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위를 멸망으로 몰고간 대륙백제의 진실
최 진 선생님의 자료에 의하면
“북위”는 중국내 하북/산동성 유역의 “대륙백제”를 10년 동안 수십만의 기병으로 다섯차례 침공하나 북위가 모조리 패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차) 488년 (2차) 489년 (3차) 494년 (4차) 497년, 기병 20만으로 침공 (5차) 498년
(강시단야僵屍丹野)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한마디로 백제의 강성함을 대변할 수 있을까요 ?
산동성 청도북쪽에 백제 동성대왕의 묘가 있다는 고 임승국 교수님의 말씀과
산동성에 동성대왕이 만든 호화로운 궁궐 임류각(臨流閣)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최진 선생님의 주장이 새삼스레이 운영자 귓전을 맴돕니다
과연 백제의 본국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결국 북위를 멸망으로 몰고간,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초토화시킨 대륙백제의 진실은 결코 반도에서 일시 진출한 역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래 자료는 최 진선생님의 원고내용을 일부 재편집 한 것으로 지도자료 등은 주말에 보완하여
이해하기 쉽게 재편집 해드리겠습니다
(백제/남제 연합군 - 위(魏)의 488년 전쟁)
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중국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뜯는 니전투구의 대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즉 그것은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위(魏)(삼국시대의 위魏와 구별하여 통상 북위北魏 386~534 라고 불리운다)나라이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중국에 있던 여러 북방 유목민 정복자들의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또 북중국에 통일국가 위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회수이남 남중국에는 南齊(479~502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북위의 백제영토 침범경위를 이해할수 있게 된다.
439년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자신의 영토앞에 있는 산동반도와 하북성의 백제식민지가 무척 눈에 가시 같았을 것이다.
또한 가우리(고구려)와의 화평관계가 435년(장수대왕 23년, 가우리에 망명해 온 연왕燕王 풍홍(馮弘)을 위의 요청으로 죽인 후) 이후 계속되었으므로, 배후의 가우리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당시 가우리/북위는 북방동맹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백제/큰왜/남제는 남방동맹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제는 북위를 오랑캐의 나라로 취급하여 그 국명을 표기할 때조차 위로魏虜(위나라 오랑캐)라는 비칭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북위가 중국내 백제 식민지를 공격해 왔다.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군왕답게 이를 과감히 맞아 격퇴하였다. 이 백제군은 본국백제군, 외外백제군과 남제군南齊軍의 연합군이었다.
자치통감 권 136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6永明六년(488년)조에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이곳에서 요서, 진평 2군의 중국내 백제 식민지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위가 공격해온 곳이 바로 하북성지구내 백제식민지였음을 명백히 하였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위서 권7하 고조기高祖紀에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세조世祖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 [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 (주1)
(주1)
중국본토에서는 예부터 여러 종족이 침입하여 얽히고 설킨 역사활동을 벌려왔다. 衆軍은 중국사서에서 외국인 부대를 말한다. 여기 남제/북위의 전쟁기록에 나오는 중군은 중국내 진출한 백제의 식민지군을 일컷는다.
동성대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 /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의 것이었으며, 이 전쟁이 끝난후 동성대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고하였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建威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長史인 고달高達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司馬인 양무楊茂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宣威장군 겸 참군參軍인 회매會邁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문서속에 포함되어 남제측의 역사서에 채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帶方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백제건국의 고토인 대방고지를 말하는데, 즉 이곳이 외백제이다. 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北岸부근 을 말한다. 廣陽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上谷지방이다. 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중국내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이지도는 본글의 내용에 맞게 재작성 예정입니다)
(백제 / 위의 490년 전쟁)
488년 백제-남제연합군에 패전한 위나라는 489년 정월부터의 연합군공격에 크게 위협을 느껴
그해 8월 고조高祖의 특사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남제의 무제武帝(=세조世祖, 소색簫賾)에게 보내서 화호和好를 청하고, 남제의 무제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제의 건국시조 소도성 이래 백제와 맺어 왔던 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490년 4월과 11월 위와 남제는 서로 사신을 파견, 다시 한번 화평관계를 확인한다. (위서魏書 권7상 제기帝紀 7 )
북위가 남제에 대하여 화호를 청한 것은 하북성지구의 백제군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이제 백제와 남제간의 동맹관계가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위의 고조高祖는 수십만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지구의 백제군을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주2)
(주2)
김상기金庠基박사는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백산학보 제3집에서 490년의 위魏의 침공은 백제의 대륙내 요서遼西지역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490년(경오년庚午年)의 전쟁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강시단야僵屍丹野)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그후의 백제-남제 연합군 / 魏의 전쟁 (494~ 498)
무제(소색)의 친위정책은 이제까지의 남제의 대외정책과 다른 것이므로 자국내에서도 곧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492년 무제가 죽자 그 아들 소소업簫昭業이 왕위를 이었으나 즉위 11개월만에 무제의 당숙인 소란(簫鸞)이 쿠데타를 일으켜 소업의 아우인 15세 소소문簫昭文을 허수아비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전권을 행사하다가,
다시 3개월 후에는 소문마저 폐한뒤 스스로 왕위에 올라 명제明帝라 칭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라고 했다.
490년 경오년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북경부근)에서 백제의 대륙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긴다 (493년).
---------
(운영자 주)
여기서 평성은 탁록 서쪽 산서성 대동시를 말하는 것으로 역시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였다
태원분지를 따라 낙양으로 남진하여 천도한 것이다
---------------
백제가 취득한 산동반도와 제남지역은 북제北齊의 연대까지 70여년간 백제가 보유하게 된다.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 전열을 정비한 위는 다시 494년 12월 (백제 동성대왕 16년, 위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18년, 남제 명제明帝 건무建武 1년) 대군을 발하여 정남征南장군 설진도薛眞度, 대장군 유창劉昶, 서주자사徐州刺史 원연元衍,평남平南장군 유조劉藻를 4방면으로 나누어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2달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등, 결국 위군은 총퇴각을 하게된다.(주3)
(주3)
위서 권7하 고조기 7하 태화18년 12월조 및 19년 1월 2월조에 위군의 승전사실과 효문제의 행차가 기록되어 있고, 남제서 권6 명제기 2년 1월, 3월조에 남제군의 위군격퇴 사실이 적혀 있다. 백제군의 기여에 관해서는 3월조에 [司州刺史蕭誕 與衆軍 擊虜 破之]라고 하여 백제군을 중군으로 표현, 간접적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중군(衆軍)은 외국군의 의미이다.
----------
그 뒤에도 태화 21년 6월 (497년, 동성대왕 19년, 남제 건무5년) 또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태화 22년 4월)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위는,
이로써 제남, 회수지방을 완전히 백제-남제에 상실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魏書 卷7 高祖紀下 太和22年紀 ‘后之私府 便可損半 六宮嬪御 五服男女 常恤恒供 亦令減半 在戎之親 三分省一’]
그러나 이 백제 / 위 전쟁은 위나라만의 약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외국정복전쟁은, 백제내부에서도 염전사상을 자라게 했다.
젊은 영웅 동성대왕은 당대의 중국 최강의 강국 위를 10년동안 5회에 걸쳐 패퇴시키면서 자만감이 싹텄다.
그래서 그는 500년(동성대왕 22년)에는 임류각(臨流閣)(주4)이라는 호화로운 새로운 궁궐을 지으니 높이가 5길이(丈)가 넘었으며, 또 궁내에 연못을 파고 이상한 새들을 길렀으며, 아름다운 여인들에 취해 지냈다.
(주4)
임류각의 위치를 논문의 저자인 최 진 선생님은 산동성으로 보고 있다 바로 고 임승국 교수님이 주장한 산동성 청도 북쪽에 백제 동성대왕의 묘가 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상당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
일이 이렇게되자 곰나루의 토착호족들은 위사좌평衛士佐平겸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苩可를 대표로 하여 동성대왕에게 내정內政에 충실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있던 동성대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백가는 돌연 칼을 들어 동성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501년 12월의 일이다.
이로써 중국대륙내에 세력을 확대하던 동북아의 영웅 동성대왕은 나이 불과 37세, 재위 23년만에 최후를 맞이하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