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을 통해서 본 치우천자의 실존 증빙

monocrop 2006. 12. 21. 15:23

<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을 통해서 본 치우천자의 실존 증빙 >

 

글 : 송준희





< 一.  서언(序言) >



중국의 正史인 『25史』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사기(史記)』권1에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 : 軒轅)와 치우(蚩尤)가 탁록의 들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 임혜상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서
중국역사상 최초의 전쟁은 바로 황제와 치우의 탁록전이며
황제는 한족(漢族)의 영수(領袖)이고 치우(蚩尤)는 묘족(苗族)의 추장(酋長)이었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우리는 930여회의 외침(外侵)을 받았다고 배워왔고

역사상 최초의 전쟁은

『삼국유사』에서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그 무리 천여명을 이끌고 들어와
처음에는 진번조선(眞番朝鮮 : 기준(箕準)조선)의 변경에서 살도록 허락받았으나
그 세력이 커지자 번조선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조선왕 준(準)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사서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최초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25사』를 중심으로 우리조상들의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더듬어 봄으로서
그 용맹성을 찬양하고 한편 역사의 맥을 간추려 보는 시간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 二.  인물비교(人物比較) >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기록보다 2천여년전의 전쟁의 주역인 중국의 황제(黃帝)와
우리의 조상인 한웅(桓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 헌원과 치우 비교내용 >




< 한글 병기 (해설) >

- 중국의 시조 (삼황중 일인 : 三皇中一人),  한웅(桓雄)시대 14대왕 (삼성기 : 三聖記)
- 소전 (少典 : 제후 諸侯)의 아들, 한족(漢族)의 영수(領袖) (중국민족사)
- 고천자 (古天子 : 사기), 묘족(苗族)의 추장(酋長) (중국민족사)
- 수구(壽丘 : 산동성)
- 삼성기(三聖紀)
- 섬서성황능현성북(중국역조제왕개람), 상군교산(사기지리지), 영주라주현 자오산(사기괄지지)
< 陝西省黃陵縣城北(中國歷朝帝王槪覽), 上郡橋山(史記지리지), 寧州羅州縣 子午山(史記괄지지) >
- 동평군수장현(사기)
- 원비 : 누조, 이비 : 방뇌, 삼비 : 동어, 사비 : 모무
< 元妃 :  祖, 二妃 : 方雷, 三妃 :  魚, 四妃 :  毋 >
- 견비총 : 산양군거야현(사기)(山陽郡鉅野縣 : 史記)


三. 두 인물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


1. 치우천자(蚩尤天子 : 일명 자오지한웅 : 慈烏支桓雄)


가.
치우천자에 관한 기록은 『한단고기(桓檀古記)』에 포함되어 있는
『삼성기(三聖記)』 전하편
『태백일사(太白逸史)』 및
『규원사화(揆園史話)』
그리고 중국의 『25사』에 많은 면을 할애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설명 하도록 한다.

나.
『삼성기』상하(上下)편에 의하면 신시역대기에 치우천자는 14대 환웅으로 적혀 있다.


< 신시역대도표 >      

- 1세 (B.C3898) : 거발한 한웅, 재위  94년, 120세
- 2세 (B.C3804) : 거불리 한웅, 재위  86년, 102세
- 3세 (B.C3718) : 우야고 한웅, 재위  99년, 135세
- 4세 (B.C3619) : 모사라 한웅, 재위 107년, 129세
- 5세 (B.C3512) : 태우의 한웅, 재위  93년, 115세
- 6세 (B.C3419) : 다의발 한웅, 재위  98년, 110세
- 7세 (B.C3321) : 거   련 한웅, 재위  81년, 140세
- 8세 (B.C3240) : 안부련 한웅, 재위  73년,  94세
- 9세 (B.C3167) : 양   운 한웅, 재위  93년, 139세
-10세 (B.C3071) : 갈   고 한웅, 또는 독로한 한웅 재위 100년, 125세
-11세 (B.C2971) : 거야발 한웅, 재위  92년, 149세
-12세 (B.C2897) : 주무신 한웅, 재위 105년, 123세
-13세 (B.C2774) : 사와라 한웅, 재위  67년, 100세
-14세 (B.C2707) : 자오지 한웅, 일명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15세 (B.C2598) : 치액특 한웅, 재위  89년, 118세
-16세 (B.C2509) : 죽다리 한웅, 재위  56년,  99세
-17세 (B.C2453) : 혁다세 한웅, 재위  72년,  97세
-18세 (B.C2381) :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 재위 48년, 82세


다.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의하면


진(晉)나라의 『천문지(天文誌)』를 인용하여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에는
"치우씨(蚩尤氏)는 치우(蚩尤)의 후예(後裔)이다."라고 했고
혹은 창서(蒼署)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後裔)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산동(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
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수 있다.

<晉天文志蚩尤旗수彗而後曲象旗所見之方下有兵云則乃蚩尤天王爲列宿也
通志氏族略蚩尤蚩尤之後或曰蒼署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生大棘城而轉徒於山東淮北者也盖蚩尤天王之英風雄列播傳 遠域之深推此可知也>
<진천문지치우기수혜이후곡상기소견지방하유병운칙내치우천왕위열숙야
통지씨족략치우치우지후혹왈창서여고신역개치우씨지묘예생대극성이전도어산동회북자야개치우천왕지영풍웅열파전 원역지심추차가지야>


라. 『규원사화(揆園史話)』의 태시기(太始記)에 의하면


신시씨(神市氏)는 치우씨(蚩尤氏)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참으로 뛰어나 만고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치우씨는 하늘을 빙빙돌게하는 힘과 바람과 번개, 구름과 안개를 능숙하게 부리고
칼 창 큰칼 큰도끼 긴창을 만들어 초목과 날짐승, 벌레, 고기따위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兵器) 만드는 일을 맡게되고
늘 적을 쳐서 나라지키기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치우씨는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이 쇠잔해짐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이때 형제와 친척중에서 장수될 사람 81명을 뽑아서 군사를 거느리게하고
갈로산(葛盧山)의 금캐서 칼과 창과 화살촉을 벼르고 만들게하여
군사를 한데모아 정비한 후 탁록(탁鹿)땅을 떠나 구혼(九渾)에 가서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는 마치 비바람같아서 세상만물을 두려워 떨게하고 그 위력을 천하에 떨쳤다.

치우씨는 1년동안에 9제후(諸侯)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에서 시작하여 예과(芮戈)땅에 나가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공상(空桑)을 쳤다.

1년동안에 다시 12제후국(諸侯國)을 얻어니
시체가 들여 가득하고 중국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게 되었다.


마. 『중국25사』 『사기(史記)』-오제본기 제1- 에 의하면


응소는 치우는 고천자라고 하였고
(應소曰蚩尤古天子)
(응소왈치우고천자)

반대로 안차기(安此紀)의 기록으로는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데 치우가 가장 포악하니 치우는 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安此紀云諸侯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안차기운제후상침벌치우최위폭칙치우비위천자야)

또한 관자가 말하기를 치우는 노산에서 금을 캐어 오병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서인은 아니고 제후의 자리에 있었다.
(管子曰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蓋諸侯號也)
(관자왈치우수로산지금이작오병명비서인개제후호야)

찬이란 사람은 공자의 삼조기를 인용하여 "치우는 서인으로 탐욕이 있는자" 라고 하였다.
(瓚曰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貪者)
(찬왈공자삼조기왈치우서인지탐자)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誅殺無道萬民)
(용어하도운황제섭정유치우형제팔십인 수신인어동두철액식사조오병장도극대노위진천하주살무도만민)


『산해경』에서는 치우가 명령하여 용으로 하여금 치우를 공격케하니
치우는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켜 대풍우를 좇아 다루었다.
(山海經云黃帝令應龍攻蚩尤蚩尤請伯雨師以從大風雨)
(산해경운황제령응용공치우치우청백우사이종대풍우)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史記』본문에서는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또한 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탁鹿之野)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 皇覽曰蚩尤총吊平郡壽張縣함향성高七丈民常十月祀之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견비총在山陽郡鉅野縣)


보는자의 시각과 목적에 따라 치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록한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치우가 누구인가하는 것을 공안국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구리의 통치자(君號:직위)가 치우라는 것이다.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바.

치우천자에 대하여 우리의 사서는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로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를 물리친 용장임을 기록하였고
중국의 사서는 치우천자를 제후, 폭학자 또는 탐자 등의 여러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토의는 황제에 관한 기록을 검토한 다음 설명하기로 한다.


2. 황제(헌원) : 黃帝(軒轅)

가 .
황제(헌원)에 관한 것은
『25사』의 맨 첫 번째 책인 『사기』권1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황제의 지위와 치우의 관계 및 전쟁을 중심으로 토의하도록 한다.

나.
『사기』의 오제본기에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黃帝者少典之子)

또한 황제의 성(姓)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軒轅(헌원)이라고 하였다.
(姓公孫名曰軒轅)

그런데 유웅국의 군이 소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有熊國君少典之子也)

또한 소전은 제후국호이고 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皇甫謐曰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

헌원이라는 이름은 헌원이라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黃帝生於壽丘長於淮水因爲姓居軒轅之丘因以爲名)

공안국은 황제는 복회 신농과 더불어 삼황중 하나라고 하였는데 태사공은 오제중의 하나로 적고 있다
(太史公依世本大戴禮以黃帝,전頊,帝 ,唐堯,舜爲 五帝)
(孔安國尙書序-伏犧,神農,黃帝爲三皇 少昊,전頊,高辛,唐,虞爲五帝)


다. 『사기』에 기록된 황제의 세보(黃帝의 世譜)는 아래와 같다.



황제의 아들이 25인인데 그중 성을 받은자는 14인이라고 한다.
김씨의 조상이라고 하는 황제의 정비(正妃:누조)로부터 난 23자(자식)중

소호금천씨인 현효(玄효)로부터
교극을 거쳐 고신(제곡)에 이르고
여기에서 지(摯)와 방훈을 포함한 4남에 이르고 있다.

또한 황제의 정비(正妃)에서 난 창의로부터 고양(전욱)을 거쳐
궁선, 경강, 구망, 교우, 고수, 우순, 우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황제로부터 순, 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은 같고 국호만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自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

순이 동이인이라고 적고 있다.
(風土記云 舜東夷之人生姚丘)

8대손이 동이인이니 그 할아버지인 황제도 동이인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
황제는 죽은 뒤 교산(섬서성)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데
괄지지에는 영주 나주현동팔십리 자오산(寧州 羅州縣東八十里 子午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치우와 황제에 대한 평가


우리사서인 『삼성기』에서

치우천왕이 청구(靑丘)를 개척하여 땅을 넓혔다고 했는데
청구는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고(桓檀古記譯者)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규원사화』에서도 치우씨가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1년동안에 9제후의 땅을 빼앗고 또 1년동안에 다시 12제후국을 얻었다고 하였다.  

헌원과의 싸움도 10년동안에 70여회나 되었다고 하니
상호견원지간(相互犬猿之間)의 전쟁용사(戰爭勇士)였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25사』의 기록은 다른점이 있다.

그것은 치우는 천자였고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이다.

이한마디로서 황제와 치우는 비교할 수 없는 직위임을 알수 있다.
다만 사가들이 황제를 높이기 위하여 소전지자(少典之子)를 유응국(有熊國)의 군(君)이라하여 소전(少典)을 인명(人名)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고

치우를 탐자, 폭자 또는 제후(貪者, 暴者,또는 諸侯)정도의 위치로 낮출려고 애쓴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三. 탁록의 전쟁


1. 사서내용의 비교

치우와 황제의 탁록전에 대하여 『삼성기』와 『규원사화』,『중국25사』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각각 차이가 있다.


① 『삼성기』에는

치우천왕이 신농(神農:삼황중1인)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색도(索度:산동성)로부터 회대(淮岱 : 淮水와 岱山사이의 中國要地)사이에 웅거하였다가
헌원과 탁록의 들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한다.


②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의 들에서 헌원과 싸울 때 큰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이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크게 혼란하여 도망가고 숨으니 백리안에 병사와 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회대(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 탁록에 성을 쌓았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또한 헌원은 항상 거쳐를 안정시키지 못하는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하는 전장에서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헌원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살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③ 『규원사화』의 태시기(太始紀)에 의하면

헌원이 치우씨에게 도전하여 탁록의 벌에서 크게 싸우니 치우씨는 큰안개를 일으킴으로 적군은 정신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도망가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다.

이리하여 회남, 산동, 북경, 낙양(淮南, 山東, 北京, 洛陽)을 모두 차지하게 되고 탁록에 성을 쌓아 회남, 산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헌원기(軒轅記)에 치우씨가 비로소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못하여 동두철액자(銅頭鐵額者)라 하였으니 헌원이 심한 낭패를 본듯하다.


④ 『중국25사』『사기』권1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의 명을 듣지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치우의 묘가 동평군수장현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탁록에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했는데 그 묘가 동평군에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즉 황제가 탁록에서 치우를 살해하여 시체를 다른곳에 옮겨 장사했다고 하고
혹은 황제가 용(龍)을 시켜 치우를 중기(中冀)에서 참한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중국25사』의 내용에 대하여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서는

치우천자의 형제81人이 동두철액(銅頭鐵額)의 동일한 복식을 하였기 때문에 치우천자를 살해했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사실은 81인중의 한 장수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⑤ 최근에 발간된 『중국민족사』에서

"중국사에 기록된바 한민족과 이민족의 최초의 전쟁은 바로 황제와 치우의 탁록전이다. 황제는 한족의 영수이며 치우는 구려 즉 묘족의 추장이었다."
(中國史上所記漢族與異族第1次戰爭卽黃帝與蚩尤탁鹿之戰黃帝爲漢族之領袖蚩尤爲九黎卽苗族之酋長)
라고 기록하였고
그 전쟁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한족과 이족의 최초의 전쟁이 중국의 탁록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 장수는 황제와 구리의 통치자인 치우였다는것만 적었다.

그러나 『산해경』에서
치우가 병을 동원하여 황제를 정벌했다고 기록하였다.
(蚩尤作兵伐黃帝)

이는 같은 중국의 사서에서도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내용을 조작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다.

이미 오랜 옛날의 전쟁에 대한 승패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시대의 이면을 찾아보는 것이 더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⑥ 탁록전관련지역




四. 최초의 전쟁과 역사(歷史)의 맥(脈)


1. 치우(蚩尤)와 황제(黃帝)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해야 한다.


치우와 황제는 모두 동이인(東夷人)이었다.
중국사서는 이들을 동이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이인이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중국은 황제를 한족(漢族)의 시조로 삼아 중국역사를 약 5백년이전으로 더 연장시켜 단군조선보다 약 3백년 앞선 역사로 꾸며 놓았다.

그렇게하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는 부득이 치우천자(蚩尤天子)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하고
『25사』의 앞부분에 여러 가지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탁록의 전쟁을 한족(漢族)최초의 민족간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동이민족의 후예들은 그것을 모른체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치우는 한지방을 다스린 제후에 불과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② 치우는 묘족(苗族) 또는 동이인(東夷人)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조상만이 아니고 중국, 몽고, 조선(中國, 蒙古, 朝鮮)등 중국대륙에서 살던 여러족속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인들이 시도하고 있는 어리석은 이론에 불과하다.


『중국민족사』에서 한족래원(漢族來源)을 16개족속으로 구분하여 그중 동이족(東夷族)에 대하여

"夷或曰東夷,以其居於華夏系之東也.
" '說文 : 夷東方之人也. 從大從弓'
東夷一名詞廣狹二義
狹義 專指秦以前居山東 ,江蘇,安徽等省自淮以北沿海一帶之異民族.
廣義 則爲秦漢以後版圖擴張, 在境內之東夷己歸同化, 因別指滿洲,朝鮮, 日本,琉球 等族爲東夷"
라고 기록하여

진(秦)나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협광(狹廣:협의와 광의)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동이(東夷)를 희석하기위하여 설명한 내용이지만
『양서』를 비롯한 여러사서에 "동이국왈조선(東夷國曰朝鮮)"이라고하여
동이(東夷)는 바로 우리조상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또한 치우는 환웅을 뜻하고 환웅시대는 모든 사서에서 단군조선 직전의 우리선조임을 기록하고 있다.

우선 역사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2. 치우천자(蚩尤天子)의 위치를 우리역사에 삽입(揷入)해야 한다.

중국사서는 중국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조인 황제로부터 역사의 기원을 기록할 수 밖에 없으므로
황제와 동시대의 치우천자만을 중국역사에 부분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중국(한족)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환웅시대의 역사기에서 밝히고 있고
여기에서 치우천자는 구리(九黎)의 14대통치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만시지감(晩時之感)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치우천자의 위치를 찾아 九黎의 왕세대를 바로세워 단군조선 이전의 약1600년의 우리역사의 脈을 연결해야 한다.


五. 결 언 (結言)

가문(家門)의 족보를 찾고 조상의 묘역을 가꾸는 일은 그 후손들의 당연한 일이요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씨족의 역사는 그 후예들이 찾아서 관리하는 것이 이치인데 우리역사를 찾는 일에는 시시비비(是是非非) 반대하는 자가 많다.

일본학자들의 논문이나 주장만을 앞세워야 우수한 학자인것처럼 우리역사를 남에게 맡기거나 의존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조상 팔아먹는(?) 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온 중국인이 두려워 떨던 치우천자를 우리조상으로 모시고 우리역사의 진면모를 찾는 일에 다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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