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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이 한민족 후손이라는 증거들...

monocrop 2007. 7. 9. 02:44


일본에 남은 한국 생활문화 일본인은 한국인이었다 2

 


1천년 동안 4차례 한민족 대이동

또 76년 부산시 북부의 예안리(禮安里) 고분군(1∼6세기)을 한국과 합동으로 발굴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북규슈형의 야요이사람이 이들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실도 알았다.


이밖에 89년 야요이시대의 대표적 유적(吉野ケ里)에서 나온 인골을 정밀 측정한 학자(松下孝幸·長崎대 의학부)는 『이 인골이 조선반도 남부의 조도(朝島)의 조개 무지, 예안리 고분인, 동북 조선의 초도(草島)인, 중국 북부의 서하(西夏)인과 비 슷하며 조선반도로부터의 도래인으로 생각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학자들이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일단 수용하는 경우라도 묘한 뉘앙스를 풍겨서 안개로 싸 감추려 한다.

 

단두형 분포도, 남한지역 전체와 일본 중부지역에 분포돼 있음을 보여준다. ▶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현재 일본 민족학박물관 관장)인 사사키 고오메이(佐佐木高明)가 낸 책(『日本の歷史①』 『日本史誕生』·集英社)에 실린 다음 내용이 좋은 보기다.

「북아시아의 신몽고로이드들이 점차 남하하여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 「조선을 거쳐」라는 짧은 구절은 매우 큰 함정이다.

 

그(다른 여러 사람도 마 찬가지다)는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몽고로이드들 이 일본으로 들어갈 때 한국에서 잠시 쉬었거나 아니면 쉬지 않고 지나쳤다고 말하 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이주한 사람은 고몽고로이드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주장 이다.

우리 조상이 북아시아계의 신몽고로이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의 신몽고로이드들은 쫓기듯이 줄달음질을 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같은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땅에 살면서 벼농사 기술을 익히고 철기를 제작하는 가운데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동질성을 굳혔으며 따라서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에는 고몽고로이드가 아닌 한국인으로 탈바꿈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연장·토기·인골 그리고 주거양식 등이 우리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서 건너간 문화를 대륙 운운하면서 둘러대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뿌리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한편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는 최근 우리 겨레의 일본 이주를 구체적으로 분명하 게 밝혀서 앞사람과 큰 대조를 보인다. 그는 1995년 11월10일에 낸 책(『日本人の成り立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긴키(近畿) 지방의 고분시대(古墳時代)인의 특징은 대체로 이 지방 현대 일본인에 가깝고 또 조선반도의 현대인과도 닮았다. 이 사실은 당연히 도이가하마 유적의 야요이인과도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규슈 동부의 고분인처럼, 긴키의 고분인도 도래계 집단의 특징이 우세한 셈이다. 긴키인, 특히 기내인(畿內人, 奈良·京都·大阪지방 사람)은 각별히 조선인 집단과 가까운 뜻에서 「특수한 일본인」이라 부를 만하다』


도쿄대에서 정년을 맞은 그는 현재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중인데 그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저명한 사회인류학자(中根千枝)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 이라고 칭송하였고 앞의 연구소장(梅原猛) 또한 『그의 끈질긴 추구와 진리에 대한 참으로 솔직한 태도에 깊이 경의를 표한다』는 옹호론을 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런 주장은 아직 소수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일본은 독립한 정치·문화의 주체였으며 한국보다 늘 우위에 서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 역사기록을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영광」을 강변하고 싶은 「황국사관」의 미망이 학자의 양식마저 마비시키는 일본적인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의 기원은 북방 알타이계와 남방의 말레이폴리네시아계 등 여러 인종의 혼혈」이라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라는 따위 의 표현으로 초점을 흐린다.

이미 5천년전에 단군조선이란 국가를 형성하고 민족으 로서 정체성을 획득한 한국인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는 절대로 분명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다. 하니하라의 연구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현재 일본학계의 이같은 동 향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야요이시대 우리 겨레의 일본이주는 다음의 네 차례로 나눌 수 있다(上田正男).
제1기. 서기전 2백년께 이주 집단의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제2기. 4∼5세기로 이주민들은 여러 소국가들을 통합, 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가는 동시에 긴키지방에 조정을 세워서 국가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3기. 5세기 후반 ∼6세기 초로 백제계의 많은 기술자들이 건너와 농경·기술·학문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4기. 7세기 후반으로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으로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은 사람이 건너갔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8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性氏錄)에 따르면 기내(畿內·京都에서 가까운 山城·大和·和泉·攝津의 다섯 곳)의 1천1백82씨족 가운데 거의 3분의 1을 한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더욱 두드러지는 씨족은 신라계의 진(秦)씨와 백 제계의 한(漢)씨 그리고 고구려계의 고려(高麗)씨들로 8세기에는 동부 일본에 까지 퍼져 나갔다.

서기 7세기 전체 주민중 9할이 「한국계」

◀ 고몽고로이드계의 아이누인(왼쪽)과 신몽고로이드계의 퉁구스인(오른쪽)

1984년에 나온 통계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다(小山修三). 한국인의 대거 이주는 서기전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1천년 동안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 죠몬시대 말기에 7만5천으로 줄어들었던 인구가 야요이시대에는 60만으로 불어나고 고분시대에는 5백40만명에 이르 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하니하라 가즈로오는 당시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이 1:8.6이라는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계산한 나 자신도 놀랐을 정도의 엄청난 숫자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더 더욱 놀랄 것』이라는 소감을 적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엄청난 숫자고 일본 학계나 국민에게는 「폭탄선언」과 다름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7세기에는 일본 전인구 10명 가운데 한국인이 약 9명이고 일본인은 1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와 견주어서, 남한 인구 가운데 부산사람(3백76만)만큼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면 우린들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발표는 유전자의 비율을 계산한 결과와도 일치하여 틀림없는 진실임이 입증됐 다. 현대 일본인에는 동남아시아계(고몽고로이드)의 유전자 2에 북아시아계(신몽고 로이드·한국계)가 8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尾本秀市). 또 85년에는 『일본 중부 와 한국 남부지역 사람들의 체질은 매우 비슷해서 그 차이는 한국 남부와 북부지방 주민 사이에 나타나는 정도』라는 보고도 나왔다(松本秀雄·大阪 醫大).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한국인과 일본 중부지방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들은 중부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8세기에는 북부지방까지 이르렀으나, 북해도나 오키나와 일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남북으로 떨어진 이 두 지역의 주민에게서는 지금도 고몽고로이드의 특징이 나타난 다. 현대의 일본인은 한국계인 신몽고로이드와 남아시아계인 고몽고로이드의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백제 멸망 10년 뒤에야 日本국호 등장

야요이시대 규슈시 지역 한국계 이주민의 분포도(왼쪽)와 고분시대 한국계 이주민의 동일본 지역 확산도(오른쪽) ▶

한국인의 일본이주 사실은 지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추운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온 까닭에 남쪽은 「앞」이고 뒤는 「북」이었다. 따라서 마을 남쪽의 산을 앞산이라 불렀으며 경주시와 대구시의 앞산이 「남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뒷간 이라는 이름도 이 공간을 집 뒤에 둔 데에서 왔다.


그러나 호칭체계가 일본에서는 반대로 나타난다. 북(한국쪽)이 「앞」이고 남은 「뒤」인 것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17∼19세기)의 지도를 보면 규슈의 경우 우리와 가까운 지금의 후쿠오카는 스쿠젠(筑前)임에도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사가현(佐賀縣) 일대는 치쿠고(筑後)로 적혀 있다. 히젠(肥前)과 히고(肥後), 훙젠(豊前)과 훙고(豊後)도 마찬가지다. 본도(本島)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서 동해쪽의 에스젠(越煎)·에츄(越中) ·에스고(越後)와 하젠(羽前)·하고(羽後)도 우리와 가까운 쪽은 앞(前) 먼 쪽은 「뒤(後)」다. 이러한 지명은 고국을 그리던 정이 사무친 나머지 언제나 한국 쪽을 바라고 지냈기에 나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밖에 대마도를 비롯하여 우리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신사(神社)의 도리이 (鳥居)가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세워진 점도 기억해둘 만하다. 도리이는 신사의 출입 문과도 같은 것으로 성역임을 알리는 표지다.
따라서 도리이가 바다에서 육지의 신사 쪽으로 세워진 것은 이곳의 신(海神)이 바다를 건너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다. 실제로 대마도 니이(仁位)의 와다스미(和多都美) 신사에서 도리이의 방향을 측정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서북쪽인 신라 고도 경주를 향하 고 있었다.

한국인의 일본 이주는 기온이 점차 낮아짐에 따라 자연히 「따뜻한 남쪽나라」에 대한 동경이 커진 점과 서기전 3세기 무렵 한(漢)족이 고조선을 침략하고 서기전 207년에 진 (秦) 또한 한에 망하므로써 많은 피난민과 망명객들이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등의 정치 적 격변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가나문자가 신라의 이두에서 비롯됐다(金澤壓三郞)거나 일본 귀족학교에서 백제 선생이 백제 말로 강의를 했다(司馬遼太郞)는 내용 따위는 우리가 다 잘 아는 터이므로 덧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재명(齊明)여왕이 2만7천여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일본서기』)만은 그냥 넘길 수 없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당시의 인구 5백6십만명에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이 다.

그 반(2백80만명)을 남자로 잡고 노인과 어린이를 다시 반으로 치면 전인구의 2 0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나선 셈이다. 이들의 패망소식이 전해지 자 당시의 귀족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겼으니 조상의 무덤에 두 번 다시 못 가게 됐다」고 통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663년 9월7일조에 전한다.


7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이 백 제가 망하고 10년 뒤(670)에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이 무렵에 나온 역사서를 『일 본서기』라 하여 나라 이름을 앞세운 것도 그 내용이 백제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7세기 후반 이전까지의 일본은 한국에 있는 나라들의 해외 영토였던 것이다. 백제멸망 후 1천3백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와 일본은 완전히 남남 이 되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기질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다.

 

앞에 든 예화처럼 규슈나 대마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닮은 기질이나 행동양식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질도 유전자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셈이다.


출처 : 한민족참역사
글쓴이 : 외로운 짚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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