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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新고구려본기 - 구려족의 흥기, 구려족 연맹체(구려국)의 성립

monocrop 2007. 1. 31. 22:48
상/고대사 토론방의 활성화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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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려족의 흥기


사실 고구려는 삼국사기에 기록된대로 주몽이 부여에서 망명해와 뚝딱 세운 나라가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제왕운기》 같은 역사책에 실린 고구려 관련 기사는 그 자체 내용이 틀렸다기 보다는 고구려 후기에 고구려의 일계왕통을 세우고, 시조인 주몽의 신격화를 위하여 건국설화를 좀 과장되게 기록했을 뿐이다. 이러한 기록 방법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어느나라의 역사책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국가는 어떻게 성립되게 되었는가. 우선 고구려를 구성한 종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 종족을 고대문헌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고구려족, 구려(句麗)족, 고이(高夷)족, 맥족(貊族) 등 아직도 정확한 정설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 맥족 계통의 구려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 구려족을 문헌에 따라 고이족, 고구려족이라고 별칭했다고 생각된다.
이 구려족이 중국문헌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서주(西周)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전국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주서(逸周書)》「왕회해(王會解)」편이다. 「왕회해」는 서주왕국이 건립된 후 서주 초기(기원전 12세기 경) 주공 단(旦)이, 관숙과 채숙이 동이와 함께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사방에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주(成周)에서 열린 대회를 기록한 것인데, 주변에 거주했던 여러 나라와 부족의 대표들이 참석했었다. 이때 참가한 부족들 중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는 족명이 나타나는데 고이(高夷)라는 명칭이 보인다. 이 고이에 대해 공조라는 사람이 주석하기를 "동북이(東北夷)로서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중국 동북방에는 고조선이 중국과 대등하게 세력다툼을 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국가를 영위하고 있었다. 이 고조선에는 많은 거수국(渠帥國, 일종의 제후국이다)들이 있었는데 고이족은 고조선 서북방에 위치한 거수국이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10세기 경부터는 선진적인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중국 및 그 주변종족들과 무역을 하면서 고대국가로서 발전을 하고 있었다. 이에 고이족도 이 당시 왕성한 활동상을 보이며 중국의 고대문헌에 흔적을 아로새긴 대표적인 종족이었었다.
다음은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구려족의 또 다른 예이다. 《상서(尙書=서경)》「주관」편에,

 

     " 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 "
      (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하였다. )

 

에 대한 공안국(孔安國, 중국전한시대 사람)의 주석을 보면,

 

     " 海東諸夷, 駒麗·扶餘·한·貊之屬, 武王克商, 皆通道焉. "
      ( 해동의 여러 이족은 駒麗(고구려)·부여·한·맥 등과 같은 족속인데, 무왕이 상(商)을 이기니 모두 같이 통하였다. )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인정한다면 중국의 서주 무왕시대인 기원전 12세기경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것이 된다.(夷族이 駒麗와 같은 종족이란 의미로 이글이 쓰였다면 의미가 없겠지만, 이 기록을 보면 駒麗·扶餘·한·貊 등 상세히 언급한 것이 夷族가 같은 시기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튼 구려족의 존재가 오래전부터 중국에 알려져 왔던 것은 사실이며, 또한 구려족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구려족의 주 활동지역은 어디인가. 《수서(隋書)》「열전」중 '배구전'을 보면 배구(裵矩)라는 인물이 수 양제에게 상소한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高(句)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漢世分爲三郡. "
      (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인데 주대에는 그곳에 기자를 봉하였고, 서한(西漢)시대에는 (그곳을) 나누어 3군을 삼았다. )

 

고구려족(고이족)의 거주지가 고죽국의 거주지와 인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백이·숙제의 전설로 유명한 고죽국의 위치는 지금의 난하 동쪽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아마도 고구려족의 원 거주지는 고조선의 서북방, 난하 동쪽 중류유역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또 다른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산해경》[해내서경]에

 

     " 東胡在大澤東 夷人在東胡東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 滅之 "
      ( 동호는 큰 호수의 동쪽에 있으며, 이인(夷人)은 동호의 동쪽에 거주한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라는 강의 북동쪽에 있으며 연나라와 접하고 있는데, 연나라에 멸망하였다. )

 

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맥국이란 고조선의 거수국들로서 맥족의 나라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맥국은 한수(지금의 난하) 동북방에 위치하며, 이 중 큰 나라 중의 하나가 고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기사에서 연나라에 멸망했다는 것은, 진개의 동침시 맥족의 나라들이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이주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안정된 발전을 하고 있던 구려족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환란이 기원전 3세기 말경 중국 전국7웅 중 한나라인 연나라 장수 진개의 동침(東侵)이다. 연나라는 소왕의 즉위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고, 마침내는 동쪽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진개로 하여금 동호와 조선을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진개의 동침은 지금의 요서지방에 있던 고조선을 뒤흔들게 된다. 고조선의 중심세력은 진개의 공격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며, 거수국을 구성하던 많은 종족들도 동쪽으로의 민족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어서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건국은 다시금 요서지방을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다. 위만은 건국하자마자 주변 고조선의 거수국들을 공격하여 점령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으므로, 그나마 남아있던 고조선의 종족들이 다시금 동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구려족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난하 동북방에 위치했던 구려족도 동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민족의 이동이란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구려족들도 한꺼번에 모든 종족이 한 곳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동 시기도 제각각이었겠지만, 일부는 서북쪽으로 이동하여 부여를 건국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지금의 요하유역에 정착하여 나중에 한사군 중 현도군의 고구려현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일부는 요하를 건너 혼하, 태자하, 혼강 등 만주지방 여러 곳에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원래 요하 동쪽에 거주하던 진국(辰國)의 여러 종족들과 혹은 싸워서, 혹은 서로 융합하여 많은 소국들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사기》「조선열전」에서 조선에 대한 주석,

 

     " [ 應소云 玄도本眞番國. ] "
      ( 응소는 말하기를, 현도는 본래 진번국이다. )

 

그리고 《한서》「지리지」<현도군> '고구려현'조의 주석을 보면,

 

     " 應소曰 : 故句麗胡 "
      ( 응소가 말하기를, 고구려현은 옛 구려(句麗) 오랑캐(胡)이다. )

 

현도군 지역은 본래 고조선의 진번국이었으며, 이 중 고구려현은 고구려족의 거주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주요 거수국 중 하나였던 진번국은 대능하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구려현 역시 대능하에서 요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구려현은 (고)구려족이 동진을 하면서 머물렀던 주요 지역으로, 아마도 구려족의 일부가 그 이상 동진을 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도군이 설치된 후 그곳 토착민인 구려족의 명칭을 사용하여 고구려현이라 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2세기 말에 주로 진행된 구려족의 동진은 주요 세력들이 요하 동쪽 만주지방에 정착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후에도 주몽이나 유리세력 등의 부분적인 이동이 있었지만, 구려족의 주 세력들은 압록강에서 요하사이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구려족 연맹체(구려국)의 성립


진개의 동침과 위만조선의 성립 및 영토 확장, 한사군의 설치에 따른 요서지방의 상실 등으로 동쪽으로 이동한 구려족들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에 넓게 퍼져 많은 소국(小國)들을 형성하게 된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고구려전>에서 보듯이,

 

     "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
     ( 이 곳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못은 없다. 사람들은 산골짜기를 따라 살고 있다. 시냇물은 마시지만 좋은 밭은 없다. 아무리 힘써 농사를 짓는대도 백성들은 자기들의 입과 배를 채울 수가 없다. )

 

구려족들은 산 골짜기와 계곡 등지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발전을 꾀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나(那)" 이름의 국가("那"는 냇가(川邊)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집단을 의미한다)나 사물택(沙勿澤)의 "택", 모둔곡(毛屯谷)·적곡(赤谷)·매구곡(買溝谷) 등에서의 "곡" 등 소국이나 토착화된 세력집단의 명칭에서 이러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만주지방에 정착한 구려족들은 각 소국들간의 쟁패 및 연합 등 세력재편을 일으킨다. 여기서 강한 소국에 약한 소국은 합병되기도 하고, 각 소국들은 연합하여 연맹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 결과 대략 기원전 2세기 중반 이전에는 이미 구려족 연맹체에 왕의 존재가 인식되는 것이다.
구려족 연맹체가 느슨한 연맹에서 왕권이 강화될 정도의 연맹체로 발전한 계기가 된 것은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라는 중국 동북방의 소용돌이 속에서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땅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3군을 설치하고, 다시 1년 후인 기원전 107년에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지금의 요하유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 현도군은 요하 동쪽으로 혼하유역까지, 즉 구려족의 거주지역까지 포함된 지역에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곧바로 토착세력인 구려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내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현도군은 구려족에게 밀려 요하 서쪽으로 군치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동옥저전>을 보면,

 

     "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도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
      ( 한무제 원봉 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 어 4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도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夷貊, 구려를 지칭함)이 침입하여, 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 )

 

와 같이 나와 있다. 이로서 구려족들은 기원전 1세기 경에 강력한 정치적 조직력을 가지고 급격하게 성장하는 동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구려족 연맹체내의 나라들은, 크게 보아 태자하 부근에는 양맥(梁貊) 또는 소수(小水)에 의지해서 건국했다는 소수맥이 있었고, 환인 등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나(那)"로 대표되는 집단의 연맹체가 존재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러 문헌 및 고고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환인, 집안 등 압록강 중류에는 초기 적석묘(積石墓)가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경에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이전부터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또한 이들은 이미 초기 철기문화를 영위했던 것으로 보아 국가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 연맹체의 왕권국가가 비류국(沸流國)이다. 비류국은 강한 "나(那)" 집단으로 떠오른 椽那, 桓那, 貫那 등의 "나국(那國)"을 영도하며, 연맹체의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고구려전>의 기록을 보자.

 

     " 本有五族, 有涓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
      ( 원래 다섯 종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이다. 처음에는 연노부로 왕을 삼았었는데 차츰 힘이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고 있다. )

 

여기서 연노부(비류나부)로 왕을 삼았다는 연노부가 바로 비류국인 것이다. 후에 주몽의 계루부에 왕권을 빼앗기면서 고구려가 건국되는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명성왕 개국조(기원전 37년)>를 보면, 비류국의 송양왕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송양왕은 주몽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

 

《제왕운기》를 보면,

 

     " 於中何者是大國 先以扶餘 <檀君本紀曰 ..... > 沸流稱 <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子以仙人之後 累世爲王 ..... > "
      ( 그 중 누가 큰 나라이냐. 우선 부여를 꼽고, <단군본기에 가로되, ..... > 그 다음으로 비류국을 치더라. <동명본기에 이르기를, 비류왕 송양이 말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예로서 여러 대에 걸쳐 왕이었는데, ..... > )

 

송양의 비류국은 부여 다음으로 큰 나라였으며, 송양왕 이전에 이미 여러 대의 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비류국은 비류수 유역의 구려족의 토착세력으로 주몽집단이 남하하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의 영도세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 이전에 이 연맹체에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명칭이 구려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고구려가 건국된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이다. 고구려가 서기 668년에 멸망했으니 705년 간 존속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
《당회요(唐會要)》<고구려>에서 《고구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가 천 년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역년이 천 년 가까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보장왕 27년(서기 668년)조>를 보면,

 

     " 또한 《고구려비기》에 이르기를 『900년이 안되어 80대장이 이를 멸망시킨다.』하였는데 고씨는 한대로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00년이고 이세륵의 나이가 80세이니 .....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

 

라고 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의 한시대에 이미 나라로서 존재하였고 900년 동안이나 존속했다는 것으로 중국인들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 10년(서기 670년)조>를 보면, 문무왕이 고구려의 고안승에게 내린 책명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공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쌓음이 산에 견줄 만하고 공을 남해에 세워 그 위풍은 청구에 떨치고 인교(仁敎)는 현도(玄도)에 덮였는데 자손이 그것을 서로 계승하고 본가와 지파가 끓이지 않아 개척한 땅이 천 리나 되고 역년이 거의 8백 년이 되려 하더니 남건·남산 형제에 이르러 소장(蕭墻)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 사이에 불화가 생겨 집과 나라가 파멸되고 종묘와 사직이 없어졌다. "

 

역시 고구려가 적어도 800∼900년 동안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주몽에 의한 고구려의 역사는 705년 간이지만, 비류국(연노부)에 의한 구려국의 역사까지 포함한다면 고구려의 역사는 900년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가에 따라 동일한 구려족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와 구려국을 같은 나라로 파악하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뜻으로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이 일종의 쿠테타에 의한 왕조의 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학성산의 행복찾기
글쓴이 : 학성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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