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이종호-한민족의 기원

[스크랩]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2)

monocrop 2007. 10. 5. 02:58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2)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
『국사』 교과서의 수정 즉 한국의 청동기를 기존 학계의 정설보다도 최소한 1천여 년 앞당기면서 단군을 실체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각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단군조선 설득력을 갖아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동안 부단히 단군조선의 실존을 주장해온 재야사학계에서는 즉각적으로 정부의 정책 변경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부 강단사학계에서도 ‘고조선 건국기사 개선과 국사교육 강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고조선역사문화재단>은 강단과 재야를 아우르면서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 답사하고 정립하기위해 발족됐다.

반면에 교육인적자원부의 급작스러운 발표에 이의를 제기한 학자들도 이어졌다.

송호정 교수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측의 급작스러운 교과서 개정은 “중국 동북공정에 대항해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고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연구소>의 김정도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고 한 『삼국유사』의 내용을 단정적으로 인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발견된 출토 유물을 보면 많이 올려도 기원전 15세기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데, 동북공정에 대항한 감정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임지현 교수는 학계 일부에서 청동기 시대 개막 시점을 기원 전 20세기로 앞당기는 것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라는 규정이라면서 청동기 시대 개막 시기를 앞당기려는 시도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을 가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개막이 더 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한국 민족의 역사적 역량이 뛰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어떤 현상의 기원이 반드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나타나야 하고, 외국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면 마치 민족적 자부심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도 지적했다.

이것은 교과서의 단군조선과 청동기에 대한 수정이 정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감정적이고도 국수주의적 대응인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번의 교과서 수정이 그야말로 민족주의적 발상의 일환에 따른 것이라면 또 한 번의 교과서 수정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했다.

<고인돌의 부활>

▲ 중국 개주 석붕산 고인돌, 중국 최대의 탁상식(북방식) 고인돌이다.  ⓒ
학계에서조차 단군조선의 삽입을 두고 찬반론이 있는 차제에 2007년 수정된 『국사』 교과서에는 매우 특이한 문장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논란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로 고인돌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삽입됐다는 점이다. 이는 고인돌이 한국의 역사를 단군시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민이라면 비파형동검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지만 고인돌의 경우 도대체 고인돌이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길래 한국의 역사를 1천년 이상 끌어올리는 데 관건이 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은 다행스럽게도 고인돌을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2000년 11월 말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제977호’로 등록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창덕궁, 종묘, 경주역사지구를 포함해 총 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을 지칭하는데, 세계유산위원회의 엄격한 등록기준에 따라 지정되는데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유네스코의 까다로운 선정기준을 너끈히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한반도 전역의 고인돌은 북한지역의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만4천 기 정도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2만4천 기 정도 있다고 알려졌지만 수몰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 등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만 기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 산재한 고인돌은 약 8만 기로 추정되며 거석유물이 많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의 경우 고인돌이 1천500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5만 기가 얼마나 많은 숫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5만 기도 일본의 코모토 마사유키가 1960년대 한반도에는 고인돌이 8만 개 이상 있었다고 지적한 것을 볼 때 한국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
여하튼 전남지역에서는 2천2백여 곳에서 무려 2만여 기가 발견돼 세계적으로 단일면적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소위 ‘고인돌 문화지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풍부한 자료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화순지역에는 사적 제410호인 화순 고인돌유적을 중심으로 한 반경 5km 주변 일대에 50개군 4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화순군에는 160개군에 1천323기가 분포하고 있다. 전남 내륙지역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으며 또 많은 분포수를 보인다. 이의 분포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숫자이다. 즉 전북 고창지역이 약 1천200여 기, 인천 강화가 80여 기인 점과 비교해 볼 때 단위면적에서의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역사를 끌어올리는 한 축으로 제시된 고인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역사가 짧은 고인돌 연구>

한반도의 고인돌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서양 선교사 칼레스와 가우랜드가 한반도의 고인돌을 유럽 학계에 소개하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고인돌은 한자로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데 지석은 지탱하는 돌, 우리말로 굄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인돌은 뚜껑돌을 지탱하는 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어원상 고임돌이 고인돌로 변한 것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왜 세웠는지 몰랐다.

그런데 고인돌 뚜껑돌 밑에서 인골과 부장품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고인돌이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덤에 뚜껑돌을 덮고 그 밑에 매장부를 두고 뚜껑돌을 받치는 고임돌(지석)을 매장 주체부 위에 둔다는 점이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서 발견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은 얇게 잘 다음은 판돌로 상자 모양의 벽체를 쌓고 그 위에 넓은 뚜껑돌을 덮어 하나의 거대한 조형물이나 제단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

▲ 고창 고인돌.  ⓒ
고인돌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한서(漢書)』에서 보인다. 『한서』는 후한의 반고(班固)가 저술한 것으로 동이족에 관한 자료가 많아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 사료이다.

‘효제 원봉(元鳳) 3년 1월 태산의 래무산(來蕪山)대 남쪽에서 수천명이 ‘슁슁’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돌이 스스로 세워져 있었다. 이는 높이가 1장 5척이고, 크기가 48발이며 깊이가 8척으로 큰돌의 밑에는 3개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큰 돌 주변에 수천의 백조가 한데 모이고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한 원봉 3년은 기원전 78년이다. 3개의 돌이 다리로 받치로 있는 것을 보면 탁상식 고인돌이 틀림없으며 크기를 한척(漢尺)으로 계산하면 약 3.5미터에 깊이는 1.86미터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로 추정된다.

요동지방의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기원 3세기경 서진(西晉)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공손도전〉에도 보인다.

‘(중략) 한(漢) 나라의 왕이 당장 끊어지게 되자 여러 대신들이 모여 부처의 귀에 대해 말하던 중, 마침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생겼는데, 그것은 길이가 1장 남짓하고, 그 아래에는 새 개의 작은 돌을 다리로 삼은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공손도에 말하기를 “이것은 한선제(漢宣帝)의 면류관 모양의 돌로서 상서를 나타내는 징조다. 즉 마을 이름이 여러 선군(先君)과 같고, 사(社)는 땅 주인인데다가 광명이야 당연히 땅위에 있으니, 이렇게 해 베 분이 보필하고 있다”고 했다. 공손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이때는 기원 190년으로 다리가 세 개이고 개석이 면류관을 닮은 것으로 보아 역시 탁상식 고인돌로 보인다. 두 기록을 보아 현지인들이 이러한 고인돌의 축조와 기능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기원전 1~2세기경에는 고인돌이 세워지지 않아 잊혀진 이야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금나라의 왕숙이 저술한 『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됐다.

“서산(西山)에 놀러 갔더니, 석실 위에 바위 하나가 있고, 그것의 가로와 세로는 3장에 달하며, 두께는 2척 남짓하다. 돌의 모서리는 반듯하고 매끄러우며 그 생김새가 마치 바둑판과 같다. 큰 돌 아래에는 3개의 돌이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장이나 되고 그 깊이도 1장에 가깝다. 거기에는 틈이 전혀 없으며, 도끼로 다듬은 흔적도 없다. 그곳 사람들은 이것을 석붕(石棚, shipeng)이라 부른다.”

▲ 화순 고인돌.  ⓒ
이 고인돌은 요령성 와방점시에 있는 탁상식 고인돌 중 하나로 추정된다. 오늘날 중국에서 고인돌을 석붕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금나라 왕적이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支石墓)이란 용어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이규보는 고려 신종(神宗) 3년(1200) 11월 말에 전라도를 여행하던 준 금마군에 이르러 지석묘를 관찰할 수 있었다.

“다음날 금마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을 구경했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해지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이했다.”

이규보가 본 고인돌은 전북 지방에서 몇 안 되는 탁상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중국은 석붕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이규보는 지석(支石)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의 모양새나 규모에만 호기심을 가졌을 뿐 이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인돌 속에서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이 거대한 바윗돌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또한 고인돌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치밀한 기초공사가 필요한 구조물이다. (계속)

참고문헌
「청동기 주역 ‘퉁구스 예맥족’이 주역」, 유홍준, 문화일보, 2004.11.25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인돌 왕궁-고조선」, 『역사스페셜 4』, 효형출판, 2003

/이종호 과학저술가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