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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북평원 700년 지배한 "한민족의 뿌리"

monocrop 2007. 2. 3. 02:14
동북평원 700년 지배한 ‘한민족의 뿌리’
[경향신문 2004-01-14 18:57]

 
 
 
 
 
 
 
 
 
 
 
 
 
 
 
 
 
 
=[韓國史속의 만주](3) ‘주몽의 고향’ 부여=
 

동이(東夷)의 나라에서 가장 드넓은 평원 지대에 위치한 부여. 중국의 동북평원 대부분을 차지하고 현재의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남부, 만주의 중심을 차지했던 부여를 찾으려면 먼저 지린시에 가야 한다. 지린성 지린시에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두 산, 서단산(西團山)과 동단산(東團山)이 있다. 두 산은 지린시 한복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지린시 외곽 철길 건너에 위치한 서단산에서는 청동기시대 돌널무덤과 서단산토기(미송리형토기)가 함께 조사되었다. 고대 문헌에는 지린성 일대 부여의 선주민(先住民)을 예족(濊族)이라 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지린성 일대의 청동기문화를 서단산문화, 그 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부여의 선주민임을 알 수 있었다.

 

서단산 맞은편에 위치한 동단산에서는 남록의 높은 대지상에 황토흙을 다져 쌓은 둥근 타원형의 남성자(南城子) 옛 성터가 발견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부여의 유물과 고구려 및 발해 시기의 유물이 나왔다. 남성자는 “성책을 만드는 데 모두 둥글게 하였으며 감옥과 비슷하다”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과 들어맞아 부여의 왕성(王城)으로 증명되었다.

 

이처럼 예맥족의 한 종족인 부여족은 일찍부터 쑹화(松花)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평원을 개척, 서단산 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하면서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했다. 전성기 부여의 영토는 사방 2,000리에 미쳤다. 가운데에 도읍이 있어 왕이 다스렸고, 도읍 밖의 나라를 넷으로 나누어 대가(大加)들이 맡아 온나라를 5개 지역으로 분리통치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네 지방을 ‘사출도’라는 말로 표현한다. 부여의 지배자인 가(加)들은 서로 의논해서 왕을 추대하기도 했고,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농사를 망치면 그 책임을 물어 왕을 갈아치우거나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을 배출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곳간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고조선 이어 2번째 국가 형성-

 

부여는 고조선이 존재하던 기원전 2세기경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다. 이후 494년 고구려에 항복할 때까지 700여년 동안 만주 일대를 주름잡았던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였다. 기원후 부여 사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이 나라가 “매우 부유하고 시조 때부터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부여는 그 경제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통치력과 군사력이 매우 강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지린시 위쪽에 있는 위수(楡樹)시 노하심(老河深)에서 모두 129기의 부여 나무곽무덤이 조사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황금의 나라’라는 기록처럼 황금 허리띠장식 등 각종 금제 장신구와 철갑옷, 칼 등 많은 철제무기가 나와 부여 대가들의 강력한 세력기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제 생산도구 및 무기를 바탕으로 힘을 키운 부여족은 오랫동안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과는 자주 교류하면서 친하게 지낸 반면, 선비족 같은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고구려하고는 세력을 다투면서 나라를 키웠다. 또한 주변의 동옥저나 읍루 같은 부족국가들을 신하로 삼으면서 만주지역의 역사를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일어난 선비족 출신 모용외의 침략을 받고, 남쪽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찍이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단초를 열었던 신채호는 부여사에 대해 주목하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기존의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한족(韓族) 중심의 정통론을 부정하고, 부여주족론(扶餘主族論)을 제기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 가운데 가장 주동력이 되는 종족을 ‘주족(主族)’으로 간주했는데, 부여족이 주족이라는 것이다. 주변의 지나족(支那族)·말갈족·여진족·선비족·일본족 등은 객족(客族)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4,000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는 것이다.

 

-금제 장신구등 출토 ‘황금의 나라’-

 

부여의 터전은 지금의 만주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다. 주몽 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그러자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주민들 중 일부(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별종’(떨어져 나간 집단)이라고 부르곤 했다.

최근 경상남도의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 솥을 비롯해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 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된다. 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우리 발해는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여,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 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책 ‘무경총요’에서도 발해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부여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집단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었다. 또한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가 되었고, 만주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고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부여사를 주목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쑹화강유역 장악 ‘민족의 고향’-

 

지금까지 부여의 역사에 관해서는 깊이있게 연구된 바가 없다. 최근 중국 고고학자들이 부여 왕성과 지배층의 무덤 유적을 조사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그 또한 중국 학계에서 연구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부여를 중국 동북지방 역사의 일부로 볼 뿐이다.

고대 이래 우리 민족에게는 범(汎) 부여족 의식이 있다. 이는 부여가 우리의 직접적 조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전문 연구자들조차도 부여가 700여년 간 만주를 활동무대로 하면서 한국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최근 동단산·모아산 유적, 노하심 유적 등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앞으로 깊이있는 연구를 통해 ‘우리 역사에서 놓쳤던 나라’ 부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길 기대한다.

 

〈송호정/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출처 : 사슴농장
글쓴이 : 가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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