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고려·조선·일본

[스크랩] [고대일본은 한국 분국] <4>

monocrop 2007. 7. 23. 16:28

<10> 고구려세력

영락 6년 일본열도 진출
쓰시마의 백제세력 제압
다카마쓰. 후지노키 고분 고구려계 왕 가능성 높아

 

일본 고고학은 기원전부터의 고분을 전기고분,5세기 이후 고분을 후기고분이라 한다.나라지방에는 후기고분이 많으며 대부분 고구려분묘 양식이다.

분묘내부가 밝혀진 다카마쓰고분의 석실 벽화는 고구려고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고 기토라고분에서는 고구려 천체도가 나타났다.후지노키고분은 도굴당해 부장품 확인은 어려우나 역시 고구려 석실구조이다.이들 고분은 서기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대왕 훈적비 비문내용과 관련이 깊다.

비문해석을 놓고 일본은 "왜군이 고구려와 항쟁하였고 백제와 신라를 정복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역사교육의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이에 대해 우리는 "일본이 침탈야욕으로 1883년 일본 군부 스파이 사코중위가 비문 106자를 지우는 등 변조해 놓고 역해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마민족의 왜국정복 학설로 충격을 준 에마가미 나미오씨는 "야요이시대의 전기고분 출토품은 주술적,보기적이며 농경민족문화가 주류이나 후기고분에서의 출토품은 군사적이고 대륙계 무기,마기 등 화려한 것이 특색"이라고해 고구려군이 일본열도에 진출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369년,백제 근초고왕의 3만 군사 침공으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했다.391년(영락 1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개토대왕이 즉위해 이해 7월,백제의 10성을 공략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명을 데려왔다.여세를 몰아 신라를 공격해 번국으로 삼았다.

영락 6년에는 백제를 굴복시켜 53성을 차지했다.400년 신라의 반발조짐이 있어 고구려는 군사 5만명을 동원해 제압하고는 쓰시마의 신라영지인 임나가라까지 추격해 갔다.당시 "고금신라"로 불린 지금의 쓰시마북부 사스나지역으로 추격한 것이다.이 지역에 가야, 신라유적이 많은 것으로도 입증되며 이병선교수는 지명연구로 구명한 바 있다.

고구려가 승리해 쓰시마 중앙부 니이옛 고구려촌)에 본거지를 두었다.고구려 진출전에 쓰시마 정세는 백제세력이 우세하여 약체인 신라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의 번국이라는 인식으로 신라세력을 지원했다.고구려와 신라세력이 합류하여 쓰시마의 백제세력을 제압하고는 백제세력을 지원하는 본거지를 타도하기 위해 일본열도로 진격했다.

"일본서기" 이추왕기(404년 3월)에 당시 상황에 대해 "추쿠시(북규슈)의 삼신이 나타나 무슨 이유로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가하고 푸념하고는 곧 왕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고구려세력에 패망했음을 의미한다.일본사서들에는 "백제인 집단이 왜국에 오려는데 신라가 저지했다"고 은유하고는 "백제는 일본의 예속국,분가였다"며 정반대로 왜곡해 놓았다.

신찬성씨록의 당시 왜국에는 한국인이 90% 이상이었다는 현실에서 소수의 선주민 왜인이 대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까.실은 왜군으로 통칭하는 왜지의 백제세력이었던 것이다.일본이 주장하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왜군출전설"은 침략사관 고취용의 잠꼬대임이 분명하다.

고구려 진출후 한제이왕이 등장한다."반정"이란 시호를 붙인 것은 제도개혁을 단행한 공적이 반영되고 있으며,고구려 분국왕으로 추정한다(문정창,"일본고대사").이 때의 고구려세력 진출로 왜국에는 고구려 불교가 성행하였고 고승들이 들어갔으며 담징의 걸작품 법륭사 금당벽화 등을 남겼다.다카마쓰고분,후지노키고분,기토라고분 등에 잠들고 있는 혼령도 고구려계 왕일 가능성이 높다.

 

 

<24>동탁

가야 기마민족 정복설 입증
생김새 삼한시대 제작방식과 흡사
日 중국 문화 도입설 등 모호한 주장

 

오사카 북쪽,전차로 20분쯤 거리에 이바라기시 히가시나라유적이 있다.나라지방과 인접한 곳이다.고대인들이 오사카만에 상륙하여 교도와 나라지방으로 향하는 갈림길의 요충이다.

1999년 6월,이곳 히가시나라유적에서 기원전 1,2세기께의 소형동탁이 출토됐다.높이 14.2cm 무게 750g 동탁 몸체에 주조할 때의 구멍이 뚫려 있어 우리 삼한시대 제작방법과 같았다.동탁 내부 위쪽에 소리를 울리는 혀가 매달려 있었고 혀가 부딪힌 부분이 깊이 패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년간 말 목에 매달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종래 일본학자는 소동탁의 형태에 따라 "조선식(한국식) 소동탁",외면의 문양이 다른 점을 들어 "일본식 소동탁"으로 구분했다.일본에서 발굴된 것은 일본제품으로 치부했으며 "대륙의 영향,혹은 교류에 의한 것"라는 등 모호한 주장을 펴 왔다.도쿄대학 다케다유키오교수는 "소동탁은 중국 한시대의 마탁이거나 그 계열의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이러한 중국문화 도입설이 지배적이었다.

소형동탁은 우리 삼한시대 지배자나 기병의 말장식품으로 사용한 마령말방울)의 일종이다.마령 마탁 소동탁 등으로 구분되며 마령은 얇은 동판을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외면에 문양을 새겼고 영롱한 소리를 찰그랑거린다.

기원전후에 우리 삼한제국에는 기마군단이 있었으나 당시 왜지(고대일본)선주민은 말 사육을 몰랐다.마령 마탁 소형동탁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에가미나미오박사의 "고대일본을 가야의 기마민족이 정복했다"는 학설처럼 우리 민족이 말을 타고 갔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기원전 1세기께의 마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출토됐다.히가시나라 유적의 것은 둥근 모양이어서 약간 다르지만 같은 계열이다.당시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선주민은 금속문화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자 금속음을 듣기만 해도 진귀한 신물로 여겨 동탁을 두드리면서 제사를 지냈다.점차 대형화하여 높이 1m이상의 것까지 만들어 의기로 삼았다.

대형동탁의 원조인 소형동탁이 오사카지방에서 출토되자 유적발굴관계자들은 "일본 최고의 동탁"이라며 경탄했다.교토국립박물관 고고학실장 나니와요조씨는 "동탁은 규슈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지만 이 소동탁 발견으로 기내오사카 나라 교토지방)에서 동탁이 기원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주장했다.

요즘 일본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기내지방에 고대일본왕권이 존재했다는 이른바 "기내중심설"에 치중한 견해이다.고대 일본성립을 규슈에서 시발했다는 "규슈중심설"을 부정하는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다.일부학자는 "조선(한국)에서 만든 동탁이 일본동탁의 원조로 보이지만 일본에서 일본인이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면서 모방품 취급을 하기도 한다.

이곳 유적은 소동탁 이상으로 중요한 특성이 있다.주거지 둘레에 환호(도랑)를 파 돌려져 있는 것이다.마을 외곽에 목책이나 환호를 돌려 파놓은 것은 외적 침입을 방어하고 주거지에 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장치인데 우리 가야지역에는 석기시대(기원전 4세기께까지)의 울산 검단리,진주 대평리,산청 사월리,창원 남산 등 유적에서 흔하게 조사됐다.

우리민족이 석기시대부터 설치해 왔던 장치가 일본열도에는 약 200년 후에 시행한 것이다.가야인들이 오사카지방에 정착하여 모국의 관습을 재현한 것임이 분명하다.가야인들의 오사카지방 진출이 종래의 학설보다 훨씬 앞섰던 것이라 추정하게 된다.

 


<25> 백제 木氏

나라현 가모추바 1호분 `백제유물 가능성 높다`


나라현 고세시 가모추바 1호분은 고고학자들이 "백제식  분묘같다."면서 발굴을 미루어 왔다. 일부 사학자는 분묘형태가 고구려 적석총을 원류로 하여 백제시대에 흔했던 네모난 방분이어서 발굴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6월초 분묘에 구멍이 뚫려 발굴이 불가피해졌다. 분묘내부는 목관이었고 4세기께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철판을 엮은 단갑갑옷의 일종),화살통, 철검, 곡옥, 동경인 소형의 삼각연신수경과 토기류였다. 일본학자들은 "백제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을 답사해 보면 유적의 위치가 갈성목씨일족의 거점이었다. 이 고분을 발굴한 고세시 교육위원회측은 "나라의 야마토조정(고대일본)이 대륙과 교류한 증거물"이라며 모호하게 발표했다.

일본학자들은 단갑과 화살통 등 무기류는 무시하고 동경에만 관심을 기울여 "종래에는 발견되지 않은 형태이며 단갑 등의 무기류와 함께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사카대학 후쿠나가 노부야 조교수는 "야마다이국(규슈)에서 온 심부름꾼에게 보내기 위해 중국 위나라에서 온 많은 기술자를 임시로 동원하여 단기간에 대량의 동경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같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일본 전국 150여개 소에서 약 500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는데 동경 뒷면의 문양이 다양하고 모양도 각양각색이며 위나라 연호 명문이 있는 것도 있다. 이에 눈을 돌려 위나라로부터 일본전신이라는 야마다이국이 위나라로부터 동경 100개를 선물받았다며 자랑해 왔다.

그러나 야마다이국과 야마토조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3세기경 규슈의 야마다이국 히미코여왕은 신라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가모추바 1호분에서 출토된 동경을 빌미로 위나라의 기술자 동원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야마토조정이 전국을 지배하여 동경까지 배부한 것처럼 억설을 펴는 것이다. 동경은 지역, 제작자, 시대에 따라 문양 형태가 다르다. 동경제작 기술력을 가진 민족의 동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지방에서 발견된 동경 보다 약 100년 앞선 3세기께의 동경이 이미 규슈지방에서 출토된 바 있다.동규슈 미야자키현 난고손백제촌) 미카도신사에 백제에서 전래된 동경 33개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발표하지 않았다.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 1~5세기께의 철검과 함께 동경이 출토되었다.북규슈 마에바루 유적에서도 유사한 것이 나왔다. 가모추바 1호분 출토 동경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한국세력 진출을 해명하는 열쇠이다. 도쿠시마 문리대학 이시노 히로노 부교수는 "현지생산의 많은 토기를 분묘에 부장한 것을 보면 현지인이 만든 동경이며 분묘의 매장자는 그 지역을 지배한 왕급 인물로 갈성목씨 전성기의 갈성습진언소쓰히코)의 분묘"라고 규정했다.

이미 앞서 밝힌 것처럼 갈성목씨는 갈성을 점거한 백제 8대성씨인 목씨이다. 백제인 목라근자 일족은 나라지방에 군림, 목만치를 선조로 소가 가라코, 소가 이나메, 소가 우마코, 소가 에미시, 소가 이루카 등 9대에 걸쳐 약 300년간 지배했다.

백제목씨가 갈성목씨와 소가씨로 스스로 개명한 것인지 또는 후일 일본학자들이 "일본인화하기 위해 변조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본학자들의 "야마토 왕묘" "갈성목씨 지배" 학설을 종합하면 가모추바 1호분 발굴로 야마토 조정은 백제인이 왕이었고 백제분국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4세기께 나라지방의 "야마토 조정 존재설"은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의 체제성립과 "일본"국명의 제정연대 등에 대해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천황을 만세일계로 고대에 한삼국을 정벌했다는 등 역사를 왜곡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의 총인구는 선주민 아이누족과 일부 해양족을 포함하여 7만5천800명에 불과했다. 그 직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9만4천900명으로 급증,8세기의 나라시대(710~784)에는 539만9천800명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일본국립민속박물관 고야마슈조오교수의 통계).

우리 삼한집단이 진출한 후 아이누문화(죠몬토기)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삼한인에게 격퇴당해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민족이 90%이상 차지한 것이 분명하다. 4세기께 나라현 히가시토노고분에서 발견된 15척 선단을 묘사한 선각화, 그 동쪽해안의 미애현 다카라쓰카에서 출토된 선형하니오(흙으로 만든 장식물) 등 각처에서 발굴된 배 유물은 우리민족이 선편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준다.7세기에 일본 중앙부에 우리문화를 꽃피운 도읍지를 우리말 "나라"로 불리게 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삼한삼국인이 점거했음을 새삼 설명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은 한국 중국에서는 고대로 "왜지"로 통칭했다. 왜소한 인종이라하여 왜지, 왜인으로 통칭하던 중 3세기에 왜인 사절이 가자 문서에 적다보니 중국 사가들이 부득이 "왜국"( 국)으로 기록하게 되어 국명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시 발해만 연안, 큐슈일원에 동남아에서 올라간 왜소한 해인들이 많아 큐슈지방을 기준으로 왜국으로 통칭한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국명이 서기 607년에 제정했다고 주장한다. 이해 야마토국이 수나라 양제)에게 오노이모코를 사절로 보낼 때 "해 뜨는 곳 천자일본왕)가 국서를 보낸다."는 글귀를 썼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오노이모코가 가져간 국서는 수 양제로부터 "무뢰한 야만인의 문서"라며 문전축출당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다. 당시 중국 주변국들은 중국 승인없이 국명을 제정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며 이로 미뤄 607년 일본국명이 제정됐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라-당군 합세로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663년 백제 복국을 꾀하며 왜지에서 대군을 편성, 부여 백마강(백촌강)으로 진격 항쟁했으나 전멸당했다. 이때의 출전군을 "왜군"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엄연한 "왜지의 백제인"이었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함에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왜지로 피난, 망명해 갔다. 왜지의 "백제계 조정"은 고국에서 몰려 든 중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다.30여년이 흐르면서 왜지의 한삼국인들은 본국에 의존할 근거가 없어져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8세기 초의 702년, 아와타노마히토를 당나라에 보내 측천무후)에게 왜(왜)자는 왜소한 인종, 비천한 글자이므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할 것을 상소하여 승인받았다. 고대 삼한인의 통치에 따라 우리민족이 제정한 셈이다.

그 동안 삼한삼국세력이 부침했던 나라지방은 702년의 국명제정을 고비로 통합, 정돈을 서둘러 710년부터 "나라사대"를 열었다. 이에따라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등 인식전환과 정치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일본사학자 추나노 요시히코씨도 "7세기이전에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