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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의 백제 유적

monocrop 2006. 12. 16. 00:24

백제유적위치도

한강유역의 백제유적 위치도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한강을 통해 동서로 연결되는 서울지역은 우리 나라 고대사회에서 경제적·전략적 요충으로 중시된 곳이었다. 한강 연안의 기름진 평야는 경제를 풍요롭게 하였고, 서해바다를 통하여 한강으로 연결되는 해로는 중국 문화와 한반도 문화가 만날 수 있게 하였다. 한국 고대사에서 한강을 장악하는 나라는 어김없이 그 시대의 주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도 한강을 '민족의 젖줄'이라고 흔히 부르며,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말로 '한강의 기적'이란 말도 자주 쓴다.

국가발전의 노른자와 같은 이 한강유역을 처음으로 차지한 나라가 바로 백제이다. 고구려계통의 유이민 집단인 백제부족은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한강유역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그들이 남긴 문화들은 또한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을까? 사실상 서울은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음에도, 그 유적들이 더 많고 화려한 다른 시기의 서울문화에 눌려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강유역에서 백제문화와 관련되는 유적들은 수없이 많고, 또 관심에 따라서 볼 유적도 많다.

한강유역의 초기 백제의 역사는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남하, 그리고 한강유역에의 정착으로 시작된다. 초기 백제국의 성립과정은 {삼국사기} 온조설화에 나타나 있다. 이 설화를 통하여 우리는 백제건국세력부여계 집단이며, 미추홀(인천)의 비류세력과 한강에 정착한 온조세력이 합쳐져 백제(百濟) 초기국가를 성립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

몽촌토성

백제초기 온조세력이 처음 머물렀던 하북 위례성에는 유적이 많지 않다. 그것은 그곳에 머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조집단은 곧이어 지금의 송파구, 강동구 일대인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많은 성터들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성의 규모나 입지조건을 고려할 때 몽촌토성(夢村土城)이 바로 하남위례성(河南 慰禮城)이 아니었나 학자들은 지목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의 올림픽공원내에 있는데, 이 성터에 올라서면 광활한 한강유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름모꼴 모양으로 성내 면적만도 6만 7천여 평, 성벽의 길이는 2,285m 에 이른다. 현재는 성의 주위에 인공하천을 만들었지만, 원래는 성벽 외곽에는 '해자'라 고 불리는 방어용 호가 둘러져 있었고, 서북쪽 모서리에는 목책시설의 일부가 지금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대규모 반격에 대비하여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한성시대 백제의 중심지로 바로 이성산성이 주목된다. 이성산성은 몽촌토성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에 위치한다. 춘궁리는 한성시대의 궁궐터로 전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성 내에서 대형 건물지가 발굴 조사되어 그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한성시대 백제역사상에서 우리는 몇 왕을 주목한다. 고이왕과 침류왕, 근초고왕이 바로 그들이다. 고이왕은 백제의 16관등을 제정하고 복색을 정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 침류왕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그리고 근초고왕마한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공략하여 고국원왕을 패사케 하고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를 편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업적은 모두가 고대 왕권국가로써 백제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 그같은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인지 근초고왕은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까지 만들었다.

방이동 1호 고분군 석실입구

이같은 한강유역의 초기백제시대 유적으로 앞에든 성터 이외에 우리는 고분군을 찾게 된다. 방이동 고분군석촌동 고분군이 바로 그것이다. 몽촌토성이 있는 올림픽 공원에서 시작되는 백제고분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불과 2-3킬로를 가면 이들 백제고분군을 만나게 된다. 이들 고분들은 비록 그 주인은 잃었으나, 한강유역 초기백제의 문화성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이곳 일대의 지명이 '돌마리'로 부려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저기에 이같은 적석총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고, 오랜 세월의 무관심 속에 파괴 훼손도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이 일대에는 7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석촌동 적석총

그 중에서도 적석총인 석촌동 3호분밑변이 55.5미터, 43.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방형의 3단 구조이다. 한반도 내에서 이보다 큰 규모의 고분은 없다. 규모가 웅대하기로 이름난 만주 즙안현의 고구려 장군총의 밑변이 30미터인 점을 감안하면 이 고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석촌동 적석고분이 바로 고구려의 그것과 전혀 다름없는 구조를 가진 점이나, 이웃한 방이동 고분군의 구조양식이 백제석실분의 전형이 되면서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구조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방이동 고분의 구조양식은 이후 공주나 부여지역의 고분들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내습에 대비하면서 한성에 도읍을 옮겼던 백제는 고국원왕을 패사 시킨지 꼭 104년만인 475년, 반대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는 국치를 바로 이곳에서 당한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설원의 한을 품고 경황중에 공주로 천도를 함으로써, 한강 유역에서 백제의 웅지는 일단 좌절을 맞이한다.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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