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 동안 4차례 한민족 대이동
또 76년 부산시 북부의 예안리(禮安里) 고분군(1∼6세기)을 한국과 합동으로 발굴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북규슈형의 야요이사람이 이들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실도 알았다.
단두형 분포도, 남한지역 전체와 일본 중부지역에 분포돼 있음을 보여준다. ▶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현재 일본 민족학박물관 관장)인 사사키 고오메이(佐佐木高明)가 낸 책(『日本の歷史①』 『日本史誕生』·集英社)에 실린 다음 내용이 좋은 보기다. 「북아시아의 신몽고로이드들이 점차 남하하여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 「조선을 거쳐」라는 짧은 구절은 매우 큰 함정이다.
그(다른 여러 사람도 마 찬가지다)는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몽고로이드들 이 일본으로 들어갈 때 한국에서 잠시 쉬었거나 아니면 쉬지 않고 지나쳤다고 말하 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이주한 사람은 고몽고로이드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주장 이다. 우리 조상이 북아시아계의 신몽고로이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의 신몽고로이드들은 쫓기듯이 줄달음질을 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같은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땅에 살면서 벼농사 기술을 익히고 철기를 제작하는 가운데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동질성을 굳혔으며 따라서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에는 고몽고로이드가 아닌 한국인으로 탈바꿈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연장·토기·인골 그리고 주거양식 등이 우리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서 건너간 문화를 대륙 운운하면서 둘러대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뿌리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한편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는 최근 우리 겨레의 일본 이주를 구체적으로 분명하 게 밝혀서 앞사람과 큰 대조를 보인다. 그는 1995년 11월10일에 낸 책(『日本人の成り立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런 주장은 아직 소수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일본은 독립한 정치·문화의 주체였으며 한국보다 늘 우위에 서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 역사기록을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영광」을 강변하고 싶은 「황국사관」의 미망이 학자의 양식마저 마비시키는 일본적인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의 기원은 북방 알타이계와 남방의 말레이폴리네시아계 등 여러 인종의 혼혈」이라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라는 따위 의 표현으로 초점을 흐린다.
이미 5천년전에 단군조선이란 국가를 형성하고 민족으 로서 정체성을 획득한 한국인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는 절대로 분명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다. 하니하라의 연구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현재 일본학계의 이같은 동 향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야요이시대 우리 겨레의 일본이주는 다음의 네 차례로 나눌 수 있다(上田正男).
서기 7세기 전체 주민중 9할이 「한국계」
◀ 고몽고로이드계의 아이누인(왼쪽)과 신몽고로이드계의 퉁구스인(오른쪽)
1984년에 나온 통계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다(小山修三). 한국인의 대거 이주는 서기전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1천년 동안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 죠몬시대 말기에 7만5천으로 줄어들었던 인구가 야요이시대에는 60만으로 불어나고 고분시대에는 5백40만명에 이르 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하니하라 가즈로오는 당시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이 1:8.6이라는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의 발표는 유전자의 비율을 계산한 결과와도 일치하여 틀림없는 진실임이 입증됐 다. 현대 일본인에는 동남아시아계(고몽고로이드)의 유전자 2에 북아시아계(신몽고 로이드·한국계)가 8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尾本秀市). 또 85년에는 『일본 중부 와 한국 남부지역 사람들의 체질은 매우 비슷해서 그 차이는 한국 남부와 북부지방 주민 사이에 나타나는 정도』라는 보고도 나왔다(松本秀雄·大阪 醫大).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한국인과 일본 중부지방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백제 멸망 10년 뒤에야 日本국호 등장
야요이시대 규슈시 지역 한국계 이주민의 분포도(왼쪽)와 고분시대 한국계 이주민의 동일본 지역 확산도(오른쪽) ▶
한국인의 일본이주 사실은 지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추운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온 까닭에 남쪽은 「앞」이고 뒤는 「북」이었다. 따라서 마을 남쪽의 산을 앞산이라 불렀으며 경주시와 대구시의 앞산이 「남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뒷간 이라는 이름도 이 공간을 집 뒤에 둔 데에서 왔다.
이밖에 대마도를 비롯하여 우리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신사(神社)의 도리이 (鳥居)가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세워진 점도 기억해둘 만하다. 도리이는 신사의 출입 문과도 같은 것으로 성역임을 알리는 표지다.
한국인의 일본 이주는 기온이 점차 낮아짐에 따라 자연히 「따뜻한 남쪽나라」에 대한 동경이 커진 점과 서기전 3세기 무렵 한(漢)족이 고조선을 침략하고 서기전 207년에 진 (秦) 또한 한에 망하므로써 많은 피난민과 망명객들이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등의 정치 적 격변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당시의 인구 5백6십만명에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이 다. 그 반(2백80만명)을 남자로 잡고 노인과 어린이를 다시 반으로 치면 전인구의 2 0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나선 셈이다. 이들의 패망소식이 전해지 자 당시의 귀족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겼으니 조상의 무덤에 두 번 다시 못 가게 됐다」고 통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663년 9월7일조에 전한다.
따라서 적어도 7세기 후반 이전까지의 일본은 한국에 있는 나라들의 해외 영토였던 것이다. 백제멸망 후 1천3백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와 일본은 완전히 남남 이 되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기질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다.
앞에 든 예화처럼 규슈나 대마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닮은 기질이나 행동양식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질도 유전자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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