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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한 3국의 각기 다른 기록통합 분석

monocrop 2007. 3. 9. 04:19

백제, 신라, 일본의 기록을 통합해 봐야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는 사례로 보입니다

기록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중요성과 함께 그 허를 분석해내는 시각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합니다....................................................................................mim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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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죽음에 대한 3국의 각기 다른 기록

 

글 : 서석

2007-02-12 22:04:37

출처: http://www.history21.org/  역사21

 

 

이근우 박사의 저서 <고대 왕국의 풍경,그리고 새로운 시선>에서 본 내용인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성왕의 죽음에 대한 각국의 기록(원문 생략)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554년)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加良(가야)과 함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인 각간 于德과 이찬 耽知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金武力이 신주의 군사를 끌고 나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高于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9천명의 목을 베니 한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2.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조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치려고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그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난병에게 살해되었다.


3. 일본서기 흠명 15년 겨울 12월조

餘昌(후의 위덕왕,성왕의 아들)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원로 중신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明王(성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병사를 모두 내어 길을 끊고 쳤다.
이 때 신라는 佐知村의 말기르는 사람 苦都에게 말하기를 "너는 천한 노예다. 명왕은 유명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예로 하여금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고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게 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고도는 명왕을 붙잡고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목을 치겠습니다."고 하였다. 명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의 머리는 노예의 손으로 자를 수 없다"고 하였다. 고도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법에 의하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노예의 손으로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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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국의 자료를 모두 보아야만

백제의 국왕이 어쩌다가 노예의 손에 죽게 되었는지 전모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자료는 불리한 전투 중에 백제왕을 죽이게 되므로 상황이 급반전되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백제왕이 잡히게 된 구체적인 사연을 알 수 없고,

백제 기록은 이와 대조적으로 5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밤에 이동하다가 신라의 복병에 걸려 왕이

            죽게 되었다고 했지만 왜 왕이 불과 50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밤중에 이동하게 되었

            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제3자의 기록으로 객관성을 띠고 있을것 같지만, 여전히 의문이 생긴다.

            성왕은 왕자 여창을 위문하기 위해 왕자의 진지로 이동하고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50명의 호위병이란 대목을 뺌으로서 왕이 사로잡히게 된 구체적인 사유는 의문으로

            남게 된다.


3국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런 과정이 나타난다.

1.백제 왕자 여창은 가야군사와 함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해 신라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2.이 때 성왕은 아들 여창을 위문하기 위해 밤중에 50명의 호위병만으로 관산성으로 이동하고 그 정보는 신라진영으로 새나간다.
3.신라군은 그 중간 구천에서 길을 차단하고 성왕을 사로 잡은뒤 노예 고도로 하여금 목을 베게 한다.
4.왕의 죽음이란 비보를 듣고 사기가  떨어진 여창의 백제군은 대패하고 철수한다.

3국의 기록을 모두 보고 난 뒤에야 사건의 전모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각기 자신쪽의 불리한 부분은 감추고 유리한 부분은 드러내며 약간씩 유리하게 과장하여 전하고, 제3자의 기록도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연도에 실린 같은 사건의 기사, 이른바 대응기사와 신라 우로이야기, 박제상(모말)이야기 등도
이러한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