마감돌은 없어지고 좌우의 받침돌만 남아 있어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처럼 돼 있다.

받침돌의 크기는 길이가 450센티미터와 464센티미터, 두께가 60센티미터와 80센티미터 높이가 140센티미터이며 기울기가 70도이며 장축방향이 동북 69도이다.

목포대학교의 이영문 교수는 이 고인돌은 거대한 덮개돌이 받침돌에 의해 웅장한 모습을 띠고 있고 주위에서 쉽게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등을 볼 때 무덤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축조 집단들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거나 제단의 기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북한의 경우 안악군 로암리의 북방식 고인돌은 뚜껑돌이 길이 778센티미터, 폭 572센티미터, 두께 70센티미터이며, 파손되지 않은 원형은 길이 910센티미터, 무게는 거의 72톤으로 추정된다. 또 받침돌과 막음돌까지 합하면 거의 100톤이나 된다.

현재 북방식을 포함해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군 운곡리 24호 고인돌로 길이 6미터, 너비 4.5미터, 높이 3.5미터로 무게가 무려 297톤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남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사적 410호)은 길이가 7미터, 너비 5미터, 두께 4미터, 추정 무게가 무려 280˜300톤의 초대형 거석이다.

그러나 이들 고인돌에 대한 필자의 기초 측정에 의하면 이들 설명은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신리 고인돌을 280˜300톤으로 추정할 경우 운곡리 고인돌은 이보다 작은 약 200톤으로 추산됐다. 반면에 현재까지 영남 지역에서 최대 고인돌로 인정하는 울산시 언양읍 서부리 고인돌은 길이 9미터, 너비 5미터, 높이 3.75미터이며 여수지역에서 가장 큰 것으로 인정하는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왕바위재에 있는 6호고인돌도 길이 8.65미터, 너비 5.6미터, 폭 2.9미터로 운곡리 고인돌보다 무게가 더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대신리 고인돌과 서부리 고인돌, 산수리 고인돌은 거의 같은 규모로 추산되는데 이들 고인돌의 정확한 크기와 무게 산정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 놓는다. (계속)

참고문헌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 제주국립박물관, 2005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평양일대에서 새로 발굴된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에 대하여」, 석광준, 『조선고고연구』, 1995
/이종호 과학저술가  


2007.09.17 ⓒScience Times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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