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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1대 신무천황의 부모의 노랫말이 한국어

monocrop 2007. 5. 27. 16:08

일본 1대 신무천황의 부모의 노랫말이 한국어

 

 

글: 정광산인 金文培

 

이 노래는 일본서기 神代下신대하 海宮遊幸바다 궁전 놀고 다니는 제목에 있는 노래 2수이다.

 

노래의 배경은 이렇다. 천손 "아마쓰 히꼬히꼬호노 니니기노 미꼬도"와 선착 원주민인 "오야마 쓰미노가미"의 딸 "가무아다 가시쓰히메"와의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히꼬 호호데미노 미꼬도"는 바다에 낚시질을 나갔다가 낚시바늘을 잃어버린다.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좋을지 몰라 물가에서 한탄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한 노인의 도움으로 바다궁전에 갈 수 있게 된다. 거기서 바닷신 도요다마 히꼬 의 딸 도요다마 히메 豊玉姬를 아내로 삼아 히꼬 호호데미는 머문지 3년이 되자, 고국생각이 간절하여 마침내 바닷궁전을 떠나 오게 되었다.

 

 대마도의 해신 신사(와다쯔미신사) 도리이(居鳥)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에 신들이 들어왔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풍옥희에 관련된 석물이 신으로 등장, 금줄이 쳐있다.(사진:글돋선생)

 자연석에 <豊玉姬之 潼墓>풍옥희의 동묘라는 한자와 금줄이 쳐있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된 대마도

 <신사의 앞부분,대륙계통의 주민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사진: 글돋선생

 <와다쯔미 신사의 신전.이 내부에 지금의 일본천황부부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들의 뿌리신사>

 <북방세력들이 들어온 곳,和多都美神社(와다쯔미신사),삼국시대엔 고구려 영역(仁位가라)>글돋

 

이별할때  豊玉姬풍옥희는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서, [해산은 반드시 당신이 있는 곳에 가서 하고 싶으니, 나를 위해 산실을 해변에 짓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그 말대로 히꼬호호데미노 미꼬도는 고향에 돌아와 가마우지 새의 깃털로 지붕을 이어 산실을 지었다. 그 지붕을 아직 다 이기전에 豊玉姬풍옥희는 여동생 玉依姬옥의희를 데리고 육지로 올라왔다.

 산고의 날이 급하게 가까워졌으나, 지붕을 아직 다 이기도 전이라 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곧 산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천손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 산고가 있을 것이나, 내가 애기를 낳을 때 원컨대 들여다 보지 말아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천손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의심스러워 가만히 들여다 보니,

 

豊玉姬풍옥희는 커다란 악어-일설에는 용-으로 화신하여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천손이 들여다 본 것을 알고 대단히 부끄러이 여긴 나머지 원망하여 眞床진상의 이불과 풀로 그 낳은 아들을 싸서 해변에 버려두고 그 녀는 바다를 건너 곧바로 가버렸다.

 

그때 천손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일설에는, 아들을 물결치는 바닷가에 두는 것은 좋지 않다하여 豊玉姬풍옥희가 스스로 안고 바다 속으로 갔으나, 잠시후에 [천손의 자식을 이 바다 속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그녀의 동생인 玉依姬옥의희에게 아들을 안겨서 돌러 보냈다고 한다. 처음에 헤어질 때 豊玉姬풍옥희가 절절한 원한의 말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은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노래를 지어 보냈다.

 

 

노래1은 다음과 같다

1번:  飫企都鄧利軻茂豆勾志磨爾和我謂禰志伊茂播和素邏珥譽能據鄧馭母

 

 

        飫(실컷먹어)企(기)都(모도)鄧(잣)利(리)

      <시껍먹었기(혼쭐나기) 못 오잖니>

 

       軻(가)茂(무)豆(팥)勾(귀)志(지)磨(마)

       <가면 (마음) 바뀌지마>

      

       爾(니)和(화)我(나)謂(이르)禰(니)

        <니 화나서 이르니?>

      志(지)伊(이)茂(무)播(까불)和(화)素(빌)邏(라)

        <쥐어 묶어 버릴라>

 

      珥(귀막이)譽(기려)能(능)

        <기막혀거려는>

       據(거)鄧(잣)馭(말부리)母(모)

       <거짓말 부리자면>

 

 

현대어 번역: 시껍먹었기(혼쭐나서) 못 오잖니,

                   가면 마음 바뀌지마(바꿔버리지마)

                   니 화나서 이르니? 쥐어 묶어 버릴라

                   기막혀 그렇게 하는 , 거짓말 부리자면

 

 

이 노래 속에 감추어져 있던 진상이 이 노래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신대기

속에서는  豊玉姬풍옥희가 해산시에 악어-일설에는 용으로 변하는 것처럼 황당무계한 허구적 신화로 꾸며져 있으나, 이 이야기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연유로 천손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이 豊玉姬풍옥희의 추한 일면을 보아 버림으로써(풀이된 노래의 내용으로는 곧잘 거짓말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소박을 맞은 그녀가 원한을 품은 채 친정으로 쫓겨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까?

 

이 노래말의 투를 보면 신대기의 노래는 경상도의 진한 사투리가 빼어있다. "시껍먹었기" "지 무카 불빌라"(쥐어 묶어 버릴라) ,거짓말 부리자모(면), 와 같이 오늘날 경상도 특히 서부경남의 방언이 남아있다. 이로서 신대기에 일본으로 넘어간 언어적 문화는 가야족의 냄새가 진하다. 즉 가야족이 쓰는 오늘날의 경상도 서부경남의 방언 족들이 대거 왜 열도에 진출하였음을 시사하는 바이다.

 

특히 대마도 '와따즈미 神社신사"는 海神해신 신사이다. 이 신사에  豊玉姬풍옥희 자연석물 신앙이 남아 있다. 신사에  역대 일본천황이 다녀 간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 일대천황의 뿌리가 이 신사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豊玉姬풍옥희가 낳은 아들과 그를 양육한 이모   玉依姬옥의희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 중에 사노노미꼬도(狹野尊)가 있다. 환단고기에는 협야존은 단군이 왜로 보낸 배반명장수의 아들로 되어있다. 이 자가 훗날 제1대 천황이 된 진무덴노神武天皇로서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가야국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豊玉姬풍옥희가 아이를 [*진상복금眞床覆衾]과 풀로 싸서 처음엔 해변에 두고 곧 바다로 가버렸으나.....여기서 *진상복금이란 것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이 강림할 때 홍폭紅幅에 싸여서 추장 아도간의 집으로 옮겨져 榻上(탑상/걸상)에 두게 된 것과 흡사하다.

 

일본의 건국신화에서도 국조인 천손 니니기노 미꼬도가 [진상복금]에 싸여서 하늘에 있는 동굴로 부터 구름을 헤치고 하강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식의 신화는 그 계통이 동북 아시아족의 특징인데, 가야시조 김수로왕이 금합자金合子속에 넣어지고 그 위에 붉은 포백布帛(비단)으로 된 이불에 싼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태양의 자손(히꼬)임을 상징하는 왕의 즉위식에서

치른 의식이다.

 

가령 북방 돌궐족에서 새로운 왕이 취임할 때 펠트(felt)위에 얹혀진다거나 또, 키르기즈의 새 임금도 그 추대의식으로 흰색의 펠트에 얹어서 허공에 던졌다가 받는 것이 이에 속한다.

 

 

2번 노래는 풍옥희가 파도치는 해변에 아이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도로 안고 갔다. 오랜 후에, 천손의 자식을 바닷 속에 둘 수는 없다고 말하고, 동생 "옥의희"를 시켜 안고 가게 하였다.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은 부인을 고용하여 각기 젖먹이는 어미, 목욕시키는 어미 등등으로 삼았다.

 

 그 뒤 豊玉姬풍옥희가 아기가 단정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음에 불쌍히 여겨, 도로 돌아가 기르고 싶었으나, 도리에 어긋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 玉依姬옥의희를 보내어 양육케 했던 것이다. 어쨌든, 언니 풍옥희는 동생 옥의회에게 의탁하여 [되받는 형식의 노래]를 올리고 아기를 안겨 보냈다. 그 노래는 2는 이러하다.

 

 

 노래 2번: 阿軻娜磨 迺此軻利 播阿利 登比鄧播伊 珮耐企弭 我譽贈比志

                   多輔妬勾阿利計利

 

 

우리말 복원:阿(아)軻(가)娜(나)磨(마)

                 <아가 나마>

 

                迺(가)此(차)軻(가)利(리)

                 <가져 가리>

               播(까불)阿(아)利(리)

                  <까불아리>

   

               登(등)比(비)鄧(등)播(까불)伊(이)

                  <덤비던 까불이>

 

                珮(차)耐(내)企(기)弭(미)

                   <차내끼미>

                我(아)譽(예)贈(주)比(비)志(지)

                  <아예 주삐지>

                     多(다)輔(보)妬(투)勾(구)阿(아)利(리)計(계)利(리)

                    <다보투구 아리께리>

 

현대어 번역

 

(비록 나는 돌아가지 못하지만) 아가나마 가져가리, 까불고 덤비던 까불이

차내 버릴 것 같으면 아예 주어버리지 다붙이고(바싹 달라 붙고) 어리니까.

 

위의 내용을 해석해 볼 때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풍옥희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용의 노래이다.

 

순수 한국어로 읽어본 이 노래의 진상은, 남편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에게 소박맞은 풍옥희가 아기를 동생 옥의희로 하여금 안고 가게 함으로써 남편께 되돌려 보내는 내용인 것이다.

 

정든 뒤에 헤어지느니보다 아예 어리고 철없는 때에 어이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면서도 그 이별의 명분을 고작 까불고 보채는 애꾸러기 -실상 모든 어린애에겐 공통된 것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점을 들고 있는 데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풍옥희의 괴로운 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노래에도 서부 경남의 톡특한 사투리가 돋보인다. "아예 주삐지"(아예 주어버리지) 지금도 서부경남의 방언들이 그 곳 사람들은 사용중이다. 특히 삼천포 대교 아래 勒島늑도(굴레섬/구라섬/구야섬/변진구야국의 지명/창선과 삼천포항을 잇는 연륙교 사이를 "구라량"이라 고려시대엔 불렸다.)에 일본 야요이 토기 발굴이 주는 의미는 그곳에서 대마도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다는 것이다.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왜로 가는 항로중 변진구야국(구야섬)-연대도(신석기 시대와 청동기시대유적,패총)-대마도-일기도-북큐슈(말로국)로 이어지는 항로길중 하나이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변진구야국을 구야<가야 란 유사어 때문에 금관가야 김해지역을 구야국이라 지칭하고 그 지명을 믿고 있다. 하지만 김해지구에서 대마도로 가는 물길은 쓰시마 난류에 역행하는 위험한 항로이다. 오늘날 부산에서 출발하는 페리호의 신 선박도 쓰시마 난류를 헤치고 가기에는 그 흔들림은 가히 배를 타본 사람들은 어려운 항로임을 실감할 것이라. 하물며 신석기 시대의 舟배로써는 불가능한 일임이 틀림이 없다. 그 일례로 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위해 먼저 부산포에서 배 띄우기를 포기하고 합포(마산)에서 거제도를 거쳐서 출발한 사례를 들수 있다. 김해에는 부산포와 같은 맥락이다.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구야"가 "가야"에서 유래되었다고 무작정 금관가야 인 김해에 비정하는 자체가 정말 얼렁뚱땅인 지명고인 셈이다. 한번 일본사학계가 비정한 것은 고칠 수 없다는 식민주의적 사고 방식이 오늘날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의 무식한 의식에 잠재하고 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길을 통해서 청동기인들의 이동을 생각하는 과학적인 사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김해란 지명이 통할리 없을 터인데....아직도 김해 대성동 박물관에는 김해를 구야국이라고 버젓히 표기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 천불이 일고 또 인다.

 

고대사 특히 일본 사학자들이 120여년간 우리 국토를 허위와 왜곡으로 유린한 거짓역사를 처음 부터 재 점검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위의 노래는 일본 1대 천황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래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성이 그 말 속에 스며있음을 알고 그 중대성을 간파할 필요성이 절실히요구된다.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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