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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보다 1천년 늦은 서양의 개마무사

monocrop 2007. 10. 5. 02:44

고구려보다 1천년 늦은 서양의 개마무사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아시아 동북방에서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대에는 더욱 활발한 정복 정책을 추진해 선비의 후예인 거란을 정벌하는 등 서부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당시 중원의 최강세력인 북위(北魏)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개마무사는 강력한 전력의 방편>

▲ 「잔다르크」의 한 장면.  ⓒ
거란은 가비능을 원조로 하는 선비의 분파로서 원래 시라무렌(Siramuren) 유역과 라오-사무렌(Lao-Samuren) 유역인 요해(遼海) 지방에 거주하면서 수렵, 어로 및 말 사육에 종사하던 유목민족으로 훗날 ‘요(遼)’를 세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생존조건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시키는 데 주력해 ‘전사국가(戰士國家)’화 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하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 사회적인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 나갔다. 이런 내외의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군사국가(despotic military state)’에서 탈피해 동북아시아 일대에 독자적인 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고 박경철 교수는 주장했다.

박경철 교수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여기에서 흉노는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한다)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과의 관계가 부용관계였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부용(附庸)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대국(大國)에 복속돼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를 포함한 피정복 이민족과의 관계도 이런 보호ㆍ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 같은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동력과 군 병력을 확보했다. 김광진 박사는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로 파악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앞에서 개마무사로 무장하려면 경제력과 개마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선비가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마를 공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환돌기를 장갑기병으로 보는데 이들 역시 선비의 세력이라면 고구려의 부용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개마무사를 채택한 것은 개마무사를 도입한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한나라군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로는 한나라군에 중장기병으로 반드시 무장하고 있어야 할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등자는 개마무사가 중무장을 한 후 진격할 때 안정적으로 말을 타기 위해 필요한 마구이다. 기마민족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등자의 발명이다. 이를 보면 MBC-TV의 드라마 「주몽」에서 한나라군이 개마무사를 동원하는데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개마무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개마무사 장비.  ⓒ
이런 정황은 개마무사는 북방기마민족에 의해 등자가 개발된 후에 고구려와 같은 철기 제작기술이 앞선 국가에서 발명됐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마무사는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라는데 의문이 생긴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무한대로 활동하는 평야에서의 전투보다는 산성전투의 이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거점 중심의 전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한 기마민족인 경우 중기병은 보유하지만 개마무사를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초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마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수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히트앤드런(Hit and Run)식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개마무사가 기마민족의 전투 속성을 감안하면 적합한 무장 체계가 아니라는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특히 기마민족은 장거리 이동이 주무기이므로 개마는 신속한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아틸라나 칭기즈칸이 중장기병보다는 경기병을 선호한 이유이다.

그러나 활과 산성 전투를 중시하는 고구려에서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사실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고구려가 산성 전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개마무사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핵심이 될 수 있다. 적군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공해 오더라도 곧바로 성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공격 장비들을 점검한 후 각종 장비와 인원을 동원해 공격에 임한다. 중국의 경우 고구려의 수성작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최첨단 공성용 공격 장비를 휴대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공격군이 진을 완전히 만들기 전 또는 약점이 보일 때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기습작전이나 추격전에서 중장기병은 커다란 이점을 보일 수 있다.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개마무사가 활약한 것도 이와 같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적어도 중국과는 달리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마무사를 채택했다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다.

▲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해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현재는 정상에 요나라 탑이 있다.  ⓒ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제일 먼저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무순의 신성(고이산성)을 부단히 점령하려고 한 이유이다.

필자는 신성을 찾아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원래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고 중앙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산성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세워져 있고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에 따라 지형이 완전히 변형돼 있어 조그마한 산성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했으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현지 중국인 안내원을 통해 수소문을 했지만 중국인들조차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같은 장소를 뱅뱅 돌면서 한나절에 걸쳐 일일이 수소문한 결과 저녁 무렵에 과거 산성의 입구라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신성의 입구는 찾는 도중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인데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10여 미터의 토성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전에는 입구임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었다는 말에 주위를 세밀히 살펴 어렵게 찾아낸 석비는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돼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동양보다 낙후된 서양의 철 생산 기술>

동양에서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하면 말의 몸통 전체를 둘러싼 정통 개마가 서양에서는 언제 등장했는지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개마는 동천왕보다도 거의 1천년 후인 십자군 전쟁 때부터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십자군 시대의 기병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체인 메일을 걸치고 있으며 투구는 노르만헬멧을 사용했다가 나중엔 헬름이라는 양동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투구를 사용했다. 말을 탈 때는 창을,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는 70~80센티미터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말까지 중무장시킨 십자군의 유럽 기병은 아랍인들이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장을 자랑했다. 아랍군의 활은 십자군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도 우수한 기병 덕분이었다.

▲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신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

유럽의 개마무사가 동양과 조우한 것은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을 때인데 이때를 서양에서 개마무사가 나타난 시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개마무사는 몽골 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은 유럽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시아는 7일, 헝가리는 5일 만에 정복했다. 독일에서 온 3만 명 가량의 튜튼 기사단도 전멸시켰다.

아랍인들도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도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맘루크로 불리는 이슬람 노예기병이다. 이들은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검을 사용했는데 사라센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대로 십자군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실제로 이들은 이집트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 기병들을 무찌른 적도 있다.

중세시대에 장갑기병이 태어난 이유는 강력한 쇠뇌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영화 「쟌다르크」에서도 주력 무기의 하나가 쇠뇌였다. 쇠뇌는 일 분에 3발 정도 발사할 수 있었음에도 강력한 위력으로 활보다 장병과 군마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그러므로 쇠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30킬로그램짜리 갑옷을 입고 말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무게의 마갑을 착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무장을 한 덕에 충격력은 대단했지만 단점도 매우 많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 방향을 신속하게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투구의 무게도 상당해서 앞은 볼 수 있지만 고개 돌려 바로 옆을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눈구멍과 숨구멍만 뚫려 있어 시야도 좁았다. 또한 시종이 없다면 갑옷을 입고 벗는 것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전투 도중 낙마할 경우 포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유럽의 제철 기술이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기 때문에 강철다운 강철로 만든 철갑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동양으로부터 전수된 화약무기에 의해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 (계속)

참고문헌 : 「한국의 산성, 고구려 고이산성(古爾山城, 신성)」, sycjs,

 

http://blog.naver.com/sycjs,

 

/이종호 과학저술가  


출처 : 아이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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