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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대일본은 한국 분국] <3>

monocrop 2007. 7. 23. 17:31
 

<5>신화의 고장 이즈모

아라가야신 모시는 축제 열어

고오진다니 유적지서 김해식.신라식 토기

하지키.청동기 등 출토


경북 포항과 마주보는 시마네현 이즈모는 일본 신화의 고장이다.일본은 바다도 "아마",하늘도 "아마"라 한다.가라제국과 신라에서 새 문물을 가지고 배편으로 바다를 건너가도 선주민들이 하늘에서 강림한 천신으로 모셨기 때문이다.지명마저 가라인의 고을이라 하여 아라가야이다.


요즘도 이 지역 고령자들은 이즈모를 "아다가야"로 부른다.아라조,가라조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전후에 아라가야조로 통합됐다.이즈모에서 최고의 천신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즈모신사는 1백여년전까지만 해도 "아다가야 신사"로 불렀다.


주민중에는 출운이라는 성씨가 많은데 "이즈모"라 하지 않고 "아다가이"로 호칭한다.고대에는 아다가야였으나 "야"의 발음이 "이"로 변한 것이다.고대로부터 아라가야신을 모시는 축제를 연례행사로 열며 특이하게도 제수차림에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햅쌀로 만든 "시도키"인데 바로 우리의 시루떡이다.벼농사로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가야신의 은덕이라면서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아다가야는 삼한시대의 경남 함안의 아라가야 지명에서 연유한다.일부 한국사학자는 하가야아래가라)로 보고 고령 상가야에 대응하여 김해 가라국 등 남부지역의 가라제국 전체의 통칭이라는 설도 있다.아무튼 이즈모지방은 고대 가라인(가야인)들이 점거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즈모 신화의 핵심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이며 고령 대가야의 건국왕 이진아시로 추정한다는 학설도 있다.그의 아들 수사노오가 신라에 강림(탄생)했다고 하여 일본역사서에 "신라는 어머니의 나라"라고 하였고 그 연장으로 "이즈모는 일본인의 어머니의 나라(의 국) 혹은 일본국의 뿌리가 된 나라(의 국)"로 기록돼 있다.


수사노오는 용감하고 성격이 거칠었던 모양이다.머리 여덟개 달린 괴상한 뱀을 퇴치했다고 하는데 이 지방을 정복했음을 비유한 것 같다.신라에 내왕하면서 배를 만드는 목재를 가져갔고 일본의 산림조성에 공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수사노오의 아들 오오쿠니누시는 천하를 다스리다가 니니기노미코도에게 북규슈를 이양했다고 한다.


일본 천황가는 세명의 조상신을 모시는데 모두 이즈모의 가라긴이다.천황이 읽는 제문도 "가라신이시어-보살펴 주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에도시대의 조정중신이며 유학자인 아라이학세키1657~1725)는 "신화의 신령은 인간이다"고 규정했으며 이는 신은 곧 실존의 가야-신라인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즈모에는 엔기식905년 제정한 제사법 세칙)의 국가지정 신사들이 많다.가라신을 모신 신사만이 지정돼 있다.대표적인 이즈모신사의 주신이 신라와 연고 깊은 수사노오이다.모든 국가지정 신사들의 명칭은 가라쿠니이타대신사,가라시마신사,사라가미시라기신사,가라가마신사로서 어김없이 "가라"를 명시해 놓았다.이야)신사와 다마사쿠유신사에도 가라신이 주신이다.


벼농사의 곡창이라는 이즈모평야를 내려다 보는 고오진다니유적에서는 3백58개의 동검과 동탁(구리 종)6개,동모 16개,무기류,동경,곡옥 등이 무더기로 출토됐다.인근 유적에서는 김해식-신라식 토기로 보이는 하지키,청동기가 무수히 발굴됐다.한국 고고학자들은 고대에 가라-신라인들이 전승한 유물이라는 주장이고 이론을 가진 학자들은 대륙과의 교류품이라면서 간접적으로 가라유물임을 인정했다.이는 고대 일본이 가라-신라의 분국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이미 북규슈 요시노가리유적의 가라유물군과 이즈모지방의 가라인 판도를 상정하면 고대 가라인들은 북규슈로 진입하는 항로와 이즈모로 직행한 경우도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6>사이도바루 고분

`원분 형태.지명.부장품 한국식`

`일왕릉` 위장위해 고분 형태 변조

출토유물도 봉인


일본 전역에는 마치 우리나라 고령 지산동 고분군,신라왕릉 고분군 모습과 같은 봉토원분이 15만여기나 있다.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지역은 부산 건너편 규슈지방이며 1세기께 축조한 것도 더러 있고 2~5세기께 축조한 원분도 5천여기나 된다.이 중에서 약 3천기는 국가 지방 문화재로 특히 동규슈 미야자키현 사이도바루에 집중돼 있는 약 3백기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분묘제도는 조상이나 군주를 숭모하는 보수적 관습의 계승이므로 민족에 따라 특성을 가진다.우리 전통분묘는 기원전부터 적석총 석실봉토분 등을 거쳐 봉토원분으로 정형화돼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내부구조는 옹관 석관 목관 횡혈식 수형식 등 다양하다.지배자급이나 귀인의 분묘내에는 토기 장신구 무기류 각종 생활동구를 부장하기도 했다.


일본은 역사교과서마다 "야요이시대에 원분이 돌연히 등장했다"는 교육을 하며 "한국형 고분"임을 부정하고 있다.


마침 지난해 일본 야요이시대 직전의 죠믄말기 유적에서 80cm정도 깊이의 구덩이에 매장한 평장풍속이 확인됐다.봉토원분 묘제가 없었고 원분은 우리 민족이 야요이문화를 가지고 진출하면서 분묘제도를 수반한 것임이 확인됐다.


후쿠오카지역의 원분은 소형인데 비해 사이도바루의 3세기이후 원분은 대형인 것이 특색이다.우리민족 진출 초기에는 소형분묘를 축조했으나 벼농사 번성과 인구증가 집단체제 정비 세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점차 동규슈 지역으로 퍼져 대형원분을 축조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사이도바루의 가장 큰 원분은 지름 1백28m,높이 18m,제사터인 배단까지의 길이가 2백19m로서 엄청난 크기다.지방통치자인 왕급이나 수령급의 분묘라고 한다.사이도바루 지명의 "바루"(원)는 순수한 우리말 "벌"인 것도 특이하고 이곳 고분에서는 가야 신라유적에서 출토된 선형토기 청동기류 무기류 마구 장신구 등과 흡사한 부장품이 출토돼 고고학자들은 "한국분묘와 관련이 깊다"고 시인했다.원분의 형태 지명 부장품 등을 미뤄 우리민족의 세력권이었던 증거라는 학설도 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이들 원분 중 가장 큰 것을 왜국에 최초로 강림한 천신으로 숭앙하는 니니기노미코도의 분묘로 지정했다.그후 왜국 초기의 부족국연합체였던 야마다이국 히미코여왕 분묘로 이름을 바꿨다.니니기노미코도는 김해 금관가야국 김수로왕의 왕자설 혹은 손자 선이라는 학설이 분분하고 야마다이국은 "가야-신라의 분국"이었으며 히미코여왕은 신라계라는 학설이 제기되자 다시 오사호츠카 매사호츠카라며 이름표를 바꿔 붙였다.고고학적으로 여러 대형고분을 어느 왕의 능묘로 특정짓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경우는 "일본고유의 왕릉"으로 위장하기 위해 갈팡질팡한 것이었다.


일본은 1926년 멀쩡한 이 원분을 전방후원분으로 변조하고는 "천왕릉 참고지"로 지정,봉쇄하고 출토 유물도 황실박물관에 봉인해놓았다.천황릉이었다면 굳이 극비리에 형태를 변조하고 부장품을 숨겨놓을 리 만무하다.고분연구 학자들이 발굴전의 고문서를 근거로 "이 원분이 한국식 원분이며 한국계 왕릉임이 분명하다"고 폭로,최근까지 논란이 일고 있다.


<7> 지역왕국

일 부족국 `우가야왕국` 서 파생

북규슈 유적서 가락국 유물 출토

가와치 왕국 주민 대부분 한국인


일본 사학계는 일본열도에 3~7세기 사이에 "수수께끼의 15왕국"이 있었다고 한다.15왕국 외에도 부침한 지역국이 많다.그런데 아직도 이들 부족국의 정체를 명확히 구명하지 못하고 있다.


초고대사연구가 고고오 세이히코씨는 고대문헌학을 근거로 이들 부족국이 기원전부터 규슈지방에 있던 일본 최초의 "우가야왕국"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학설을 펴기도 했다.


고증하기 어려우나 우가야왕국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왔다.우가야는 고령가야로 여기기 쉬우나 "상대의 가야" 즉 가야국 전신이었다고 한다.그후 지역마다 부족국이 난립했다는 것이다.2세기께 북규슈의 히미코왕국 야마다이국=친위왜국과 남규슈의 가야계의 구노국,3세기초 오사카북쪽 효고현에 신라계의 다지마왕국,백제 유물이 출토되는 규슈중부 구마모토현에 히고왕국이 형성돼 있었다.이들 부족국을 규슈왕국으로 통칭한다.


북교슈 유적에서 일본천황의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의 신기"(신기:거울 옥 칼)가 한 세트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김해가락국 유물과 같은 종류이다.도항해간 초기의 가야 신라세력이 규슈 여러 지방에 분산되어 웅거한 흔적이 이들 부족국이란 게 일본고고학계의 정설이다.


일본 중앙부 나라지방 유적에서는 4세기경 분묘에서 꼭 같은 "삼종의 신기"가 출토됐다.이 시기에 가야-신라세력이 진출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포항 건너편 시마네현 이즈모는 신령이 바다에서 건너왔다는 "신화의 고장"이다.가야-신라유물이 지천으로 출토되며 이즈모왕국이었다고 한다.4세기경 동규슈 미야자키현의 휴가왕국,5세기의 오카야마일대의 시비왕국,오사카 남부에는 가와치왕국,나라현 남서부지방에 가츠라기왕국,나라 남부에는 아츠카왕국,교토북쪽 시가현에 오오미왕조,나라현 천리시 지방에는 아먀토왕조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왕국 왕조는 통일왜국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다.모두 서일본지역으로 각처에 거점을 잡은 부족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들 지역 유적에서는 삼한삼국 유물이 무더기로 촐토되고 있다.삼한삼국인 집단이 첫 상륙지인 규슈에 잔류하기도 하고 그후 일부집단은 일본열도 중앙부로 이동하는 과정에 형성한 한국계 부족국이었다는 증거라고도 한다.


기비왕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나라로 동진하는 도중의 해상교통이 편리한 세토나이가이 바다를 끼고 히로시마 오카야마의 일원에 자리잡았다.특히 오카야마지방 산비탈에는 5세기경 축조한 한국식 대형원분이 많다.금장식 귀걸이 스에기(신라토기) 작은 철판을 엮은 갑옷 계갑 말머리 모양의 혁대 버클(죔쇠) 가야토기인 특수기대 등 한국유적에서 출토되는 부장품과 꼭 같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또 분묘의 석실 석관에 이용한 석재는 한국인 살았던 규슈 구마모토에서 산출되는 응회암이다.규슈에서 이동한 한국인들의 분묘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가와치왕국이 있었던 오사카부 남부에는 일본왕족인 만다친왕이 신찬성씨록에 이 지역 주민의 90%이상이 한국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이곳에는 근년에 흙을 산처럼 모아 놓고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일본천황릉이라면서 자랑하는 전방후원분이 있다.일본은 닌도쿠왕릉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믿지 않는다.그런데 이 분묘에서 출토한 동경 칼 등의 부장품이 백제 무령왕릉의 출토품과 흡사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일부 일본사학자는 백제계 대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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