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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동과 요서, 고대 지명의 변화

monocrop 2013. 4. 2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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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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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왕조 은나라, 동이족 일파였다”

경향신문 / 입력 : 2008-11-03-17:40:46수정 : 2008-11-03 17:40:47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

 

ㆍ中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현장을 가다

지난 10월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안양 은허(殷墟)유적에서 은허발굴 8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내외의 학자 160여명이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은허발굴의 의의를 되돌아보고 발굴성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술대회에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 주관으로 답사단이 파견됐는데, 기자는 이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곳은 은허(殷墟)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상(商)나라 성이 존재했던 곳인데요. 1호 궁전터는 이미 1999년 발굴되었고, 이곳은 지금 막 확인된 제2호 궁전터입니다.”

지난 10월30일 오후 5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은허(殷墟).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모인 국내외 참석자들의 눈이 빛났다. 이곳은 유명한 은허 유적에서 강(환수·洹水)을 사이에 두고 강북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원북상성(洹北商城) 터. 탕지건(唐際根) 중국사회과학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설명을 끝낸 뒤 참석자들을 이끌고 한참 더 갔다.

 

 

은허(殷墟) 유적의 원경. 36㎢의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돼 있으며 15만편의 갑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자, 이 판축한 흔적 좀 보세요. 이것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원북상성의 북성벽입니다.”

따끈따근한 발굴 성과를 보면서 유난히 감상에 젖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1928년부터 은허를 발굴한 리지(李濟)와 둥쭤빈(董作賓), 량쓰융(梁思永) 등의 후손들이었다.

109년 전인 1899년 국자감 좨주이자 금석학자였던 왕이룽(王懿榮)은 지독한 학질에 걸렸다. 그는 처방 받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다. 이것은 갑골문자였다. 이후 학자들의 추적 끝에 약재의 원출처가 바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샤오둔춘(小屯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8년 둥쭤빈을 대장으로 대대적인 샤오둔촌 발굴에 나섰고, 마침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 은(상·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인 은허(殷墟)를 찾아낸 것이다. 무엇보다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갑골문자)를 확인했다. 이 갑골문은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는 한자의 원형이다. 은허 발굴은 2001년 중국학계가 선정한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굴’ 가운데 단연 1위로 뽑혔다.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 갑골은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로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1936년에는 12기의 왕릉과 2500여기의 제사갱, 부장묘가 발굴됐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했어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답사단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갑골전시관이었다. 지금까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은 15만편에 이르는데, 1936년 이 한 곳(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쏟아졌다.

문득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에 나온 “오직 은(상)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는 귀절을 떠올랐다. 중국학계는 “이것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당안고(당案庫·역사기록을 보관한 창고)”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국가기록원인 셈이다.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수공업, 상업, 축목, 기상, 건축, 질병, 생육, 길흉 등 국가의 대사는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일일이 점을 친 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확인된 15만 편에서 확인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지만 아직 해독된 글자는 1000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라는 점이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이제 짙게 깔린 어둠에 바람마저 휑하여 더욱 쓸쓸해진 은허 현장. 답사단은 은(상)이 망하자(BC 1046년)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허를 지나면서 불렀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를 떠올렸다. 하지만 은(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저히 파괴된 역사지만 그 동이의 역사는 3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현현하고 있으니까….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앙일보ㅣ2008.10.22 02:17 입력 / 2008.10.22 16:51 수정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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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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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종족 짱골라  

 

교수 “순수한 은 없다”… 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2-16 03:00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 교수. 회족()인 그는 한족()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 성 친양()에서 톈수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西) 성 남부와 장쑤() 성 서부 및 안후이()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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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발해유적

국제신문 / 입력: 2009.01.01 19:32

 

北·中 공동발굴 결과 만주 고조선·발해가 韓역사로 밝혀지자 '쉬쉬'
中, 63년 이후 30년 넘게 침묵 1997년 마지못해 내용 공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북한과 중국이 공동발굴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 고분군.
1963년 8월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17명의 북한 고고학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6·25동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당시였겠지만,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 팀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요령성, 내몽고 동남부 지역의 비파형동검 관련유적을 조사했고, 또 다른 한 팀은 길림성과 흑룡강의 발해유적을 살폈다. 그들의 조사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년 간의 조사는 1966년에 북한에서 보고서로 출판되었지만 누가 발굴하고 집필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이 발굴에 대해서 30년 넘게 침묵하다가 1997년에서야 그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중국 보고서에는 북한과 같이 발굴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잊고 싶은 발굴이었고, 북한 측에게도 숨겨놓고 싶은 보고서인 셈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발굴로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발해는 한국의 역사이며, 한민족의 고대사는 현재의 국경이 아닌 만주지역을 포괄한다는 주장을 굳히게 되었다. 반대로, 중국으로서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다 자칫하면 공동발굴이 갓 점유한 만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조·중 공동발굴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보고서가 남한과 일본에서 계속 인용되자 마지 못해 공동발굴이라는 이야기는 뺀 채 그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심 좋은(?) 중국의 결정에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만주지역이 고대 이래로 한국의 역사였으며,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은 뜻 깊다고 적극적으로 공동발굴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은 지금같이 역사의 왜곡에 집착하지 않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만주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고마워했지, 결코 그 역사를 뺏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학자들은 길림 돈화의 육정산 고분,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 영안 동경성 유적을 발굴했다.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정효 공주묘가 발굴된 대표적인 고분유적이요, 동경성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발굴한 이래 발해의 대표적인 궁성지였으니 가장 중요한 유적들을 조사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매우 알찼다. 특히 동경성에서 발굴한 얼굴이 그려진 벼루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로 평가된다.

필자가 이 보고서를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당시 비파형동검자료를 모으던 중에 어렵사리 흐릿한 복사본을 구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2007년에 육정산 고분과 동경성을 갔을 때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펼쳐진 유적을 보노라니 대학원 시절 놀라움에 넘겼던 책장 하나 하나가 떠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의 답사는 중국의 감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육정산과 성자산(대조영이 건국한 동모산으로 추정됨) 유적은 감시를 피해 새벽에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발해 동경성을 답사할 때는 중국 관계자들에게 몇 시간 억류되기까지도 했다.

2006년 여름의 일로 필자가 동경성을 갔을 때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중이어서 제한된 지역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답사팀 중 한 명은 출입금지 팻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발굴장면을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었고, 우리 답사팀은 몇 시간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사진기의 사진을 지우고 벌금을 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는데, 며칠 뒤에 다른 한국 학자팀이 방문하자 먼저 왔던 사람들이 억류되었네 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한 달 뒤에 러시아를 가니 공동발굴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인욱, 자네 중국에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도망친거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천리 가는 발 없는 말 치고 제대로 가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1963~1965년도 같은 국가 간의 사이좋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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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 고대 시베리아 신석기 유물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 세석기 -

 


- 세석기 문화권 -

 


- 철제의료기구(좌)와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간석기)날을 현미경으로 비교한 것 -

철제의료기구는 울퉁불퉁한데 비해 세석기는 매끄럽다, 즉 날카로움은 세석기가 더 뛰어나다.

 

- 세형돌날로 직접 고기를 잘라보는 사진 -

 

- 샤먼이 사용하던 사슴뿔 관 -

 

- 암각화 분포도 -

 

- 사슴뿔로 만든 곡괭이 -

 

- 뼈바늘, 현재까지도 일부 이누잇족이 쓰고 있다 -

 

- 돌칼로 이발하는 이누잇족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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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교국가연합, 21∼24일 서울서 ''몽골반점동족''국제대회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4-09-19 15:27 |최종수정2004-09-19 15:27

 

 

세계 '몽골리안' 한데 뭉쳐 평화운동

 

세계 처음으로 몽골반점을 가진 종족들의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또 몽골반점 종족 국제기구가 창설된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회장 곽정환)은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와 공동으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11개국 13개 ‘몽골반점 종족(몽골리안)’이 참가하는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평화의 시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몽골리안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과 문화적 각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한편, 세계적인 ‘몽골리안 협력 벨트’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몽골반점이란 갓난아이의 엉덩이 위쪽에 생긴 푸른 반점으로 한국·몽골 등 동북아에 거주하는 북방계 종족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몽골리안의 형질적 특성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 바아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리안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 두 그룹으로 분화된다. 옛 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 코리야크족 캄차달족 길리야크족 아이누족 아메리카인디언 등이 있고, 새 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 위구르족 핀족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만주·네이멍구·위구르(신장성),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핀란드, 북미인디언, 남미인디언, 에스키모 등 13개국에서 총 500여명의 정치 종교 학계 비정부기구(NGO) 등 지도자들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위한 몽골리안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심정문화 세계와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몽골반점 종족의 역사, 문화, 가정 전통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몽골리안의 근원과 가정문화의 재발견(김충렬 고려대 교수·철학) ▲동북아시아 국가의 문화적 교류(박흥순 선문대 교수·국제학) ▲몽골리안의 평화와 심정문화(신현덕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 등 8개의 전체 및 그룹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몽골리안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호 내 알흔섬이 러시아 후지르 마을 언덕 너머로 신비스럽게 바라다 보인다.

특히 23일에는 ‘21세기 국제평화 하이웨이 프로젝트’ 설명회와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고찰―몽골리안 연대·협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 심포지엄이 마련되며, ‘몽골반점동족 세계평화연합’이 창설돼 국제평화기구로 출범할 계획이다.

회의 의장인 곽정환 IIFWP회장은 “인류를 한가족으로 묶기 위해 참사랑·참생명·참가정 운동을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주창으로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평화회의’를 열게 됐다”고 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곽 회장은 이어 “몽골리안은 시원의 시대부터 인류 평화와 복지를 갈망했던 종족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며 “몽골리안 문화와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구촌 화해·협력 시대에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IIFWP는 전·현직 국가수반, 종교 지도자 등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연대해 인종·국가 간 갈등, 종교분쟁 등 지구촌 난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에는 분쟁지역인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 몽골리안이란

우리나라 대다수 갓난아이들은 엉덩이에 청색 반점이 있는데, 이는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가 숨을 쉬지 않자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멍 자국이라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청색 반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몽골반점’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몽골리안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몽골반점은 의학적으로 진피의 심층에 있는 방추형 또는 분지형의 멜라닌 색소세포가 모여 표피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 생후 2세까지는 빛깔이 진하다가 점차 옅어져 11∼12세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어린이에게서는 90 % 이상이 나타난다.

상고시대로부터 평화와 복지를 찾아 세계를 순례한 몽골리안 종족의 선조들은 인류 문화사에 귀한 자원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인류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 시원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수내 알흔섬으로 전해진다. 바이칼호 자체가 수많은 북방 종족 신화의 탄생지다.

실제 몽골리안은 중앙아시아에만 거주하지 않는다. 고대 몽골리안 후손들은 한국, 일본, 중국 서북부,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몽골리안 배경을 가진 종족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모시는 제천의식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활, 자연친화적인 사고, 영적인 세계관 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들은 몽골리안의 생활문화와 심층 무의식의 세계에 용해돼 여전히 남아 있다.

정성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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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 이후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

조선일보ㅣ 입력 : 2006.06.30 22:55 / 수정 : 2006.06.30 23:00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이룬 나라이지만, 전시설명판에는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漢)왕조에 복속됐다고 적혀있다. /랴오닝성박물관 도록

 

지금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遼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려는 기획이다. 요하 유역을 아우르는 ‘요하문명’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 밖 요서·요동을 포괄하는 요하문명 전체를 자기 역사로 만드는 ‘요하문명 공정’에 중국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은 뒤, 장성 밖의 무지몽매한 새외(塞外)민족과 차별을 두었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북방한계선’을 긋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리장성 밖에서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더 발달된 구석기·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요하유역의 구석기문화인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은 북경인(北京人)보다 형질인류학적으로 더 발달된 것이다. 이 지역 사해(査海)의 신석기문화는 서기전 8000년에 이르며, 신석기 말기(서기전 3500년~2500년)의 것이 바로 독특한 옥기 작품을 낳은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번 전시에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려고 하는 뱀의 도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라의 도우에 많이 나타나는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전시 중 세 번째 테마 ‘화하일통’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을 통일(=一統)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를 이룬 부여(서기전 3세기~서기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 삼연(북연-전연-남연)의 유물이 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었다.

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라고 기술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위세품이 출토된 랴오닝성 서풍현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이라고만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요하지역에서 ‘화하일통’의 역사는 최소한 2500여 년은 됐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내몽골·요하유역의 각 유적과 이 일대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요령식 동검, 다뉴세문경, 옥룡(=곡옥) 등을 공유하는 알타이어계 요하문명권이었다. 한국은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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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들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 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로 비록 중국과 신라의 협공에 멸망했지만 그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이 살아 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요하문명의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북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바꾼 국호)-대진국(발해의 국호)-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이기에, 중국은 사활을 걸고 동북공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의 미래까지 노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을 보러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발걸음이 멈칫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높이 90㎝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빗살무늬토기. 요하문명의 빗살무늬 토기들 가운데 황제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동남 아시아·인도까지 활동 범위 넓혀 나가

소년한국일보 / 입력시간 : 2007-07-30 13:27

 

백제 땅 중심으로 바닷길 이어져 일찍부터 해외 교류… 왜국 등과 무역 통해 큰 이익
'백제 금동 대향로' 코끼리·악어 등장…겸익, 인도서 불교 공부… 경전 들여와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코끼리를 탄 사람.

 

■ 뛰어난 선박 제작 기술과 항해술 지녀

 

한반도 서남부의 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던 백제에는 좋은 항구들이 많았습니다. 바닷길이 백제 땅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어 백제인들은 일찍부터 대륙과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가 쉬웠지요. 백제인들의 활동 범위는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답니다.

543년 백제 성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부남국의 보물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부남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로, 이는 당시 백제가 부남국과 교역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실마리지요. 성왕은 또 554년에는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답등’이란 것을 선물합니다.

이는 양털이 주성분인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백제가 답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북인도와 직접 교역했거나, 적어도 활발한 무역을 통해 해외의 진귀한 물건들을 구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642년 백제 사신이 왜국과 교역을 하려는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곤륜은 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백제가 가로막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왜국은 배 만드는 기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해 백제에 의지해 외국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에는 방(舫)이라 불리는 큰 선박이 있었답니다. 왜국에서 ‘구다라선’이라고 불렀던 이 배는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였습니다. 선박 제작 기술과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백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물건을 왜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지요.

 

악어.

 

■ 백제인, 진취적이고 적극적…국제화된 나라

 

백제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인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짐을 갖고 코끼리에 올라 탄 사람과 악어가 보입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에 백제인이 자주 왕래를 했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지금의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국과 필리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겸익 스님은 백제인의 활발한 해외 활동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는 512년경 백제를 떠나 양자강 남쪽의 양나라에 잠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쳐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인도 중부의 절 상가나사에서 인도 말인 범어를 배우고 불교를 공부했지요. 14 년 후인 526년 나란타사의 배달다 삼장 법사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이 때 백제의 임금이었던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아담장과 오부율문이란 경전을 번역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이 작업에는 백제의 승려 28 명이 동원되어 모두 72 권이 번역됐지요. 인도에서 건너온 책이 직접 번역됨으로써 불교의 한 교파인 율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우리 나라 경전은 대개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뒤 들어온 것이었지요. 겸익은 불교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 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입니다.

백제인들은 겸익 스님처럼 알고자 하는 것, 새롭고 진귀한 물건을 찾아 위험한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답니다. 백제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 등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제화된 나라이기도 하였지요. 바다를 향해 크게 열려 있었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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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신용철]물에 잠기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6-05-22 02:59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의 긍지인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동명성왕의 개국 설화에는 우발수(), 압록강, 졸본천(), 비류(), 엄류수(), 곤연(), 하백() 등의 강이나 물과 관계되는 단어가 무려 9개나 나온다. 이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백두산뿐만 아니라 압록강이나 호수 등의 물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바다이름 발)’자 역시 물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2360기의 고분이 중국 압록강변 운봉(·중국 발음으로는 윈펑)댐의 수몰지구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50km,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에서 45km라고 하니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의 역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들이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어 247년 동황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의 관심을 의식해서인지 발굴을 하지 않은 채 댐에 물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측이 공동조사를 제의하기 전에 서둘러 다시 수몰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의 장푸유() 창바이산()문화연구회장은 성()의 축조 양식이 고구려나 발해 등의 것과 차이가 있으므로, 중국 한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전문가들은 흙으로 쌓은 한대의 것과 달리 돌로 쌓은 성은 당연히 고구려의 것임을 주장하지만, 중국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상태라 발굴을 통한 입증은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이미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려는 판국에 우리의 주장이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선 운봉댐의 공동 소유자(1964년에 공동 건설)인 북한은 왜 중국 측에 아무런 주장이나 항의를 못하느냐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항의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우리와 미국 등에 대해 그처럼 강경하게 ‘주체()’를 외치는 북한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중국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약해지는지…. 물론 6·25전쟁 때 남한이 미국의 도움을 받았듯이 북한 측은 중국에 신세를 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역사나 영토 문제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두만강 하구와 나선의 공동 개발, 동북 3성()의 역점 개발, 발해(·보하이)만 유역 대개발 등으로 인해 우리 영토의 자주권이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해체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끈질긴 소수민족 정책 즉, 최근의 ‘동북공정’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만이라도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데 자기의 목소리를 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 그리고 미래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 지혜와 용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고분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물속으로 잠겨 버렸다. 한편 중국은 상하이() 푸둥() 지구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발해만 유역의 대개발’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랴오둥() 반도를 비롯하여 허베이() 성, 랴오닝() 성 등의 연안과 우리 한반도의 북부 서해안 일대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은 뻔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가 물에 잠기듯이 ‘발해왕국’은 겨우 바다 이름에서나 찾게 될 것이니 서글픈 일이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중국사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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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them Chinese

 

몽골 L.A Face의 갱스터 힙합

 

몽골인들의 쥐나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

특히 1911년 만주국이 망하면서 자신들을 지금의 몽골과 쥐나자치주인 내몽골로 찢어놓은 것에 대한 분노.

지금도 독립국인 몽골마저 강탈하려는 야심에 대한 저주와 두려움.

핍박받고 있는 내몽골 자치주의 몽골족에 대한 절망.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짱골라들에 대한 미움 등이 표현.

 

그렇다.

쥐나를 겪어본 나라는 안다.

쥐나가 어떠한 지를.....

 

근데 얘들 좀 하죠 d^-^b 최고~~~ 

 

 

 

요동 요서(遼東 遼西)
                                 
 오 재 성

1.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

< 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

       - 8세기 이전의 요동, 요서의 기준점은 요(遼)이다.(기준성 방향언어)

< 8세기 이전 요동, 요서의 기준점 "요" >
 

요동, 요서를 부르는 기준점은 동이국가와 장안 중심의 지나족(한부족)국가 경계 지역에 있고 고구려, 백제의 위치를 밝혀 줄 중요한 기준점 이므로 우리민족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시대별로 반드시 밝혀야 한다

< 요동, 요서의 중요성 >

* B.C 5세기 연(燕)나라와 조선(古朝鮮)의 경계와 위치를 알 수 있다.
* 고구려 서쪽 경계와 고구려 초기 및 말기 위치를 알 수 있다.
* 백제의 위치와 수도 한성과 웅진 위치를 알 수 있다.
* 대방(帶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 서안평(西安平) 위치를 밝혀 고구려 서쪽과 요(遼)나라 수도 위치를 알 수 있다.

< 연(燕)과 요동(遼東) >

① BC 5세기 요동은『사기』권69 소진(蘇秦)의 기록으로 위치를 알 수 있다.

# 일부한자 지원이 않되어 공란으로 나타나는 점 이해바랍니다 !

"연(燕)의 동서남북 기록"
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樓煩屬雁門郡 林胡國名朔嵐己北)
西有雲中九原(雲中九原秦曰九原郡漢曰五原郡雲中城內楡林縣九原郡在楡林縣西界)
南有호타易水(  出鹵城)

㉠ 동유조선요동(東有 朝鮮 遼東 :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다)
㉡ 북유임호누번(北有 林胡 樓煩 :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다)
㉢ 서유운중구원(西有 雲中 九原 :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다)
㉣ 남유호타역수(南有 호타 易水 :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다)

이중에서 누번속안문(樓煩屬雁門 :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과
임호삭람지북(林胡朔嵐之北 : 임호는 삭과 람의 북쪽에 있다)과
구원개오원(九原改五原 : 구원을 오원으로 바뀌었다)과
호타출로성(호타出鹵城 : 호타는 노성에서 출발하였다)

위와 같이 각 방향 마다 2개의 명칭이 있어 "연"강역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나라를 나타낼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인데 영역과는 상관없다.
둘째, 영역을 나타내는 방법인데 위치까지도 동시에 알 수 있다.

연의 기록에서 위치를 나타냈는지, 영역을 나타냈는지 밝혀야 한다.
연의 ㉡은 북쪽 표기에서 "임호"는 삭,람의 북쪽에 있고,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고 했는데 안문은 동쪽에 있고 삭, 람은 서쪽에 있다.

㉢은 서쪽 표기이다. 운중과 구원이 있다고 했는데 현재 운중이 있을 뿐 구원은 없으나 구원과 유사한 지명이 북쪽에 "오원"이 있고 남쪽에 태원이 있는데 기록에서는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 하는데 현재의 "오원"은 삭, 람, 안문의 서북쪽에 있으니 서쪽이 북쪽의 두 지점보다 더 북쪽에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비슷한 태원(太原)이 매우 가까운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구(九)에서 대(大)로, 대(大)는 태(太)로 유사형태화(類似形態化)로 본다면 태원(太原)을 구원(九原)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태원은 운중(雲中)의 남쪽에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

㉣은 남쪽 기록인데 역수(易水)와 호타출로성(호타出鹵城)이라 하였는데 현지도에 로성(潞城)이 있다. 노성 주변에서 역수와 비슷한 형태의 지명이 wenshu로 발음되는 문수(文水)가 있을 뿐인데 로성(潞城)의 서북쪽에 있다.

㉡㉢㉣에서 북쪽 서쪽 남쪽의 위치가 정하여 질 수 있는데
㉠의 동쪽은 조선과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조선은 국호인데 고조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기자가 살던 조선의 기(箕)땅으로 본다면 아래쪽에 둘 수 있으나 고조선의 기비(箕丕)나 위만 및 예군남여(南閭)의 위치를 보면 위쪽에 둘 수가 있다.

㉠㉡㉢㉣의 지명이 있는 곳에서 요동과 닮은 지명으로는 안문과 로성 사이의 요(遼)밖에 없는데 요에서 태행산맥까지는 요동(遼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산서성에 8개의 명칭을 배열하니 8각을 형성하고 이중에서 북쪽의 두 지점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서,남쪽이 산맥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며 영역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8개 명칭중에서 삭, 람지북, 안문, 운중, 로성(鹵城)과 같은 로성(潞城)의 4개의 명칭이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결정되게 마련이다.

----------< 북쪽 >
------林胡-------樓煩
------朔 嵐------雁門
---雲中-+-----------+-朝鮮
서------|-----------|--------동
쪽------|-----------|--------쪽
---九原 +-----------+ 遼東
------?---------鹵城
-----易水   
---------< 남쪽 >

이로서 연나라때 요동은 요 동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지도상 표시 >
 


< 우적도상 "요" >
 

태원 바로 및에 "요"가 있다


2.『사기』에서 진(秦)과 요동(遼東) - 진장성연구(秦長城硏究)


BC3세기 요동시점의 연구는 "진장성"에서 밝혀야 한다
(진장성은 104도-113도까지 진나라 때 축성된 성을 말한다 - 요의 서쪽(요서)에 있다)
# 여전히 한자가 일부지원 안되는 점 이해바랍니다 !

< 중국 군사지도상에서 만리장성 표시 >

 

- 노란선이 진시황의 장성이고
- 녹색선은 진시황 후대에 축성한 성인 것 같다

# 진시황의 장성은 서쪽의 임조('臨  : 감숙성) 강중(羌中)에서 남쪽의 북향호를 지나서 북쪽으로 하수를 지나 새(塞)와 음산(陰山 : 산서성)사이 까지이고 음산을 지나면 요동이다.
(西至臨 羌中 南至北嚮戶北據河爲塞 陰山至遼東)
(서지임조강중 남지북향호북거하위새병음산지요동)

# 지리지에 서쪽 하수(河水)에 음산현이 있다
(地理志西河有陰山縣)
(지리지서하유음산현)

#「사기」에 있는 진시황의 장성(長城)에 대한 기록인데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비교하여 보자.
(塞先代反 白浪反謂靈夏勝等州之北黃河 陰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陰山 東至遼東 築長城爲北界)
(새선대반병백랑반위령하승등주지북황하 음산재삭주북새외 종하방음산 동지요동 축장성위북계)

현재 황하 서쪽은 감숙성에서 시작하여 령, 하, 승(靈 夏 勝)을 지나 북(北)황하 황석보(滑石堡)에서 동쪽으로 와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안문(雁門)까지 이르는 장성과 또 한줄기는 북쪽으로 마니산에 이르고 숭례(崇禮)를 거처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이 있다.

진장성은 서쪽의 임조(감숙성)에서 시작하여 강, 역(羌 域)을 지나서 북쪽으로 황하(黃河)를 거쳐 음산(陰山) 근처에 이르고 음산(陰山)을 지나면 요동이다 라는 뜻이다

장안중심의 진이 장성을 음산 북쪽 장성을 먼저 축성했다면 남쪽에 장성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쪽에서 안문(雁門)까지 장성이 있고 안문동쪽은 장성이 없고 그 동쪽에 태행(太行)산맥에 있다. 안문은 요와 같은 남북축상에 있으니 안문 동쪽을 요동이라고 할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태행(太行)산맥 동서의 세력과 안문의 남북세력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진장성 부분 확대도 : "삭(朔)"북쪽 "음산(지도표시는 산음)" >

 

- 노란선 끝부분 바로 직전에 "삭(朔)"
- 노란선 끝부분에 "안문(관)"
- "삭" 북동쪽에 "음산(산음)"
→ 장성이 끝난부분이 바로 태행산맥이다
→ 장성 동쪽이 요동이라는 의미 아닌가 ?

분명한 것은 진장성은 안문(雁門)에서 끝나는 장성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시황 장성 기록과 일치하는 것은 임조에서 안문(雁門)에 도달하는 유적이 있다.
분명히 진장성은 기록과 일치하게 음산의 남쪽 안문에서 장성이 끝나며 동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안문의 동쪽은 요의 동쪽으로 표기 할 수도 있다.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을 음산을 지나면 요동에 이른다고 해석된다.
음산과 요동에 대하여 본문(本文)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을 해석하여 놓기를 정의(正義) 음산동지요동(陰山東至遼東)이라 하였으므로 요동의 시발점을 어디로 보는가를 밝혀질 수 있게 하고 있다.
두 문장은 동자(東字)의 차이밖에 없지만 뜻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장성(秦長城) 기록에서 요동이란 장성이 끝나는 삭, 안문의 동쪽을 요중심의 동쪽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수가 있을 것이다.


< 삭, 안문, 음산 위치 >

 


3.한과 요동(창해군으로 연구)


① BC.1세기 요동의 시점 연구는 한(漢) 창해군 연구에서 알 수 있다.

㉠ 원삭원년에 예왕 남여(濊王 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에 속하게 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하였다.
(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 :『후한서』권85)
(원삭원년예군남여등반우거솔이십팔만구예요동내속무제이기지위창해군 :『후한서』권85)

㉡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사기』 권30
---팽오가멸조선치창해지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사기』 권30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한서』 권24
---팽오천예맥조선치창해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한서』 권24
㉣ 東夷 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 :『후한서』 권85
---동이예군남여등구이십팔만인항위창해군 :『후한서』 권85

(武濟因文景之畜忿胡奧之害卽位數年嚴助朱買臣等招徠東 事兩奧"江淮之間"蕭然煩費矣 )
(무제인문경지축분호오지해즉위수년엄조주매신등초내동구사양오"강회지간"소연번비의 )
창해군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남여(南閭) 등이 요동으로 이동한 지역을 창해군이라고 했을 수도 있고,

둘째는 남여 등이 살고 있는 지역을 명칭만 조선의 우거밑에서 한 무제로 바뀌였다고 볼 수도 있다.

어찌하든 창해군은 요동에 있으며 연제(燕齊)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서(漢書)』권 24 에 의하면 팽오가 예물로써 구멍을 뚫듯 매수하여 예맥조선에 창해군을 설치했다(팽오아예맥조선치창해군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고 하였으니 이동 한 것이 아니고 칭호만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해군이 바로 요동에 있다는 점이다.

이제 창해군의 위치가 과연 어디일까 ?
『한서』권 24 에서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燕齊)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치 창해군즉연제지간마연발동 : 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고 했다.

창해군을 설치하는데 왜 연, 제(燕 齊)(산서성과 산동성)사이에서 소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땅 안에 창해군이 설치되는데 다른 부족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니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연(燕)이 전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서성에 있고 제(齊)가 산동성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창해가 바로 창해군이라 할 수 있고 창해의 서쪽에 요동의 기준(基準)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창해의 잔영 창과 신해 서쪽에는 태행산맥이 있고 그 서쪽에 요(遼)가 있다.
요의 동쪽에 창해가 있으니 창해군으로 요동의 기준(基準)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4.고구리(高句麗)와 요동(遼東)


삼국지, 후한서, 송서, 양서, 남사에서 고구리(려음"리")는 요동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동지동천리(遼東之東千餘里)라 하여 '요동에서 천여리 떨어져서 고구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에서 우 북평, 어양, 상곡, 태원(右 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하였다고 하였고, 안평의 서쪽를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위서』에는 광주(光州)를, 『구당서』에서는 항성(項城)과 은산(銀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은산, 북평, 서안평(銀山, 北平(阜平), 西安平)은 하북성에, 광주, 항성(光州 項城) 은 하남성에, 태원(太原)은 산서성에 있다.

요동에 고구리가 있다면 북평 은산 신성 의 하북성,
광주 항성의 하남성도 요동이어야 하고
태원도 요동에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에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唐)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동지동천여리라는 기록으로 보면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銀山, 甬道(北平), 新城, 西安平) 등에서 서쪽으로 천리(千里)를 가면 요동의 기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은산(銀山)에서 천리(千里)에 가까운 곳은 바로 산서성 요(遼)가 있다.

요동의 시점이 아닌가 그러니 연(燕)과 조선, 진장성(秦長城)과 요동,
한과 창해군에서 나타난 대로 음산보다 서쪽으로 요동 기점이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여리라는 말은 그대로 믿는 것보다 요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 항성, 광주보다 요동의 기점은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동의 기점이 있다는 연, 진장성, 창해지군 사건과 동일한 뜻이라 할 수 있다.

 


5.맥제(백제)와 요동, 요서(遼東 遼西)


지금까지 연과 조선,
진장성과 요동,
창해지군, 요동고구리에서 요동의 기점을 논하여 보았는데,
연에서는 요의 동쪽을 요동으로,
진장성에서는 음산의 동쪽을,
창해지군에서는 창(滄)의 서쪽에 기점이 있을 것이다.
고구리에서는 은산, 용도(북평), 안평의 서쪽에 기점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의 여러 가지는 요동에 관해서만 말하였지 요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유일하게 맥제는 요동과 요서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양서』와 『남사』의 기록에서
"요동백제역거유요서진평2군지(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2郡地)"
(송서(宋書) : 요동백제유요서백제소치위지진평군진평현,
---------------遼東百濟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으로 기록했음)"

요서와 요동에 대해서 고찰하여 보면 맥제(百濟)가 요동에 있으며 요서에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요동(遼東)에 있어야 할 지명 기록은,

『남제서』에서 광양, 조선, 대방, 광능, 청하, 낙랑, 성양(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이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항성, 웅진, 대산, 동명, 박성, 제성, 백마(項城, 熊津, 大山, 東明, 薄城, 諸城, 白馬) 등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맥제본기에는 석문, 평원, 황산, 사자하, 숭산, 독산, 동성, 잠산. 덕안(石門, 平原, 黃山, 泗 河, 崇山, 獨山, 桐城, 岑山. 德安)등이 요동에 있어야 한다.

요서의 진평이군(晋平二郡)은 산서성 요의 서쪽에는 진성(晉城)과 고평(高平)이 있어 한자씩을 취한 지명이다.

요동 지명은 하북성에 석문, 청하, 평원(石門, 淸河, 平原)이 있고,
산동성(山東省)에는 동명, 황산, 박산, 제성, 백마, 사자하(東明, 黃山, 博山, 諸城, 白馬, 泗 河)가 있으며,
하남성에는 항성(項城)이, 안휘성에는 독산, 동성, 잠산(獨山, 桐城, 岑山)이,
강서성에는 덕안(德安)이 있다.

분명히 태행산맥의 동서를 가름하는 것이 요동과 요서로 볼 수 있는데
오직 요서에 진평이군이 있다고 했는데 요서의 시발점을 진평이군(晋平二郡)으로 볼 수 있고 요동의 시발점은 음산지요동(陰山之遼東)이었다.

이를 지도상에 맞추어 보면 동경 113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음산, 진평, 고평(陰山, 晉城, 高平)이 있었다.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遼)가 있는데 음산,진평, 고평과는 동경으로 0.5도의 차이 밖에 없다. 이것은 연(燕)에서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이라 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서기 9세기 이전의 요동과 요서는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의 서쪽을 요서(遼西)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연(燕)나라 이후의 요동(遼東)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요나라 이전 요동과 요서는 산서성의 요(遼)중심의 동서를 말한다.
------------------------------------- 구요동 구요서(舊遼東 舊遼西)
※ 요나라 이후 遼東과 遼西는 요령성의 遼河의 東西를 말한다.
------------------------------------- 신요동 신요서(新遼東 新遼西)

 


6.요동, 요서를 혼돈하는 이유

< 왜 遼가 遼東 遼西의 기점이 됐을까 ? >

① 진장성에서 하수(河水)까지의 중앙의 지점에 있다.
②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서쪽으로 튀어나온 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지명이다.
③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나족(支那族 :漢部族)과 조선족의 격전지이기 때문에 요충지역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
④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옛이름이 서개마대산(西蓋馬大山)이다.
그 명칭을 다 쓸수는 없어서 약칭이 필요했던 것이다.
⑤ 요동요서의 표현은 바로 국경 즉 전역(戰域)의 표시인 것이다.
요동에는 조선족의 국가가 요서에는 지나족(한부족)의 국가가 있어 대치되었으므로 자주 거론이 되었던 것이다.

< 왜 遼東, 遼西가 혼돈되었는가 ? >

요(遼)나라가 907년부터 1124년까지 존재하면서 요동을 기록함에 있어 요동과 9세기 이전 요동기록에서 요동(遼東) 시발점에 대한 혼돈을 촉발 시켰던 것이다.

요나라 상경도 상경임황부(上京道 上京臨潢府)는 한나라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의 땅에 있었으니 요나라는 요동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동경부(東京府)는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서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나라의 동쪽이라하고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그래서 요동반도라는 지역명칭이 생긴 것이다.
(고구리의 땅일 때는 남옥저의 명칭이었다)

요(遼)나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요나라 이전의 요동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요나라 동쪽인 요동으로 9세기 이전 역사에서 요동으로 표현하게 되니 10세기 이후 요동과 혼돈하게 되였고 지금은 遼나라 이전의 요동 요서와 遼나라 이후의 요동을 거듭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시작은 907년 요나라 건국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요동은 산서성 요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였다.

< 산서성 요(遼 : 좌권)를 중심으로 동쪽에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은 지명들 >

< 요(遼:左權)의 동쪽 >

광영(광녕) 독산성 석문 은산 밀운 북평 양향 탁 역 고안 안차 용성 신성 신농 수성 창주 신해 안평 청하 평원 은 황산 대산(대산) 동명 연주 운주 사수 치주 청주 제성 내주 용도(북평:용도) 고대인성( 주구점) 귀덕 서화 항성 몽성 해 풍 우 서 영국 선성 함산 독산 회영
(廣靈(廣 ) 獨山城 石門 銀山 密雲 北平 良鄕   易 固安 安次 容城 新城 新農 遂城 滄州 新海 安平 淸河 平原 恩 黃山 岱山(大山) 東明  州  州 泗水 淄州 靑州 諸城 萊州) 甬道(北平:龍道) 古代人城( 주구점) 歸德 西華 項城 蒙城 海 豊 虞 徐 寧國 宣城 含山 獨山 懷寧 )

< 요의 중심과 서쪽 >

숭산 진성 고평 여성 태원 요 남 운중 안문 대 삭 음산 오대산
특히 안평의 서쪽(서안평)에 찬황이 있다.
(崇山 晉城 高平 黎城 太原 遼 嵐 雲中 雁門 代 朔 陰山 五臺山
특히 안평의 서쪽(西安平)에 贊皇이 있다.)

 

< 마치면서 >

오재성 선생님의 요동, 요서를 되도록 이면 쉽게 풀어본다는 것이 겨우 지도 몇 개와 한자에 국문 토다는 정도에 불과 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역시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제지식이 너무 모자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에 올라오는 모든 내용들이
더 쉽고 한번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그런 쉬운 역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송준희 드림 >

      <출처: 우리역사의 비밀>

 

 

*본래 료동·료서(遼東·遼西)의 경계는 위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산서성 동부의 하북성 접경지역인 '료(遼)'입니다. 현재는 '좌권(左權)'이라 불리는 곳이지요. 따라서 진짜 료동 지역은 [하북성 북부 ~ 압록강(현재의 료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결코 현재 료동반도라 부르는 자그마한 지역이 아닙니다.

한편 료하(遼河)는, 현재 북경 바로 동쪽을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인 '란하(?河)'입니다. 따라서 료하는 료동 지역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인 것이죠.

 

 

**요동(遼東)은 漢에 이르러 다시 또 그 자리를 동쪽으로 넓혀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만(滿)이 동쪽 가장자리로 삼았던 조하(潮河)는 조백하(潮白河)나 조수(朝水)나 조수(潮水) 또는 조하(朝河)라고 불려진 우리말 아사물(阿斯河아사하)을 소리값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요동왕 한광(遼東王 韓廣)이 있던 무종(無終)도 우리말로 <닿는 데가 없다>는 말을 그대로 글로 쓴 것이니 無終도 패수(浿水)였던 백하(白河)의 기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항우(項羽)가 장도(臧茶)를 연왕(燕王)으로 삼자 그곳에서 王으로 있던 한광(韓廣)은 요동왕(遼東王)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가 장도(臧茶)에게 죽었다 이 때 한광(韓廣)은 하북성(河北省) 계현(薊縣)의 무종(無終)에서 遼東을 다스렸다 하니 이 무렵 遼東은 계현(薊縣)이 있는 곳까지 슬그머니 넓어진 것이다 漢은 영정하 아라내와 만나는 패수(浿水)와 그 위쪽인 조하(潮河) 어림의 패수(沛水) 기슭에 걸친 고장을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朝鮮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어설프게 내밀었던 손을 쓸 수조차 없게 다쳤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패수(浿水) 서쪽의 옛 燕의 요동새(遼東塞)로 되돌아간 다음 남겨진 그곳을 한 때 노관의 연(燕)에게 내어주면서 지키도록 하니 그는 다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훗날 高句麗가 요수(遼水)였던 오늘날 영정하(永定河)를 바탕으로 요서(遼西)라고 불렀던 하북(河北)과 산서(山西) 언저리를 <삼국사기>에서도 잘 알고 따로 한요동(漢遼東)과 요동(遼東)으로 틀림없이 나누어 적어 놓았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서>나 <후한서>에도 요동군(遼東郡)은 하북성(河北省) 유주(幽州)에 들어있다 거두고 있던 현(縣)으로서는 거용(居庸)과 양평(襄平)과 지금의 신성진(新城鎭)인 신창(新昌) 그리고 서안평(西安平)과 번한(番汗)을 비롯하여 요대(遼隊)가 보이는데 모두가 다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에 있다

참으로 요동이라는 땅이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의 글쟁이들에게서 속은 것을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진(秦)의 호해(胡亥)가 동쪽으로 나들이를 하여 갈석(碣石)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회계(會稽)에 이르렀다>고 그들은 뚜렷하게 말하고 있다 이 때 시황제가 세워 놓은 새김돌(刻石각석)에 아랫사람들이 제 이름만 새기고 진시황의 이름을 빼먹어 그는 크게 노여워 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가 다시 새김글을 고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일을 그들은 글속에서 <요동을 갔다 왔다>라고 썼는데 이것을 보고 <갈석이 난하에 있으며 그곳이 바로 요동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보아도 진시황이 동쪽으로 나들이하면서 새김돌을 세운 곳은 자부산과 성산을 거쳐 낭야와 회계로 가는 길목이었고 이 무렵 난하(灤河)의 갈석(碣石)은 모두가 배달의 땅이었으니 그 뒤를 이은 호해(胡亥)도 이곳을 단 한발짝도 다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해(胡亥)가 밟은 갈석(碣石)은 누르매(黃河)의 下流에서 회계(會稽) 사이에 있어야 한다

이때의 요동(遼東)은 진나라의 나라터에서 동쪽으로 머나먼 곳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니 갈석(碣石)도 난하(灤河)의 갈석(碣石)이 아닌 산동반도(山東半島) 북쪽 바닷가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말하였다 나중에 한무제(漢武帝)가 동쪽으로 바라 보았다는 곳도 북위(北魏) 때 그림에는 똑똑하게 누르매(黃河) 어귀로 그려져있다 이것으로 보아 무제(武帝)조차 그 때까지도 난하(灤河)에 이르지 못하였고 바다를 따라 가장 북쪽은 누르매 어귀를 넘지 못하였던 것이다


 

***송나라때 만들어진 우적도는 화이도를 본딴 것으로 제작 연대가 8,9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분명히 요가 나오는데 9세기 전후로까지 중원의 태행산맥 너머를 요동으로 보는 시각은 진이후 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구려영역의 재조명 필요

 

삼국사기 - 모본왕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태행산맥을 따라 있는 국경지역을 한나라가 침범하니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응징 태원까지 쳐들어 간 것이다. 여기서의 북평은 현재의 북경이 아니라 태행산맥 아래 부평을 북평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북쪽 경계선이 결코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북경 영역을 북평으로 인식한 것은 명이후에나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현재 연은 발해까지 확대되어 고조선은 중원을 결코 쳐다 보지 못하는 것 처럼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잘못된 식민 역사를 받아 왔는지 확연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

중앙일보ㅣ2007.07.31 05:08 입력 / 2007.07.31 05:56 수정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동북공정·임나일본부 등 동북아시아의 ‘뜨거운 감자’인 ‘역사 전쟁’을 풀기 위한 한국 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잇따라 결실을 거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 측이 입맛에 따라 내놓는 ‘일방적’ 주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 쪽에선 사료적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역사서에 남은 기록보다 더 객관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펴낸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전7권)과 2003년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펴낸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동이(東夷) 사료』(전4권) 등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東亞三國關係史料全輯)』(전5권·이하 『사료전집』)이 중국 옌볜(延邊)대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육사(二十六史)』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 등에 실린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수록했다. 무엇보다 기존 자료집보다 수록된 자료가 방대하다.

이번 『사료전집』이 다루는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는 요순시대부터 1912년까지다. 옌볜대·지린대·랴오닝대 등 9개 단체의 중국측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99년 시작해 올해까지 8년이 걸렸다. 총 7500쪽 분량이며, CD롬으로도 제작했다. 남겨진 숙제는 역주(譯注) 작업이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 역사책을 저본으로 옌볜대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제작 전 과정을 한국 관계자들이 책임졌다. 후암미래연구소장이자 한국불교신문 사장인 차길진(60·사진)씨가 기획·출간 등을 총괄했다. 제작비 5억여원은 이재욱 한국노키아 명예회장이 후원했다.

중국 역사서에서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만든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 』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을 새롭게 밝혀낼지 주목된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시안의 대상(실크로드를 오가던 낙타 상인 집단) 조각.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도 시안 일대에서 활약했다.[중앙포토]
차 소장은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인다 해도 앞으론 이런 일을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북공정 여파로 최근 중국 측의 견제가 심해져 사료를 수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570여 만여 자의 한자를 CD로 만드는 작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 소장은 “이번 『사료전집』의 목차를 후암미래연구소 홈페이지(www.hooam.com)를 통해 공개해, 원하는 이들에게 복사비만 받고 내용을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민덕식 교육연구관은 “학자 개개인이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혼자서 다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바로 선택해 볼 수 있게 한 이 같은 사료집의 편찬은 중요한 작업”이라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이들 사료집을 통해 새롭게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배영대 기자

 

 

 

[역사 발굴]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퍉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탏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흲)이다(夷者흲也).”

여기서 이(夷)를 저(흲)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흲)란 과연 무엇인가. 저(흲)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흲)’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흲)·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흲)의 의미를 다시 저지(흲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흲地)의 저(흲)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흲)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퍉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퍉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퍉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19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끝)

 

글: 심백강 역사학자·민족문화연구원장 shimbg2001@hanmail.net
발행일: 2004 년 02 월 01 일 (통권 533 호)
쪽수: 358 ~ 368 쪽

 

 

 

누가 단군조선을 신화라 말하는가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끝)

 

< 안영배 기자 > ojong@donga.com
발행일 : 2002 년 08 월 29 일 (349 호)
쪽수 : 66 ~ 67 쪽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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