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etc; ... 미분류

[스크랩]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3> 식인문화의 역사

monocrop 2007. 2. 3. 08:24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3>

유비, 인육(人肉)을 먹다


[
들어가는 글]

아래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거장 제리코의 유명한 그림 ‘메두사의 뗏목’입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자랑하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입니다. 실제 사건을 그린 것이죠.

1816년 세네갈 해상에서 프랑스 국적의 메두사 호를 무자격 선장이 운항하다가 배가 난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는데, 결국 선원과 승객 149명 중 15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이들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가운데 악천후와 굶주림 속에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의 구조는 세상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을 일으켰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 사건도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갈 즈음 메두사의 뗏목 선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즉 이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의 살, 즉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다시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혔고 결국 관련자들은 사형되었습니다. 제리코의 그림에서는 왼쪽 아래 부분에 온전하지 못한 시체가 있고 한 사나이가 시름에 젖어 있지요. 바로 그 사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들은 얘기입니다. 중화요리 집에 가보면 검은 나무에 하얀 글씨로 ‘○○ 반점’이라고 되어있고 그 아래에 붉은 색 매듭으로 만들어진 중국 요리집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뭐냐고 물어보니 누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인육(人肉)을 요리 재료로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이 의심나는 요리집에 가기를 꺼리게 되어 “우리는 사람고기를 쓰지 않는다”는 표시로 붉게 해 둔 것이라고 합디다.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인육을 먹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옛 기록에 보면 기근이 심하게 들어서 먹을 것이 없게 되면 인육을 먹는다는 내용이 더러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인육을 평상시에도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요.

식인의 동기나 목적으로는 기아 외에 죽은 사람의 능력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때로는 병을 고치는 약으로 인육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를 위하여 적의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환이 두려워 죽인 인간의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즉 적을 죽여서 그것을 먹게 되면 적의 영혼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논리지요. 적의 인육을 먹으면 그 인육이 소화되어 이미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이 그의 육신을 먹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바로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 유비가 인육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여러 책에서도 인용하여 사용하는 예가 많지요. 우리는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 엽기적 접대문화 - 유비에 대한 인육접대

나관중 ‘삼국지’에서 가장 엽기적인 장면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든지 유비가 인육을 먹는 장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후돈이 화살에 꽂힌 자신의 눈을 먹는 장면쯤 되겠지요. 나관중 ‘삼국지’에는 유비가 인육을 먹는 부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지요.

유비가 서주를 장악하고 있을 때 여포는 장요ㆍ고순 등과 함께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유비ㆍ관우ㆍ장비를 공격하러 나섭니다. 강력한 여포의 군대의 총공격을 받자 유비의 군대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지요. 관우와 장비는 몇 명의 패잔병과 함께 산속으로 달아났고 여포군은 소패성을 이내 점령합니다. 유비는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처자식들을 그냥 버려 둔 채 성을 버리고 서문으로 빠져 나와 말을 달려 도망칩니다.

유비가 홀로 말을 몰아 달아나는데 뒤에서 한 사람이 ‘태수님’하고 불러 뒤돌아보니 손건이었습니다. 유비는 손건과 함께 큰 길을 피해 샛길을 따라서 허창으로 말을 달립니다. 초겨울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고 서산 너머로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지요. 두 사람은 하루 반나절을 한 끼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파 화전민(火田民)에게라도 가서 요기(療飢)라고 할 셈으로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유안(劉安)이라는 화전민의 집에 들러 먹을 것을 요구하자 얼마 후 유안이 고기를 잔뜩 구워서 산나물과 함께 저녁상을 차려왔지요.

유안에게 무슨 고기냐고 묻자 이리 고기라고 대답하였고 유비와 손건은 별 의심도 하지도 않고 그 고기를 배불리 먹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 유비는 길을 떠나려 후원에 메어둔 말을 끌어내기 위해 그 집 뒤꼍으로 가다가 보니 부엌에 젊은 여자가 죽어 있고 그 여자의 허벅지와 팔 다리가 예리한 칼로 베어져 있었습니다. 유비가 깜짝 놀라서 유안을 불러서 물으니 유안이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죽은 여자는 자기의 아내인데 존경했던 유비가 왔는데 대접할 것도 없어 아내를 죽여 요리해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대강의 내용입니다. 물론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 나관중이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정사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나관중 ‘삼국지’는 이 대목을 통하여 유비가 얼마나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는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나관중 ‘삼국지’를 읽은 누구라도 이 대목을 읽고서는 찜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중학생 시절에 ‘삼국지’에서 이 대목을 본 저는 왠지 모르게 답답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면서 이 사건이 단순히 훌륭한 사람에게 최고의 충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상징적으로 씌어진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육(人肉)에 대한 이야기가 도처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사마천의 ‘사기’에 은나라의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젓갈처럼 만든 것), 포(脯 : 말린 고기), 자(炙 :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해(?)를 즐겨 먹었는데 자신의 제자인 자로(子路 : B. C. 543
B. C 481)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어 해로 만들어지자 이 때부터 해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때의 해가 어쩌면 이런 유의 해가 아닐지 모르겠네요.

또 다른 측면에서 인육 요리는 자신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삶아서 바치기도 하고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으로 그 사람이 가진 충성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했다는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많고 역사가 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네요.

유비가 인육을 먹은 이야기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얼마나 유비에게 충성을 하고 싶었으면 자기의 아내를 죽여서 바치겠느냐, 그러니 유비는 얼마나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겠는가 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중국인 특유의 과장이기도 하겠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칩니까? 아니면 유비에 대한 백성들이 신망이 두텁다고 느껴지십니까?

여러분들은 “에이 설마, 아무리 백성들의 신망이 높다고 해도 인육으로 접대를 해?” 라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유비가 인육을 먹은 사실은 정사에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러한 묘사가 중국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이죠. 나관중 ‘삼국지’나 ‘수호지’는 중국과 그 중국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고리이기도 합니다.


(2) 중국의 식인문화(食人文化)

중국인들은 유달리 음식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한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음식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은 광동(廣東)성이지요. 홍콩 근방입니다. 중국 속담에 “경치 좋은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의 비단옷을 입고 광저우 요리를 즐긴다(生在蘇州 穿在杭州 食在廣州)”라는 말이 있지요(광저우는 광동성의 중심 도시죠).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당시 광장에서 농성 중이던 한 학생이 비장한 결의를 발표하겠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외국인 기자들이 몰려왔는데 이 학생이 한다는 소리가 “중국의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단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 기자들은 한심해서 말을 잃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인 기자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나는 유비가 인육을 먹는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관중 ‘삼국지’는 유비가 얼마나 고귀한 인물이며 얼마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가하는 점을 부각시키려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식인문화(食人文化)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수호지’에도 인육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수호지에 보면, “부자가 오면 잡아서 재산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잔불을 밝히는 데 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송이 유배 가는 과정에서 들른 주막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해서 파는 주점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중국의 영화나 이야기에 너무 흔하지요.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기근이 심해지면 인육을 먹는 일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난을 당했을 경우 동료들의 시신을 먹은 사례들이 보고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요. 따라서 식인문화를 중국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특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식인문화(食人文化)는 매우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중국에 나타나는 식인 문화는 크게 보면 기근(飢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저질러진 예가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형벌의 일종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복수의 의미로 자행된 일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만의 특성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다음 항목에서 다룰 식도락(食道樂)의 차원이 되면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해지죠.

먼저 기근이라는 상황에서 자행된 식인 문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좌전’에는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하며(애공 21년), ‘한서’에는 굶주림에 지친 장안성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B. C 24 : 왕망전). 가까운 청나라 때에는 강희 연간에 태안지방에 기근이 들어 서로 잡아먹는 바람에 주민의 절반이 식용으로 먹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과거의 일만은 아닐 수도 있지요. 북한의 경우에도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이 같은 인육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형벌과 관련된 식인문화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패하면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흔한 일이었지요.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은나라 마지막 황제 주왕은 거역하는 신하가 있으면 산채로 숯불 구덩이에 집어넣었으며 때로는 살을 저며 장(젓갈류)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은 팽월을 죽여 소금에 절여 신하들에게 주었고 수나라 때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을 문무백관에 하사하여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군중들이 악질 관리 내준신(來俊臣)을 뜯어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자치통감’에 보면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민중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고 합니다(당기편).

그러면 중국에서는 왜 이렇게 식인문화가 고도화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인구는 많은데 잦은 기근이 들어 만성적으로 식량이 부족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너무 많았지요. 또 전쟁의 과정에서 분노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적에 대해서는 모든 형벌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패배한 적에 대하여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자행할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전쟁은 이내 식량생산에 차질을 초래하고 또 식량부족이 되는 악순환을 연출하지요.


(3) 세계 최고 문화민족의 식도락

위에서 식인문화에 대해 이미 지적한 두 가지 경우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은 과거 중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이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하여 즐겨 먹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에서는 진귀한 것을 특미(特味)로 봅니다. 미식가들이 인육을 먹는 것에 대한 기록들이 만만치 않게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제나라의 환공의 이야기입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맛있는 요리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칩니다. 역아는 이로써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아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요.

뭐니 뭐니 해도 중국의 식인문화는 당나라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당나라는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였기 때문에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지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나라는 안정되고 귀족들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니 이것저것 맛있는 것만 골라 먹다가 싫증이 나면 더욱더 진귀한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육이 요리의 재료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 미식가들을 위한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슬픈 얘기지만 인육은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남모르게 거래되었다가 당나라 이후에는 아예 인육시장이 개설되어 인육이 공개적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9세기 당나라 말기에 중국을 방문했던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인육이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 도종의의 ‘철경록(輟耕錄)’에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거나 자기의 첩을 삶아 먹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에이, 세계에서 대표적인 문화민족인 한족(漢族)들이 무슨 그런 짓을 … ” 하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예 인육을 파는 상설 시장까지 있었다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는 당나라 때의 양주(楊州)와 봉상(鳳翔), 송나라 때는 항주(杭州)와 변경(?京), 명나라 때에는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에는 안경(安京) 등에는 상설 인육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중국의 서적들과 중국에 대한 찬미자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 등의 외국인들의 견문록에도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에 상세히 나와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표적인 의학 서적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12세기에는 한 사람당 15근 정도의 인육을 얻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때 사천(四川) 지방에 인육이 남자일 경우에는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었다는 것이죠.

이 모든 일들은 수천 또는 수백 년 전 과거의 일이니 이젠 이 같은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불과 1백 수십여 년 전 증국번의 일기에 의하면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폭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이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근대 문학가인 노신(魯迅)은 ‘광인일기(1918)’에서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狂人 : mad man)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중국사회가 가진 구조적 병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식인 풍습은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로 봐야겠지만,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띱니다. 그리고 이런 식인문화는 먼 과거의 얘기가 아닙니다. 1919년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중국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기도 했지요. 정말 현재 중국에 식인 문화가 사라졌는지 공연히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말이지만 중국의 식인 문화는 4천년 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말하기도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00차례 이상이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960년대나 70년대까지도 암암리에 중국 전역에 식인풍습이 남아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찬란한 중화 문명의 확산과 식인 문화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초기의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거쳐 남중국으로 확산되어 왔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인구의 증가에 따르는 식량 부족이 원인이겠지요. 그렇지만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한족(漢族)의 식인 문화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사족이지만 음식에 대한 중국인들이 과도한 집착은 전 세계적으로 사스(SARS) 공포를 낳았습니다. 사스는 2003년 발생한 대표적인 괴질(怪疾)로 치료약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스는 중국의 독특한 음식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지요. 즉 중국 언론의 대체적인 시각은 광동지역을 주변으로 사람들이 “네 발 가진 것 중에선 책상, 날아다니는 것 중에선 비행기, 물 속에선 잠수함 빼고 다 먹는다”는 식으로 야생동물을 남획해 먹다가 사스란 괴질을 불러들이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메모 : 중국 식인문화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