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신라

[스크랩] 남북국시대를 연 발해와 신라의 실체

monocrop 2013. 4. 2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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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의 /역사/면에 있는 [FㅗU-_-CㅗK 탐원공정, 쥐나 짱골라의 허구적 망상]을

/나의 이야기/면에 있는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χλ㎯㎯㏆γχ 심심타파용 게시물 목록들 λ㎯㎯㏆γ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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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유비, 조조, 손권이 영웅들로 묘사 되었지만 중국의 三國時代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단지 한 단락 정도만 차지하는 아주 보잘 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 한번 정도 등장하는 어느 왕조의 창업자들도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만큼 국가를 창업 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 소설의 영향으로 과대 평가되어 영웅시 된 삼국시대의 호걸들 ]  

 

그런데 일국을 창업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별처럼 역사에 등장한 국가들 중 역사에 길이 남을 제국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사라지느냐는 창업자를 승계한 똑똑한 통치자가 나와야 가능한 일 입니다.  앞에 예를 든 유비, 조조, 손권의 경우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 그들이 만든 왕국은 결국 단명의 왕조로 막을 내립니다.

 

[ 소설과 달리 삼국시대는 중국사에서 보잘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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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정사(역사서)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소설)의 허구... 클릭참조>>

 

 

@흉노제국 (1120만km²) & 한나라 (370만km²)

기원전후의 흉노의 활동영역(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262쪽 재구성).

 

漢나라의 시조인 유방 劉邦 은 백등산에서 희대의 영웅 '묵특 선우'에게 패하여 신속관계를 맺고 목숨을 겨우 보존합니다.

지금도 漢族들이 자기 조상들이 창업하였던 왕조 중 최고로 강력하다고 주장하는 漢도 실은 대대로 흉노에게 공주를 받치고 조공을 상납하여야 살아 갈 수 있었던 속국이었습니다. 약간의 길항이 있었지만 한족 최고라 자부하는 漢나라는 흉노에게 굴종을 하면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사나 전설이 아닌 한족이 쓴 正史 중 최고이며 모범이라 받드는 史記 에 나오는 가감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漢族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흉노에 구걸하며 만리장성안의 영토만 지키기에 급급하였던 명백한 과거가 있음에도 漢을 세상의 중심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사왜곡에 일가견이 있는 무서운 사고방식입니다.

 

흉노는 전성기에 오환ㆍ선비ㆍ서역ㆍ위수(渭水)를 비롯 중원 북부지역ㆍ티베트 등을 점령하여 漢나라보다 3배나 큰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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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방송 : 2008. 11. 2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글 : 정종숙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추적’
그 첫 번째 시간!

<문무왕릉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신라의 시조인 성한왕은 누구인가?
투후는 누구인가?
과연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 비문 속에 숨어있다.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1.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그리고 투후(?侯)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인물 성한왕. 그리고 문무왕릉 비문에 등장하는 또 다른 글자 <투후>와 <15대조 성한왕>은 비문의 주인공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인가?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묘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무위시 김일제 석상


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일까?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적석목곽분
비문이 던지는 암호들. 그 화두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따라 가는 역사적 ‘진실’의 추적! 미스터리 여행은 2편에서도 계속된다.


- 제2편 ‘왜 흉노의 후손이라고 밝혔나?
몰락한 흉노의 자손임을 내세운 신라 김씨 왕족. 북방의 오랑캐 족으로만 여겼던 ‘흉노족’의 후예들이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대제국을 세웠던 흉노의 후예들, 그들은 왜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 역사적 흔적들을 찾아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제2편은 29일(토) 밤 8시 10분에 방송됩니다!

 

 

[제2회]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방송 : 2008. 11. 29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창범 PD
▣글 : 정종숙

‘역사추적’그 두 번째 시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

비문 속 주인공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과연 존재했는가?
흉노족은 정말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는가?
과연 수수께끼 같은 문무왕 비문의 비밀은 풀릴 것인가?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성한왕은 누구인가?
 
▲대능원


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동복


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존재했는가?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4.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그렇다면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화천


5. 성한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해동비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한사군의 위치 (백산학보 61호 수록 논문)

 

 

임둔 고조선의 위치   

MBC TV / 2002년 4월 22일 오전 7시 40분 
 
"고조선 중국내륙에"

 

앵커: 고조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학설이 제기됐습니다.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중국 요서 지방에서 출토됐습니다. 김성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 4군은 지금의 평양의 낙랑, 오른쪽에 임둔 , 오른쪽에 진번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함경도에 현도가 위치했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기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습니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복리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입니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혀준다고 복 연구원은 말합니다. 임둔 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한 4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의 상고사인 고조선이 만주지역으로 비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만주지역으로 비정이 된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 상고사 전체의 틀이 한번 바뀔 수 있는 거죠.

 

기자: 이번 연구결과로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위치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던 평양지역의 낙랑유물 유적부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김성우입니다. 

 

 

 

 

[과학] 빙하기 바이칼에 한민족이 살았나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2-08-27 17:44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 내 올혼섬에서 바라본 호수와 불한 바위. 기후가 건조해 섬의 대부분이 초원이고 소를 방목한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한민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해답을 한반도 내에서만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북방 아시아인과 언어 문화 뿐 아니라 생김새와 유전적 특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면 국경은 물론 학문 간 장벽을 뛰어넘는 종합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 첫 시도로 우리나라의 유전학자, 의사, 지질학자, 고고학자, 민속학자 22명과 러시아 학자 4명이 8월 5일부터 8일까지 러시아 이르쿠츠크대에서 ‘동아시아 민족의 뿌리’를 주제로 세미나를 갖고 시베리아의 성소로 추앙되는 바이칼호를 답사했다. 동아사이언스는 서울대 내분비대사영양연구소,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 이르쿠츠크대가 공동 주최하고 (주)미토콘과 (주)SIS가 후원한 이 행사를 단독 동행 취재해 보도한다.》

해외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거리에서 한국인을 한눈에 쉽게 알아보고 아는 척 한다. 그러나 비행기로 4시간 거리나 떨어진 바이칼호에서 맞부딪친 시베리아 원주민이 한국인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똑같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 아시아인은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가지고 있다. 또 얼굴이 평평하며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늘다. 이런 생김새는 동상과 찬바람을 견디고, 흰 눈 속에서 지내는데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의대 이홍규 교수는 이런 북 아시아인의 체질이 빙기 때 시베리아에서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이번 행사를 조직한 이 교수는 20년 전 북방과 남방 아시아인의 당뇨병 유전자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 뒤부터 한민족의 기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추위에 적응된 체질이 형성되려면, 오랜 기간 고립된 지역에서 살았어야 한다”며 “2만5000년 전쯤 시베리아에 매우 혹독한 빙기가 닥쳤을 때 바이칼호는 아시아인들의 선조에게 오아시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당뇨병 전문가인 이 교수로서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한 문제이다. 생활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추위를 모르고, 영양도 과잉 상태다. 이런 급속한 환경 변화와 체질의 부조화가 비만과 당뇨를 일으키는 것. 이 교수는 “실제로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 미국의 피마 인디언은 거의 모든 성인이 비만 상태이고, 절반은 당뇨병에 걸린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를 포함한 전세계 유전학자들은 80년대 말 세계 주요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를 토대로 등장한 ‘아프리카 인류 기원설’을 신봉한다. 흔히 ‘분자 시계’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엄마가 딸에게만 물려주고 돌연변이가 빨라 조상을 추적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에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15만년 전 쯤. 이어 5∼7만년전 쯤 중동지역으로 진출해 빠른 속도로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로 퍼졌다.

이런 흐름에 비추어 국내 유전학자들은 한국인의 원류가 된 북 아시아인이 마지막 빙기인 5만년 전부터 1만2000년 전까지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교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북 아시아인의 체질을 갖고 있지만,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 등도 일부가 섞여 크게 4개의 유전학적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며 “이는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을 4종류로 구분한 것과도 일맥상통해 유전자 검사를 통한 사상체질의 진단법을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단국대 김욱 교수(유전학)도 북 아시아인이 한민족의 주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남방계 혈통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김 교수는 한국, 일본, 몽골, 중국, 태국 등 아시아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1만6500개의 DNA 가운데 CCCCCTCTA라는 9개의 글자가 빠진 특이 유전자를 가진 비율이 한국인은 16%, 일본인 14%, 중국인 13%였다. 반면 몽골인은 4%, 베트남인은 23%, 필리핀인은 30%여서 북쪽으로 갈수록 낮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높았다. 김 교수는 “이 결과를 통해 한민족의 형성과정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무덤 계곡’이란 지명이 있을 정도로 많은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석기를 연구한 목포대 이헌종 교수(고고학)는 “2만5000년 전부터 날씨가 추워지면서 정교한 세형돌날 문화가 시베리아에서 발원해 한반도로 확산된 것은 빙기와 인구 이동의 연관성을 엿보게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고고학의 권위자인 이르쿠츠크대 게르만 메드베데프 교수는 “빙기였던 1만7000년∼1만9000년 전 바이칼호 인근의 시베리아가 사막화되자 더 좋은 기후를 찾아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에 인구가 밀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홍규 교수는 “국내 구석기 유적에서 나온 뼈에서 DNA를 추출해 시베리아 원주민이나 인골의 DNA와 비교하면 한민족의 이동경로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 특유의 질병 패턴을 찾는 연구에 정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칼호 독특한 생태계▼

흔히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호는 넓이는 세계 7번째지만, 담수량을 기준으로 볼 때는 세계 최대의 호수이다. 최대 수심 1642m인 이 호수에는 전세계 민물의 5분의 1이 담겨 있다.

초승달처럼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는 길이 640km, 평균 너비는 48km로,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이나 된다. 호수의 최대 투명도는 42m. 여기까지 물밑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맑아 그냥 마셔도 될 정도다. 주변의 숲과 초원에서 365개의 강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 북극해와 연결된 앙가라강 뿐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김주용 박사는 “바이칼호는 3000만년 전부터 호수 북쪽의 땅은 융기하고 남쪽은 벌어지면서 단층 운동에 의해 형성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바이칼호 주변에서는 매년 3천번 이상 지진이 일어난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지질학자 구엔나디 우핌체프 박사는 “지금도 호수 주변은 1년에 1㎝씩 융기하고 호수는 매년 2㎝씩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칼호에는 2500종의 동식물이 산다. 이 중 상당수가 바이칼호에만 사는 고유종이다. 세계 유일의 민물 바다표범을 비롯해 철갑상어, 오물, 하리우스 등 어종이 이곳의 명물이다. 이처럼 생물 다양성이 높은 것은 바이칼이 생성된 지 오래된 호수이고, 일반적인 호수와 수심 깊은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자체 정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호수 주변에는 온천이 많다. 90년 미소 합동조사단은 잠수함을 타고 수심 420m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하기도 했다.맑은 물, 높은 생물 다양성, 많은 온천은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초기 아시아인에게 좋은 안식처가 됐을 것이다.

브리야트족의 샤먼 발렌틴.
▼바이칼호 주변 부리야트족▼

시베리아에는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이 있다.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은 이 중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바이칼호 주변에서 자치공화국을 이뤄 살고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아 관심거리이다.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돼 부리야트족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스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다.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답사단은 이르쿠츠크시를 떠나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의 올혼섬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10시간 동안 달리면서 우리는 길가에서 오색 천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을 수없이 만났다. 배재대 이길주 교수(러시아학)는 “샤머니즘의 상징인 이 말뚝은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똑같다”며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이르쿠츠크에서 여행사를 하는 정정길씨는 “부리야트족도 우리처럼 천한 이름을 지어줘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고 귀띔한다.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는 것.

마침내 석양이 바이칼을 온통 붉게 물들일 무렵 우리는 올혼섬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서 부리야트족의 샤먼 발렌틴을 만났다. 그는 검푸른 호숫가의 신목() 아래서 바이칼의 신 불한(칸)을 부르는 굿판을 벌였다.

바이칼을 찾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부르는 샤먼의 북소리와 애잔한 노래 가락은 우리 정서와 금세 공명을 일으킨다. 함께 따라서 추는 춤은 강강술래 같다.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모습이 닮아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3차례 바이칼을 답사한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은 “스탈린 시대 때 많은 브리야트족 샤먼이 처형당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바이칼호에는 다시 샤머니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알타이산맥서 한민족 흔적 찾는다…시베리아 고고학의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3-07-15 18:11

 

《시베리아의 알타이산맥은 한민족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동쪽으로는 몽골과 만주를 잇는 초원길에 있는 이 산악지방은 수만 년 동안 많은 유목민의 피난처이자 동서 문화의 교차로가 된 곳이다. 동아사이언스 취재진은 지난해 여름 바이칼호 탐사에 이어 올해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정신세계사의 후원으로 고고학자인 목포대 이헌종 교수 등과 함께 ‘한민족의 기원’을 찾아 알타이산맥을 답사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볼 수 있었던 한민족의 시베리아 기원설 흔적을 소개한다.》

흰눈으로 모자를 쓴 듯한 4000m 이상의 산봉우리와 빙하. 수정처럼 맑은 물과 코발트빛 호수. 난공불락의 절벽 사이로 흐르는 급류. 햇빛조차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울창한 삼림. 풍부한 날짐승과 약초. 활주로처럼 펼쳐지는 고원 분지의 초원.

알타이고원에 오면 이곳이 ‘아시아의 진주’란 말이 실감난다. 이 산맥은 러시아에서 시작해 중국, 카자흐스탄, 몽골의 국경지대를 따라 2000km에 걸쳐 남동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 산악지대는 ‘시베리아 고고학의 보고’로도 유명하다. 5만년 전 이곳에 현생인류가 정착한 뒤 만든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 다양한 도구와 함께 암각화, 고분, 미라, 매머드 뼈, 동굴 유적, 유골이 수없이 발굴됐다. 또 50만년 전 구인류의 석기도 나오고 있다.

서울에서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까지 비행기로 5시간. 다시 버스로 10시간을 달려 취재진은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고고학연구소의 데니소바 발굴 캠프에 도착했다.

발굴 책임자 아나톨리 데레비안코 소장은 “이곳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먼저 현생인류가 정착한 곳”이라며 “산악지대에 유난히 석회암 동굴이 많아 빙하기에도 안식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해발 1000m의 고원지대 초원에 있는 알타이자치공화국 멘드로사콘 마을로 향했다. 서울에서 5000km나 떨어진 여기에서 낯익은 닮은 꼴 얼굴을 보니 반갑기만 하다.

여기서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투르계 알타이어를 배운다. 놀랍게도 이곳 말로 ‘믈’은 우리말로 물이다. ‘아빠’는 아버지, ‘마늴’은 말, ‘말’은 말()이다. 투르크어, 몽골어, 만주퉁구스어를 비롯해 한국어와 일본어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게 실감난다. 흰 천을 매달고 제사를 지내는 성소도 우리의 서낭당과 빼닮았다.

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지리크 무덤은 한국 문화와의 관련성으로 주목을 받는 곳이다.

무덤 발굴을 참관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고고학)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타이 유적인 파지리크 봉토분은 적석목곽분으로 고신라의 것과 비슷하다”며 “알타이 지역에 사는 투르크계와 몽골계 원주민은 우리 민족과 사촌관계다”고 밝혔다.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해온 강원대 주채혁 교수(역사학)는 2년 전부터 한민족의 ‘알타이-사얀산맥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알타이와 그 동쪽의 사얀산맥에 살면서 순록을 키우고 숭배했던 유목민족이 만주 싱안()령 쪽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고조선의 ‘선’은 순록의 먹이인 ‘선(·이끼)’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1월에는 아메리카 인디언도 알타이-사얀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모스크바대 일리아 자하로프 교수(유전학)가 미국 학자와 함께 러시아 내 유목민족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해 ‘러시아과학원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한 것. 이 논문에 따르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2만5000년∼4만년 전 시베리아 사얀지방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알타이, 동쪽으로는 바이칼호 일대에 살다가 베링해를 건너간 투바족 등 투르크계 유목민족이다.

만일 한민족의 발상지도 알타이와 사얀지방이라면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선조가 같은 셈이다. 알타이어 문화권은 지난 2000년 동안 흉노제국, 고구려제국, 돌궐제국, 몽골제국, 금, 청, 오스만 같은 대제국을 건설해 유라시아를 동서로 연결하며 대륙의 주인 역할을 해왔을 뿐 아니라 멀리 아메리카 대륙까지 개척한 것이다.

한민족의 기원을 찾아 20차례나 북방지역을 답사한 정신세계사 정재승 편집주간은 “알타이인은 말을 타고 사얀산맥을 거쳐 바이칼호나 몽골 초원까지 일주일이면 갔고, 여기서 고구려 만주 땅까지는 다시 일주일이면 갔다”며 “불분명했던 과거의 국경과 유목민의 빠른 기동력으로 볼 때 알타이와 한반도 사이의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해발 1000m의 고원 분지에 있는 우스트칸의 동굴 유적. 바위 한 가운데 동굴이 보인다. 수십만년 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알타이=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알타이(러시아)=신동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dongho@donga.com

 

▼알타이 설화-민담▼

 

 

알타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설화와 민담 가운데는 우리 것과 원형이 같은 게 많다. 국내 최초로 알타이 민담과 설화를 모아 최근 발간한 ‘알타이 이야기(370쪽, 정신세계사)’는 이곳의 설화가 우리 이야기와 얼마나 비슷한지 보여준다.

알타이 민담인 ‘하늘로 간 별이, 즐드스’는 한 여자애가 새엄마와 언니의 구박을 받다 죽지만 환생한다는 줄거리가 ‘콩쥐팥쥐’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알타이 설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는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 부여의 시조설화인 ‘금와왕 이야기’를 합쳐놓은 것 같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탄자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이름의 노인이 개구리의 생명을 구해주고 보답으로 아내를 얻어 알타이의 후손을 넓게 퍼뜨린다는 것.

저자인 부산대 노문학과 양민종 교수는 “알타이는 ‘황금’을 의미하는 단어로 금와왕=황금 개구리왕=알타이 개구리왕=탄자왕으로도 유추해 해석할 수 있다”며 “한반도 북부지역과 알타이는 문화적 상징과 이야기의 내면에 흐르는 모티브에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터키에서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을 거쳐 몽골과 만주, 한반도로 이어지는 알타이 문화권에서 말로 전해오는 구비문학의 유사성에 주목해 자료를 수집하고 원주민을 만나 채록을 해왔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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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홍산문화 발견의 파장

제안 및 시청소감 2000-12-24 (04:07) Article Number / 2862 글쓴이 : 사학과

 
아래글의 요지는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인 배달한국,고조선분들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황하문명보다 빠른 이러한 문명의 주인공이 황하유역으로 가서 황하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인데요.
중국등의 반발을 생각해서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시는군요^^


발해북안의 신석기문화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문화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반도에서 발견 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자 모두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배달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화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요녕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약 6천년전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단계의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동북부와 산동일대, 양자강하류 유역등입니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인데, 이 북신문화는 7천년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 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 까지 합니다.


이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 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요동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B.C.6000~B.C.5000
요녕(요동,요서)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북신문화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황하문명의 주역


이하동서설은 중국의 역사학자인 '부사년'에 의해 발표된 논거로써 고대에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는 하夏족(중국민족의 모태)이, 동쪽에는 이夷족(한민족의 모태)이 분포하여 살면서 각각 황화문명을 일으켰다는 논거이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였었는데 중국에서는 부사년이 워낙 유명한 학자였고, 전통적인 중국민족의 고대사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논거가 일반화 되었었다.

(퍼온이주: '부사년'이 '하이서동설(夏夷西東說)' 이라 하지 않고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이라 한 것은 이夷의 東문화가 더 빠르고 우수하였다 하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임.)


당시 고고학적인 성과에 있어서도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을 뒷받침 해줄만한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


실제로 황하유역의 상류를 중심으로 발견된 <앙소문화>와 황하의 중하류에서 발견된 <용산문화>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화로 토기에 있어서도 서쪽의 <앙소문화>의 토기는 채색빛을 띠는 '채도'였었고, 동쪽의 <용산문화>는 회색빛을 띠는 '흑도'였었다.


이러한 현격한 문화차이를 보이는 유물들은 중국의 고대문화는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서쪽의 하족과 동쪽의 이족이 각각 일으킨 것이라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논거를 충분히 뒷받침 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거가 힘을 잃게 된 것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계속되면서 앙소문화(BC5000 -BC2000)가 용산문화(BC3000 - BC1500)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앙소문화> 상층에서 <용산문화>가 발견되어지고 나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서쪽의 <앙소문화>가 동쪽의 <용산문화>로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우세하여졌고, 중국민족의 모태가 되었던 하족에 의해서만 황하문명이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공식화 되어졌다.


중국의 동부에 분포하여 살면서 하족과 대립하였던 동이족의 활동과 문화에 대하여 나오는 중국의 고대사서보다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중요시 하게 되었고 최근에 까지도 이러한 논거가 힘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고고학적인 발굴은 계속되었고, 용산문화의 전신인 문화가 용산문화의 분포지인 요서,요동일부 산동,하북,안휘일대에서 발굴되면서부터 또다시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이 거론되어졌다.


지금까지는 서쪽의 앙소문화가 동쪽의 용산문화로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우세하였으나 앙소문화와는 다르며 용산문화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 오래된 문화를 그 일대에서 계속적으로 발굴하면서 중국의 고대사는 또다시 재평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이족의 분포는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중국의 동부일대인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안휘성과 중국동북부인 요서,요동일대이며 이는 용산문화가 발견된 지역과도 일치가 된다.


1.<북신문화>(北辛文化)는용산문화가 발견된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오래된 문화로 이 <북신문화>는 대략 BC 5000년 이상까지 소급이 되며 이는 중국의 앙소문화가 생긴 시기와도 거의 일치가 된다.


2.<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는 대략 BC4500년까지 소급이 되며, 앙소 문화와는 많은 차이점을 들수 있다.
이는 후에 <용산문화>로 대체를 하게 되는데, 대문구문화 말기인 태산 동남쪽 거현 유적에서는 원시 한자(漢字)가 질그릇에 새겨져 출현한다.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이다.
(퍼온이주: 위의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 라는 것에 대하여 '아사달 문양' 즉 '(고)조선'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인식되고 있음.)


3.홍산문화(紅山文化)는 요녕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된다.
그 존속 연대는 B.C.3500 ~ B.C.2200년으로 밝혀져 있고, 분포지역은 철리목맹(哲里木盟)의 남쪽, 적봉(赤峰)지역 및 조양(朝陽), 금주(錦州) 일대이며, 남쪽으로 하북성 북쪽지역을 포괄한다.


4.용산문화(龍山文化) - <대문구 문화>의 뒤를 이어 <용산문화>는 BC 2800 BC 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에 근거했다.
그 중심지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용산진(龍山鎭) 성자애(城子崖)유적이다.
이렇게 <용산문화>는 한민족의 모태가 되는 동이족이 세웠다는 것이 현재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공식화 되고 있으며 이 문화는 고조선을 세우는데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고대에 한민족의 역사무대는 한반도 보다는 중국의 동부인 하북,하남,산동일대와 요서,요동일대였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퍼온이주: 역설적으로 서부의 <앙소문화> 상층에서 동부의 <용산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앙소문화> 지역 즉 황하상류에서 동부의 문화인 <용산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됨.
실제로 <용산문화>와 같은 문화권인 <요동 요서>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굴되었는데 그동안 흔히 황하문명이라 일컬어지던 황하 상류 문화권 지역에서는 4200년전 청동기.
고대 우리 민족(동이東夷인)의 중심지였던 <요동 요서>의 청동기가 약 200년 빠름.
현재 중국에서 건국 시조로 받들어지는 동이인東夷人 <황제헌원씨> 의 후손들인 <요임금> <순임금> 이 원조 동이국인 동쪽으로부터 청동기 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임.) 
 

[그림 ①] 유목문화권과 농경문화권과 문명의 발생. ⓒ김운회

 

[그림 ②] 신석기ㆍ청동기 유적지 분포도(후난성 청터우산 추가). ⓒ김운회

 

[그림 ③] 즐문토기 문화권(정수일. 앞의 책, 70쪽에서 발췌). ⓒ김운회

 

[그림 ④]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122쪽). ⓒ김운회

 

[그림 ⑤] 철과 금ㆍ구리 주요 생산지. ⓒ김운회

 

 문명을 볼 때 기후 참 중요하죠. 하지만 식량에 대한 한쪽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식량쪽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의식주 전반에 관한 여러 요소가 함께 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듯이 식량증산에 따른 도구 역시 중요하거든여.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이 필요하듯 그 수단에 수반된 것도 역시 고려해야 하죠.


양자강쪽(강남)에는 광물자원과 같은 지하자원이 드물죠. 반면에 황하쪽(강북)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그에 따른 운송의 이로움과 선대 문명인 배달,조선이나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를 얻기가 쉬웠죠.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지리적인 이점이 더 많이 작용한 것이죠. 외형적으로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지 않죠. 그사람의 앞면,뒷면,옆면도 보아야 하죠. 그리고 그의 내면적인 모습까지 보려고 노력해야 보다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죠. 먹는 것에 대한 것으로 먼저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봤으면 해요. 분석만 하고 끝나면 수술한다며 배만 찢어놓은 것이랑 같죠. 종합도 함께 해야 그 수술에 대한 치료도 할 수 있는 것이죠


한민족 모두가 유목만 했던 것도 아니고 농경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한민족의 일부는 유목하고 또다른 일부는 농경을 하며 둘 다를 병행한 부류도 있었습니다. 고대의 한민족의 영토는 드넓었으며 같은 한민족이지만 각각의 지역에 맞게 생활하였을 뿐입 니다. 지금의 각 지역들을 보세요. 어느 한나라가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신경썼던 것도 아니고 관광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후진국이라 여겨도 과학이 발달한 나라도 있으며 구식과 신식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인도,쥐나,러시아,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각 지역마다 그에 맞게 생활을 영위해 갈 뿐입니다.


너무 한쪽만 보지 마세요. 지금의 쥐나를 보세요. 해안쪽과 내륙을, 도시와 시골을,부자와 서민들.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어우려져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농경을 이미 고대부터 널리 하고 있던 민족이면서도 강맹한 유목,기마민족이기도 한 민족이 바로 우리랍니다. 한민족의 수많은 지류 중 어느 하나만 보고 그 지류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지류들을 하나하나가 모여 적용될 때야 한민족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한 부여와 고구려는 대표적 반목반농 국가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후예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는 배달과 조선을 이어받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유목이나 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청동기 문화의 실존근거를 홍산문명의 발굴로, 홍산문명의 고조선이나 동이와의 연관 성을 묘실문화의 유사성으로 서술하고 있죠. 그리고 청동기 문명의 원조로 공인된 것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쪽에서이고, 유목민족의 이동성이라는 특성때문에 청동기 문명은 '초원길' 즉, 지금의 고비사막북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사이에서 서로는 카스피해와 소아시아 헝가리지방 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스텝기후지역인 대초원을 따라 유목민들끼리의 교류로서 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세계사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구요..그래서 특히 동북아 고대에는 유목민족=청동기문 명, 농경민족=신석기문명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농경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패러독스에서 벗어나 고대에는 유목민족의 문명적 우위성과 특성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논조의 책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부터 서흉노의 갈래인 훈족, 대제국의 몽골족등을 가장 중심 예로 들면서 말이지요


빙하기는 기원전 50 ~ 42세기까지 엄청난 강우량증가시기를 겪고 다시 기원전 42 ~ 33 세기까지 감소를 보이다가 기원전 24세기에 증가를 보여 건조한 사막지대까지 소택지화가 진행된다 합니다..... 만주의 경우도 별반 다름이 없어 지금처럼 건조한 상태가 아닌 조금 기온이 높은 다습한 곳이었지요.....그러므로 산해경의 곳곳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대나무 생장의 기록이 보여집니다.....대나무는 후에 없어진 것이지요......


숙신의 화살인 <호시>도 그걸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하지만 홍산요하문명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 상나라와 주나라시대에 나타나게 되는 죽간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런 지역에서 잘 자라고 있던 나무를 써서 껍질이 있는쪽을 얇고 반듯하게 베어내면 큰 손톱 모양의 단면을 가진 한쪽은 둥글고 한쪽이 평평한 가벼운 나무판이 됩니다......거기에 불로 지져서 녹도문을 새겼을 것입니다......단순한 뜻새김부호가 많았겠지요.......


목간이라고도 볼수 있겠지만 아직은 조금 그렇네요.....이것이 서토(중원대륙)로 들어가 죽간도 되고 갑골문으로도 달라지며 또 불에 지져 뜻을 아는 걸 본받아 갑골점을 쳤을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소부리씨는 오래 전부터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하여 뼈점을 쳐왔지요.....상(은조선)나라에서도 거북의 등껍질을 쓰기에 앞서 소부리씨(예맥족)와 같은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중세고려에 들어서면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재질의 종이라 만주와 몽골, 중원대륙 등 아시아 전지역에서 닥나무종이가 최고의 상품으로 떠올랐죠. 그래서 근세조선의 닥나무종이 한지가 유명해진 것이죠.
타림분지塔爾木盆地(탑리목분지)는 David.H.Childress의 <중국..중앙아시아..인도의 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글에서도 기원전 3415년까지 민물호수로서 이루어졌으며 이 커다란 호숫가 근처에 이 곳으로부터 나온 타림강과 여러 시내들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이때 기름진 들로서 호수의 기슭에 있었는데 곤륜산맥이 타림호의 남쪽 언저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자연환경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왔고 변해갈 것입니다. 특히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홍수가 일어나던 때가 기원전 24세기입니다. 이 당시의 홍수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동,동아시아 등 전세계적인 홍수기였죠


홍산요하문명의 한웅배달국은 지금의 미국이 50개의 나라인 여러 주들이 뭉친 연방국가처럼 크게 아홉나라의 연방국가였죠. 물론 한웅배달국의 후예인 단군조선국 역시 여러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국가였습니 다. 한웅배달국의 연방제후국 중 하나였던 수메르(수밀이)는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 서양에서 노아의 방주로 일컬어지는 전세계적 기상이변인 홍수에 의해서였습니다. 물론 그 지역마다 홍수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것은 정사로 또 어느 것은 신화, 종교서적(성경) 등등의 방식으로... 이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으로 수메르는 무너진 겁니다. 그 뒤 백인민족인 아카드족에게 혼혈정책을 강요당하고 중동을 지배한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죠. 중원대륙에 있던 한민족연방국가들 그것도 상(은조선)나라 이전의 요,순 임금시대나 하왕조를 비롯 여러 우리 제후들이 홍수의 범람을 막으려고 한웅배달과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고 받은 기록도 있죠.  그래서 그들은 치수법을 배워 범람하는 홍수로 인한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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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요하문명을 이룬 한웅배달국의 주역은 지금의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들 조상인 배달겨레가 이루어낸 고대문명입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세웠을 때 한웅배달이전 한민족의 시조 환국을 재현한다는 뜻에서 제후국의 이름을 차카타이 한국, 오고타이 한국, 킵착 한국, 일 한국 등으로 붙인지도 모르죠.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주: 단군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입니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칸(KAN)이 서구의 킹(KING)이란 단어로 변화되어 자리잡는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 서량지(徐亮之) : 대만대학 교수>>>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동이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고 하였으며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고 하였다


▒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중국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등 지방은 본래 "묘족(동이)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고 주장하고 있다


▒ 임혜상(林惠詳) : 중국 역사학자>>>임혜상(林惠詳)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의 사람이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임금은 은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하였다
은나라가 망한 뒤 기자(其子)가 동쪽 조선으로 달아난 것은 조선 역시 은민족의 소거지(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퍼온이 주: 은민족은 (고)조선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고 하였다


▒ 시로코고르프 : 소련 역사학자>>>소련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 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강의 가운데 의 동쪽)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 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놈들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노력조차도 안 해 놓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부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홍산요하문명을 이룬 한웅배달국의 신시에서 나와 중원대륙의 산동성,하남성을 경유한 배달겨레 복희씨는 하남성의 진陳에 터전을 잡게 되죠. 이때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겨레 비치수리씨(화서華胥부족)들은 새부리(산동성)의 지 마울(제음濟陰)지역에 살림터를 마련하여 크게 일어나게 되고,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겨레 누에검씨(뇌신雷神부족)들 역시 산동성지역에 자리를 잡 게 됩니다. 이 누에검씨들은 일찍이 산뽕나무 잎을 먹고 아름다우면서도 고운 실을 뽑아내는 천 잠天蠶(하늘누에)을 잘 다루었는데 복희씨를 따라 가는 중 산동성을 터전으로 잡게 되어 이 산동지 역은 산뽕나무 누에비단실을 만들어내는 누에치기가 성행하게 되죠. 배달겨레 복희씨는 대략 기원전 3528~3413년경의 사람으로서 음양오행의 환역법桓易法을 갑자甲子로 시작하는 복희팔괘를 창안하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습니다


참고로 환역(桓易)이란 홍산요하문명과 양주장강문명을 이룩한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 시대로부터 전래된 철학으로서 세 상만물의 구성과 그들 사이의 운행이치를 밝힌것이죠. 훗날 복희가 한웅배달국의 환역을 이용하여 新易을 창안하니 이를 희역(羲易)이라 하며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들인 하(夏)나라 때는 연산역(連山易)으로, 상(은殷조선)나라 때는 귀장역(歸藏易)으로 그리고 주(周)나라때는 문왕과 그 아들 주공이 이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풀이를 해 놓은 주역(周易)으로 변모되어 전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것은 한웅배달국시대의 자부선생이란분이 삼청궁에서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을 강연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록으로 본다면 환역의 역사는 단군조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듯 합니다. 환역의 그당시 모습은 알길이 없으나 윷놀이를 가지고 강연하였다 하므로 그것을 단서로 삼아 추론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한민족의 갈래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사서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옛날부터 쥐나족들은 북으로는 황하의 위쪽과 동으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의 도읍이 장안과 낙양을 벗어나지 못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황하를 경계로 한 하남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시기 북경을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땅은 배달겨레의 것이었으며 황하 위쪽은 짱골라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서쪽은 서융과 백이 동쪽은 북융과 산융이라는 융적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동으로 순행할때도 그렇고 초한의 싸움도 어디에서 주로 일어났는지 보시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참고로 서융,북융,산융 등으로 불리는 융족은 사실 배달겨레의 한 갈래입니다. 서융만 해도 한웅배달국 초기에 배달겨레 반고가 가서 세운 배달제후국의 사람들입니다. 백이의 이夷는 배달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니 말 안해도 우리 민족이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한웅배달국 갈래왕조입니다. 진나라는 배달 서융계 국가입니다. 배달겨레는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으로 시대를 변천해가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 어지는데 북쪽은 흉노로 서쪽은 융족 등으로 동쪽은 동이로 중원대륙에는 회이, 견이, 풍이 등 여러 배달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배달겨레 말할 때 구환九桓,구이九夷 등으로 불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흉노는 돌궐,선비,몽골,거란,오환,저족 등으로 갈라지죠. 융족은 이후에 강(티벳)족과 흉노의 갈래들인 달단(타타르),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 들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동이족 역시 예족,맥족,환족과 숙신,말갈(여진)족 등으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변천을 겪습니다. 서흉노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아틸라의 훈제국 천하를 이루어내죠. 아틸라의 죽음 이후로 그들은 지금의 헝가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북위, 북연, 수나라와 당나라 등 여러 나라를 세우고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죠.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우고 몽골족은 원나라를 일으키죠.
우리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을 세우죠.
돌궐(투르크)은 아랍으로 건너가 셀주크투르크와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이룩하죠.
 

쥐나 짱골라들의 왕조는 기껏해야 한,송,명 3왕조 뿐이죠. 그 외의 대부분 왕조들은 홍산요하문명과 양주장강문명을 이룩했던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제후국 또는 갈래왕조 국가들입니다.


게르만족이 서고트족,동고트족,반달족,알란족,주트족,색슨족,앵글족 등으로 나누어졌었죠. 배달 흉노계 훈족(서흉노)의 유럽침입으로 이들 게르만족계열이 로마(이탈리아), 브리티니아 (영국),갈리아(프랑스),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유럽으로 이동해 퍼지죠


이 사실들에 관한 학자들의 논문도 여러 편이고, 독일의 ZDF방송국에서도 훈족에 대해 다큐방송도 있었죠. 어차피 훈족이 흉노계라 하든 투르크(서돌궐)계라 하든 어차피 배달갈래민족이죠. 배달갈래 흉노계가 나중에 선비,오환,돌궐,거란,몽골,저족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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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고 돕니다. 과거 반도신라나 근세조선 같은 어리석은 시대가 있었지만 그들 백성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위정자들이 나쁜 것이죠


백성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악용한 위정자들 이 나쁜 것입니다. 김씨,이씨,박씨,고 씨,강씨,연씨 등의 각 가문이나 혹은 만주,연해 주,경상도,전라도,함경도 등 각 지방이나 또는 각 왕조 등에는 언제나 영웅과 매국노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를 보고 나머지마저 나쁘다고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자제했으면 합니다.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쓰레기도 있고 한국동해영역을 왜놈들에게 거의 팔아먹은 김대중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는 매국노들을 비롯하여 쓰레기 정치가들이 각 지방색을 들먹여서 가뜩이나 좁은 나라의 국민들을 쪼개고 서로에게 불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죠. 우리는 절대 그들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반도내의 배달겨레가 다른 지역의 같은 배달겨레들을 배척해서 수많은 전쟁을 스스로 불러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못 하고 분열하면 지금의 한국은 아니 반도의 배달겨레는 또다시 수많은 종족으로 갈라지고 약해지겠죠. 우리는 합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통합되고 강해져야 지금의 몽골내각이 한국에 연방의 손길을 보내는 것을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를 아우르고 조선족을 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배달과 조선 역시 지금의 미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제국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끊임없이 합치고 강해져 나아가는 길입니다.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면 전쟁을 대비하라!란 말도 있죠.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기회가 와도 준비소홀로 실력이 부족하여 그 기회를 잡지 못 하겠죠. 하물며 주변4강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손 놓고 있다가 는 평화는 커녕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과거의 기상을 잃어버린 근세조선만 봐도 알수 있죠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 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 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 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 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 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죠.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 에 놓여있는 겁니다. 


혹시 헝가리나 터키의 유럽,근동 혹은 이전 타타르 등의 중앙아시아 등의 민족들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동안 꾸준히 동양의 피보다 서양의 피가 많이 보급된 하나의 결과일뿐입니다 헝가리나 터키 중앙아시 아의 여러국가들의 그 시작은 배달형제들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브라질 등을 위시한 남미에서는 같은 부모 밑에서라도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다양한 자식형제들이 태어납니다. 유럽이 중남미를 침략하는 과정 중에 워낙 많은 피가 섞여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의 가계를 보면 인디언,독일인,스페인,포르투칼,영국인 등 다양합니다. 그래서 남미에서는 같은 친형제끼리라도 피부색이 다른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는 이전에 KBS나 MBC 등의 다큐멘터리 등을 비롯하여 세계각국 유명 방송국들에서도 다룬 다큐나 뉴스,과학 등 여러 방송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번 참고해도 좋겠네요. 그리고 조선족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뒤에서 못된 짓만 꾸미는 짱골라가 나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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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리프팅된 제 문화권의 유사성

이헌종 교수의 <동북아시아 중기구석기문화 연구>에서


"시베리아 일대의 무스테리안기의 문화와 멀리 확산되어 있는 유라시아 석기문화와의 유사성을 어떤 바탕에 의해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스테리안 석기문화에 대한 기술체계의 특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문화군, 문화의 계통, 기술적 계통, 문화확산, 발전단계선 등이 지역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더욱이 중앙아시아와 몽고지역에도 확산되어 있는 무스테리안문화의 제 양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Okladnikov 1981,1986; Derevianko 1999).


결국 이 지역의 중기구석기문화는 다양한 무스테리안기의 석기문화 즉 유럽의 석기문화와 연관된 석기문화의 제양상과 거의 유사한 문화 계통, 기술적 전통 등을 갖고 일정한 발전단계를 밟았다.


그런데 이 지역의 남동쪽에 위치한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석기문화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주목된다 하겠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화가 <홍산문화>이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이다.


이 문화를 발굴함으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현재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하지역으로 밝혀져 있으며 2007년부터는 고조선의 역사가 국사에 편입되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보다도 1000년 이상이나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 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다.


한웅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B.C.6000~B.C.4000 의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된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이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된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이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한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400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 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한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크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장강 상류인 호남성 동정호의 팽두산(彭頭山)과 동이족인 묘족(苗族)과 같은 동이족인 월족(越族)이 밀집해 웅거한 장강 하류의 절강성 상해일대(양저문화)와 샤오싱(소흥)부근의 하모도(河姆渡)에 밀집되어있음을 본다.


장강 유역은 동이 구려족과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 백월족(百越族), 동이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웅거지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문헌 중에 일찍이 원시, 낙후된 미개지 땅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곤 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출현의 고고학적인 발견은 그 출현 연대가 황하유역에 비해 늦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문화발전 수준 역시 결코 북방 동이족의 황하유역보다 낮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B.C.5000∼B.C.3300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형상은 수공업 및 농업이 한결같이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동이족이 웅거한 상고시기의 장강 유역의 정황은 지나 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도 그 요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하모도 유적지를 가면 태양신의 유적지라 칭하는데 이는 역시 태호복희와 태양신으로 추앙되던 염제 신농의 농경문화 덕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망을 만든 수렵문화의 복희와 농기구를 만든 염제를 두고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금관의 나라, 신라

프레시안 / 기사입력 2005-08-30 오후 7:08:46

 

옛날, 바닷가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이 아가씨를 찾아와 결혼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아가씨, 두꺼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결혼한 바로 그 날 밤에 신랑은 두꺼비 허물을 벗고 얼굴은 해사하고 몸은 커서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두꺼비 신랑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꺼비에게 빼앗긴 동네 총각들이 두꺼비 신랑을 자꾸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동네 총각들은 두꺼비 신랑을 혼내주려고 쉬운 물고기잡이보다는 힘든 사냥내기를 해서 두꺼비 신랑의 콧대를 꺾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없는 녀석이 덩치만 컸지 무슨 사냥을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 신랑, 말에 오르자마자 활을 날려서 여우·노루·오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저렇게 날렵한 사냥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날 이후 두꺼비 신랑은 이 마을의 스타(star)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촌마을이면 흔히 나타나는 '두꺼비 신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술 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두꺼비는 북방계 사람들이 남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피부 질환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피부병이 나으니 흰 얼굴이 나타나고 체격이 크니 씩씩한 남자로 보일 수밖에요.
  
  사냥 일도 마찬가지죠. 남방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쉬운데, 그래서 남방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냥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두꺼비 신랑에게는 그것이 북방에 살 때의 본업이었죠. 그러니 쉬울 수밖에요.
  
  결국 이 같은 경로를 거쳐서 북방계 두꺼비 신랑들이 힘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진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임금들의 얼굴은 북방계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방계의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마가 높으면(북방계) 관운(官運)이 있다거나 이마가 좁으면(남방계) 부모덕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피부가 검다든가 쌍꺼풀이 있다든가 눈이 크면(남방계) 천한 관상이라고 하는 식이죠.
  
  (1)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조선의 멸망이 B. C. 108년 정도이고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건국이 B. C. 57년경(漢 宣帝 五鳳元年)으로 돼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나 고구려계의 국가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이 다소 느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직계 왕가를 주축으로 그 주류세력이 남하했다기보다는 여러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조 박혁거세라는 분도 신화(말과 알, 버드나무[楊山])로 판단해 보면 역시 외부(북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박(朴)은 '밝다[明, 또는 東]'는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혁(赫)이라는 말도 역시 '밝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한자의 뜻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이병도 박사는 거세(居世)는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으며 이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는 거슬감(居瑟邯 : 여기서 邯도 干의 뜻)의 거슬(居瑟)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와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니키시(コニキシ : 鞬吉支)의 키시(キシ)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 2001) 1쪽]. 따라서 박혁거세라는 말은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박[東 : 밝]혁[明]거세[聖王]이라는 말이지요.
  
  부지영 선생(『일본, 또 하나의 한국』저자)은 박혁거세를 '비치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당시의 한자말을 읽는 방식은 이두식으로 읽었는데 이 점은 일본편에서 이미 일부를 보셨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혁거세 역시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박(밝다) + 혁(빛) + 거세(居世)'에서 거세(居世)에서 거(居)가 일본 말로는 '이루(いる)'이므로 居는 '이'이고 世는 그대로 우리말로 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赫(빛) + 居(이) + 世(세)'로 '비치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제가 보기엔 '비치세'의 의미를 확장하여 '(세상을) 밝히세'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차이가 없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히는 임금[東明聖王]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따라서 부여계의 군주 이름과도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 역시 쥬신의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고대의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일본어의 발음과 대조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19세기 이전까지 박혁거세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2천 7백여 곳이 있었고 아직도 2천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부지영, 『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8) 75쪽].
  
  신라 초기의 국호는 서나벌(徐那伐)인데 이병도 박사는 서(徐)는 '솟다[高, 또는 上]', 나(那)는 '나라(國)', 벌(伐)은 '성(城)', 또는 도시(capital)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서나벌은 '높은 나라의 도읍', 또는 '해가 솟는 나라의 도읍(the capital of rising sun)'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의 서울(Seoul)이 나타난 것이지요. 참고로 나라[國]의 고어로 사용된 한자어는 나(那)·라(羅)·야(耶)·로(盧) 등이고 도읍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는 불(弗)·화(火)·비리(卑離)·부리(夫里) 등입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1쪽].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불[火 :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상징]을 신라는 태양[日 :히···]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는 고구려가 잘 막아내었으나 수도가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받아 고구려의 지도부가 남으로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옥저로 달아났던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그림 ①] 제 2 차 요동전쟁(고구려-위나라 전쟁)
  

 
[그림 ①]은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들, 죽령은 현재의 황초령, 미구루는 현재의 문천이라고 합니다(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하 제 35장 참고) ⓒ김운회  

  이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신라의 왕계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남하한 고구려의 장수들이나 호족 세력일까 하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2)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림 ②] 신라 천마총의 금관(왼쪽)과 백제 무령왕릉의 금관 장식(오른쪽) ⓒ김운회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그림 ③] 사르마트 금관(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황금』(276-267쪽에서 재구성) ⓒ김운회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림 ④]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쥬신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림 ⑤] 아로시등(阿魯柴登) 유물(내몽골 지역) ⓒ김운회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쥬신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그림 ⑥] 선비족[타브가치(拓跋鮮卑)]의 금관 장식 ⓒ김운회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림 ⑦] 고구려 금관(청암리 토성 금동관) ⓒ김운회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까운 고구려만 해도 금동관에 신라 금관의 특징인 곡옥이나 세움 장식이 없죠.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림 ⑧] 선비와 신라의 금관 ⓒ김운회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쥬신의 선주민(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⑨]입니다.
  
 
[그림 ⑨] 세계 금관의 총화, 신라금관 ⓒ김운회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쥬신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쥬신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쥬신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그림 ⑩] 쥬신 신앙의 상징 솟대의 모습(경복궁) ⓒ김운회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쥬신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冢)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冢)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쥬신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그림 ⑪]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91호) ⓒ김운회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림 ⑫] 휴도왕의 지배영역 ⓒ김운회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쥬신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쥬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쥬신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쥬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쥬신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참고).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제가 보기에 김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쥬신 선민족(흉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 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쥬신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저는 이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5)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쥬신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쥬신 선민족)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쥬신이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금관의 나라, 신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여명기의 신라에 대하여 개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분석 범위도 광범위하여 매우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모두 종합하고 여러분들이 보다 읽기 쉽게 요약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신라의 금(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신라의 후예(後裔)들에 의해 후일 나라 이름이 금(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후예 만주 쥬신은 금(金)이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를 만들어 두 차례나 중국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이미 본 대로,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경주 김씨로 대립하는 부족들을 화해시킴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었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고서 정착합니다. 후금은 바로 이 나라를 이은 나라지요. 금나라는 신라와의 연계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비롯한 다른 여러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금나라 태조(아골타)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의 태조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 내용은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금나라의 태조가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여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 渤海 同本一家)"라고 하고 있지요.
  
  금나라 태조의 말씀에서 금나라(금·청)가 바로 신라계와 고구려의 후예(신라·고구려 연합세력)이며 고구려 - 발해 - 금(반도에서는 고려) - 후금(청) 등으로 이어지는 쥬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금·후금)나라를 건설한 만주쥬신은 황족의 성은 경주 김씨로 반도 쥬신과는 항상 친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17세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몽골 칸국의 황실인 보르지긴 씨족도 알탄오락(黃金氏族), 즉 김씨(金氏)로 되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부여·고구려·백제 등과 마찬가지로 쥬신의 공통된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이 일부 알타이 서부 지역과 유사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조선계와 선쥬신계(흉노계)의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는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쥬신의 대륙문화에 중앙아시아·로마 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복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쥬신의 전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즉 부여는 남쪽으로-반도부여(백제)로-열도부여(일본)로 향하는 동안, 신라는 북쪽으로-만주(금)로-중국(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4회]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하였나


▣방송 : 2008. 12. 13(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글 : 손현철 PD

“신라 적선(賊船) 마흔다섯척이
대마도를 습격하였다” <부상략기 中>


일본역사서에 수차례 등장하는 신라해적.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894년 대마도를 침공한 신라해적선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역사추적이 대마도 현지 취재를 통해 신라해적의 정체를 파헤친다!

<9세기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부상략기>


894년 대마도를 침공한 45척의 배! 그들의 정체는?
894년 9월 5일. 정체불명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한다. 12일 후, 이들의 습격은 대규모 전투로 번지고 일본군의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신라가 기근이 들고 창고가 텅 비어 왕성이 불안하니, 왕이 곡물과 천을 빼앗아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배가 100척이고 배에 탄 사람이 2500명이 있다”
<부상략기 中>

한국의 역사서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 없었던
이름. 그들의 정체는 신라해적이었다.
<부상략기에 남아 있는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


신라해적이 노리는 대마도의 보물은 무엇이었나?
포로로 잡힌 현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얻고자 대마도를 습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마도는 산세가 험난해 곡식 재배가 어려운 지역. 그렇다면 신라해적은 무엇 때문에 대마도를 침공했을까?
대마도는 농경에 불리한 지형이지만 고대에는 은과 진주가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또한 삼림이 우거진 대마도는 삼나무와 같은 목재가 풍부하게 자라는 섬으로 이는 주요한 조선용 자재로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일본 조정에서는 일찍이 대마도 방위에 신경을 집중해왔었다.
<대마도 산출 은(銀)>
<삼나무 등의 목재가 풍부한 대마도의 산>


신라해적은 왜 퇴각했을까?
“화살 전쟁이 벌어졌는데 화살이 비같이 날아왔다.
적들은 모두 화살을 피해 도망쳐 돌아갔다” <부상략기 中>

45척이라는 거대한 규모로 대마도를 침공한 신라해적. 하지만 그들은 왜 그렇게 쉽게 퇴각해야했을까? 어떻게 일본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준비했을까?
신라해적들의 일본침공은 894년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869년 큐슈섬. 신라해적이 조공물을 약탈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게다가 신라해적은 일본 통 치부의 외항에 대담하게 잠입. 조공으로 바쳐진 비 단을 탈취한다. 이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인에 대 한 경계를 강화하고, 은의 산출지인 대마도 역시 예 외는 아니었다.
<활보다 살상력이 강한 장거리 공격용 무기 석궁(쇠뇌) 신라해적은 석궁의 공격을 받고 물러갔다>


대규모 신라해적단, 그 배후는 누구인가?
“모두 302명을 사살했는데 중대장 3명, 부장 12명이었고
손에 넣은 물건 중에 대장군 깃발도 있었다” <부상략기 中>

해적단이 단순한 백성이나 민초들로 구성 됐다면 대장군과 부장군 같은 계급을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 그렇다면 해적단의 배후가 당시 신라호족으로 있던 장군이나 성주가 아닐까? 아니면 현춘의 증언대로 신라 본 조정에서 직접 파견한 군대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수천명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신라해적단, 배후에 관한 진실을 <역사추적>이 찾아 나선다.


신라해적의 소멸-또 다른 시대를 열다!
9세기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신라해적. 하지만 이와 같은 해적들의 소행이 부정적 측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 사후, 신라와의 공적 교류를 중단했던 일본. 신라해적은 비정상적인 교역형태이지만 일본과 또 다른 교역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상무역과 약탈을 통해 얻은 이익을 가지고 새로운 해상세력권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후삼국 시대를 여는 견훤이나 왕건 같은 세력에게 흡수된다.
신라해적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개명을 여는 역사의 부산물이었다.
<서남해안과 당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해상호족
박영규의 근거지 마로산성>

 


신라 황룡사
저 목탑은 높이가 86m쯤으로 추정되며, 현대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달합니다.

(세계 최고의 목탑. 백제 미륵사를 지은 장인들을 초청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 [皇龍寺]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절.

 

황룡사 구층목탑

 


엠파스 백과사전 참조하여 구성.

 

<<불길 속에 사라진 황룡사 9층 목탑 클릭참조>>

 



 

신라의 수레모양 토기

  

 

 

 

 

 

 

 

 

 

 

 

 

 

<<'석굴암 √2의 비례미론'을 주장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 클릭참조>>  

 

<<다시 보는 신라 석굴암 클릭참조>>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클릭참조>>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클릭참조>>  

 

중세고려 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 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8세기 전세계 4대도시 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 이었습니다.
'우리 고구려 바로알기, 해나라 ( http://haenara.net )' 에 올린 신라 인구 관련 글입니다.



제가 글솜씨가 없어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

아래는 신라 [왕경도(왕이 사는 도시 그림)]입니다.








근세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 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
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도로는 규격별 로 나뉘어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
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근세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근세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 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근세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8세기 세계 4대 도시 - 신라 서라벌 클릭참조>>  

 

<<고구려의 국력, 로마와의 가상대결 및 고구려의 토목건축술 클릭참조>>

 

당시 일본에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가 수십장이 작성 되었습니다.
 
신라와의 무역내역을 적은 문서인데, 오사카대학의 도노 하루유키 교수의 문서 분석 결과
 
신라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5위 이상의 고위 귀족들 이라고 합니다.
 
또 이 [매신라물해]에 나타나는 물품에는 신라 물품 말고도 동남아산 향료와 약초, 중국산 비단, 페르시아산 물품까지 적혀있습니다.

즉, 세계 각지의 물품들을 신라를 통해 들여왔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본 귀족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의 상징 이 된것입니다.
 

당시 아랍쪽의 신라 관련 기록.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966년(신라가 망한 직후) -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 -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

위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는 개목걸이에도 금을 쓸 정도로 금이 풍부한 나라였고 화려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째,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째, 바다(태평양)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으로서 아주 정확하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무슬림들에게 산 좋고 물 좋고,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이상향적인 곳이었다.

중세 아랍 문헌에는 신라의 역사에 관한 기술도 있다.
 
그 중 신라와 중국(당) 간에 선물이 교환되지 않으면 천벌로 가뭄이 든다는 ‘하늘의 뜻’을 빌려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점과, 특히 양국 간에 상호성에 기초한 선물 교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일찍이 발해는 요동반도를 차지하였다.

서 길 수(서경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흔히 발해는 단군조선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특히 강역문제의 핵심은 요동지방의 편입여부에 있다. 우선 지금까지 나온 발해 강역도를 분류하면... 

 

발해강역도

 

1. 요서지방이 일부 들어간 지도

 

① 唐晏 纂, 劉承幹 交, {渤海國志}, 求恕齋, 1919

 

② {조선전사} 5. 중세편, 1991

 

 

2. 요동지방이 들어간 지도

 

① 新妻利久, {渤海國史及び日本との國交史硏究}, 東京電氣大學出版局, 1969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 1994

 

② 上田雄 孫永健, {일본발해교섭사}, 彩流社, 1994

 

③ 沿革圖七幅,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발해의 서쪽 강역문제는 요동의 지배여부와 집결된다. 이하 당나라의 요동지배는 중국 측 기록에 따른다하더라도 발해가 성립된 지 6년만인 714년 요서지방으로 완전 철수하였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 그 이전에도 실제로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하 간단히 이에 관계된 자료들을 간추려 본다.

 


1. 안동도호부는 발해 건국 이후 요동에서 사라졌다.

 
1)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안동도호부의 옛 주민(舊戶)을 맡겨 통치(統攝)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구당서 고려전) ---- 이 때 발해가 성립된다.

 

2) 699년 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는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 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구당서 고려전) ---- 발해가 성립된 후 형식적으로나마 안동도호부를 유지하려했으나 실패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에 흡수된 것을 말하며 적어도 이때부터는 요동반도가 발해 땅이 된 것이다.

 

3) 714년 - 당나라, 요서지방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2. 732∼733 발해의 등주 공격 때 요동에는 당의 세력이 없었다.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원정군은 바다길로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살해한다. 만일 가탐의 도리기에 나오듯이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쯤 올라간 박작성이 국경선이라면 당나라를 침략할 대부대가 압록강 하구를 지키는 당나라군부터 무찔러야 했을 것이다. 발해 군이 현재 산동성인 등주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압록강 입구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요동반도 끝에서 고군산 열도를 지나가야 한다. 만일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면 발해군의 대선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등주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반도 에 당나라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발해가 요동반도를 치지 않고 등주를 친 것도 요동반도를 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요동반도에 당나라 세력이 있으면 그곳부 터 쳤을 것이다. 발해는 해군의 출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육로로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문제를 일으켰던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 군사를 모아 싸우게 하고, 유주 절도사가 [하북채방처치사를 겸임하도록 해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총 16개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권 213 당기 현종 개원 20년) 한편 당나라는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남쪽으로부터 발해를 침공하도록 한다(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3. 요사 지리지에 반영된 요동반도의 발해 영토

 
 요동반도가 확실한 것만 몇 곳 간추린다(요사 권 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 본래 조선(필자 주 : 단군조선)의 땅이다(本朝鮮之地). ……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에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後爲渤海大氏所有)

진주(辰州) 봉국군 절도 - 본래 고구려 개모성, 당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 개모성을 격파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蓋州)로 바꾸었다.

노주(盧州) 현덕군 자사 - 본래 발해 삼노군이다. 옛날 5개 현으로 산양, 삼노, 한양, 백 암, 상암이었는데 모두 폐지했다. 철주(鐵州)는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 때 안시성이 되었다. 당 태종이 쳐들어 갔을 때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성을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 주를 두었는데 본래 위성, 하단, 창산 용진의 4개 현이다.

암주(巖州) 백암군 하 자사 - 본래 발해 백암성, 태종이 빼앗아 심주에 속하게 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고구려의 국력, 로마와의 가상대결 및 고구려 장안성 등 토목건축기술 클릭참조>>     

 

연해주 동해안의 고구려ㆍ발해계 성곽

 

니꼴라예쁘까성을 가보면 15만평의 성터가 토성으로 쌓여있다

여기에서 발해토기들이 아직도 발견되는데 이 토기들은 고구려식이다
성밖에는 해자라고 너비10미터 깊이3미터의 물줄기가 두르고 있다
이는 제1방어선의 역할을 한다
성모양은 둘레 4km 높이 10m로 철옹성이다

이곳은 발해의 동경 용원부 정리부 소재지로 밝혀졌다

 

 

발해 고분 벽화에는 2명의 무사 2명의 악사 2명의 시중이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나라에는 발해관련 유물이 360여점이 전부이다

그나마 발해예술을 느낄수 있는 유물은 없다
그중 문자기와가 있는데, 이는 한자와는 다른 고유문자가 존재했다는것을 알려준다

 

<<발해문자 해독 첫 시도 클릭참조>>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클릭참조>>

 

흑룡강성에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이 있었는데 성터가 있으나 방치되고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옛모습을 간직한 발해석등이 남아있다

  

발해 수도의 성벽은 돌을 안에 넣고 밖에는 흙으로 발랐으며 크기는 근세조선시대 한성의 크기와 비슷하다 

내부는 도시계획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폭 110미터의 주작대로가 나있으며 81개의 거주지역이 있다
1구역당 세로 30미터 가로 500미터이며 인구는 20만이 살았을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하나의 성이 더 존재했다. 이는 궁전과 관청이 있는 황성이다.
황성내에는 5개의 궁전이 있으며 1-2궁전에는 왕이 국사를 보고 4궁전은 침전이었다
궁전 동쪽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으면 2개의 섬과 호수 정자가 있다
이는 반도통일신라의 안압지와 형태가 비슷하다

 

러시아 연해주 읍자부리 지역에서도 발해유적이 발견되는데, 이 곳은 발해의 전초기지로 추정된다

성 주위에 흐르는 강은 쑤이푼강인데 이는 발해의 솔빈부에서 나온 말이다
발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발해사를 우리나라로 인식해야한다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클릭참조>>   <<졸본부여(고구려)의 후예 '대진국(발해)' 클릭참조>>

 

인구 100만명의 번화한 도시였던 발해 수도 상경의 터가 21일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에 있는 상경은 외성의 둘레만 16km에 이른다. 궁성 앞에는 폭 110m의 주작대로가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 상경의 궁성은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복원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돼 있다. 이 사진은 11일 위아주식회사가 미국 인공위성 아이코노스(IKONOS) 를 이용해 찍은 것이다. 사진제공 위아주식회사 2004-09-22

 

대진국(발해) 상경 용천부 복원도 

 

발해의 유물이 발굴된 상경성 터

 

1933~1934년 발굴 조사로 그 모습이 드러난 발해의 도읍지 상경성 터는 발해의 소중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지입니다. 발해의 제3대 왕인 문왕이 만든 것입니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내성은 왕이 거주하는 궁성구와 관아가 있는 황성구로 나뉘어 있습니다.

외성은 동벽과 서벽이 3.4킬로미터에 가깝고, 남벽과 북벽이 약 4.6킬로미터와 5킬로미터로, 총 둘레가 무려 16킬로미터를 넘습니다.

외성의 안팎에는 또한 궁전 터와 절터, 집터가 여러 곳 있는데 궁전이나 집터 내부에서는 벽을 따라 설치된 구들 시설, 즉 온돌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한웅배달과 단군조선의 후예인 졸본부여(고구려)를 거쳐 대진국(발해)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전통적 난방 시설입니다.

 

계획 도시의 중앙 대로 주작 대로

상경성 안에는 남북 방향으로 성을 2등분하는 중앙 대로가 있는데, 주작 대로라고 불립니다. 

 성안은 가로와 세로로 뻗은 도로에 의해서 82개의 방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이들 방은 동서 465~530미터이고,

남북의 길이는 큰 것이 350~370미터이고, 작은 것이 235~265미터입니다.

  

발해 상경용천부 - 동서로 긴 格子형

발해 상경용천부 도성도.

쥐나 흑룡강(黑龍江)성 영안(寧安)현 동경성(東京城)성에 위치한 발해의 도읍지 중 한 곳이다. 성 둘레는 1만6,296m이며 전체 면적은 42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도성이다.

왕궁과 황성을 합한 면적이 39만여 평으로 최근 한성 백제의 도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송파구 풍납토성의 2배에 달하는 규모다. 경백호에서 발원한 목단강이 휘감아 돌아가고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한 이 도성은 동서로 약간 긴 장방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구려와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장안성이나 낙양성의 도시 구조 형태를 띠고 있으며 북변왕궁형의 배치를 가지고 있다. 왕궁 앞에 황성을 배치하고 황성에서 남문까지 폭 110m의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시와 서시로 나뉘어 있으며 방의 크기는 동서 길이가 465∼530m, 남북 길이는 큰 것이 350~370m, 작은 것이 235~265m 규모이며 방 81개로 구성된 격자형 도시다.

외성은 속에 돌로 쌓고 겉에 흙을 덮은 형태이며 주위에 해자를 둘렀다. 중심 구역은 다시 세 구역(중·동·서구)으로 나뉘어 있으며 현재 37개의 궁궐지가 발견되었다. 도로는 각각 너비 28m, 34m, 92m, 110m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달 부여계 예맥,말갈(여진)족 고구려가 배달 흉노계 선비족 당나라에 무너진 후, 장안성은 중원뿐만 아니라 한반도·만주·연해주·몽골·왜열도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새로운 도시 조영의 모델로 차용되기 시작하면서 경주나 왜열도 나라(奈良) 지방의 여러 도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복원된 발해의 선박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절터 전경. 이곳에서는 구들이 있는 건물터와 발해의 전형적 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오매리절터 북쪽1호 건물터 구들 유구.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 12명의 인물 벽화가 있는 정효공주묘 무덤 안칸 동벽도('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정효공주묘 개념도

 

▲ 발해의 두 번째 수도 중경 서고성 복원도(중국 길림성 화룡현).

 

▲ 중경터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 기와무지.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전면 재발굴한 서고성터 중경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의 전형적인 손끝무늬기와 등을 수십 겹으로 쌓아 놓았다. 붉은 색의 고구려기와도 선명하다(박민성씨 제공).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음을 보여주는 6m 높이의 발해 대형 석등(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소재).

 

<<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 공개 클릭참조>>  

 

 

 

 

기존 사학계에서 각국이 바라본 대진국 발해의 영역

 

새로 밝혀져 더욱 확장되기 시작한 대진국 발해의 영토

아무르강 유역서 발해유적 발굴, 트로이츠코예=최북단 영역' 학설 뒷받침

트라이츠코예 고분군

 

발해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 (출처 : 조의선인님의 블로그)

 

우리에게 있어 발해는 수수께끼의 역사와도 같다. 발해에 관련된 사적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는 발해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해 고찰하기 힘들다. 발해는 서쪽은 요동 동쪽은 연해주 북쪽은 시베리아 남쪽은 대동강을 그 영역으로 하는 대제국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30년만에 고구려 유민들의 끈질긴 투쟁과 염원으로 탄생한 나라가 바로 발해다. 현재 중국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속말말갈족이라며 자국사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발해고 등의 사서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이라 평하고, 구당서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기록한다. 여기서 별종은 다른 종족이 아니라 갈라져 나온 가지를 뜻한다. 일례로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이라 표현한 문구가 많다. 이로보아 발해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말갈과 관련해 한규철 교수님은 말갈은 중국 중원왕조의 사상에 입각한 동북아 민족 모두 낮추어 말하는 비칭이라고 한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이다. 일단 발해의 영토 대부분은 고구려인이 살던 고구려 영토였다. 아무리 고구려가 망했어도 30년만에 말갈족이 고구려인을 내몰고 이 곳에 살 수 있었을까?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 당은 아무리 많아봐야 20만명의 고구려인을 당 내지로 옮겼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인구가 69만호이다. 이를 인구수로 환산하면 350만 정도 된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고구려의 영토에 계속 살았을 것이고, 고구려의 엣 영토에 발해가 건국되자 그대로 발해인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다. 

 

발해의 통치 기구를 보면 이민족 통치에 편리하도록 편성된 요나라의 이중 통치 제도 같은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복 종족인 여진족이 피지배 종족인 한족의 경제와 문화에 반하여 그들의 통치 제도를 모방한 금나라의 통치 기구 같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발해의 통치 기구 안에는 말갈족의 통치 제도를 수용한 것도 없었다.

 

『신당서』에는 발해국의 중앙 통치 기구로 3성, 6부, 12사, 1대, 8사, 1원, 1감, 10위가 실려 있는데 이 기구들은 동족인 고구려 유민의 피지배층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발해국의 지방 통치 기구로는 주현제만 있었지, 부족제는 없었다, 주현제만 있었다는 것은 지방 통치 기구가 농경인만을 통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족제도가 없었음은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하는 말갈인을 다스리는 지방 통치 제도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발해국의 주민 가운데 말갈족이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발해의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제도에 미니족에 대한 통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발해에 고구려 유민을 제외하고 문명한 다른 민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혹 있었더라도 그 수가 적었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이 말갈인들이 인구 면에서 많았고 피지배계급 중 다수였다면 발해국의 지배층은 이들 말갈인들을 위한 통치 기구를 만들어 이를 다스리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국의 3성 6부의 중앙 통치 기구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기구는 말갈족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 기구가 아니고 고도의 농경 문화를 지니고 있는 고구려인을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를 전제로 발해국의 통치 기구를 만든 것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런 통치 기구에 따라 통치를 받은 것도 고구려 유민이었음에 틀림없다.

 

중국 장안에 버금가는 수도를 가진 대제국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발해는 당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움직이는 한 주역이었다. 그 시대 발해는 신라 못지 않게 많은 나라들과 교역을 하였다.

 

발해는 국초부터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였다. 2대 무왕 때는 흑수말갈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전쟁을 하였다. 발해는 뛰어난 기동력으로 당나라 등주 지방을 초토화시켰고, 마도산에서 당나라 대군과 맞이하여 그들을 대패시켰다. 당시 발해와의 전쟁으로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당 조정은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운전금(運錢金)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운전금 지출계획을 바꿔 ,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했다.

 

10대 선왕 대에 이르면 발해는 사방 5천리(기록에 따라 6천리, 9천리라 기록)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그들의 저력을 인정하였다. 당시 발해는 40만의 강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의 49만 군사력과 막상막하였고,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당나라는 발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발해가 이렇듯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의 교역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발해에는 수도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다섯 갈래의 국제 무역로가 있었다. 이 5대 국제통로는 상경에서 부여부를 거쳐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 영주를 거쳐 중원으로 가는 영주도, 압록강을 타고 산동반도로 들어가는 압록도,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에 연결되는 신라도,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에 이르는 일본도이다.

 

특히 발해는 일본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발해 건국 초 당, 신라, 흑수말갈이 밀착하자 고립을 막기 위해 발해는 외교 파트너로 일본을 택하였고, 그 후 발해가 망할 때까지 일본과의 교역은 계속 되었다.

 

발해는 주로 모피와 삼 등 토산품과 당으로부터 수입한 서책을, 일본은 견직물과 종이, 금 같은 생활필수품 등을 각각 수출입하였다. 871년 발해 사신이 일본과의 교역에서 얻은 이익만 해도 일본 화폐로 40만냥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의 샤프쿠노프 박사는 기존의 실크로드 외에 사마르칸트에서 치타를 지나 발해의 수도 상경성으로 가는 제2의 동서 교역로가 있고, 이 교역로는 담비의 길이라 한다. 소그드 및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모피를 사들였고, 이를 위해 발해의 모피를 수입했다. 게다가 발해 지역에는 중앙아시아의 은화가 많이 발견됨을 볼 때 당시 발해와 중앙아시아 간의 교역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교역로인 발해 5도(영주도, 조공도,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는 거란, 중국, 신라, 일본으로 이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그리고 상경에서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담비의 길은 발해의 여섯번째 국제 교역로였다. 이는 발해가 구축한 아시아 네트워크다. 발해 5도와 담비의 길, 이 길을 통해 발해는 국제무역을 펼치고 부를 얻었다. 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은 발해가 해동성국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원천이었다.

 

 

 

세계와 사통팔달한 발해


어울림문화 꽃피운
다섯갈래 국제교류망

 

발해는 동방의 강대국답게 튼튼한 국가체제에 기반하여 5대 교통로를 통해 세계와 사통팔달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국제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안에 버금가는 수도를 가진 대제국 발해를 누구에게 얽매인 변방의 한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변조이고 왜곡이다. 발해의 국제성은 우리 민족사의 정통 계승국으로서, 당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한 주역으로서 응분의 국제적 대응과 교류를 진행한 데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사방 5천리를 아우른 국토면적은 한반도 전체 면적의 2.2~2.8배에 달하는 50~63만 k㎡나 되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대부분은 후일 고려로 망명해 발해의 역사적 정통성을 넘겨준다.


△ 발해의 옛성 노브고르데에프성 취락지에서 출토된 중앙아시아 소그드 은화 (앞책, 56쪽)

40만강군 바탕 228년간 지속
독자연호 쓴 중앙집권 왕국
5개 교류길 통해 문화융합
발해만의 문화까지 창조

 

발해의 행정체계를 보면, 중앙정부기구는 대체로 당의 3성 6부 9시제를 본받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개편하고 이름도 달리하여 3성 6부 1대 7시 1원 1감제로 운영하였다. 3성 가운데 행정실무기관인 중대성을 중심으로 하는 운영체제는 3성의 균형과 견제를 기저로 한 당나라의 운영체제와는 다르나, 통일신라 하대에 3성 중 집사성에, 그리고 고려 때 중서문하성에 권력이 집중된 것과 비슷해, 그 상관성이 주목된다. 지방행정기관으로는 부, 주, 현을 두어 각각 도독, 자사, 현승 등 지방관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의 행정체계는 당나라의 그것과 대등한 것으로서 결코 당의 지방행정체제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망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 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능수능란한 무왕은 둘째 아들을 당에 숙위로 보내 그 제안을 수락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발해가 당에 숙위를 보냈다거나, 당이 주제넘게 발해왕에게 ‘홀한주도독’ 같은 책봉을 했다거나, 조공이 오갔다든가 한 것은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두 나라의 의례적인 외교관례나 관영무역일 뿐, 중앙과 지방간의 어떤 신속관계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중국과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이기에 침해를 당할 때는 단호하게 주권을 행사한다. 북방의 흑수말갈이 당에 빌붙어 압박해 오자 발해는 723년 대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수군 정예 2만을 보내 속전속결로 중국 산둥반도의 덩저우를 공략한다. 우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외선제공격의 일례다.



△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 출토된 삼존불의 협시보살이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다. (전쟁기념관, 발해건국 1300주년 기획전 '발해를 찾아서', 28쪽)

 

발해의 당당한 국제성은 이러한 자주적인 국가권력 행사와 더불어 상경을 시발점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뻗은 다섯 갈래의 국제교통망을 통해 진행된 교류와, 그 결과로 이루어진 문화의 융합상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5대 국제통로는 상경에서 부여부(현 지린)를 거쳐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 영주(현 초우양)를 거쳐 중원으로 이어지는 영주도, 압록강을 타고 산둥반도로 들어가는 압록도(일명 조공도),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까지 연결되는 신라도,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이다.

이 5도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는 그 대표적 일례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발해는 주로 모피와 삼 등 토산품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서책을, 일본은 견직물과 종이 등 생활필수품을 서로 교환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

 

정수일 교수

 

<<요나라시대 황금색 브래지어 발굴 클릭참조>>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까지 발해 영토 클릭참조>>

 

발해의 궁궐 모습, 상경용천부. 당나라의 장안성에 이어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성이었다.

 

중국 지린 성(길림성) 백산 조선족 자치 현에 있는 발해영광탑.

5층 벽돌탑으로 13 m 높이이며 탑 밑에는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석등. 발해문화의 웅장성을 보여 준다.

 

 

 

중세 아랍인이 본 신라 (출처 :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 중세 아랍 상인들이 남해로에서 이용하던 돛배 (<이슬람세계>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1996, 131쪽)

“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그 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 마저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정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9세기 지리서 “중국동쪽 위치”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 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9세기 중엽에 나온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이때까지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원래 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이라크 과학원이 1951년에 너비 2m, 폭 1m의 대형지도로 복원하였다. 필자는 1979년 바그다드박물관 전시실에서 벽에 걸려있는 이 지도를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지난해 취재차 이 박물관을 찾아가는 모 방송사 취재진에게 확인을 부탁했더니, 지도는커녕 박물관 전체가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반문명인들에 의해 저지러진 저주 받을 현대판 반달리즘(문명 파괴)에 그저 비분강개할 뿐이다.

중세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산명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등 풍부

 


△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1154년) (필자 제공)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향유고래에서 나는 사향 못지 않은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의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명기된 신라지도(5개 섬) (필자 제공)

그밖에 신라인들의 종족적 기원이나 신라의 대외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기술에서도 눈길을 끄는 여러 대목이 있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이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중국(당나라)간의 관계는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에 바탕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간에는 상호성에 입각한 선물교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음미해 보게 한다.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믐이 들게 한다는 것은 천리를 빌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검,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세계를 누빈 발해-신라 남북국시대

 

 

 

 

 

 

숙신은 한나라 때에 이르면 ‘읍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고구려나 부여와는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읍루가 또다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三國志』「魏書」상도향공기).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숙신이 읍루(아이누·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라는 말이 아니라 읍루와 교류를 하는 극소수의 숙신(또는 옛 읍루지역에 사는 숙신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북위시대에 숙신은 물길(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교섭하고 있습니다(『魏書』「孝文帝紀」).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다시 발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新唐書』「黑水靺鞨傳」). 이 때는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들도 발해에 속하게 됩니다(『金史』本紀 1).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는 발해는 말갈의 국가라고 하고 있죠.
  
   제가 같거나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많은 사서들이 같은 민족을 이리저리 부르고 있기 때문이죠. 간단히 보면 물길ㆍ말갈ㆍ숙신은 같은 민족의 다른 표현이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국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발해 = 고구려’를 좀 복잡하게 표현한 것뿐이죠.

표현이 복잡하든 말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① 정치적 계승의식과 통치 영역의 면, ② 인적 구성의 면, ③ 문화적인 일체감 등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발해는 후고구려로 보는 편이 적당할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도처에 “발해는 국토가 고구려와 일치하며 산물(産物)들도 고구려와 일치(『오대사(五代史) 』74 「고려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국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속일본기(續日本記)』10 聖武天皇 新龜四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武經總要』 前16 下).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신당서(新唐書)』219 「발해전」, 『구당서(舊唐書)』199 「발해말갈전」).『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를 고려국왕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 = 고구려’라고 보는데 하등의 이론이 있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三國遺事』)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발해왕이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속일본기(續日本記)』권23]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해는 그 스스로 고려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나 일본 측에서도 ‘발해 = 고구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발해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그 문화나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까지도 고구려를 완벽히 계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묘호를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 큰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발해로 부르기보다는 후고구려(후고려, 또는 대고려)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발해는 아예 ‘발해 말갈’로도 지칭이 되는 나라입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회요(五代會要)』,『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 또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五代史』74 「高麗傳」)”, “발해 말갈은 본래 고려종(高麗種)(『五代會要』30 「渤海」)”,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大祚榮)(『자치통감(資治通鑑)』210)”이라고 합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아도 그 민족이 그 민족입니다. 즉 예맥 - 조선 - 숙신 - 물길 - 말갈 - 고구려 - 발해 - 거란 등의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들이 임의로 쓴 말은 아닐 것이니 북적과 고구려ㆍ부여ㆍ읍루 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와의 차이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이(東夷)를 북적(北狄)으로 같이 부르고 있으니 그것이 구별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숙신과 그의 다른 이름인 물길과 말갈은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예맥이라는 말이 없어진 자리에 숙신ㆍ물길ㆍ말갈 등의 명칭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맥은 소멸하고 물길이나 말갈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맥과 숙신ㆍ동호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요동ㆍ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끝없이 뭉치고 흩어진 하나의 역사 공동체이자 문화공동체라는 말이지요.

말갈족이 발해 이후, 금나라시대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청나라(후금)시대에 다시 만주족으로 바뀌어 불립니다. 결국 모두 같은 민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임을 스스로 표방하고 있습니다.

 

발해와 신라는 경제적으로도 그 활동범위는 중국, 일본을 넘어서 서아시아, 로마까지 이르고 있다.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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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왕조 은나라, 동이족 일파였다”

경향신문 / 입력 : 2008-11-03-17:40:46수정 : 2008-11-03 17:40:47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

 

ㆍ中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현장을 가다

지난 10월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안양 은허(殷墟)유적에서 은허발굴 8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중국내외의 학자 160여명이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은허발굴의 의의를 되돌아보고 발굴성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술대회에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 주관으로 답사단이 파견됐는데, 기자는 이 답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곳은 은허(殷墟)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상(商)나라 성이 존재했던 곳인데요. 1호 궁전터는 이미 1999년 발굴되었고, 이곳은 지금 막 확인된 제2호 궁전터입니다.”

지난 10월30일 오후 5시,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은허(殷墟).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모인 국내외 참석자들의 눈이 빛났다. 이곳은 유명한 은허 유적에서 강(환수·洹水)을 사이에 두고 강북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원북상성(洹北商城) 터. 탕지건(唐際根) 중국사회과학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설명을 끝낸 뒤 참석자들을 이끌고 한참 더 갔다.

 

 

은허(殷墟) 유적의 원경. 36㎢의 넓은 지역에 은(상)나라 말기 궁전과 제사터, 왕릉 등이 조성돼 있으며 15만편의 갑골이 확인되기도 했다. 중국 100대 고고학 발굴사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자, 이 판축한 흔적 좀 보세요. 이것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원북상성의 북성벽입니다.”

따끈따근한 발굴 성과를 보면서 유난히 감상에 젖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1928년부터 은허를 발굴한 리지(李濟)와 둥쭤빈(董作賓), 량쓰융(梁思永) 등의 후손들이었다.

109년 전인 1899년 국자감 좨주이자 금석학자였던 왕이룽(王懿榮)은 지독한 학질에 걸렸다. 그는 처방 받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했다. 이것은 갑골문자였다. 이후 학자들의 추적 끝에 약재의 원출처가 바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샤오둔춘(小屯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8년 둥쭤빈을 대장으로 대대적인 샤오둔촌 발굴에 나섰고, 마침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온 은(상·BC 1600~BC 1046년) 말기(BC 1300년부터)의 도성인 은허(殷墟)를 찾아낸 것이다. 무엇보다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갑골문자)를 확인했다. 이 갑골문은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는 한자의 원형이다. 은허 발굴은 2001년 중국학계가 선정한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굴’ 가운데 단연 1위로 뽑혔다.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 갑골은 완전한 체계를 갖춘 문자로 현재 세계인구의 4분의 1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1936년에는 12기의 왕릉과 2500여기의 제사갱, 부장묘가 발굴됐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은(상) 말기인 BC 1300년에서 BC 1046년 사이에 재위했던 12명의 왕, 즉 역사서에 나온 반경에서 주왕까지 12명의 왕으로 해석했어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답사단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갑골전시관이었다. 지금까지 은허에서 확인된 갑골은 15만편에 이르는데, 1936년 이 한 곳(YH 127 갑골갱)에서만 무려 1만7000여편의 갑골이 쏟아졌다.

문득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에 나온 “오직 은(상)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는 귀절을 떠올랐다. 중국학계는 “이것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당안고(당案庫·역사기록을 보관한 창고)”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국가기록원인 셈이다.


은(상)은 갑골에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의 신령에게 왕실과 나라의 길흉을 점친 것으로 유명하다. 군대, 형벌, 전쟁, 공납, 농업, 수공업, 상업, 축목, 기상, 건축, 질병, 생육, 길흉 등 국가의 대사는 물론 소소한 일상까지 일일이 점을 친 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확인된 15만 편에서 확인된 갑골문은 4500자에 이르지만 아직 해독된 글자는 1000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답사 내내 경탄에 마지 않은 것은 은(상)의 청동기와 옥기 제작 기술이었다.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데, 사모술(司母戌)이란 명문이 있는 청동방정(鼎·사각형 모양의 솥)은 무게가 832.75㎏에 이르렀다. 옥기는 2600여건이 확인됐는데, 중국 동북방 차하이-싱룽와에서 발원한 옥기문화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은(상)은 동이족의 일파라는 점이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은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고 단정했다. 이번에 발굴된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인데,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되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고구려·백제의 선조인 부여 역시 점을 치고, 술과 노래를 좋아하며, 백색을 숭상하는 등 은(상)의 풍습을 빼닮았다”면서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았다는 뜻인 역법(曆法)마저 은의 역법을 썼다”고 말했다.

이제 짙게 깔린 어둠에 바람마저 휑하여 더욱 쓸쓸해진 은허 현장. 답사단은 은(상)이 망하자(BC 1046년)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허를 지나면서 불렀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를 떠올렸다. 하지만 은(상)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저히 파괴된 역사지만 그 동이의 역사는 3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현현하고 있으니까….

<중국 안양(은허)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중앙일보ㅣ2008.10.22 02:17 입력 / 2008.10.22 16:51 수정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최형규 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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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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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종족 짱골라  

 

교수 “순수한 은 없다”… 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2-16 03:00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 교수. 회족()인 그는 한족()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 성 친양()에서 톈수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西) 성 남부와 장쑤() 성 서부 및 안후이()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배달겨레의 유산, 골각문자와 갑골문자 클릭참조>>   <<유전자로 밝혀보는 배달겨레의 뿌리 클릭참조>>

 

▲‘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발해유적

국제신문 / 입력: 2009.01.01 19:32

 

北·中 공동발굴 결과 만주 고조선·발해가 韓역사로 밝혀지자 '쉬쉬'
中, 63년 이후 30년 넘게 침묵 1997년 마지못해 내용 공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북한과 중국이 공동발굴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 고분군.
1963년 8월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17명의 북한 고고학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6·25동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당시였겠지만,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 팀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요령성, 내몽고 동남부 지역의 비파형동검 관련유적을 조사했고, 또 다른 한 팀은 길림성과 흑룡강의 발해유적을 살폈다. 그들의 조사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년 간의 조사는 1966년에 북한에서 보고서로 출판되었지만 누가 발굴하고 집필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이 발굴에 대해서 30년 넘게 침묵하다가 1997년에서야 그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중국 보고서에는 북한과 같이 발굴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잊고 싶은 발굴이었고, 북한 측에게도 숨겨놓고 싶은 보고서인 셈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발굴로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발해는 한국의 역사이며, 한민족의 고대사는 현재의 국경이 아닌 만주지역을 포괄한다는 주장을 굳히게 되었다. 반대로, 중국으로서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다 자칫하면 공동발굴이 갓 점유한 만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조·중 공동발굴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보고서가 남한과 일본에서 계속 인용되자 마지 못해 공동발굴이라는 이야기는 뺀 채 그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심 좋은(?) 중국의 결정에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만주지역이 고대 이래로 한국의 역사였으며,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은 뜻 깊다고 적극적으로 공동발굴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은 지금같이 역사의 왜곡에 집착하지 않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만주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고마워했지, 결코 그 역사를 뺏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학자들은 길림 돈화의 육정산 고분,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 영안 동경성 유적을 발굴했다.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정효 공주묘가 발굴된 대표적인 고분유적이요, 동경성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발굴한 이래 발해의 대표적인 궁성지였으니 가장 중요한 유적들을 조사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매우 알찼다. 특히 동경성에서 발굴한 얼굴이 그려진 벼루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로 평가된다.

필자가 이 보고서를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당시 비파형동검자료를 모으던 중에 어렵사리 흐릿한 복사본을 구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2007년에 육정산 고분과 동경성을 갔을 때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펼쳐진 유적을 보노라니 대학원 시절 놀라움에 넘겼던 책장 하나 하나가 떠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의 답사는 중국의 감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육정산과 성자산(대조영이 건국한 동모산으로 추정됨) 유적은 감시를 피해 새벽에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발해 동경성을 답사할 때는 중국 관계자들에게 몇 시간 억류되기까지도 했다.

2006년 여름의 일로 필자가 동경성을 갔을 때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중이어서 제한된 지역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답사팀 중 한 명은 출입금지 팻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발굴장면을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었고, 우리 답사팀은 몇 시간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사진기의 사진을 지우고 벌금을 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는데, 며칠 뒤에 다른 한국 학자팀이 방문하자 먼저 왔던 사람들이 억류되었네 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한 달 뒤에 러시아를 가니 공동발굴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인욱, 자네 중국에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도망친거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천리 가는 발 없는 말 치고 제대로 가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1963~1965년도 같은 국가 간의 사이좋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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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 고대 시베리아 신석기 유물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 세석기 -

 


- 세석기 문화권 -

 


- 철제의료기구(좌)와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간석기)날을 현미경으로 비교한 것 -

철제의료기구는 울퉁불퉁한데 비해 세석기는 매끄럽다, 즉 날카로움은 세석기가 더 뛰어나다.

 

- 세형돌날로 직접 고기를 잘라보는 사진 -

 

- 샤먼이 사용하던 사슴뿔 관 -

 

- 암각화 분포도 -

 

- 사슴뿔로 만든 곡괭이 -

 

- 뼈바늘, 현재까지도 일부 이누잇족이 쓰고 있다 -

 

- 돌칼로 이발하는 이누잇족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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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교국가연합, 21∼24일 서울서 ''몽골반점동족''국제대회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4-09-19 15:27 |최종수정2004-09-19 15:27

 

 

세계 '몽골리안' 한데 뭉쳐 평화운동

 

세계 처음으로 몽골반점을 가진 종족들의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또 몽골반점 종족 국제기구가 창설된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회장 곽정환)은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와 공동으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11개국 13개 ‘몽골반점 종족(몽골리안)’이 참가하는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평화의 시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몽골리안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과 문화적 각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한편, 세계적인 ‘몽골리안 협력 벨트’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몽골반점이란 갓난아이의 엉덩이 위쪽에 생긴 푸른 반점으로 한국·몽골 등 동북아에 거주하는 북방계 종족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몽골리안의 형질적 특성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 바아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리안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 두 그룹으로 분화된다. 옛 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 코리야크족 캄차달족 길리야크족 아이누족 아메리카인디언 등이 있고, 새 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 위구르족 핀족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만주·네이멍구·위구르(신장성),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핀란드, 북미인디언, 남미인디언, 에스키모 등 13개국에서 총 500여명의 정치 종교 학계 비정부기구(NGO) 등 지도자들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위한 몽골리안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심정문화 세계와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몽골반점 종족의 역사, 문화, 가정 전통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몽골리안의 근원과 가정문화의 재발견(김충렬 고려대 교수·철학) ▲동북아시아 국가의 문화적 교류(박흥순 선문대 교수·국제학) ▲몽골리안의 평화와 심정문화(신현덕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 등 8개의 전체 및 그룹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몽골리안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호 내 알흔섬이 러시아 후지르 마을 언덕 너머로 신비스럽게 바라다 보인다.

특히 23일에는 ‘21세기 국제평화 하이웨이 프로젝트’ 설명회와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고찰―몽골리안 연대·협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 심포지엄이 마련되며, ‘몽골반점동족 세계평화연합’이 창설돼 국제평화기구로 출범할 계획이다.

회의 의장인 곽정환 IIFWP회장은 “인류를 한가족으로 묶기 위해 참사랑·참생명·참가정 운동을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주창으로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평화회의’를 열게 됐다”고 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곽 회장은 이어 “몽골리안은 시원의 시대부터 인류 평화와 복지를 갈망했던 종족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며 “몽골리안 문화와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구촌 화해·협력 시대에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IIFWP는 전·현직 국가수반, 종교 지도자 등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연대해 인종·국가 간 갈등, 종교분쟁 등 지구촌 난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에는 분쟁지역인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 몽골리안이란

우리나라 대다수 갓난아이들은 엉덩이에 청색 반점이 있는데, 이는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가 숨을 쉬지 않자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멍 자국이라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청색 반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몽골반점’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몽골리안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몽골반점은 의학적으로 진피의 심층에 있는 방추형 또는 분지형의 멜라닌 색소세포가 모여 표피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 생후 2세까지는 빛깔이 진하다가 점차 옅어져 11∼12세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어린이에게서는 90 % 이상이 나타난다.

상고시대로부터 평화와 복지를 찾아 세계를 순례한 몽골리안 종족의 선조들은 인류 문화사에 귀한 자원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인류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 시원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수내 알흔섬으로 전해진다. 바이칼호 자체가 수많은 북방 종족 신화의 탄생지다.

실제 몽골리안은 중앙아시아에만 거주하지 않는다. 고대 몽골리안 후손들은 한국, 일본, 중국 서북부,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몽골리안 배경을 가진 종족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모시는 제천의식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활, 자연친화적인 사고, 영적인 세계관 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들은 몽골리안의 생활문화와 심층 무의식의 세계에 용해돼 여전히 남아 있다.

정성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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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 이후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

조선일보ㅣ 입력 : 2006.06.30 22:55 / 수정 : 2006.06.30 23:00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이룬 나라이지만, 전시설명판에는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漢)왕조에 복속됐다고 적혀있다. /랴오닝성박물관 도록

 

지금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遼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려는 기획이다. 요하 유역을 아우르는 ‘요하문명’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 밖 요서·요동을 포괄하는 요하문명 전체를 자기 역사로 만드는 ‘요하문명 공정’에 중국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은 뒤, 장성 밖의 무지몽매한 새외(塞外)민족과 차별을 두었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북방한계선’을 긋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리장성 밖에서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더 발달된 구석기·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요하유역의 구석기문화인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은 북경인(北京人)보다 형질인류학적으로 더 발달된 것이다. 이 지역 사해(査海)의 신석기문화는 서기전 8000년에 이르며, 신석기 말기(서기전 3500년~2500년)의 것이 바로 독특한 옥기 작품을 낳은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번 전시에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려고 하는 뱀의 도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라의 도우에 많이 나타나는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전시 중 세 번째 테마 ‘화하일통’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을 통일(=一統)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를 이룬 부여(서기전 3세기~서기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 삼연(북연-전연-남연)의 유물이 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었다.

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라고 기술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위세품이 출토된 랴오닝성 서풍현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이라고만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요하지역에서 ‘화하일통’의 역사는 최소한 2500여 년은 됐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내몽골·요하유역의 각 유적과 이 일대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요령식 동검, 다뉴세문경, 옥룡(=곡옥) 등을 공유하는 알타이어계 요하문명권이었다. 한국은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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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들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 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로 비록 중국과 신라의 협공에 멸망했지만 그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이 살아 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요하문명의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북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바꾼 국호)-대진국(발해의 국호)-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이기에, 중국은 사활을 걸고 동북공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의 미래까지 노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을 보러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발걸음이 멈칫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높이 90㎝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빗살무늬토기. 요하문명의 빗살무늬 토기들 가운데 황제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동남 아시아·인도까지 활동 범위 넓혀 나가

소년한국일보 / 입력시간 : 2007-07-30 13:27

 

백제 땅 중심으로 바닷길 이어져 일찍부터 해외 교류… 왜국 등과 무역 통해 큰 이익
'백제 금동 대향로' 코끼리·악어 등장…겸익, 인도서 불교 공부… 경전 들여와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코끼리를 탄 사람.

 

■ 뛰어난 선박 제작 기술과 항해술 지녀

 

한반도 서남부의 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던 백제에는 좋은 항구들이 많았습니다. 바닷길이 백제 땅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어 백제인들은 일찍부터 대륙과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가 쉬웠지요. 백제인들의 활동 범위는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답니다.

543년 백제 성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부남국의 보물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부남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로, 이는 당시 백제가 부남국과 교역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실마리지요. 성왕은 또 554년에는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답등’이란 것을 선물합니다.

이는 양털이 주성분인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백제가 답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북인도와 직접 교역했거나, 적어도 활발한 무역을 통해 해외의 진귀한 물건들을 구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642년 백제 사신이 왜국과 교역을 하려는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곤륜은 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백제가 가로막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왜국은 배 만드는 기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해 백제에 의지해 외국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에는 방(舫)이라 불리는 큰 선박이 있었답니다. 왜국에서 ‘구다라선’이라고 불렀던 이 배는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였습니다. 선박 제작 기술과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백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물건을 왜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지요.

 

악어.

 

■ 백제인, 진취적이고 적극적…국제화된 나라

 

백제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인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짐을 갖고 코끼리에 올라 탄 사람과 악어가 보입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에 백제인이 자주 왕래를 했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지금의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국과 필리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겸익 스님은 백제인의 활발한 해외 활동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는 512년경 백제를 떠나 양자강 남쪽의 양나라에 잠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쳐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인도 중부의 절 상가나사에서 인도 말인 범어를 배우고 불교를 공부했지요. 14 년 후인 526년 나란타사의 배달다 삼장 법사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이 때 백제의 임금이었던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아담장과 오부율문이란 경전을 번역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이 작업에는 백제의 승려 28 명이 동원되어 모두 72 권이 번역됐지요. 인도에서 건너온 책이 직접 번역됨으로써 불교의 한 교파인 율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우리 나라 경전은 대개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뒤 들어온 것이었지요. 겸익은 불교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 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입니다.

백제인들은 겸익 스님처럼 알고자 하는 것, 새롭고 진귀한 물건을 찾아 위험한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답니다. 백제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 등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제화된 나라이기도 하였지요. 바다를 향해 크게 열려 있었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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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신용철]물에 잠기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6-05-22 02:59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의 긍지인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일어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는 동명성왕의 개국 설화에는 우발수(), 압록강, 졸본천(), 비류(), 엄류수(), 곤연(), 하백() 등의 강이나 물과 관계되는 단어가 무려 9개나 나온다. 이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백두산뿐만 아니라 압록강이나 호수 등의 물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바다이름 발)’자 역시 물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2360기의 고분이 중국 압록강변 운봉(·중국 발음으로는 윈펑)댐의 수몰지구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50km, 고구려의 수도인 지안()에서 45km라고 하니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속에서 새로운 고구려의 역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들이 ‘고구려의 동천왕()이 위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어 247년 동황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의 관심을 의식해서인지 발굴을 하지 않은 채 댐에 물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측이 공동조사를 제의하기 전에 서둘러 다시 수몰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의 장푸유() 창바이산()문화연구회장은 성()의 축조 양식이 고구려나 발해 등의 것과 차이가 있으므로, 중국 한대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전문가들은 흙으로 쌓은 한대의 것과 달리 돌로 쌓은 성은 당연히 고구려의 것임을 주장하지만, 중국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상태라 발굴을 통한 입증은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이미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려는 판국에 우리의 주장이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선 운봉댐의 공동 소유자(1964년에 공동 건설)인 북한은 왜 중국 측에 아무런 주장이나 항의를 못하느냐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항의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우리와 미국 등에 대해 그처럼 강경하게 ‘주체()’를 외치는 북한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중국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약해지는지…. 물론 6·25전쟁 때 남한이 미국의 도움을 받았듯이 북한 측은 중국에 신세를 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역사나 영토 문제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두만강 하구와 나선의 공동 개발, 동북 3성()의 역점 개발, 발해(·보하이)만 유역 대개발 등으로 인해 우리 영토의 자주권이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해체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끈질긴 소수민족 정책 즉, 최근의 ‘동북공정’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만이라도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데 자기의 목소리를 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 그리고 미래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 지혜와 용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고분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물속으로 잠겨 버렸다. 한편 중국은 상하이() 푸둥() 지구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발해만 유역의 대개발’을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랴오둥() 반도를 비롯하여 허베이() 성, 랴오닝() 성 등의 연안과 우리 한반도의 북부 서해안 일대가 모두 그의 영향권에 들어갈 것은 뻔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역사가 물에 잠기듯이 ‘발해왕국’은 겨우 바다 이름에서나 찾게 될 것이니 서글픈 일이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중국사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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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them Chinese

 

몽골 L.A Face의 갱스터 힙합

 

몽골인들의 쥐나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

특히 1911년 만주국이 망하면서 자신들을 지금의 몽골과 쥐나자치주인 내몽골로 찢어놓은 것에 대한 분노.

지금도 독립국인 몽골마저 강탈하려는 야심에 대한 저주와 두려움.

핍박받고 있는 내몽골 자치주의 몽골족에 대한 절망.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짱골라들에 대한 미움 등이 표현.

 

그렇다.

쥐나를 겪어본 나라는 안다.

쥐나가 어떠한 지를.....

 

근데 얘들 좀 하죠 d^-^b 최고~~~ 

 

 

 

ㅁ ㅁ ㅁ ㅁ ㅁ s s s s s s s s s s s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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