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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야사]가야가 살아온다 <15><16> 예안리 고분 주변

monocrop 2007. 7. 23. 23:10

 

<15> 예안리 고분 주변

예안리 고분군이 있는 곳은 장시(長詩)마을이다. 원래 시례리(詩禮里)로 불렸으나 8년전에 분동됐다. 마을이 자리한 곳은 언뜻 평지처럼 보이나 이 마을 서북쪽의 까치산(342m)과 마을 동쪽 마산(馬山·60m)이 서로 연결되어 표고 10m 가량의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시례리란 이름은 마을 뒤편에 시루처럼 생긴 시루봉에서 연유한다. 처음에는 시례골로 불리다가 시례리로 변했다고 한다. 마을 앞의 넓은 농경지는 앞들(안들)이라고 불리는데 예안천이 흐른다. 장시마을은 시례리 들머리에 해당하며 현재 37세대 130여명이 산다. 예부터 장승이 서 있었다 해서 장승배기라 불리기도 했다.

장시마을 이장 권성조(65)씨는 “일제때 일본사람들이 예안리 고분을 마구 파헤쳐 쓸만한 물건을 많이 빼갔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해방 직후까지도 다수의 돌덧널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뒤로는 밭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예안리 고분 동쪽에 있는 마산(馬山)에도 가야의 늦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다. 군데군데 토기편이 흩어져 있으나 대부분은 밭으로 개간됐다. 마산의 남쪽 사면에는 먼 옛날 바닷물이 드나든 흔적으로 보이는 해식동굴이 형성돼 있다.

문화재 당국은 지난 78년 6월 예안리 고분군 4천3백41㎡만을 사적 제 26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나 다른 곳은 방치하고 있다.

예안리 고분을 발굴한 부산대 신경철(고고학) 교수는 “이곳은 고고학적·형질인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유적”이라며 “예안리 일대는 아직 잔존 유물이 많을 것으로 보이므로 당국의 체계적인 보존 정비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예안리 고분 현장을 방치할 게 아니라, 비슷한 고인골이 출토된 일본 야마구치현처럼 야외 전시관이나 인류학 박물관을 건립해 산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5> 제3부 가야인의 삶 ④예안리 사람들

#1천6백년전 삶의 편린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는 가야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사적 261호 예안리 고분군이다.

부산→김해 14번 국도를 따라가다 김해 선암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서낙동강을 끼고 6㎞ 가량을 들어가면 예안리 고분군을 만난다. 겉으로는 고분인지 잔디밭인지 모를 밋밋한 유적이지만, 입간판을 찬찬히 훑어보면 ‘역사적 전율’이 느껴진다. 1천6백여년전 바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안리 고분은 지난 76~80년 부산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져 모두 183기의 분묘유구와 1천4백여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됐다. 이곳에서 확인된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 횡구식 석실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와 토기·철기류는 4~7세기 가야사의 ‘편년’을 규정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특히 여기서 수습된 210기의 인골 가운데 절반 가량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고대인의 형질인류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예안리 고분군 유적조사보고서’(부산대 박물관 1985년 발간)에 따르면, 예안리 인골들은 대개 장대한 기골이 특징이다. 그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64.7㎝, 여성이 150.8㎝로 1930년대 중부 이남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크다.

골격상의 특징은 현대인에 비해 안면이 높고 코가 좁으며 콧부리가 편평하다. 전체 사망자 중에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고, 청·장년층의 사망률이 높다. 이곳의 옹관묘에는 대부분 어린 아이가 매장됐는데, 11세 이하의 어린이 사망자가 확인된 것만 전체 4분의 1에 달했다. 당시의 높은 유아사망률은 의료수준이 낮았던 고대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도표 참고>

#다양한 질병에 시달려

예안리 고분은 당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고까지 보여준다. 부산대 의대 해부학교실과 일본 성 마리안나 의대팀이 공동으로 벌인 예안리 고 인골 연구결과를 보면, 가야인들은 생전에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

인골들 중에는 관절이 정상인보다 굵고 척추가 늘어난 경우가 적지 않다. 척추 디스크를 앓은 흔적을 보인 인골도 있다. 이 경우 삐져나온 뼈가 신경을 건드렸을 터이니 당사자는 지독한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도 치료를 못해 뼈 모양이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도 있다. 정상적인 인골에 비해 대퇴골 관절이 훨씬 큰 인골도 있다. 이 경우는 골반에 대퇴골이 완전히 맞물리지 못하면서 고관절 부분이 부어 아마 평생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외상에 의한 염증이 골막염을 일으킨 경우도 보이고, 증세가 더 심해 염증이 뼈까지 침투해 들어간 인골도 있다. 이런 질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요즘도 나타난다.

예안리 인골들 중에는 날카로운 이기(利器)에 의한 손상흔, 즉 전쟁 등으로 인한 상처나 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4~7세기 김해 예안리는 아마도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 같다.

예안리 인골들은 그들이 생전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는지까지 알려준다. 당시 사람들의 상당수는 충치를 앓았다. KBS 역사스페셜팀은 2년전 예안리 인골들의 치아를 엑스레이로 촬영해 이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의 치아는 대개 상아질이 완전히 닳아 있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치간의 3분의2 정도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치아를 많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생전에 이가 모두 빠져 잇몸으로 살았을 사람도 있고, 축농증에 시달린 이도 있다. 고름주머니가 생겨 입속에서 골수염이 진행된 경우도 나타난다.

학자들은 예안리 인골의 치아에 옥니가 많은 것을 들어 당시 가야인들이 아래턱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치아 대부분에 균열이 나 있는 것은 모래가 섞인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많이 섭취한 증거라고 말한다.

#고대 국제교류까지 설명

예안리 고분의 인골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개껍데기가 많은 땅에 묻혀 뼈가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안리는 원래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모래땅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쓰레기장인 패총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의 알칼리 성분은 산성 토양을 중화시켜 인골의 부식을 막는다. 조개껍데기가 많이 섞인 토양은 비가 오면 패각의 칼슘 성분이 녹아 모래땅으로 스며들고 땅 속의 인골에까지 탄산칼슘이 충분히 공급되어 최상의 보존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야인의 원류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인골은 예안리 외에도 경남 사천시 늑도의 30여기 유구에서도 확인됐다. 학자들은 일본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기원전후의 ‘야요이 인골’이 예안리 가야인과 같은 형질이라는 사실을 중시, 야요이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파악한다. 가야인과 고대 일본인은 2천여년 전부터 교류를 가진 것은 물론 형질인류학적인 공통점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안리 고분은 가야인들의 삶과 죽음을 전해주는 한편 고대사회의 국제교류까지 설명해주는 타임머신으로 비어 있던 가야사의 중요한 장면을 채워주고 있다.

<16> 제3부 가야인의 삶 ⑤가야불교

가야사 16. 제3부 가야인의 삶 ⑤가야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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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비한 ‘가락고찰’

김해시 동북쪽의 신어산(630m) 중턱에는 은하사(銀河寺)란 유서깊은 절이 있다. 김해시 어방동 인제대 앞을 지나 가야랜드에 닿기 전에 우회전, 산쪽으로 2.2㎞ 들어가면 병풍같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운치를 자아내는 은하사에 닿는다. 가는 길목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라고 적힌 팻말이 군데군데 서 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절 입구에 적힌 ‘가락고찰(駕洛古刹)’이란 문구. 과연 가야시대 절일까.

전승(傳承)에 따르면 은하사는 원래 서림사로 불렸으며 인근 동림사와 함께 인도 아유타국의 왕자인 장유화상(長遊和尙)에 의해 창건됐다. 은하사 대웅전의 동편 벽위에 내걸린 판문에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러온 허황옥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함께 도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웅전 대들보에는 아유타국 수호신이라는 신어(神魚)가 그려져 있어 신비감을 안겨준다. 신어산이란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

서림사, 동림사는 임진왜란때 불탔고 그뒤 서림사(은하사)만 재건됐다.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지금의 대웅전은 1837년께 중창된 것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은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의 장유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유폭포를 따라 꼬불꼬불 산길을 내쳐 오르면 불모산 연봉인 용지봉 어귀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장유암을 만난다. 장유8경이라 이를 만큼 경관이 빼어난 이곳에는 장유화상 사리탑(경남 문화재자료 제31호)이 역사의 수수께끼처럼 서 있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제작수법은 고려말께로 짐작된다.

김해지방에는 이같은 ‘가락고찰’이 즐비하다. 신어산의 은하사, 동림사, 영구암(靈龜庵), 인근 무척산 정상의 모은암, 불모산의 장유암, 부산 녹산동의 흥국사가 그러하다. 이들 사찰은 공통적으로 허왕후 도래기인 서기 1세기께 가야불교가 전래됐다는 구비전승 자료를 남기고 있다.

#가야불교 남방전래설

김해지방에는 ‘가락고찰’만이 아니라 쌍어문, 신어, 태양문, 코끼리상, 파사석탑 등 인도 등지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많다. 이를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한반도에 불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은 가야라고 주장한다.

향토사학자 허명철(김해 금강병원장)씨는 오랜 실지조사와 연구활동을 통해 가야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제기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파사석탑이나 장유화상과 연관된 기록 및 전승자료를 근거로 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으로 전해진 것은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이다. 신라는 이보다 훨씬 늦은 527년(법흥왕 14년)이다. 고구려 묵호자가 경북 선산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도 눌지왕(417~458)때의 일이다. 372년 이전에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고, 그것도 중국의 북방불교가 아닌 남방불교라면 한국 불교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야 한다.

이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가 후대의 불교적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김해의 가야불교 관련 유적과 전설은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가락국 불교가 1세기 전반에 전래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그러나 서기 452년에 가락국 질지왕이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보여 이때를 전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도 452년을 주목한다. 그는 “왕후사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면서 “대가야나 안라국의 권역에 드는 고령 합천 함안지역 등에도 5세기 전반에 불교가 퍼진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엽에는 지배층에서 수용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신라불교의 토양 역할

‘삼국유사’에 전하는 가락국 질지왕 2년(452)의 왕후사 창건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정황이 충분해 학계에서 대체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연기설화나 창사(創寺) 전설류가 아닌 불교관계 사실이 가야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도 이때다.

질지왕 원년(451)은 신라 눌지왕 35년, 고구려 장수왕 39년, 백제 비유왕 25년에 해당한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상태지만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으로는 가야가 신라보다 75년 앞서 불교를 공식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대 채상식(사학) 교수는 “우리나라 불교의 큰 판도는 고구려 신라가 주류지만, 중국의 남조와 해양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가야의 경우 남방불교적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라말 고려초에 김해지방은 독자적 불교 세력권을 형성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 지역의 가야불교 전승 역시 후대에서 ‘가야전통’을 중시한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가야불교가 소홀히 여겨진 것은 가야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가락국은 불교를 수용한뒤 불과 70여년뒤에 망해 발전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김해지방에 가야불교의 실제적 자취가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가야멸망 뒤 신라에서 가야 왕실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가야불교는 신라에 흡수되거나 수용되어 훗날 신라불교, 고려불교가 융성하는 바탕이 됐다는 견해도 제기한다.

<16> 허왕후 오빠 장유화상 존재 오랜 논란

허왕후의 오빠로 전해지는 장유화상(일명 허보옥)은 가야불교를 거론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실존인물로 보는 쪽은 ‘가락국기’의 기록과 가락고찰에 얽힌 각종 구비전승 자료를 들이댄다. 가야의 불교 전래를 허왕후-장유화상의 도래시기와 같이 보는 것이다.

향토사학자 허명철씨는 “옛날 인도에는 긴옷을 입고 사는 장유(長遊)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허왕후와 함께 가락국에 와서 불법을 전파했을 것”이라며 오늘날 장유면(長有面)이 ‘長遊’에서 비롯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가공인물로 보는 쪽은 가야에 불교가 본격 전래된 때를 질지왕 2년(452)으로 볼때, 400년 전의 개국설화에 등장한 인물의 존재는 당연히 허구라는 주장이다.

‘이야기 가야사’(청아출판사)를 쓴 역사학자 이희근씨는 “허왕후 설화는 불교적으로 윤색된 이후의 산물이며, 장유화상에 대한 자료도 기껏해야 조선 후기나 구한말의 기록”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왕후사를 세운 지 500년 뒤 그 터 주변에 장유사(長遊寺)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도 눈여겨 볼 대목. 이것이 맞다면 장유사는 고려초에 생겼으며 사찰 이름에서 따온 듯한 장유화상도 그 즈음의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질지왕이 세웠다는 왕후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쟁점이다. 허명철씨는 “자료 고증과 수십차례의 현장조사 결과 김해시 장유면 태정리(태정산)가 거의 확실하다”며 현지의 폐사지를 근거로 댄다. 송원영 김해시 문화재 전문위원도 여기엔 동의했다. 그러나 아동문학가였던 고 이종기씨는 장유면 대청리 폭포수 아래쪽이 바로 절터였다며 다른 주장을 폈다.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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