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 [특집7] ‘주몽’ -동북공정 이대로는 안된다.

monocrop 2007. 2. 3. 18:36
[특집 7] 동북공정, 이대로는 안된다

  - 정부와 학계는 동북공정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수립하라 !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우리는 왜 침묵하는가? 


  한국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해프닝이 있다. 일본에서, 울릉도 옆 외로운 바위섬, 독도의 ‘독’ 자만 나와도 전국민이 일어서서 규탄하고, 나라 전체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정부는 유독 독도 문제에 대해서만 강경하게 대처를 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애국심으로 혈서를 쓰고 또 일부는 규탄데모를 하고 게으른 국회의원들조차도 비바람 몰아치는 독도를 다녀와서 독도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지역구민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우리의 역사 모두를 말살하고 우리 영토를 통째로 삼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끝없는 침묵이 흐르고 있다. 움직임이 아주 없지는 않는 것 같은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정부가 나서서 부산을 떨면서 고구려 연구재단을 만들더니 2년만에 해산하면서 “모든 사업은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된다”고 한다. 이것은 정부의 일관된 방침이기도 하다고 하는데 정작 동북아재단은 1년 넘게 조직조차 구성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산도 10분의 1 규모로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 동북공정의 이론을 그대로 반영하여 고구려의 선조가 중국의 옛 민족인 고이(高夷)라고 기술하는 책을 중국 100여개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류의 역사해석이 곧 중고등학교 역사책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그 뿐인가? 1억 명 이상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세계적인 교과서 회사(피어슨 에듀케이션)는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34개 세계 유명 기관에서 53개의 세계지도가 한반도 전체 또는 일부를 중국땅으로 표기하고 있으며(연합뉴스 2005.7.10), BBC 중국어판에 북한 전역이 중국의 영토로 묘사되기도 하고 북한 전역이 ‘동북4성’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유포되는 지금 상황에도 알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있다. 중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 “중국을 자극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와 국제정세를 모르거나”, “세계화에 역행하거나”,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 ①] BBC 중국어판(『한겨레 신문』2006.5.26)


  그리고 소위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으로 자부하는 이들은 세계화니 FTA이니 하면서 민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극우 민족주의 계열인 중국의 후진따오 주석이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렇게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중국은 슬며시 신라공정, 백제공정을 건드리기도 하고(湖北日報 2004.12.10 - 湖北省 共産黨 기관지 : 경향신문 2004.12.10 참고) 일본에 있는 발해의 유물들을 반환하라고 종용하기도 하며, 고대 유적에 대한 한국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금지한 가운데 자기의 구미에 맞게 유적을 복원하는 동시에 동북공정을 이론적으로 합리화 하는 논문들을 쏟아내고 있다. 최근에는 백두산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동북공정이 1990년대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현대 중국 공산당(한족) 정부는 일관되게 한국을 중국의 실지(失地 : 일어버린 영토)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1950)은 한족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이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동북공정은 사실상 한족(漢族)의 중국공산당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1950년대 당시 중국정부는 “한국은 중국의 잃어버린 영토(失地領土)”라고 하였다. 즉 『중국근대간사(中國近代簡史 : 1954)』에 실린 지도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17개 지역이 원래는 중국영토였는데(여기에는 일본은 제외), 미국과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실지(失地)가 되었으므로 이제 회복해야한다는 것이다[Owen N. Denny(柳永博 譯註) 『청한론(淸韓論)』(동방도서 : 1989) 64쪽]. 이 책은 중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교과서의 일종이다. 이런 논리대로 한다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은 피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그림 ②] 중국의 실지(『중국근대간사(1954)』)


  [그림 ②]을 보면 대만(臺灣)이 중국령이 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미 대만이 중국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과 접해있는 우리도 상당히 위태롭다.


  현재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나 발해사의 편입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백제공정과 신라공정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최근 대대적인 양자강 발굴사업을 통해 한반도나 일본의 벼농사 기원을 연결시키려하고 있다(日本『文藝春秋』2005년 4月號 「長江文明發掘記座談」). 그런데 재미있게도 중국의 실지에 일본은 빠져있다. 중국에 보낸 조공이라면 일본도 만만치가 않은데 중국은 아마도 일본에 대해서는 다소 주눅이 든 듯하다.



2. 청산해야할 유산, 소중화 근성 


  대부분 한국의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국 문화를 아류 중화문화로 착각하고 있다. 필자가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대담을 하다보면,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한국 문화가 있는가? 다 중국의 아류이지”하는 자조섞인 말을 듣곤한다.


  한국의 최대 공영 방송이 『논어(論語)』강좌를 편성하는가 하면, 외교부 고위인사라는 자가 한국인의 본류가 중국에서 건너왔으며 중국인과 뿌리가 같은 것은 한국인뿐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하고, 대부분 지식인들이 『삼국연의』의 제갈량을 흠모할 뿐만 아니라 『삼국연의』를 사모하는 고급 지식인 모임들도 있다. 


  어디 지식인 사회만 그런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때로는 입시상담, 홈닥터, 결혼상담, 비즈니스 카운슬러 역할 등을 하는 한국 무당들이 몸주로 두는 “수준 높고 힘이 센” 외국의 귀신들은 관성제군(관우), 소열황제(유비), 와룡선생(제갈량), 옥천대사(관우 사부),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오방신장(도교계통) 등으로 대부분 중국의 통속소설인『삼국연의(나관중 삼국지)』의 등장인물이다.


  한국 귀신의 계급을 분류한 조흥윤 교수(한양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귀신은 ① 천신, ② 조상신ㆍ산신, ③ 유비ㆍ관우ㆍ장비 등 전내신(殿內神 : 별도의 건물로 모신다는 의미), ④ 최영ㆍ임경업ㆍ신립 ⑤ 가택신, ⑥ 터신, ⑦ 저승관련 신 등의 서열을 가진다고 한다. 가공의 인물인 옥천대사나 실제로는 별 비중도 없는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까지 “나라를 위해 몸바치신” 우리의 장수보다 높이 모시고 있으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KBS의 유명 드라마 '왕건'의 경우에도 『삼국연의』를 그대로 답습하는가 하면 국민 드라마라고 떠드는 MBC 드라마 ‘주몽’에서도 평범한 한족(漢族)의 여인을 국모(國母)로 둔갑시키고 백제의 시조는 상단의 행수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리고 중국만 빼면 우리가 중화이고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로 치부하면서 한국의 역사 무대를 최대한 청천강 이남 또는 압록강 이남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축소지향형의 지식인들이 주류를 형성한 사회가 바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과 현재의 한국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주 몽골 한반도 북부 전체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대가정이니 중화의 역사이니 하면서 하나로 묶고 범한국인의 역사를 모두 파괴하려는 책동인 동북공정이 시작되었으니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제대로 대응할 리가 만무하다.



3. 동북공정, 대비는 있는가? 


  현재 우리의 학계에서는 동북공정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① 기존의 사학계가 추진하는 ‘고구려 지키기’, ② ‘요동사(遼東史)’ 개념[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보려는 시도] 등이 추진되어왔다. 여기에는 정부와 민간의 막대한 인적․물적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와 노력는 동북공정에 대한 대비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 동안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여 해왔던 일이 과연 무엇인가 ? 그저 하릴없이 중국의 동북공정의 동향을 분석․소개하고 고구려 관련 역사책들을 간행하는데 온 정력을 쏟으면서 맹목적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지킨다고 허둥대고 있다. 그 뿐인가? 중국이 던져놓은 미끼인 조공-책봉 에 관한 연구로 날과 밤을 지새고 있다.

 

  ‘고구려 역사 지키기’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천 4백여 년 전에 없어진 나라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한다거나 조공-책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한 들 궁극적인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설령 발해(渤海)의 역사를 지킨다 해도 이미 1천년 전에 없어진 나라이니 그 또한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1천년 전의 국가의 토지대장이 있다한들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내의 경우를 봐도, 토지는 1~20년 동안 주인이 없으면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이미 1천년이 지난 이야기로 역사를 지킨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고구려 역사 자체를 지키는 것은 그동안의 연구로도 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역사적 고증이나 자료들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가 한족의 역사와는 다른 갈래인 것은 이미 다 검증된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중화의 역사가들도 대부분 인정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설령 이와 다른 견해가 있다한들 그것은 논쟁의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구려의 역사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한국인들의 역사로 면연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일은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중화사상으로 세뇌되어 있던 닫힌 사고에서 벗어나 “한국인은 과연 누구인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요동-만주와 몽골 지역 범한국인들의 역사의 실체를 밝히고 그 공통성을 찾아서 한족과는 다른 범한국인의 역사의 범주를 자각하고 이를 바로 세워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만이 보다 근본적인 동북공정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즉 고조선․부여․고구려의 역사가 북으로는 발해 - 요나라․금나라 - 후금(청)으로 계승되고 남으로는 신라 - 고려 - 조선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자각하고 그것의 이론적 토대를 굳건히 세우는 길만이 동북공정의 해결책인 것이다. 여기에 일본과 몽골의 분화를 첨가해야 한다.


  우리는 거의 해마다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고 부산을 떨면서 바이칼과 알타이를 찾고 있지만 그 성과들이 국사교과서에 반영된 적은 한번도 없다. 도무지 사학계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인 상태이다. 그러면서 몽골이나 만주를 범한국인들의 역사라고 하면 ‘아마츄어리즘’으로 매도하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고고한 학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일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에만 나타나는 ‘재야사학자’ 그룹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보수 사학자들이 말하는 교과서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의 괴리가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 고고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무엇인가?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맞서기 위해 이들이 개발하는 대응논리라는 것이 ① 고조선과 부여의 주민 구성 및 국가형성, ②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 ③ 한중 외교관계에 대한 연구(조공과 책봉을 중심으로), ④ 근대 동아시아 국경 획정과정 등이다.


  그러나 이 논리들은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 소중화주의적(새끼 중국인 근성) 인식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사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중국 측에 유리한 증거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수천년 동안 우리 스스로 한반도의 한국인들을 기준으로 한국인들을 하나씩 솎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우리 형제들인 만주와 몽골의 쥬신(Jüsin  : 한족들이 말하는 이른 바 동이와 북적)을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발해 이후의 만주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한 들 소용이 없는 일이다. 지금 사학계에서 추진하는 방식이 최고로 성공을 해도 고구려와 발해까지만 (그것도 지배층의 역사만) 우리의 역사고 요, 금, 몽골, 후금(청)의 역사는 당연히 범한국인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멸망한 해는 926년으로 이미 1천 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1천 년 동안 만주는 이제 우리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결국 우리의 보수 사학계는 만주사는 중화역사의 일부라는 한족(중국)의 논리를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까지 설명해왔듯이 요동과 만주는 한국 역사의 근원이 되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범한국인의 역사를 모르고서 한반도의 역사도 알 수 없거니와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알기가 어렵다 ([특집2], [특집3], [특집4], [특집5], [특집6] 참고).


  예를 들어 우리가 오랑캐로만 알고 있던 청나라의 건국(1616)을 오늘의 사정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면, 연변(청나라 건국세력인 건주여진의 근거지) 일대의 조선족 또는 고려인(조선도 명나라 백성도 아닌 한국인들) 10만 정도가 결집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만주 - 몽골 일대의 유목민들을 모두 규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한 후 남하하여 중국을 지배한 것이다. 그들이 왜 오랑캐인가? 그들이 오랑캐라면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떠도는 많은 고려인과 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들도 한국인이 될 수가 없다(병자호란의 상황도 제대로 알려면 『대쥬신을 찾아서』 2권 황혼에 온 단군왕검의 편지 - 조선사 5백년 최악의 쿠데타 인조반정 참고).  



 

    [그림 ③] 명나라 때의 여진족(만주쥬신)


  한국의 보수 사학계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도 현재의 서울 - 개성 - 경기도 남부 - 강원도 등지에 나타나는데도 이를 오랑캐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면 그 후예들인 서울 경기 주민들도 오랑캐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만주지역의 말갈과는 또 다른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영서말갈이니 영동말갈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자가당착(自家撞着)도 이 정도이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들이 한국인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인가? 연구를 깊이 해보면 이들은 결국 고구려의 지방민이라는 결론(한규철 교수)에 도달하게 되는 데 말이다. 사실 말갈은 한국인들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동북공정의 또 다른 대안으로 거론되는 ‘요동사’ 개념은 더욱 의미가 없는 시도이다. 요동사 개념은 요동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도 아니고 한국의 역사도 아니라는 논리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요동은 우리 민족의 주요 근거지이며 근․현대 한국인들의 시원(始原)이 되는 곳인데 이것을 한국의 역사에서 분리 한다니 도대체 납득하기 어렵다.


  ‘요동사’ 개념에서 말하는 한국이라는 것은 삼한(三韓)의 개념을 근거로 하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중국의 사서(史書)만을 중심으로 개념화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개념은 한반도 남단에만 있었던 삼한(三韓)을 포함하여 북방계 유목민의 천손 사상(天孫思想)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즉 한국은 한국(韓國)이 아니라 순 우리말인 큰(한), 가운데(中), 중심의 나라 등을 의미하는 말로 한국을 한자로 표시하면 중국(中國)과도 같은 의미이다(이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충분히 분석할 것이다). 이것은 국어학자들은 물론이고 신채호 선생, 정약용 선생도 지적했던 바이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의미하는 한국이라는 말은 오히려 칸국(汗國)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구체적인 분석은 『대쥬신을 찾아서』 1권 참고). 이들은 오직 중국 사서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충고하거니와 범한국인들의 역사는 한국인들 고유의 언어와 함께 연구해야만 비밀이 풀린다. 


  ‘요동사’ 개념이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우리 민족사의 진원지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등은 모두 요동을 근거지로 하거나 요동을 주요 활동무대로 한 국가이다. 특히 백제는 남부여(南扶餘)라고 하기도 하여 충실한 부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요동의 국가라고 한다면 상식적이지 못하다.


  지금 우리 정부나 사학계는 지나친 소중화 의식이 가져온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혀 있어 마치 바다에 엄청난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데 배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는 않고 선실(船室) 속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다. 이들은 고구려 역사만 방어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유아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고구려 역사의 방어는 물론이고 만주 전역의 역사의 영속성과 우리의 역사와의 연계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북공정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범한국인의 역사 즉 쥬신(Jüsin)의 관계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보는 것이다. 범한국인의 쥬신 관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식한 논리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이하는 『대쥬신을 찾아서』 2권 전면 인용).  


  첫째, 중국의 주변민족들이 한족(漢族)과 함께 하기에는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너무 뚜렷하다는 것이다. 한(漢) 나라 이후에는 중화사상이 매우 견고히 형성되어 대부분 주변민족들을 그들의 통치 및 교화 대상으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주변민족의 이름들이 모두 개․돼지․승냥이와 같은 욕설로 지칭되어있다. 애초에 한족(漢族)과 주변민족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한족(漢族)과 그 주변민족들의 역사와 문화적인 특성이 워낙 다르고 지역적인 경계 또한 분명히 나누어져 있다. 사실 한족(漢族)과 사이(四夷)를 나눈 것은 쥬신이 아니라 바로 한족(漢族) 자신이다.


  한족은 그들과 주변민족(사이 : 四夷)을 분명히 분리시켜 “결코 융합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임을 누누이 천명해 놓고서 이제와서는 그들이 결국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나라의 변장(邊牆)이다. 1479년 명나라는 산해관(山海關) - 광녕[光寧 : 광닝(北鎭)] - 개원(開原 : 카이위안) - 압록강까지 변장을 쌓았다(『明憲宗實錄』卷35). 이변장은 한족과 쥬신의 경계가 되는 장벽으로 “사실상”의 국경이기도 했다(『明憲宗實錄』; 『明史』卷328). 이 변장은 만리장성과 현재의 랴오닝성(遼寧省)을 연결한 것으로 명나라는 대체로 만리장성 이남과 랴오뚱(요동) 반도를 한족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즉 현재의 랴오닝성 지역은 명나라의 국경 수비 지역이었고 그 이북은 사실상 관할하기 힘든 범한국인[쥬신(Jüsin)]의 영역임을 명나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셋째, 발해는 분명히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금과 후금은 발해 또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다. 민족 구성이 그렇고 그들의 실록이 그렇게 밝히고 있는데 왜 그것이 한족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종적 문화적으로도 한족(漢族)과 다를 뿐만 아니라 금의 건국자들은 아무르 강 유역을 근거지로 했으며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다. 그리고 요나라나 금의 계승자인 후금(청)의 건국 세력이 흥왕(興王)의 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장백산(태백산, 백두산)으로 명백히 한반도의 한국인들과 그 신성(神聖)함을 공유하고 있다. 산해관이 중국의 땅이듯이 장백산(태백산, 백두산)을 비롯한 요동, 만주도 쥬신의 땅이다.


  현대 중국 공산당은 2차대전의 틈바구니에서 어부지리로 청나라의 영역을 고스란히 공짜로 차지하여 오늘날과 같은 거대 국가가 되었지만 현대 중국정부와 청나라 정부와는 역사적 계승관계는 전혀 없는 것이다(마치 머슴이 주인이 죽자 주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주인의 역사조차도 자기의 역사로 만들어 버린 것과도 같다). 한족 스스로도 자기들이 만주쥬신(만주족)의 후예라고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청나라 말기 한족들이 일관되게 추진한 것은 멸만흥한(滅滿興漢 :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 정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현대 중국정부가 청나라의 영토를 법적으로 계승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현대 중국정부는 단지 만리장성의 이남의 땅에서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최대 영역으로 잡더라도 명나라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한족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티벳, 만주, 내몽골 등 중국의 변방의 땅은 한족의 땅과는 상관이 없는 만주쥬신이 개척한 영역일 뿐인데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하여 한족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족은 주변민족 특히 쥬신의 역사는 계승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영토만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승해 왔다. 그러던 가운데 만주와 몽골을 비롯한 쥬신의 역사와 민족, 문화는 철저히 말살해왔다.


  네째, 중국은 조공(朝貢)을 가지고 정권의 종속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본대로 황당한 논리에 불과하다. 즉 중국은 각 주변 나라들이 행했던 과거의 외교적 레짐(regime)을 그 국가들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지배권 확립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도대체 한족이 조공을 받은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한나라 - 명나라 정도에 불과하고 북중국은 대부분 범한국인(쥬신)이 통치한 경우가 많았다(상세한 내용은『대쥬신을 찾아서』2권 15장 - 중국은 미국의 지방정권? - 참고).


  원래 중국(中國)이라는 것은 국호가 아니고 한국이라는 말과 같이 세상의 중심( center of the world)이라는 보통명사인데, 이 말이 중화민국(1912)과 중화인민공화국(1949)의 성립 이후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의 의미에는 단순히 세계의 중심으로서 중국이 아니라 화하족(華夏族 : 한족의 고유명칭)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이 들어있다. 


  즉 한족들이 통치할 때는 자기 고유의 나라 이름(漢이나 明)을 사용하다가 쥬신이 통치할 때는 보통명사 중국을 들어 마치 중화의 한족이 지속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통치한 듯이 떠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족들은 몽골의 원나라도 마치 한족의 중국인처럼 보이게 유도하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칭기즈칸의 몽골은 세계적으로 워낙 많이 연구된 분야라서 이들의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지만 대부분 서양인들이나 일반인들의 혼돈을 유발하는데는 크게 성공하고 있다. ‘교언영색 선어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더니 정말 중국인 답다.


  현대 중국 정부는 소국에 불과했던 주(周)나라와 최초의 한족 통일왕조 한(漢)나라의 경우를 들어서 고대사를 재단하다가 남북조시대~원나라에 이르면 보통명사인 중국을 들고 나와서 현대 중국정부와 동일시하고 있다. 말을 얼마나 교묘하게 했으면 그 많은 한국인들이 농락당했겠는가? 그 잘 나고 고고한 학자들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또 명나라 때는 다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다가 청나라의 시기를 평가할 때는 보통명사 중국을 들고 나오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중국을 통치한 대부분 정권이 오히려 쥬신(Jüsin)이다. 그런 논리로 치자면 현재 대부분의 중국 땅은 몽골(몽골쥬신)이나 만주족(만주쥬신)들에게 다시 돌려줘야할 것이다.


  다섯째, 만주와 요동 등은 중화의 고유 영토와는 무관한 지역이다. 산해관(山海關)을 정점으로 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되는데 만리장성은 한족(漢族) 스스로 한족(漢族)과 쥬신(Jüsin)과의 경계를 명확히 나눈 것이다. 나아가 청나라(만주족)이 세운 유조변(柳條邊 : 한족출입 금지구역)도 쥬신(Jüsin)과 한족(漢族)을 나누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이 선은 만리장성과 거의 일치하는 선이다.


  중국공산당 이전에는 요동과 만주를 한족(漢族)이 직접 지배한 적이 거의 없는데  왜 이제 와서 중국정부는 요동과 만주의 역사가 현대 중국의 역사라고 강변하는가? 현대 중국공산당 정부는 그 지역이 현대 중국의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상식이하의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 과거 몽골(원나라)이 중국 전토를 지배했으니 그 이전의 한족의 역사가 모두 몽골의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청나라 때에는 춘추전국은 물론이고 한(漢)나라의 역사도 모두 만주족(청나라)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또 일본이 도발하여 중국 남동부를 점령했던 시기(중일전쟁 - 2차대전)에는 동진 - 송 - 제 -양 - 진 - 남송 - 명나라 등도 모두 일본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 바 동북공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중국(한족)의 수준 미달의 논리를 반박하는데 돈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범한국인의 역사 즉 쥬신사(Jüsin history)를 바로 세워 국제적인 언어로 번역해서 세계에 알리고 홍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일일 것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역사가 한반도에만 고착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다르다. 그것은 다만 새끼 중국인 근성에 물든 성리학자들과 보수사학계가 줄기차게 공작을 해왔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해방 이후에도 금나라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현재의 보수 사학계가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보수사학계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조선 시대 특히 인조(仁祖) 이후의 지식의 주류가 소중화주의적인 사고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에 이병도를 위시한 보수사학계는 그런 류의 소중화주의적 전통을 고수한 것에 불과하다. 조선의 혼군(昏君) 인조 이후 우리에게는 한번도 정신 혁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 정부와 학계에서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대안이라는 것이 전혀 대안의 구실을 못하는 지금 그들에게 무작정 맡겨 두어서 될 일인가? 이제 보다 근본적인 대책들이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구려 연구재단에 투입한 돈의 10분의 1만이라도 투자하여 새로운 동북공정 대안 연구 단체를 만들어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릴없이 고구려 관련 서적들만 봇물처럼 출판하거나 중국이 파 놓은 함정이나 미끼에 정신없이 허둥될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 국한된 편협한 민족주의를 지양하여 ① 우리 민족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북사』, 『요사』,『청사』『원사』등 관련된 부분을 번역하여 방대한 사료를 만들어 전문 연구자들의 자료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여 쥬신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② 현대의 과학으로 검증된 수많은 자료와 관련 민속학 등을 DB화 - 네트워크화하여 이것을 교과서에 반영하며, ③ 동북공정에 보다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사료 수집과 이와 관련 전문가들의 양성은 물론, ④ 해외에도 쥬신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어차피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능한 중화 정부는 실질적으로는 막대한 자금을 주면서도 겉으로는 민간단체의 설전으로 동북공정을 몰아가려하기 때문이다.


 

4. 뿌리를 위한 시론 : 조선, 고려, 한국의 기원

           - 소중화주의를 벗어던지면 우리 민족이 보인다 -

 

  동북공정에 대응하기에 앞서 먼저 범한국인에 대한 개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것은 범한국인 탐구의 시작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동안 연구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 살아남은 말은 고려인 또는 조선족 그리고 한국이다. 조선과 관련된 말로 사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말은 직신(稷愼)․숙신(肅愼)․척산(斥山)․식신(息愼)․제신(諸申) 등이 있고 고려인과 관련된 말은 고리, 코리(Khori) 또는 고려, 까오리, 구리, 고구려, 구려 등의 말이 있다.


  그동안 민족의 여러 스승들은 조선(朝鮮)이라는 말의 어원을 숙신(肅愼)에서 찾았다. 즉 흔히 만주족(여진족)으로 알려진 숙신에서 조선이 나왔다는 것이다. 스승들의 견해는 대체로 아사달을 표현한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하여 직신(稷愼)․숙신(肅愼)․척산(斥山)․식신(息愼)․제신(諸申) 등의 대표 발음으로 쥬신(Jüsin)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조선(쥬신)이라는 말은 ‘태양의 첫 빛이 비치는 나라(해 뜨는 나라)’라는 뜻이고 이 말은 그대로 ‘서라벌(서울)’이라는 말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조선에서 숙신이 나온 것으로 보고있다. 그 이유는


① 조선이 숙신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존재했다는 점. 밝조선 이전에 조선이 이미 성립될 정도로 조선이라는 말의 연원이 깊다는 점

②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범위가 큰 말이라는 점.

조선이라는 명칭은 B.C. 7C 『管子』에 등장하나 숙신은 그 보다 2백년 뒤인 기 『상서(尙書)』에 처음 등장했다는 점.

④ 쥬신의 고유 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알타이, 알탄, 아이신, 아사달, 아사타라, 아시나, 아사밝, 아사다께 등의 말에서 조선이 파생되는 과정은 유추하기 쉽지만 숙신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다는 점.

⑤ 조선(朝鮮),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朝鮮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

⑥ 숙신과 조선이라는 말이 서로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조선과 숙신에서 파생된 말이 조선과 숙신과 유사한 말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

⑧ 쥬신계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구려와 숙신계의 건국신화가 많은 공통성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의 주도세력을 숙신으로 보기도 한다는 점.


  조선(朝鮮)의 어원(語源)을 분석해 보면 태양(하늘) 숭배와 금제련술, 태양이 떠오르는 성스러운 산의 사람들,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민족(아침의 의미), 찬란히 빛나는 땅의 민족이라는 자부심 등을 표현한 말로 나타난다(朝鮮의 鮮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대쥬신을 찾아서』1권 8장 참고). 


  고려의 경우를 보면 ‘고리’ 또는 ‘구려’라는 말은 이전부터 나타나지만 고구려(高句麗)라는 말은『한서(漢書)』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玄菟郡)과 관련되어 대체로 고조선 서부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즉 고려는 오늘날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되는 말인데 이 말의 기원을 살펴보자(상세한 분석은 『대쥬신을 찾아서』 1권 8장 참고).  


  첫째, 고구려 또는 구려는 ‘구리(銅)’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구리 등의 금속은 쥬신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는 하나의 토템이기 때문이다. 쥬신의 대표적인 주요 산업과 직업은 중계무역과 대장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금속은 쥬신의 대표적 브랜드이다. 당시 구리는 최첨단 소재이므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고려(고구려)는 ‘IT 강국’ 또는 ‘최첨단 신무기 국가’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둘째, 구리, 까오리 등은 까마귀 또는 까마귀의 울음 소리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들의 내용을 보면, 천손이나 태양 또는 금속(땅 속의 태양)을 상징하는 말과 까마귀는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비행을 즐길 정도로 매우 영리하며 인육을 먹기 때문에 하늘(태양)로 가는 영혼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신의 메신저(전령)로 생각되기 때문에 쥬신의 신조(神鳥)로 여겨진다. 태양과 까마귀를 연결하는 생각은 범한국인에게는 매우 보편적이고 오래된 사고의 하나였고 고구려의 벽화속의 태양신이 이고 있는 태양속에 삼족오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고대인들이 태양의 흑점에서 세발 까마귀의 모습을 본 기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여의 왕 해모수와 동명성왕에서도 태양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쥬신족들은 자기의 고유 토템인 새(알)와 태양의 하나의 복합체로서 까마귀를 민족(칸)의 상징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천손족(天孫族 : 하늘나라 사람들)의 이두식 표기로 나타난 말일 가능성 있다. 즉 ‘하늘’이나 ‘태양’을 표현해야하는데 범한국인(쥬신족)들에게는 문자가 없으므로 태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들이 바로 ① ‘高(고 : 뜻을 빌림 - 높다)’ ‘桓(환 : 소리를 빌림 - 환하다)’ ‘白(뜻을 빌림 - 빛나다)’ ‘不[소리를 빌림 - 의미는 불(火)]’ 등인데 여기에 무리를 나타내는 말은 ② ‘여(與)’ 또는 ‘여(黎)’이므로 이것들을 조합(① + ②)함으로써 뜻은 대동소이하지만 다양한 나라의 이름들이 나올 수 있다. 즉 ‘高黎(고려)’, ‘不與(불여)’, ‘不黎(불여 - 부여)’ 등이 쉽게 나온다. 그런데 그 뜻은 모두 하늘의 자손 또는 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한자(漢字) 말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민족의 나라’라는 말이 된다.


  넷째, 범한국인들이 삶의 터전을 표현한 말로 골, 고을을 의미하는 말 수가 있다.

 

  하나의 명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의미로 확장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구리라는 말과 골(마을)이라는 말과 서로 부딪히면서 ‘(구리족의) 고을’ 또는 ‘(구리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확장될 수도 있다. 원래 구리(銅)를 의미했던 고구리는 고을[村]을 의미하는 ‘골’이라는 말과 상호작용하면서 ‘구리족의 마을’, ‘구리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쥬신(조선)이나 코리(고려)나 결국은 그 의미가 대동소이하다. 즉 ① 태양(하늘) 숭배, ② 금제련술 ③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민족(아침의 의미), ④ 찬란히 빛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 등을 표현하고 있다.


  고려나 쥬신(조선)은 범한국인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고려는 현재의 한국을 의미하는 코리아(Korea)와 너무 유사하게 들려 다른 한국인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쥬신(Jüsin)이라는 단어가 범한국인을 부르는 용어로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이제 한국이라는 말의 기원을 살펴보자.


  한국의 보수 사학계는 ‘한국(韓國) = 삼한(三韓)’이라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즉 이 한(韓)이라는 말이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알아보자. 


ꂛ 언어적 관점


  언어적 관점에서 한(韓)은 중국의 한(韓)을 의미하거나 한반도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상서(尙書)』에는 “『한서(漢書)』에 ‘고구려’, ‘부여’, ‘한(韓)’이 있는데, ‘馬干’은 없으나, ‘馬干’이 곧 저 ‘韓’이라, 음은 같고 글자가 다를 뿐”이라는 대목이 있다. 한국에서의 ‘韓’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한(韓)나라가 아니라 단지 그 음을 빌려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인데 [마간] 또는 [ㅁ 가흔], [한], [카흔], [카안], [칸] 등으로 발음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정약용 선생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도 같은 내용의 말이 있다. 


  즉 우리 민족의 강역을 지칭하는 ‘한(韓)’이라는 말은 분명히 한자(漢字) 말은 아니고 다만 음을 빌려 쓴 것이므로 ‘馯’ 등 다른 글자로 음만 비슷하면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칭기즈칸(成吉思汗 또는 成吉斯汗)에서 사용된 ‘한(汗)’으로 사용해도 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한’이 고유어로서 가지는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늘[天]을 의미할 경우 - 한인, 한우물(하늘에 제사 지내는 우물)

② 우두머리[首長]를 의미할 경우 -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마립간)

③ 크다[大]는 의미의 경우 - 한밭[大田], 한길[大路] 등

④ 하나[一]라는 의미의 경우 - 한 나라 (하나의 나라), 한 아버지

⑤ 같다[同]는 의미의 경우 - 한 핏줄, 알타이는 한 핏줄, 한 겨레 등 

⑥ 바르다[正]는 의미의 경우 - ‘한복판’


ꂜ 지리적 관점


  신라 말기나 고려시대에도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있었고(『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고려사(高麗史)』) 요동과 만주 지역을 삼한(三韓)으로 기록한 바 있고(『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요동의 북쪽도 한주(韓州)라고 하였다는 기록(『신당서(新唐書)』, 遼史)도 있다. 이 기록들만 보아도 삼한(三韓)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 또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상세한 해설은『대쥬신을 찾아서』1권 9장 참고).  .


ꂝ 수장적(首長的) 관점


  부여(扶餘)나 고구려(高句麗)의 경우에도 대인(大人)을 가(加[Kha])라고 하고 만주나 몽골어에서 군장[君長(大人)]을 한(汗[Han]) 혹은 가한(可汗[Khan])이라 한다.  신라에서도 군장(君長) 또는 대인(大人)을 간(干[Khan]), 금(今[Khum]), 감(邯[Kham])이라 했고 신라 관직명(官職名) 중에 대아찬(大阿飡)을 한아찬(韓阿飡) 혹은  한찬(韓飡)이라고도 하고 대나마(大奈麻)를 한나마(韓奈麻), 대사(大舍)를 한사(韓舍)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은 우두머리나 임금을 한(칸)이라고 쓰는데 어원적으로 주로 ‘하다[多 : 많다]’라는 형용사나 ‘크다[大]’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이거나 종교적 지도자나 신(神)을 의미하는 감() 또는 가미, 신조(神鳥 : 신의 전령, 샤먼)인 까마귀[烏], 나아가서는 하나[一], 중간[中]이라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알타이 계열의 종족들은 하늘[天]과 관련된 말들을 지도자의 호칭에 붙이기를 즐겨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상을 보면 한국은 단순히 경상․충청․전라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으로 가장 크고 바른 하나의 나라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 의미상 보통명사 ‘중국(中國 : center of the world)과 같은 말이다.



5. 천년의 잘못된 패러다임을 넘어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이 말도 지금까지 분석해온 것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주의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동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본다.


  일반적으로 ① 만주 서부[요서(遼西) 초원지대]는 동호(東胡)의 근거지로 오환․선비계(鮮卑系)이며 몽골계이고 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소흥안령-장백산맥]는 숙신․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여진의 거주지이며, ③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 압록강 -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의 근원지라고 본다. 이것이 [그림 ④]이다.

 


   [그림 ④] 일반적으로 보는 동북아시아의 민족


  그러나 동호, 숙신, 예맥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그 동안의 유적이나 유물로 보면 고조선의 영역은 동호 + 예맥이 아닌가? 그리고 숙신이라는 말은 허베이 - 요동 - 만주 - 연해주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화 유적이나 유물 또는 체질만 봐도 보수 사학자들이 [그림 ④]와 같이 나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한국인들의 체형과 체질을 연구해온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들의 짧은 허벅지를 ‘조선무다리’ 로 표현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왼쪽부터 짧은 허벅지(조선무다리)를 가진 사람들 분포도 - 체질이 상통하는 지역(조용진 『얼굴』85쪽) - 선사시대 인종분포도(일반적인 교과서 역사부도) 등을 나타내고 있다. 고도의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선사시대 인종 분포도에서는 필자가 예맥을 범쥬신으로 표현함).

 


 

                   [그림 ⑤] 한국인들의 기원 관련 그림


  간단히 말하면 요하 문명이 오늘날 한국과 직접 관련이 있는 문화의 원형이다. 요하 지역은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인 구들의 발상지로 파악되고 있으며(한족과는 확연히 다름) 범한국인들의 청동기가 일관되게 분포하는 곳이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영역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비파형(요령식) 동검의 출토지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은 한족(漢族)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 이 분야에 전문가인 미국 덴버 대학의 여성 인류학자 사라 넬슨 교수는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림 ⑥]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조선의 세력범위 

 

  보수사학사들이 중시하는 중국 정사의 기록들을 보면, 숙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예맥도 동북방 민족의 범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흔히 말하는 동이와 북적을 예맥이라고 한 것이다. 동호는 지금껏 지적해온 대로 고조선과 부여의 근거지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그림 ④]는 명백히 잘못된 그림으로 무엇보다 이 그림을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하는 자료로서는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상세한 분석은 『대쥬신을 찾아서』 1권 5장, 8장, 9장, 10장 참고).

   


  

       [그림 ⑦] 사서에 나타난 맥족(우리 민족의 뿌리)의 이동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알타이산과 바이칼 호수 지역에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 에모리大 연구소는 부랴트(바이칼 지역 자치공화국 :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보고 있음)인과 한국인의 유전자(DNA)가 거의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부랴트의 포타포프 대통령이 2000년 한국 방문시 김대중 전대통령은 “많은 학자의 연구 결과 우리는 형제”로 환대한 바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문명은 농경과 유목의 접점에서 발생하였는데 다소 지나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황하문명은 범한국인(쥬신)의 주도로 성립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은나라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은나라는 중국 최초의 청동기 국가로 일반적으로 상(商)나라라고 불린다. 은나라는 대체로 B.C. 1600년 경에서 B.C. 1000년 경까지 존속하였는데, 그 수도의 이름을 따라 은나라로 부른다. 이를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은나라는 범한국인을 의미하는 이(夷)의 나라로 표기하고 있다. 황하문명의 주역도 결국은 범한국인의 일부이다. 그 증거가 아래의 그림이다. 



 

      [그림 ⑧]  청동기 유적 분포도(주로 북방 - 요하 - 한반도에 분포) 


  만약 한족들이 자체적으로 황하문명을 건설했다고 하면 은허(殷墟)에서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들은 그 초기의 원형에서부터 시기별로 그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어야할 것이다. 청동기 문화도 중화민족(한족)이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우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가 이미 발달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안양(安陽) 은허(殷墟) 등지에서 나타나는 청동기는 그 성형법이나 소재, 문양 등을 보건데 이미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라시아 청동기나 서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123~130쪽).


  [그림 ⑧]에서 보듯이 만리장성 이남에서는 문명의 여명을 알리는 청동기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범한국인(쥬신)의 이동로를 통해서 분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기를 쓰고 양쯔강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를 발굴하려시도하고 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있다. 오히려 고도의 신석기 농경문화만 발굴해내고 있는데 한족(현대 중국공산당 정부)은 뻔뻔스럽게도 이것을 장기적으로 신라공정과 백제공정으로 연결지으려하고 있다(湖北日報 2004.12.10).


  한족이나 새끼 중국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신석기 문화만 해도 한국은 한족과 확연히 다르다. 예를 들면, 고대 한국인들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는 즐문토기인데 이것도 한족과는 다르다.

 


       [그림 ⑨] 즐문토기 문화권(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70쪽)

 


 

        [그림 ⑩]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122쪽)


  범한국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무속)으로 무속(巫俗)도 우리 뿌리의 원형을 찾아가는 중요한 방법론의 하나이다. 몽골 - 만주 - 한국 - 일본 지역에서도 이 같은 전통이 강한데 그 가운데도 유독 한국의 무속이 천민화의 길을 간 것도 한족 문화(유교)의 영향 때문이다. 참고로 소련은 공산화 이후 시베리아의 수만명의 샤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여행을 해보면, 한국 문화의 원형은 기본적으로 북방의 유목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남방의 농경문화와 중국의 유교문화가 다소 유입된 것이다. 기원적으로 보면 한국 문화는 북방문화와 남방 문화의 화학적 혼합 과정이지만 이것은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현재 한국 문화에서 중국 문화를 분리해내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방안이기도 하다(한국문화와 중국문화의 구체적인 차이는 『대쥬신을 찾아서』 1권 참고). 

 

 

6. 글을 마치며  

 

  천년 이상을 지속되어온 편협된 축소지향적 소한국주의를 탈피하여 범한국인(Pan Korean)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각 분야별로 연구되어온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간단히 말하면 한국인들의 눈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우리의 사명이다.


  다시 말해서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상․전라․충청 식의 한국인 개념에서 탈피하여 범한국인(Pan Korean) 개념을 탐구하여 그 실체를 밝히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하여 고조선․부여․고구려의 역사가 발해․신라 - 고려 ․요․금 - 원․고려 - 조선․후금 으로 면연히 이어진 범한국인의 관계사를 복원해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문제는 역사와 경제를 항상 묶어서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 세대만의 몫이 아니라 후손들의 몫이기도 하다.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해서 역사문제에 대응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을 더욱 위기로 몰고가게 된다. 한족(현대 중국공산당 정부)은 경제는 경제고, 역사는 역사로 생각하여 현재의 실리와 미래의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않다. 그저 일본의 역사왜곡에 정부가 대응하듯이 중국에도 대응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제 범한국인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여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범한국인의 소멸과 한족(漢族)에 의한 문화적 인종적 사막화를 막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사의 무대에서 우리가 중화민족의 들러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세계 역사의 주역이었음을 알려 스스로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운동을 시작할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6년은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찾아가는 원년이어야 한다.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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