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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교사 루이스가 본 임진왜란 조선병사의 모습

monocrop 2007. 10. 2. 04:30


일본 함대가 겨우 수일 안에 꼬라이 왕국에 도달하여 최초로 맞부딪힌 해변의 성채는 부산포라고 일컬어지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600명의 병사가 있었을 뿐으로 그 밖에 수비할 사람이라곤 주변의 촌락에서 모여든 서민들에 불과하였다.

길에는 모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를 뿌려 놓았으며, 성채 안에는 천 개 이상의 동제 소형포가 있었다. 일부는 무쇠 탄환을 발사하고, 다른 것은 화살을 대신 사용하였는데 대포처럼 소리가 나고 길이는 2팔모 반 정도였다.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개머리판이 없는 총포와 수없이 많은 투르크 식 활과 화살을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12일, 양력으로는 1592년 5월 23일로 아고스띠뇨가 이끄는 제 1진은 부산포에 도착하여 이날 밤은 절영도에 머물렀고 소오 요시토시는 조선측과의 교섭을 위해 먼저 상륙하였다.

 

가고스띠뇨는 즉시 성채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명하고, 목숨을 살려 줄 테니 항복을 하라고 성안에 있는 장수에게 사자를 보냈었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자의 전갈에 대해 비웃으면서, 우선 국왕에게 그 뜻을 보고하여 항복해도 좋은가를 물어볼 테니 기다려 달라고 거짓으로 답신을 하였다.

 

아고스띠뇨도 그 회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꾸미고서는 밤새도록 극도의 경계와 주의 속에서 철야를 하면서 다음날의 전투 준비를 시켰는데 실제로 새벽 3시와 4시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성안의 꼬라이인들은 실로 끈기있고 과감하게 저항하여 전투는 3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 주위의 해자에는 모두 끝이 뾰족한 쇠가 뿌려져 있었고, 사람 키 정도로 물이 가득 차 있었으나, 일본인들은 해자 위쪽에 판자를 걸치고 건넜고, 성채에 다다르는 도중에도 판자를 사용하여 수많은 쇠가시에 발이 찔리지 않도록 하였다.

일본인들이 대단히 고전하면서도 사기충천하여 이미 성벽 위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을 보자 위쪽의 일부 꼬라이인들은 적이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벽 위에서 해자로 뛰어들었다. 성안에서는 두번에 걸쳐 양쪽이 부딪치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꼬라이인들은 용감한 전사이며 그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으므로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고 그들 중 포로가 된 사람은 소수였다. 그들 가운데 최초로 전사한 사람은 그들의 장수(정발 첨절제사)였다.

-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 ~ 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
 
사극에서 나오는 포졸의 모습이나...동사무소 방위같은 이미지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창출했는지 궁금하군요..아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의 방조적 침묵에 의해 그려진 자학적 이미지일겁니다.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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