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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는 어디서 왔는가?

monocrop 2007. 1. 26. 07:27

역사의 맥 - 신라(新羅)건국과 경주정착 경위


아래글은 박혁거세의 출자(出自:어디에서 기원했는가)와 신라건국에 관한 글입니다.

중요한 논지(論指)는 박혁거세는 지금의 몽골과 북부중국지방인 황하 상류 근처에서 살던 고대민족인 동호족(東湖族)에서 나온 오환족(烏丸族)이며, 인근의 흉노족에게 크게 패하여 그 무리중 일부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에 지도하에 훙노족과 전란을 피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지금의 서울(서라벌)에 정착하였고, 혁거세 사후 인근(한강유역)의 백제의 전신인 십제(十濟)와 평양근교의 낙랑등과 다투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충북지방과 경북의 상주지방을 거쳐 경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박혁거세는 처음부터 오늘날의 경주(慶州)에서 탄생하여 신라를 건국한걸로 압니다. 그러나 시조탄생설화는 문자가 아직 발달하기전 그분의 존엄성과 위대성 그리고 신비성을 제고(提高)할 목적으로 후세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다소 윤색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신화속에는 역사적 사실이 은유적으로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삼국사기 혁거세조 기록에 보면 마한이나 십제(十濟) 말갈, 낙랑등과 외교,전투 관련사항들이 나옵니다. 당시 낙랑이나 말갈 그리고 십제등은 모두 지금의 평안도(평양),경기도(서울) 강원도 등지에 위치해 있던 것들입니다.

경주에 위치했다면 이들과 접(接)하지 않았으므로 그들(낙랑,말갈,십제 등)과 그렇게 다투거나 할 수 없으며 또한 기록도 남지 않았겠죠.

동호족(東湖族)은 선비족(鮮卑族)과 오환족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거주한 지역에 따른 분류였습니다. 오환족은 자신들의 선조인 동호족이 흉노족에게 크게 패한 역사적 사실로 다시 흉노에 대적했으나 크게 패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그런 오환족의 한 지파(支派)가 혁거세의 아버지인 우거수(군장) 였고, 그 우거수가 이끄는 오환족 무리들이 만주와 한반도북부를 거쳐 오늘날 서울 근처에 정착했는데 마침 이곳에 고조선 유민들이 여섯개부족으로 나뉘고 거주하고 잇었고 이들과 연합 혹은 정복을 통해 서라벌(徐羅伐)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오환족의 한 지파인 혁거세 무리가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들은 오환족들은 계속 차례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쳐 내려와 합류하게 됩니다.

박혁거세를 고대 지금의 몽골과 북중국인 황하(黃河)를 근거지로하는 오환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여러 명칭(지명)과 풍속등이 오환족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새라블(서라벌)-서울
우거수 (오환족의 추장,군장,우두머리)
혁거세 거서간(칸,汗,kahn)인 거서간은 오환족식 우두머리(首長) 명칭입니다 등등...


1.신라(새라불)의 건국

2천년의 대제국 단군조선이 망하고 부여(북부여,졸본부여)가 일어서면서 동북아시아는 힘의공백이 발생했고, 중국에서도 주(周)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소국들의 패권싸움으로 지새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던 시대였다.

당시 한반도의 남부지역은 말쥬신(馬朝鮮)의 관활지역으로서 몰락한 단군조선왕손들의 봉지(封地)역활이나 하는 낙후된 공지(空地)와 같았다.

이때 전통적인 기마민족인 동호족(東胡族)은 황하(黃河)의 강변초원지대를 국경개념없이 이동하며살았던 황하문명을 일으킨 원조들로서 쥬신제국을 종주국으로 수두3神사상에 철저했으며 서쪽으로는 훈족(흉노족)과 화합하며 살았던 종족이었다.

(우리 배달민족은 쥬신(조선)족을 원류로 부여족,동호족,크게 세종족이다.)
그런데 흉노족의 수장 모돌이 쥬신제국이 망하는 틈을타 쥬신제국의 영토와 중국의패자 한(漢)나라까지 격멸하는등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됨에따라 동호족과의 결전이 불가피하게되었다.

이때 동호족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漢)족과 힘을합쳐 살길을 찾는 선비족 (鮮卑族)과 끝까지 흉노에 항전하는 오환족(烏丸族)이다. (오환족은 내몽고 오환산으로 이주한데서 붙인 종족이름)

B.C.87년 오환족집단의 우두머리 우거수(右渠帥)호공(弧公)이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크게패하여 일부는 전한(前漢)으로 투항해버리고 호공이 이끄는 나머지 무리는 고구려건국전의 가우리땅으로 넘어오게된다.
이들을 실라족이라한다.
실라(新羅,SILLA)는 황하유역을 일컫는 당시말로서 지금도 몽고에서는 황하(黃河)를 실라로 부른다. 실라는 '새로운 땅 혹은 강'을 의미

당시 가우리(고구려)는 이복형제간인 졸본부여의 고무서세력과 신흥세력 고주몽간의 싸움이 치열한 때인지라 우거수호공은 계속 남으로이동하여 아리수(한강) 북쪽에 자리를잡고 마한(馬韓)의 속국으로서 대실라건국의 첫발을 내딛게된다.

B.C.57년 그동안 부족을 이끌던 우거수호공이 죽자 그의아들 불구래(弗矩內)가 13세의 어린나이로 수두(蘇塗)에나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거서간(居西汗)의 위(位)에오르니 이분이 바로 신라(新羅)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이시다.
(불구래,혁거세는 '밝음'의 의미로서 하늘의 아들을 뜻함)
혁거세 거서간의 아내인 알영부인은 역시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선비족 계열로 보고있다.

불구래 거서간은 소불(서울)의 아리수(한강)북쪽에 성을쌓고 마한에 조공을 폐지하고 독립을선언하여 나라이름을 새라불(徐羅伐)이라 정하였다.
(새라불은 새로운 강변터라는 뜻으로 실라와 같은의미임)

불구래거서간이 이끄는 초기 새라불은 북방의전란을 피해오는 유민들을 아리수(한강)를 건너기전 소불(서울)에 안착시켜 큰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세력이커진 박혁거세는 49세때 마한의 왕이 죽은틈을타 일격에 쳐부수니 마한의 잔존세력은 곰나루(웅진;이때는 백제건국3년전)로 도망치고, 동시에 마한동쪽에있던 경기진한(辰韓)까지 공격하여 아리수의 패자(覇者)가된다.
이로서 장차 신라(新羅)로 성장할 큰뿌리를 내리게되었고 소불(서울)에서 큰무라(경주)까지의 장정(長征)준비를 마친셈이되었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장정의뜻을 이루지못하고 경주근처에도 가보지못한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B.C.5년)

2. 새라불(신라)의 경주정착과정

서기61년 혁거세의손자 새라불3대왕 노례(弩禮)이사금(尼師今)은 북쪽의 낙랑침범과 남쪽의신흥국 십제(十濟)의 북침에 못이겨 아리수를 십제에 양보하고 남으로내려가 낭자곡성(지금의청주)을 취득한다.
서쪽평야지역을 갖고싶어 계속백제를 침공해보지만 번번히 실패하여 와산성 (지금의보은)으로 쫓끼다가 결국 소백산맥을 넘게된다.

소백산맥을넘은 실라족은 사벌(沙伐;지금의 尙州)땅에정착하여 먼저와있던 신쥬신(辰朝鮮)의 유민 金씨집단과 합류하게된다.
(우리는 경상도의 김씨집단을 원주민이라 부르지만 실은 북방에서 가장먼저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실라족과 쥬신족유민들은 다같이 북방에서 부여족(백제주류)에게 많은 핍박을 받은관계로 쉽게동화될수있었다. 그러나 백제천황은 이들의 사벌정착을 가만두지않았다.

초기백제의 엄청스런공격에 실라족과 쥬신족 김씨집단은 온힘을합쳐싸우니 험악한 산세에 백제도 더이상 건드릴수없어 자연스럽게 소백산맥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이되었다.

겨우 백제의 추격을벗어난 새라불은 서기93년 사벌을떠나 고소부리(古所夫里)를 거쳐 이듬해 드디어 큰무라(建牟羅;경주의 북방)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곳엔 이미 석타래집단이 성책을쌓고 완강히 버티고있었다.
석타래(昔脫解)는 오래전 진시황에게쫓겨 건너온 동이족으로서
용성국(龍城國;대동강하류)을 세워 왕이되는데 원래 해상무역을위한 야철술(冶鐵術)의 명인이자 바다로부터 생명의안전을 비는 용왕이라 불리는 무당이었다.

이 용성국이 낙랑의 침략을 받게되자 2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김수로왕이 있는 구야(拘耶;김해)(가야국의성립과정은 다음호에 살펴본다)땅에 상륙하여 김수로왕과 협상끝에 아돌포(阿珍浦;지금의감포)로 옮겨 알천(閼川)에 이서국(伊西國)을세우고 서울을 큰무라(建牟羅)로 정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과 싸움끝에 석타래가 하서지촌(下西知村)으로 쫓겨 간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무라(牟羅)는 마을을 뜻하는 옛말로서 우리민족의 分國인 일본은 지금도 마을을 무라(村)라 부른다.)

한동안 싸움으로 대치하던 朴,金씨측의 새라불과 昔씨측의 이서국은 협상으로 해결키로 뜻을모아 뱍(朴)씨계, 김(金)씨계, 석(昔)씨계의 군장회의를 열어 3성씨가 다같이 동참하는 연합공화정부를 세우기로합의하고, 나라의 왕위도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상키어려운 민주공화정부 체제였다.

따라서 3대 노례이사금(朴씨)다음의 4대왕은 석타래(昔씨)가 맡게되면서 큰무라 월성(月城)을 축성한다.

따라서 박혁거세의 최초신라(도읍:소불)는 고구려와는 같은시기,백제보다는 40년앞서지만 경주에서의 박,석,김 신라는 백제보다 120년후에 이루어졌다.

박씨족을 오환족(烏丸族)으로 인식하는 이론적 근거. 아래주소로 가보시면 보다 상세히 나옴.

http://blog.naver.com/knightblack?Redirect=Log&logNo=1195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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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반석 같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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