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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륙신라의근거들

monocrop 2007. 2. 24. 02:46

대륙 신라의 진실(밝혀진 동, 서 신라)

(1) 신라의 국호문제

-> 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신라는 503년까지 국호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힘의 역학관계가 “고구려>백제>신라” 나타납니다

신라의 국호는 건국당시(B.C57년) 서나벌(徐那伐)로 부터 시작하여 계림(鷄林), 신로(新盧),신라(新羅), 사라(斯羅), 사로(斯盧) 등 여러 가지로 쓰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중국의 25사인 “위서”에는 위시(魏時:220~265년)에는 신로(新盧), 송시(宋時:420~479년)에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307년에 “신라”라고 불렀다고 기록되고 있고 또 503년에 또다시 국호를 “신라”라고 부르자고 군신들이 왕에게 건의한 기록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B.C57년에 건국한 이후에 500년 동안 국호를 확정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인데 그당시 또하나의 신라가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 ?


(2) 신라의 왕의 명칭

삼국사기에는 왕의 호칭이 거서간(居西干) ->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泥師今) -> 마립간(麻立干) -> 왕(王) 으로 되어있고 최치원의 제왕연대력에는 모두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김부식은 이를 두고 최치원이 그 칭호가 야비해서 부를 것이 못된다는 생각 때문에 왕으로 불렀을 것이라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 호칭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이 모두 사용되었고 중국의 사서에는 왕의 호칭이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삼국사기에 있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신라왕의 호칭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를 연구해볼 필요성이 있다


(3)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때 왕의 이름이 다르다

-> 사서에 나오지 않는 신라 정신대왕은 보천, 효명태자가 있었다


삼국유사에서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643년 신라로 돌아 오는데 맞이한 왕이 두사람이다


즉 선덕여왕과 정신대왕이다

그런데 정신대왕은 정식 왕계보에 없다


정신대왕의 신라는 어디인가 ?


(4) 진평왕에 대한 대수가 틀리다

-> 단순 오기인가 ?

삼국사기는 진평왕이 신라의 26대 왕이나 중국 정사인 북사에는 진평왕이 30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어 4대의 차이가 난다


(5) 신라의 특산물

->1363년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는 이미 천년전에 신라에서 생산되었다

이미 이시대 신라는 나침반(신라침반)의 재료인 자석과 침을 당나라에 주었으며 면(綿, 목화)를 고구려에 주었다


* 교과서는 코메디


“한국에 목화가 전래된 것은 1363년(공민왕 12) 원(元)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 가져온 후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 경상도 산청(山淸)에서 재배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되었다“

-> 예 와 마한, 신라에서 이미 생산하였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6) 기  타

당나라 운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전라도 순천에서 군사를 원조받을수 있을까 ?

일식 최적관측위치가 신라초기에는 양자강 이남으로 나타난다


지명 등등....

 

(1) 삼국사기만이 서신라와 동신라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 부연설명

- 4세기 이전에는 강회지역의 신라뿐이었고 반도는 고구려(干:간)지였다.

- 고구려 연방붕괴이후는 황해 동쪽의 독립신라(503년:반도)가 있었고

- 황해서쪽(대륙)에는 고구려, 백제에서 해방된 신라가 있었다


(2)  사로신라는 고구려 백제에서 광복하는 신라이고 통치자를 모두 왕이라고 했다는 것이고

동신라는 고구려에서 독립했다는 것과 간에서 왕으로 통치자의 호칭이 변경된다는 것이며 동신라는 631년 이전에 만주의 길림에서 광령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장성을 경계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의자왕백제 보장왕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만주의 남부를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3) 중국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공통부분으로 서신라왕으로 비공통부분으로 동신라왕으로 추증해  볼뿐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동신라는 503년을 고구려로부터 독립하여 고구려간에서 신라왕이 되었다고 할수 있음


서신라는 서기전57년에 4대를 합쳐야 건국년대가 밝혀질것 같고 패망은 당나라가 계림도독부로 하였으니 당나라패망년대가 아닐까 생각되나 연구가 필요하다


(4) 동신라(東新羅)의 진흥왕비(眞興王碑)에는 성씨(姓氏)의 사용이 없었다


진흥왕비는 

-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와

- 568년에 세워진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비가 있는데


지명과 관직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姓氏)의 사용이 없었다는 것은 한반도에사 성씨 사용의 상한선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창녕진흥왕비에서 직책으로는

- 大等(대등), 軍主(군주), 幢主(당주, 唐주), 道使(도사), 村主(촌주), 上大等(상대등), 奈末(내말),

一伐干(일벌한), 一尺干(일척한), 述干(술간),  一吉干(일길한),  沙尺干(사척한), 及尺干(급척한),    大奈末(대내말), 郡使(군사) 등의 명칭이 있고


인명으로는 

- 與古(여고), 武力(무력), 小里夫(소리부), 都記(도기), 忽利(홀리), 刀下(도하), 鳳安(봉안), 居七夫(거칠부), 子力(자력), 未得(미득), 智聰(지총), 竹夫(죽부), 福登(복등), 宿欣(숙혼), 汶叱(연알), 比戶(비호),  須兵夫(수병부), 德文元(덕문원), 멱薩(멱보), 牟聰(모총), 麻叱(마알) 등이 있고


북한산비에는 

- 內夫(내부), 영力(영력) 이 있고


이원비에는 

- 彗忍(혜인), 居七夫(거칠부), 內夫(내부), 영力(영력), 服冬(복동), 比知夫(비지부), 진夫(진부), 영知(영지),  非尸(비시), 舜知(순지), 忠知(충지), 吉之(길지)등이 있으며


단양적성비에는 

- 伊史夫(이사부), 西夫叱(서부질), 內札夫(내찰부), 比次夫(비차부), 武力(무력), 久設(구설), 支勿(지물),  助黑夫(조흑부) 등이 있는데 성씨로 보이는 것이 왜 보이질 않는가 ?


상대등 이하 지배층에서 성씨의 사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흥왕비에도 단양적성비에도 성씨의 흔적이 없으니 한반도에서는 6세기까지도 성씨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


만약 6세기 이전 성씨가 사용되었다면 이 시대의 비석에 기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도저히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서 유리왕9년(32)에 6촌에 성씨를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였으니, 박씨, 김씨와 함께 최소한 8개의 성씨가 전하여졌을 것이 아닌가 ?


그럼에도 진흥왕비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진흥왕은 干(한)이었던 智證麻立干(지증마립한)이 신라국왕으로 변경(獨立, 독립?)한 이후 3대왕이다.


干은 고구리의 지역지도자였는데 汗 또는 韓으로도 기록했다.

그렇다면 지증마립한이 변경(독립?)하기 전에 성씨를 사용한 신라의 위치는 어디인가 ? 하는 점이다.


삼국유사와 중국25사 동이에서는 九黎(구리)의 치우천자와 조선의 단군, 기자, 위만을 이은 동이 일부에 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치우천자의 능이 산동성 동평에 있고 기자 능이 안휘성 몽성에 있는데 신라의 지명인 항성, 석성, 덕안, 동명, 연주, 사지연수와 치우천자능과 기자능이 있는 남북에 있으며 西華 동쪽의 강회지역에 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中國25사와 삼국유사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한 서화 동쪽에 신라가 있음은 분명한데 역사기록을 숨기고 왜곡한다고 없어질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어떤가?


삼국사기는 중국25사, 삼국유사와 공통으로 석문, 석성, 서화, 항성, 주류성, 동성, 잠산, 덕안의 동쪽에 新羅(사로신라)가 있음을 밝히면서도 유일하게 비공통으로 또 하나의 新羅(동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기록으로도 서화 항성의 동쪽인 강회지역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당영호징 신라국기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某王이라 기록)이 있었고 반도 만주에 기록으로 거칠부 국사와 김부식의 干新羅의 기록이 있으며 김부식시대까지도 반도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었던 을지문덕, 장보고의 기록이 있음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500년 이전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광복한 新羅(대륙신라)이고 503년 이후 신라는 독립한 신라(동신라)임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결국 503년 이후에는 두개의 다른 新羅가 있었지만 500년 이전에는 서화 항성의 동쪽 사로新羅만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니 유리왕 9년(32)부터 성씨를 사용하였다고 했으니

이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서화 동쪽 사로신라로 볼 수 있으니 동신라 진흥왕비에 성씨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 아닌가?


반도에선 성씨 시용은 동신라의 체제가 확립된 진흥왕 이후가 아닐까?


진흥왕비, 단양적성비에서 성씨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의문점을 밝혀주는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7세기 이후가 아닐까 ?


(5) 동신라와 서신라와의 관계


현재 공통부분으로 밝혀진 내용으로는 사 로에 있던 사로신라와 한반도와 만주를 통치한 신라와는 동일정부에 의해서 통치된것으로 보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631년에 길림 철령 광령 즉 만주까지 통치한 신라가 있었으니 황해 서쪽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신라와 무관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881년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신라방이 있다고 배우거나 가르친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은 신라방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광복이전에 백제가 요서나 중국에 진출했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연구를 하니 신라나 백제가 중국의 동부를 통치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했다고 가르쳤지만 한웅으로 불리는 치우 천자능이 중국에 있고 김유신의 조상 소호금천씨능이 중국에 있고 그곳에는 김유신시대 전쟁지명이 있습니다


물론 그땅에는 기자가 살았던 서화도 있고 기자총이 있다는 몽성도 있습니다


동이의 연속성이 중국에 있으니 대륙에 신라가 없다고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학자가 '이하동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내에 동이가 있다고 많은 근세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25사와 삼국사기 공통부분의 역사는 한반도로 옮겨오지 못할것입니다


500년 이전에는 중국의 사 로지역에 신라가 있었고 503년 이후에는 한반도에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한 신라가 있었으니 9세기까지 신라는 두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민 대륙에 있던 신라는 663년에 당의 계림도독부로 전락하여 당의 연방국가의 일부로 전락하였지만 반독립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6)경상(慶尙)에서 길림(吉林)까지 동신라(新羅)땅

☞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는 동쪽 길림에서 서쪽의 개원 철령 광령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7) 중국25사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공통부분의 신라는 동이전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대입하여보니 중국 요 중심의 동쪽에 있었고 더욱이 자연현상에 의한 연구에서도 확인 되므로 황해 서쪽이니 서신라 또는 사로신라로 부르고 비공통부분이며 631년에 만주까지 다스린 신라는 황해 동쪽이니 동신라 또는 신라로 구분하는 것임


서신라는 사로국이 고구려와 백제의 연방에 속하였다가 광복된 것으로 보여지므로 광복신라로 부르기도 하며 동신라는 고구리간시대를 지나 독립하였으므로 독립신라로 부르기도 하였다


서쪽이나 동쪽을 붙이는 것은 위치에 의한 것이고 광복이나 독립은 그 역사의 흐름에 의한 것이므로 서신라를 사로신라로 동신라를 신라로 부르는 것도 무방할것 같다


자세한 명칭 확정은 연구를 더 하여야 할것이다


(8) 동신라는 503년 고구려간에서 신라왕이라고 칭하므로서 독립하였음을 알수 잇습니다


중국25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부분은 요중심의 동쪽 신라왕계보로 볼 수 있고 비공통부분을 동신라왕으로 확인할수 있습니다


동신라왕께보에서 명확하게 할수 있는 분은 비문이 있는 진흥대왕 그리고 자장법사시대의 정신대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해보지만 정확한 것은 더 연구해보아야 할것입니다


분명하게 진흥대왕이나 정신대왕처럼 나타나면 우리역사가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신라가 동시대에 2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혼란스러우니 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연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사로신라의 수도는 사로 즉 영해지역에 있는 경주가 수도인 것같은데 동신라의 수도도 경주로 나타나고   있다


왜 경주가 신라의 수도인가??


고구려가 32년에 낙랑국을 병합하고 금 평양에 별도 한성을 두고 남쪽에는 간을 두고 연방통치를 하였는데 간의 주도가 현 경주였기에 독립하고도 신라의 수도로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남한지역중에서도 왜 경주를 수도로 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다른 지역의 간들을 병합시키고 땅을 합병하여 넓으진 것으로 보여서 최초 간의 통지도가 신라 수도로 되었기 때문으로 보여지고 있으나 더 연구를 해보아야 할것으로 생각됩니다


10. 사로신라와 동신라에 대하여


사로는 신라의 초기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 및 25사에 기록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상도 경주에 사로국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신라가 되었다고 배워 왔다


그런데 사로가 기록된 삼국지 동이전의 동이 각국의 위치는 요 중심의 동쪽이지 한반도 기록으로 볼수 없다는 점이다


500년 이전 삼국사기가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기록의 재현이 한반도 상황으로 볼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와 25사 동이전의 공통부분으로 살펴 본 결과 사로국은 기자가 살던 서화의 동쪽이며 항성의 동쪽에 있었던 신라의 구 명칭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요동명 항성 잠산 동성 덕안 동쪽에 안휘성의 남부를 령이라는 지명이 많고 강소성의 북쪽 지명에 해가 있으니 영해라면 이곳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그리고 이지역에는 '사'라는 지명과 '로'를 닮은 '려'가 있으니 이곳이 사로국이 아닐까


회원이라는 지명으로 근처에 형산이 있고 구룡강이 있고 주변에는 김유신때 신라와 백제의 전투 지명이 있고

김유신의 선조 김수로왕과 소호금천씨관계 지명이 있다는 것은 사로국의 신라위치를 재조명하여야 할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동신라는 503년 고구려간에서 독립하여 631년에 만주의 광령 철령 길림의 동쪽까지 강역으로 확보하였음을 만주원류고와 요사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25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부분의 사로신라와 한반도쪽의 각각의 신라를 사서를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신라사를 정리하여야 할것이다


삼국유사도 선덕왕의 신라와 정신대와의 신라로 기록된 두개의 신라

삼국사기에도 왕으로 기록된 사로신라와 간에서 왕으로 변경된 신라 고구려 동쪽 신라와 백제 동쪽 신라로 기록 하고 있다


우리는 사서를 부정하지 말고 재정리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재현 하도록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11. 사로신라 즉 대륙신라의 건국과 패망의 추정

대륙신라는 중국25사와 삼국사기의 공통부분으로 복원이 가능한데 건국에 대해서는 다음과같다


삼국사기에서는 22대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신라왕으로 변경하니 진평이 26대이다


그런데 북사에서 진평은 30대이니 4대의 오차가 있다


간에서 왕으로 변경한 동쪽 신라는 21대까지는 간으로서 22대 지증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신라는 30대 진평이니 사로의 건국은 현재의 서기전57년보다 4대를 더한 년대가 건국년대로 추정해야 한다


동쪽 신라는 936년에 패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륙신라는 663년에 당나라의 속국으로 계림도독부로 되었으며 당나라 연방의 1국으로 존재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장보고 최치원에 의하여 진평10년까지는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하지만 당나라 패망과 함께 패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더 존재하였는지는 앞으로 계속하여 연구해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시원한 답을 못드려 미안합니다.

그러나 모두 합리적 해석과 진실이 규명되도록 연구하면 패망년대를 규명되리라 믿습니다


이론이 있을수 있는 부분임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일제는 한반도 중심의 한국사를 만들기 위해 일제 강점시절 치밀한 노력을 하였고

그 노력의 댓가로 드디어 단군조선사의 신화화, 강역의 반도화에 성공하였고


그 뜻에 동조하는 이병도, 신석호를 대한민국의 역사거두 즉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60년동안 사기역사를 교육하고 있으며

멀쩡한 학생들이 조작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출처 : 리프트나라
글쓴이 : 대동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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