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 임나일본부설의 다양한 설-기본적인 견해

monocrop 2007. 9. 22. 23:40
요약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


본문

야마토 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사진:다음블로그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九州]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吉備臣]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날조한게 정확하구요, 우리나라 국가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당했을 리가 없죠...

일본에 외교상으로 문제를 삼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너그러히 대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사람으로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정확한 진실 개명과 사과의 촉구는 꼭 필요하겠죠(자료. 다음 신지식)

 

 

임나 대마도설에서 일본 규슈임나 10국 연정설

 

글돋선생辯:임나=가야가 아님. 임나는 원래 대마도를 칭하였다(한단고기) 나중에 광개토왕이 대마도 정벌후 임나와 일본규슈를 임나10국을 연정을 삼았다.

 

임나10국은 규슈에 있으며 3국은 바다에 연해있고,7국은 육지에 있었다.(한단고기).신공황후가 일본서기에 정벌했다는 "고금신라"(다쿠부스마 시라기)는 한반도 신라가 아니고 일본규슈 내 多久新羅(다쿠신라/현재 규슈 사가현 多久市가 바로 그곳/임나신론/김문배외1/고려원1995년 설)이다.

 

일본 침략사관이 한국을 정벌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임나일본부설이 한단고기의 출판으로 이제 그 헛된 정체는 사라져야한다. 김석형(북한학자)가 발표한 임나는 혼슈지방에 있었던(정확한 지명은 모름)한민족 분국설.

 

민족사학자 문정창선생은 임나는 원래 대마도였고, 나중에 규슈 연안 일기도를 비롯한 오도열도 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정확한 지명고는 없었다.

 

그러나 임나신론을 발표한 金文培,金仁培형제는 규슈지방에 임나10국 모두 언어학적 설명과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 지명을 제시한 것이 더 일층 발전된 점이다. 한단고기의 원론을 참고한 토대위에 발전된 사료임이 틀림없다.

흠명23년기(562년)의 임나10국명.

 

1)가라국-반파국이라고 불리며 기문지방(오늘날 玄海)를 포괄하는 후쿠오카의 동북방 전역,

2)안라-穴川(八女市)동쪽지방.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안라는 함안의 아라가야가 아님.

3)斯二岐-佐伯(사이키)-大分縣만의 연안일대

4)多羅-多良(다라)(유명해의 서안일대)

5)卒麻-城島고원지대(대분현 別府市서쪽)

6)古嵯(고차:흠명기에는 久嗟로 나옴)-玖珠(대분현)

7)子他(시타)-福岡縣 絲田(시타)

8)散半下-桑原山 남쪽 桑平 지역(宮崎縣)

9)乞篒-久住(大分縣)

10)捻禮-板南(응신16년에 나오는 (니리무))

 

위치비정 참조:<일본서기고대어는 한국어:빛남91년,김인배,김문배공저 284page>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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