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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 전몰자 몰터와 그 넋을 위로한 傳 [哀公寺]가 이곳이다

monocrop 2011. 10. 3. 01:01

신라 전몰자 넋을 서방극락왕생기원처 傳 哀公寺 마애석불입상을 찾아서 

 

 

 <신라 사형수 무덤 근처에 자리한 아미타석불을 찾아서, 08.11.05일 정광산인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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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가지의 풀리지 않았던 문제 풀기

 

경주 두대리 마애석불입상을 찾은 것 중 두가지 풀리지 않은 점을 오늘을 필히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첫번 째 斗垈(두대)라는 지명이 열쇠가 된다. 

두번째는 이 절이 哀公寺(애공사)라는 학설의 확인에 있었다.

 

어떤 학설을 점검하기엔 너무나 오랜세월이 흘렸다.

아미타석불의 연대 추정은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불상 양식으로 보아 8세기말경의 상으로 추정된다.

 

斗垈라는 지명의 비밀풀기

 

신라시대 전몰자의 몰터가 있다는 곳

 

첫번째 두대라는 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면담했다. 두대라는 말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경주 지명책자에 두대리에 지명고에 관한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필자가 한가지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흥미있는 이야긴 즉 두대 마을 뒷쪽에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당산수)가 있다. 금줄을 쳐 놓고 동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보호수는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지켜주는 지킴이이다. 뒷산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신라시대 사형수(전사자,전몰자)의 무덤터라고 한다. 이 보호수에 얽힌 전설에도 사형수(전몰자,전사자)의 일화가 엮혀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신라 사형수들의 무덤터와 두대란 단어가 머리 속에 뻔뜩거리며 실마리가 잡혔다.

신라 고분 중에 용강동 토우총이 있다. 80년에 [말무덤]이라고 하여 쓰레기 더미속에 묻혀있는 잡초투성의 작은 산등성이 같이 보였다. '말(馬)무덤'이라 들리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개발하기위해 파헤쳐보니 고분이었다. 토우가 제일 많이 나온 고분이었다. 특히 괘릉 서역 장석모양의 토우 였다.

말은 '몰' 이란 단어였다. '몰 무덤"이다. '몰'이란 "접두어' 죄다,모조리, 또 다른 뜻은 '모두 한곳으로 몰린'의 뜻이다. 

 

'몰 무덤'은 모두 한곳에 묻은 무덤의 뜻이였다.  斗垈 란 "말 두", "터 대"이다. 원래 '몰 터"였는데 '말 터"로 전사되고 한자어로 써여 지면서 "말(斗)터(垈)"가 되었다.  무덤이 몰려있는 터 였다.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내려 사형수들의 무덤터란 말과 연계된 곳이다.

말이 사형수이지, 한꺼번에 어떤 정치적 변환에 의한 몰떼 죽음의 자들이 묻힌 곳라고 생각되어진다.

 

"동경잡기"에 나와 있는 기록과 삼층석탑의 연대가 맞지 않음

 

난 한가지 의문은 풀렸지만 또 한가지 의문점과 연결지어야한다. 두번째가 두대리 삼존석불사지가 애공사(哀公寺)라는 설이 두대리 마을사람들과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설이다. 원래 두대리에서 건천가는 국도 건너 편의 효현동 삼층석탑지가 남아있다. 그 곳을 경주문화재청에서는 애공사터라 추정하고 있다. 보물 67호 효현리 삼층석탑의 안내판에도 그렇게 추정한 기록이 보인다. 그 근거를 삼은 경주 읍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효현동 일대<哀公寺趾>라는 기록에 의한다.

동경잡기는 조선 현종10년 1669년 <동경誌>를 민주면, 이채가 중수하여 <동경잡기>로 간행한 경주의 역사 전설 등을 모은 읍지이다. 그 신빙성도 희박한 편이다. 효현동에 있는 효현동 삼층석탑의 시대적 맞지않아 동경잡기의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동경잡기에 보면

 

[애공사 탑은 진지왕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소개되어있다. 진지왕은 25대(576년~579년)왕으로 6세기 년대 인물이다.

하지만 이 효현리 삼층석탑을 살펴보면 우주와 탱주 및 지붕돌 층단 받침(옥계석)이 4단으로 되어있다. 이 점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경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으로 태종무열왕의 조부이다.

진지왕을 위로하기 哀公寺 (왕을 애도하기위해 지은절)를 지었으니 그 왕은 슬픈 사연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자를 탐하는 패륜아로 묘사되어있다. 아버지 진흥왕의 왕비를 탐하는 패륜행위는 백성들에겐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다. 삼국유사 기록을 유추해 보건데 진지왕과 애공사를 연관지었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아무리 신라시대 성적자유가 개방된 사회라 할지라도 삼국유사기록에 남아있는 패륜적 행위가 반 국민적 정서에 해당된다고 밖에 아니할수 없다.

 

몰터(斗垈)에 묻혀있을 인물들의 정치적 사건을 유추

 

왕을 애도할 만큼 커다란 신라시대의 8세기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자. 삼국유사에 의하면 35대 경덕왕19년(서기 760년) 이일병출(二日竝出) 즉 두 해가 나란히 나왔다의 표현이있다.  이는 나라가 위태롭다든가 위급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적 비유이다.

이 처럼 심상치 않은 자연 현상 또는 불길한 이변이나 재앙을 서술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변혁과 같은 대변동이나 왕의 죽음 따위를 암시하는 기술적 유형의 특징이다. 최철(국문학자)이 "이일병출"에 대한 상징성이 아주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선덕왕(김량상)의 반란으로 혜공왕(36대)의 죽임을 당하는 변혁이 일어남

 

 日.月이 각기 두 오누이를 상징하듯, 日은 왕을 그렇게 볼 수 있다.  

月은 숨어 日(王)의 그늘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적수가 되는 표리와 같은 관계다.

그렇게 볼 때, 月의 상징적 의미를 반왕당파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늘에서 일어난

金思仁.金良相(37대 선덕왕의 본명) 등의 무리들에 의하여 더욱 커진 것이다.

月은 女權을 중심한 권력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이일병출(二日竝出)]으로 표현되었다. 왕당파와 반왕당파의 투쟁을 호국신에 의하여 밝혀,

나라를 평온케 하는 데 힘썼기에, 그 노래를 지은이를 月明(월명사)이라고 상징 표현했다고 본다.

 요컨데, 明은 日.月의 합성어로 각기 오누이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왕권과 그에 도전하는 두 세력을 말한 것....(전혀다른 향가와 만엽가 142페이지 인용)

 

  경덕왕 16년 757년 및 18년에 지방 군현 및 중앙 관부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고침으로써 왕의 의도가 질서정연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함과 동시에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굳히려 한 데 있었다면, 왕의 이러한 정책이 귀족들의 반감과 이의를 불러일으켜, 신라의 정치 사회는 자연히 두 개의 파벌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여기에 덧붙여 경덕왕으로선 후계할 자식마저 없어 태자의 출생 문제로 내심 고민했던점, 표훈대덕께 청해 결국 상제의 도움으로 자식 하나를 둔다. 그러나 왕태자가 출생하는 날의 삼국기사의 기록을 보자 경덕왕 17년 758년 ,[7월 23일에 왕자가 탄생하였다. 큰 우뢰와 번개가 일더니 佛寺 16개소에 낙뢰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이 왕자가 혜공왕이다. 왕태자가 출생한 이후 왕의 번민은 더욱 대단했던 것이다. 경덕왕 19년은 왕세자 탄생 3년째 되던 해다. 왕세자의 인간됨이 더 뚜렷해짐에 따라 왕의 실망은 더해졌고, 반왕당파의 세력은 더욱 왕께 위험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이기백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 사회과학 2집, 1958년에 의하면, 경덕왕 때의 이러한 정치 사회상을 말해, 몇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풀이했는데, 최철은 이를 인용하면서 [이 파벌이란 왕을 중심으로 한 친왕파와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이에 반기를 든 반 왕당파의 두그룹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고 하고, [이런 정치적 성격의 파벌은 경덕왕 16년에 구주를 비롯한 지방 군현의 명칭과 同 18년에 중앙 관부의 명칭을 한식으로 고친 것을 계기로 더욱 심화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상제의 예언대로 국란이 일어나 후일 혜공왕이 된 그 왕세자가 반왕당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이다. <삼국사기> 혜공왕 16년조 [왕은 어려서 즉위하여 성장함에 따라....기강이 문란하고 재난과 이변이 여러 번 나타나며, 인심이 이반하고 사직이 불안할 새, 이찬 金志貞이 叛하여 무리들을 모아 궁궐을 에워쌌다. 4월에 상대등 金良相(후일 선덕왕)이 김경신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金志貞 등을 주살했으나 왕과 왕비는 난병에게 피살되었다. 삼국유사는 선덕왕과 김경신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몰터(斗垈)리의 구전속의 정체와 哀公寺의 정체성과 두대리 마애삼존불입상에 관심

 

서악고분은 옆 쪽으로 효원동과 두대리가 있다. 서악고분군에 무열왕릉을 비롯한 통일 신라시대이후 고분군들이 옮겨왔다. 일련의 사태로 보아 斗垈(몰터)의 병사들의 떼 무덤群, 구전속의 전승 설화속의 정체가 서서히 두대리 마애삼존불입상에 모인다.

 

전몰자와 묻힌(몰터,斗垈) 신라왕을 애도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哀公寺]에 있던 마애삼존불입상이라 추정됨

 

난 두대리 마애삼존불입상터가 [哀公寺]라고 주장하는 설에 무게를 두었다. 구전으로 전해 오는 설화나 전설의 실체에 근처에 명확히 실체를 드러내고있는 마애삼존불 입상을 보면서 연대 또한 8세기말경의 상으로 보고 있다.제 36대 혜공왕의 죽음(780년몰), 김량상과 김경신에게 왕과 왕비와 많은 군사들의 시체를 함께 함께 모두 매장한 몰터(斗垈)의 전설과 그 혜공왕을 죽인 경덕왕의 반당파는 日,月 관계에 있던 정치세력들이다. 약체인 혜공왕을 김지정반란을 진압하는 목적으로 군사를 일어켜 틈을 이용하여 혜공왕을 주살하였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덕왕과 경덕왕(성덕대왕종을 만든이)의 덕치를 크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 아들 혜공왕(이름은 乾運)의 역량부족으로 측근에게 나라를 빼았기고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후 그 넋이라도 애도하는 뜻에서 [哀公寺]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 신빙성을 뒷받하는 무덤, 김유신 무덤을 경덕왕 무덤이라고 한 이병도설(1969년경)

 

현재 김유신 묘지를 경덕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한 이병도씨에 의하면 記의 기록에 의해서 "모지사" 위치에 관한 기록을 근거로하여 경덕왕 무덤자리가 지금의 김유신묘 자리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십이지상의 면석들의 조성등의 릉급의 무덤은 왕급 무덤이라는 설이다. 김인문 묘지를 김유신 묘라고 추정하는 설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무열왕 릉묘와 김인문 묘지와 경계석 축조 방법면으로 볼 때 그런 추정이다. 암튼 경덕왕이 혜공왕의 아비이다. 

김유신 묘지가 경덕왕 릉이라고 할 경우, 혜공왕의 릉은 당연히 서악 고분으로 오는 것이 타당성이 있으며 두대리 쪽에 애공사가 맞을 가능성 확률이 놓아지는 것이다.

 

몰터자리에서 약 200미터 옆 경주 벽도산의 서쪽으로 향한 절벽의 자연 바위면을 쪼아 삼존불입상을 얕게 부조하고 있다. 굴불사면 석불을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이다.

수인을 보아서 가운데 주불은 아미타불이 취하는 수인이다. 아미타불과 양쪽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새겨놓았다.

아미타불은 죽은이들의 넋을 서방세계로 인도하여 극락 왕생시키는 부처이다. 특히 전쟁이나 억울하게 죽은자들의 극락 왕생을 책임지는 부처이다.

 

일본 미야자키현 마토노신사에서 본 사형수들을 위한 서방극락왕생기원비

 

1995년 1월2일 일본 구주(규슈)미야자키현 마토노신사에 신대문자 석비에 있는 가림토문자(단군시대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찾아갔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경내안에 스기나무(杉木) 아래 석등기둥에 새겨진 신대문자(가림토문자)를 해독하니  (3개의석비를 종합한 내용인즉)

 

 <사진:정광산인 글돋선생 1995년 미야자키현 마토노신사 방문>

[서방정토를 향해 이제 영면했으므로,감은 눈(目) 속에서 지향하던 그 극락 세계에 왕생하기를 축원하도다, 망자의 넋을 기리는 哀悼碑(애도비)를 잡목의 삼나무 땅에 안치하노니, 그 분(사형수)의 영혼도 이곳에 봉안하여 모시노라]와 같은 정도의 대의로 파악되었다(고대로 흐르는 물길/세종출판사1995년 김인배 203페이지) 

 

이 마토노진쟈(的野神社)의 석비는 1725년 10월에 건립된 것이다. 이 곳은 이 미야자키현 관내 사형수 및 번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신사이기 때문이다.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비에 새겨 놓았던 신사였다.

 

몰터에서 마애삼존불 입상이 있는 암자까지 오르는 오솔길 양옆에 하늘 높이 몇십년 묵은 측백나무와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설송나무,히말라야삼나무)가 잘 조성되어있었다. 한적한 가을날 오후의 오솔길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밟으며 걸으면 한결 운치나는 오솔길이다. 히말야삼나무의 초록 잎에 9월에서10월까지 달리는 솔방울 열매가 잎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밤색 원추형으로 마치 적은 부처님들이 앉아있는 것 같아 신기하였다.  히말야삼나무는 파키스탄이 원산지이며 산스크리트어로 'devdar'가 어원이다. "신의 나무"란 뜻이다. 마애삼불상 앞에서 내려다 본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솔방울 열매가 환생한 전몰자의 영혼처럼 보여 아미타불 가피력을 보는 것 같아 절로 합장하게 하였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몰터에 대한 조사와 哀公寺에 대한 검토를 관련 기관이나 학계에서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조사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찾아가길 원한다면 " 무열왕릉 입구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건천쪽으로 2.7km 정도 가서 왼쪽 두대리 표지판이 나온다. 왼편 마을길로 접어들어 회관 앞을 지난후 왼쪽으로 꺽는다. 가다가 오른쪽으로 마애불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암자 입구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측백나무가 늘어선 오솔길을 걸을 겸 아래 마을근처에 주차시키고 걷는 편이 좋다.  두대리 마을 입구에서 마애불까지거리는 1.3킬로 정도. 대형차는 입구에 들어갈 수 없다. 시내에서 건천방면으로 가는 버스는 20분 간격이다.

 

 

                                   보물제 122호 높이 본존상은332센티, 본존불은 바위면을 약간 파내고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크고 나지막한 육계가 표현되고 얼굴은 넓적하면서 두 볼에 양감이 풍부하다. 입은 꽉 다문형태로 인잔한 맛은 떨어진다

                                  비장하고 심각한 모습으로 뭇 영혼들을 서방극락정토로 어떻게 다 모시고 갈까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가운데 아미타불의 통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굴곡이 노출되어있다. 두 협시보살상은 본존상에 비해 크기가 약간 작으며 얕게 새겨져 있어 입체감이 떨어진다 

 

 

삼존불아래 산신각과 그 주변 

 

암자오르는 오솔길 

 두대리마애석불 보물 지정비

 심우실-십우도를 비유한 수행실

 

 작은 암자가 옛 절터(애공사)를 대신하여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의 가슴이 많이 드러나서 속옥인 승기지(僧祇支)와 띠매듭이 보이며 옷주름은 거의 선각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어있다. 특히 옷주름이 허리 밑에서 양다리 위로 갈라져서 여러 겹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불입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른 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붙여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이숙희 선생의 자료에서)

                                                                        <가운데 본존불 아미타불, 광배는 두광(머리빛)과 신광(몸빛)이 이중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발의 모양이다. 앞으로 내민것이 아니라 옆으로 반듯이 벌리고 있다

                                                                         약간 앞으로 숙인 불상의 안정성을 고려한 발 모양이 아닌가 싶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나 발의 모습으로 보아 마치 국민의례 모습으로 보여 딱딱한 느낌이난다

                                                                          

                                                                  왼편 협시보살은 신체비례는 균형이 잡혀 있고 조각기법은 부

                                                                     세부표현이 많이 생각되어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 대신,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둥근 보발로 대체되어있다

                                                                    왼손에 정병을 들었고 어깨 위로 올린 오른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관세음 보살상의 형태이다.

 

                                                          비슷한 크기의 오른쪽 보살상도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두 보살의 머리부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원형 광배가 선각되어 있다.

                                                          또한 삼존불상 모두 연화대좌 위에서 있는데 연판을 간단한 선각만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미타삼존으로 추정할 경우 왼쪽에 정병을 든 보살은

                                                           관음보살상이며 전반적으로 상들의 어깨가 넓고 곡선이 완만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주나 조각양식에서

                                                           상체가 비교적 고부조인 반면 밑으로 내려올수록 평면적이고 세부표현도 생략되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불상양식 이후의 특징을 보여주는 8세기말경의 상으로 추정된다.

 

 

                               두광과 신광이 잘 묘사된 주불, 화염문양의 광배와 엄지에 중지를 맞대게  표현된 아미타수인, 아래서 찍은 형상은 골굴사 마애여래상을 보듯하다.  상의 윗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자연석에 골을 파서 물꼬형태를 취해 비가 오면 양 옆으로 흐르도록 배려해 놓았다.사진위 오른쪽 빗물골이 보임 

                               부조의 높,낮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불의 상체 부위는 높게 부조해 높은 것이 특색이다.

                                                                  . 앞으로 내민것이 아니라 옆으로 반듯이 벌리고 있다

                                                                     약간 앞으로 숙인 불상의 안정성을 고려한 발 모양이 아닌가 싶다

                                              삼존불상 모두 연화대좌 위에서 있는데 연판을 간단한 선각만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있다.

 

 

몰터(斗垈) 추정 애공사 마애아미타 본존불과 <골굴사> 마애불과 비교,                        <오른쪽 함월산 골굴사 마애여래불상> 

 

 

 

 히말야삼나무의 초록 잎에 9월에서10월까지 달리는 솔방울 열매가 잎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밤색 원추형으로 마치 적은 부처님들이 앉아있는 것 같아 신기하였다.  히말야삼나무는 파키스탄이 원산지이며 산스크리트어로 'devdar'가 어원이다. "신의 나무"란 뜻이다. 마애삼불상 앞에서 내려다 본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솔방울 열매가 환생한 전몰자의 영혼처럼 보여 아미타불 가피력을 보는 것 같아 절로 합장하게 하였다.

 

         9월~10월 경 밤색 영혼의 환생을 보려 오세요.히말라야삼나무, 산스크리트어로 'devdar'가 어원이다. "신의 나무"라 불리는 곳에 전몰자들의 영혼이 신의 나무에 안겨있는 모습, 아미타불의 가피력을 느껴본다(글돋선생)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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