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신라, 일본의 기록을 통합해 봐야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는 사례로 보입니다 기록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중요성과 함께 그 허를 분석해내는 시각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합니다....................................................................................mimesis
................................................................................................................................... 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한 3국의 각기 다른 기록
글 : 서석 2007-02-12 22:04:37 출처: http://www.history21.org/ 역사21
이근우 박사의 저서 <고대 왕국의 풍경,그리고 새로운 시선>에서 본 내용인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공격해 왔다. 군주인 각간 于德과 이찬 耽知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金武力이 신주의 군사를 끌고 나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高于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9천명의 목을 베니 한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그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난병에게 살해되었다.
그 아버지 明王(성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이제 천한 노예로 하여금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고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게 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고도는 명왕을 붙잡고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목을 치겠습니다."고 하였다. 명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의 머리는 노예의 손으로 자를 수 없다"고 하였다. 고도는 말하기를 .............................................................................................................................
백제의 국왕이 어쩌다가 노예의 손에 죽게 되었는지 전모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자료는 불리한 전투 중에 백제왕을 죽이게 되므로 상황이 급반전되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백제왕이 잡히게 된 구체적인 사연을 알 수 없고, 백제 기록은 이와 대조적으로 5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밤에 이동하다가 신라의 복병에 걸려 왕이 죽게 되었다고 했지만 왜 왕이 불과 50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밤중에 이동하게 되었 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성왕은 왕자 여창을 위문하기 위해 왕자의 진지로 이동하고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50명의 호위병이란 대목을 뺌으로서 왕이 사로잡히게 된 구체적인 사유는 의문으로 남게 된다.
각기 자신쪽의 불리한 부분은 감추고 유리한 부분은 드러내며 약간씩 유리하게 과장하여 전하고, 제3자의 기록도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History-NEWS > 백제·남부여·왜·신라·가야·발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백제 수도가 대동강 평양에 있던 증거 17개 (0) | 2007.07.05 |
---|---|
[스크랩] 일본 1대 신무천황의 부모의 노랫말이 한국어 (0) | 2007.05.27 |
[스크랩] 하남성 용문석굴에 백제 부여씨 불상이 왜 있나? (0) | 2007.03.07 |
[스크랩] 대륙백제의 중원 정벌과 일본정벌의 문헌적 자료 탐색 (0) | 2007.03.07 |
[스크랩]송나라황제가 된 백제왕 (0) | 2007.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